The 16 Weeks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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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주 기초공부

목차

 


 

소요리문답

(16주 준비과정)

 

1)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2) 십계명에 대하여

3) 사도신경에 대하여

4) 주기도문에 대하여

 


 

주제별공부

(16주 본 과정)

 

1) 성경이야기

2) 성경 말씀을 내 것으로

3) 성경의 이모저모

4) 히브리어 원전과 번역들

5) 사도적 교회  

6) 성경과 전통 

7)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8) 개혁 교회와 장로 교회 

9)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10) 성서력에 대한 이해와 적용 

11) 모든이교회론

12) 교인의 권리와 의무

13)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앙교육

14) 교회의 사회적 책임

15)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16)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소요리문답

 

1643~1647년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모인 개혁교회(Reformed Church) 회의(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에서 33장으로 된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와 196개 항의 대요리 문답서(The Larger Catechism), 107개 항의 소요리 문답서(The Shorter Catechism)를 발표했다. 대요리 문답서는 교역자들을 위한 것이고, 소요리 문답서는 초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장대재 교회당에서 열린 대한국장로회 독노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서 및 소요리문답서를 장로교회의 표준 교리서 및 요리문답으로 채택했다. 이 싸이트에 실은 번역본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37-66쪽을 스캔 받은 것이다.  모든이교회는 총회가 번역한 소요리문답서를 세례자 교육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I.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문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고전 10 : 31, 롬 11 : 36, 시 73 : 24-26, 요 17 : 22


문 2.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시하시기 위해 주신 법칙이 무엇입니까?

신구약성경에 간직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유일한 법칙 입니다. -딤후 3 : 15 - 17


문 3.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믿어야 하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요20 : 31, 시 119 : 105, 미 6 : 8


문 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의 존재, 지혜, 능력, 거룩, 공의, 선하심, 그리고 진리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불변하시는 영이십니다.

     -요 4:24, 시 139:7-13, 렘 23:4, 히 4:13, 시 139:1-4, 히 13:8. 시 102 : 27, 말 3 : 6, 왕상 8 : 27,   덤후 2 : 13, 출 34 : 6-7


문 5. 하나님은 한 분 외에 더 많은 신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8 : 4, 신 4 : 35, 39, 6 : 4, 렘 10 : 10


문 6. 하나님의 신격에는 몇 위가 계십니까?

하나님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있는데 이 셋이 한 하나님이며 본질이 같고, 능력과 영광이 동등합니다. -마3 : 16-17, 28 : 19, 빌 2 : 6


문 7. 하나님의 예정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예정이란 그가 뜻하시는 바를 따라 정하신 그의 영원한 목적이며, 이 목적에 의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장차 일어날 모든 것을 미리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엡 1 : 4-5, 9, 롬9 : 22-23


문 8. 하나님이 그 예정을 어떻게 실행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예정을 실행하시는 것은 창조와 섭리의 일로하십니다.

     - 계 4 : 11, 사 40 : 26, 롬 11 : 36, 히 11 : 3


문 9. 창조하시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창조하시는 일이란 하나님이 그의 능력의 말씀에 의하여 엿새 동안에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만물을 지으신 것인데 매우 좋게 지으신 것입니다.

     -히 1 : 3, 시 33 : 9, 창 1 : 21


문 10.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지식과 거룩함이 있게 하사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창1 : 27 - 28, 9 : 2


문 11.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이란 그의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활동을 지극히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게 보존하고 다스리는 것 입니다.

     -시145 : 9, 17, 103 : 19, 104 : 24, 계 11 : 17-18. 히 1 : 3


문 12. 사람이 창조함을 받아 타고난 신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특수한 섭리를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그와 더불어 생명의 언약을 세우시며, 선악과를 먹지 말도록 금하셨고, 먹으면 죽음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창 2:16-17, 롬 5:12-14, 10:5, 눅 10 : 25-28


문 13. 우리의 처음 시조가 창조 때 타고난 신분을 계속 유지했습니까?

우리들의 처음 시조는 자기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가졌으며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의 창조 때 타고난 신분에서 타락했습니다.

     - 창3 : 6 - 8, 3 : 22 - 23, 고후 11 : 3


문 14.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범하는 것입니다.

     -요 16 : 9, 롬 14 : 23, 약 4 : 17, 요일 3 : 4, 5 : 17


문 15. 우리의 처음 시조가 창조함을 받았을 때의 타고난 신분에서 타락한 원인이 되는 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처음 시조가 그들의 창조함을 받았을 때의 타고난 신분에서 타락한 원인이 되는 죄는 그들이 그 금지된 열매를 먹은 일입니다. -창 3:6


문 16. 모든 인류가 아담의 처음 범죄 때 함께 타락했습니까?

아담과 맺어진 언약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로부터 정상적인 생육법에 의하여 내려온 모든 인류는 그가 처음 범죄 할 때 그의 안에서 죄를 지었고 그와 함께 타락하였습니다.

     -시51 : 5, 행 17 : 25-26, 롬5 : 12-20, 고전 15 : 21-22


문 17. 그 타락은 인류를 어떠한 상태에 빠뜨렸습니까?

그 타락은 인류를 죄와 비참의 상태에 빠뜨렸습니다. -롬 5 : 5, 갈 3 : 10, 엡 2 : 3


문 18. 사람이 타락하여 빠져 들어간 그 상태의 죄성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타락하여 빠져 들어간 그 상태의 죄성은 아담의 첫 죄의 허물, 원래 가졌던 의의 결핍, 그의 본 성품 전체의 부패, 곧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것과 또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실제적 범죄 등입니다.

     -엡 2 : 1, 고전 15 : 22, 마 15 : 19, 약 1 : 14-15


문 19. 사람이 타락하여 빠져 들어간 상태의 비참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인류는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었으며,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따라서 이생을 온갖 비참 속에서 지내며, 죽게 되며, 그리고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창 3 : 8, 엠 2 : 2, 롬 5 : 14, 창 2 : 17, 마 25 : 41


문 20. 하나님이 모든 인류가 죄와 비참한 상태에서 멸망하도록 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직 그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어떤 이들을 영생에로 택하셔서 은혜의 계약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것 은 그들을 한 구속자에 의하여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구원의 상태로 이끌어 들이려는 것입니다.

     -엡 1 : 4-7, 딤전 1 : 14-15, 딛 3 : 4-7, 롬3 : 20-22


문 21.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의 구속자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이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과거와 미래에 계속하여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며. 두 가지의 특유한 성품을 지니면서도 한 인격이십니다.

     -요 1 : 1, 14, 덤전 2 : 5, 롬 9 : 5, 골 2 : 9


문 2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참 육신과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그에게서 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마 26 : 38, 눅 1 : 27 - 31, 히 2 : 14, 4 : 15, 7 : 26, 요 1 : 14


문 23.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자로서 하시는 직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두 상태에 있어서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행 3 : 22, 눅 4 : 18, 21, 히 4 : 14-15, 5 : 5, 요 18 : 36-37, 빌 2 : 6-8, 10, 계 19 : 16


문 24. 그리스도가 예언자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하십니까?

그리스도가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심은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함으로써 하십니다.

     -사 54 : 13, 요 6 : 63, 15 : 15, 눅 4 : 18-21


문 25. 그리스도가 제사장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하십니까?

그리스도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기 위하여 단번에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신 일과 우리를 위하여 계속 중재하심으로써 하십니다.

     -히 9 : 26-28, 7 : 25, 27, 10 : 10, 7 : 26-27, 10 : 14, 9 : 14, 엠 2 : 16, 롬 3 : 26, 8 : 34, 10 : 4, 요일 2 : 1, 히 9 : 25, 2 : 17


문 26. 그리스도가 왕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하십니까?

그리스도가 왕의 직무를 수행하심은 그가 우리를 자기에게 복종케 하는 일과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켜 주시는 일과 그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제재하고 정복하심으로써 하십니다. -마28 : 20, 18 : 17-18, 사 63 : 9, 고전 15 : 55-57


문 27.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것은 그가 비천한 상태에 태어나시고 율법 아래 있으며, 이 세상의 비참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것과 매장되어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눅 1 : 31, 고후 8 : 9, 빌 2 : 6-9, 마 27 : 46


문 28.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하늘에 오르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신 것과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고전15 : 4, 요 20 : 19-23, 막 16 : 19, 눅 24 : 51, 행 1 : 9, 엡 1 : 19-20, 롬 8 : 34, 행1 : 11, 17 : 31, 딤후 4 : 1


문 29.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에 참여자가 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자가 되는 것은 그의 성령이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써 입니다. -요1 : 12-13, 16 : 7-8, 딛 3 : 5-6


문 30.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구속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하십니까?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심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또 우리를 효과적으로 불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십니다. - 엡 2 : 8, 2 : 18- 20, 요 6 : 37 - 39


문 31. 효과적인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효과적인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인 바, 우리의 죄와 비참을 확실히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시며, 우리의 뜻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설복하시며 또한 그렇게 할 힘을 주십니다.

     -요 16 : 8, 엡 1 : 18, 계 3 : 17-18, 행 26 : 18, 겔 11 : 19, 빌 2 : 13


문 32.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혜택이 무엇입니까?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것들을 곁따르거나 또는 이것들로부터 나오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립니다.

     -롬3 : 24, 8 : 30, 엠 1 : 5, 롬8 : 14-15, 살전 5 : 23, 고전 1 : 30


문 33. 의롭다 하심이 무엇입니까?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동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가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의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기 때문이고 그리고 오직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롬 3 : 22-24, 행 10 : 43, 고후 5 : 19, 롬 3 : 26, 5 : 19-21, 5 : 1


문 34. 양자로 삼으심이란 무엇입니까?

양자로 삼으심이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들의 수효 속에 받아 주시며, 그의 모든 특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요일3 : 1, 요 1 : 12, 사 44 : 2, 롬 8 : 17


문 35. 거룩하게 하심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하게 하심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으로서 우리의 영육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새로워지며,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엡 1 : 4, 6, 4 : 23-24, 고전 15 : 31, 롬 6 : 11


문 36. 이 세상에 있어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것들을 곁따르거나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혜택들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어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것들을 곁따르거나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혜택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양심의 평온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은혜의 증진과 또 은혜 안에서 끝까지 굳게 견디는 것입니다. -롬 8 : 36, 39, 마 11 : 29, 갈 5 : 22, 벧후 3 : 18, 약 1 : 12


문 37. 신자들이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혜택들이무엇입니까?

신자들은 죽을 때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여지며 그 즉시로 영광에 들어가고, 그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대로 부활 때까지 무덤에서 쉬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3 : 2, 엠 5 : 27, 눅 23 : 43, 살전 4 : 14


문 38. 신자들이 부활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혜택들은 무엇입니까?

부활 때에 신자들은 영광중에 일으킴을 받아서 심판 날에 신자임을 공적으로 인정을 받고 무죄 선고를 받으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흡족하게 즐기는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4 : 16, 요 5 : 28, 고전 15 : 42-44, 마 10 : 32, 25 : 33-34, 시 16 : 11, 살전 4 : 17

 

 

II. 십계명에 대하여

 

문 3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그의 계시된 뜻에 복종하는 일입니다.

     -신 29 : 26, 마 28 : 20, 미 6 : 8


문 40. 하나님께서 사람의 복종의 법으로 처음 계시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종의 법칙으로 처음 계시하신 것은 도덕법이었습니다.

     -롬2 : 14-15, 10 : 5, 창 2 : 17


문 41. 그 도덕법이 요약되어 담겨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 도덕법은 십계명 속에 담겨 있습니다. -출 20 : 3, 17, 마 19 : 17-19


문 42. 십계명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요지는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과 온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 22 : 37-40, 신 6 : 5


문 43. 십계명의 머리말은 어떤 것입니까?

십계명의 머리말은 이러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곧 노예의 집에서 너를 데려 내온 너의 주 하나님이다." -출 20 : 2


문 44. 십계명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주님이시며, 또 우리 하나님이시요. 구속자이시므로 우리는 그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엡 1 : 2, 롬 3 : 29, 사 43 : 11, 레 18 : 30, 신 11 : 1


문 45.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첫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출 20 : 3


문 46. 첫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계명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럼으로써 그를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 43 : 10, 렘 32 : 37, 마 4 : 10


문 47. 첫째 계명에서 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계명에서 금한 것은 참 하나님이시며 또 우리의 하나님이 신 것을 부인하거나 그를 예배하며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영광을 다른 신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시 14 : 1, 렘 2 : 27-28, 단5 : 23, 신 8 : 8-18


문 48. 첫째 계명에 있는 "나 외에"라는 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계명에 있는 '자 외에'라는 말이 우리에게 특별히 가르치는 것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주목하시며, 또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시 44 : 20-21, 대상28 : 9


문 49. 둘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 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출 20 : 4-6


문 50. 둘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지정하신 종교적 예배와 법령을 순수하게. 그리고 전부 받아들이고 행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신 32 : 46, 요 4 : 24, 고전 15 : 34, 덤전 6 : 13-14


문 51. 둘째 계명에서 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계명에서 금한 것은 우상을 통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지정되어 있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신13 : 6-8. 4 : 15-16, 삼하6 : 7, 레 10 : 1


문 52. 둘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이 무엇입니까?

둘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점유권과 그가 받으시는 예배에 대한 그의 열의(熱意)입니다. -계 15 : 3-4, 롬 1 : 6, 출 34 : 14


문 53. 셋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셋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출 20 : 7


문 54. 셋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법령과 말씀과 사역을 거룩하게, 그리고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 하는 것입니다.

     -히 12 : 28-29, 계 15 : 3-4, 말 1 : 6-10


문 55. 셋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게 하시는 데 쓰시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모독하거나 남용하는 일입니다. -출 5 : 2, 막 7 : 11, 말 2 : 2


문 56. 셋째 계명에서 첨부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셋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는 이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서 벌을 피한다 하더라도 주 우리 하나님은 그들이 그의 의로운 심판을 피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삼상 2 : 12. 61 4 : 13


문 57. 넷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넷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 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하는 것입니다. -출 20 : 8-11


문 58. 넷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넷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지정 하신 바와 같은 그러한 일정한 때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지키고 특별히 이레 중 한 날을 온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창 2 : 3, 출 16 : 25-29, 신 5 : 12, 사56 : 2


문 59. 이레 중 어느 날을 하나님께서 정하셔서 매주간에 안식일을 삼으셨습니까?

세상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 하나님께서 한 주간의 일곱째 날을 정하여 매 주간의 안식일을 삼으셨으며 그 후부터 세상 마지막까지는 한 주간의 첫날을 안식일로 삼으셨습니다. 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창 2 : 3, 눅 23 : 56, 고전 16 : 1- 2, 마 12 : 8, 행 20 : 7, 요 20 : 19 - 26


문 60.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면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모든 세상의 업무와 오락까지도 끊고. 그 날을 종일 거룩하게 쉬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로 그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다만 부득이한 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드려야 할 시간만큼은 예외입니다.

     -렘 17 : 21 - 22, 사 58 : 13 - 14, 마 12 : 1 - 14, 출 31 : 12 - 17, 20 : 8 - 10


문 61. 넷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넷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필요로 하는 의무들을 생략하거나 소홀히 이행하는 일과 게으름으로써, 또는 본질적으로 죄가 되는 일을 행하거나 우리의 세상 업무나 오락에 관하여 필요치 않은 생각이나 말이나 일을 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겔 22 : 26, 23 : 38, 말 1 : 13, 사 58 : 13


문 62. 넷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이 무엇입니까?

넷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업무를 위하여 한 주간 중 엿새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과 그가 일곱째 날에 대한 특별한 소유권을 요구하시는 일과 자기 자신이 보이 신본보기와 그가 안식일을 축복하신 일입니다.

     -출 30 : 9-17, 20 : 11, 레 23 : 3


문 63. 다섯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다섯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하는 것입니다. -줄 20 : 12


문 64. 다섯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섯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나 동등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위치와 관계에 있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드릴 존경을 드리고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엡 6 : 5


문 65. 다섯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섯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여러 가지 지위와 관계에 있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드릴 존경과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그것에 배치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 15 : 4-6 .


문 66. 다섯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섯째 계명에 첨부된 이유는 이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장수(長壽)와 번영이 있으리라는(이 약속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그들 자신에게는 선이 되는 한에서) 약속입니다. -신 5 : 16, 엡 6 : 3


문 67. 여섯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여섯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출 20 : 13


문 68. 여섯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섯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정당한 노력을 다해서 우리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입니다. -엡 5 : 29, 마 5 : 21


문 69. 여섯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섯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나 우리 이웃의 생명을 부당하게 끊거나. 또는 그러한 결과로 이끄는 모든 일입니다. -행 1 : 8, 왕상 21 : 9-10


문 70. 일곱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일곱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 출 20 : 14


문 71. 일곱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곱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마음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정절을 보존하는 일입니다. -마 5 : 27-32


문 72. 일곱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곱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모든 정숙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엡 4 : 29, 5 : 3-4


문 73. 여덟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여덟째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출 20 : 15


문 74. 여덟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덟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남들의 재산과 신분을 정당하게 얻고 또 증진시키는 일입니다.  -잠10 : 4, 12 : 27, 23 : 21, 레 6 : 4-6, 살후 3 : 10-12


문 75. 여덟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덟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의 재산이나, 신분을 부당하게 방해하는 일이나, 또는 방해할지도 모르는 일들입니다.

     -엡 4 : 28, 겔 22 : 29, 렘 52 : 17, 말3 : 9, 살후 3 : 7-10


문 76. 아홉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아홉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하는 것입니다.

     -출 20 : 16


문 77. 아홉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홉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과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 간의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일입니다. 특히 증언하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엡 4 : 25, 롬 1 : 8, 고전 13 : 4-5, 잠 22 : 1, 빌 4 : 8, 속 8 : 16, 벧전 3 : 16, 행 25 : 10


문 78. 아홉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홉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진실에 어긋나는 일이나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의 좋은 평판을 해치는 모든 일입니다. -레 19 : 15, 벧후 2 : 2, 빌 3 : 18- 19, 잠 19 : 5


문 79. 열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열째 계명은 '제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 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출 20 : 17


문 80. 열째 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열째 계명 에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 이웃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하여 옳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는 완전히 만족을 느끼는 일입니다. -히 13 : 5, 딩전 6 : 6, 빌 2 : 4, 딩전 1 : 5


문 81. 열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열째 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우리 이웃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하면서 우리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가지는 일과 이웃의 소유에 대하여 부당한 행동을 하거나 탐욕을 가지는 모든 것입니다. -고전10 : 10, 갈 5 : 26, 약 3 : 14-16, 롬 7 : 7. 골 3 : 5

 

III. 사도신경에 대하여

 

문 82.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날마다 계명들을 어깁니다.

     -전 7 : 20, 요일 1 : 8, 창 8 : 21, 약 1 : 14, 3 : 2-8, 시 19 : 1-12, 왕상 8 : 46


문 83. 법을 어기는 일이 모두 하나같이 흉악합니까?

어떤 죄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또는 여러 가지 더 무서운 죄로 발전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것들보다 더 흉악한 것 입니다.

     - 히 2 : 2 -3, 요 19 : 11, 시 19 : 13


문 84. 모든 죄가 마땅히 받을 보응이 무엇입니까?

모든 죄가 마땅히 받을 보응은 이 세상에서와 또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일입니다. -롬 6 : 23, 마 25 : 41, 롬 1 : 18, 신 28 : 15


문 85. 죄 때문에 마땅히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때문에 마땅히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데 사용하시는 모든 외형적 방법을 우리가 힘써 사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하는 일입니다. -요 3 : 16-18, 막 1 : 15, 눅 13 : 34, 마 28 : 20


문 8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 것에 의하여 우리는 복음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대로의 그분만을 받아들이고 의지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요1 : 11-12, 6 : 40, 잠 3 : 5, 히 10 : 39


문 87. 생명에 이르는 회개란 무엇입니까?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일종의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것에 의하여 죄인이 자기의 죄에 대한 참된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를 이해하는 가운데 자기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그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고 새로운 복종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또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딤전 2 : 15, 행 2 : 37, 11 : 18, 26 : 18, 눅 18 : 13, 렘 14 : 7, 삼상 7 : 2, 고후 7 : 11


문 88.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데 쓰시는 외형적인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혜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데 쓰시는 외형적인 통상적 방편은 그의 법령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며, 이것들은 모두 택함을 받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 효력이 있습니다.

     -덤후 3 : 16- 17, 요 6 : 53-57, 마 28 : 19-20


문 89. 말씀이 어떻게 효력이 되어 구원을 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영께서 말씀의 낭독, 특히 말씀의 설교를 하나의 효과적 방편으로 삼으셔서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또 거룩함과 위안으로써 그들을 튼튼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 입니다.

     -요5 : 39, 17 : 3, 행 2 : 37, 약 2 : 23, 요 4 : 22, 시 19 : 7, 119 : 130, 살 전 1 : 6


문 90.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히는 효과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읽고 들어야 합니까?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우리가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써 거기에 열중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에 간직하며 우리 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잠8 : 34, 눅 8 : 18, 벧전 2 : 1-2, 히 4 : 2), 덤전4 : 13, 시 119 : 18, 91, 사66 : 2, 약 1 : 21-22


문 91. 성례가 어떻게 구원의 효과적 방편이 됩니까?

성례가 구원의 효과적 방편이 되는 것은 성례 자체가 가지는 어떤 효능이나 그것들을 집례 하는 사람이 가진 어떤 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축복과 또 성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그의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입니다. -고전3 : 7, 6 : 11, 12 : 13, 벧전 3 : 21, 행 8 : 13, 23


문 92. 성례가 무엇입니까?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 예식에 있어서 사람이 지각할 수 있는 표적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또 새 언약의 혜택들이 신지들에게 표시되고 보증되고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28 : 19, 26 : 26-28, 눅 22 : 20, 롬 4 : 11


문 93.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례는 어느 것들입니까?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마 28 : 19-20, 막 14 : 25, 고전 11 : 23


문 94.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성례의 하나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접붙임을 받음과 은혜의 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다는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마 28 : 19, 롬 6 : 3, 계 1 : 5, 갈 3 : 26-27


문 95. 세례는 누구에게 베풀 수 있습니까?

세례를 보이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자기의 믿음과 복종을 고백한 이후이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의 회원과 같은 사람들의 아기들은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행 2 : 41, 2 : 38 - 39, 고전 7 : 14, 갈 3 : 27  28


문 96. 성찬이 무엇입니까?

성찬은 성례의 하나로서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주고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내 보이는 예식입니다. 그것은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적이고 육욕적인 방식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되며 그의 모든 혜택을 받고 은혜 가운데서 영적인 양육과 성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눅 22 : 15, 고전 11 : 26-28, 10 : 16, 요 6 : 55-56, 마 26 : 26-27, 엠 3 : 17


문 97. 성찬을 합당하게 받으려면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님 의 몸을 분간하는 지식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회개와 사랑과 새 복종에 대해서 스스로를 살피는 것입니다. 성찬 때 합당치 않게 참여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임하는 심판을 먹고 마셔서는 안되겠습니다.

     -고전11 : 27-29. 요 6 : 55-56. 롬6 : 4

 

IV. 주기도문에 대하여

 

문 98.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요6 : 38, 14 : 13-14, 16 : 23-24, 마 26 : 39-42, 요일 5 : 14, 눅 18 : 13, 빌 4 : 6, 마21 : 22


문 99.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의 지침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법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우리의 기도의 지침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지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형식, 곧 보통으로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그 형식이 기도의 특수한 지침입니다. -마6 : 9-12, 요일 5 : 14, 덤후 3 : 16-17


문 100. 주님의 기도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기도의 머리말,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가 우리 에게 가르치는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를 도울 수 있고. 또 언제나 도울 뜻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거룩한 존경심과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가라는 것이며 또 우리는 남들과 함께, 그리고 남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57 : 15, 눅 11 : 13, 15 : 20, 10 : 12, 사 43 : 1, 64 : 9, 말 1 : 6, 슥 8 : 21, 엠 6 : 18, 롬8 : 15


문 101. 첫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첫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게 하시는 데 방편으로 쓰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또 남들에게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하게 하시며, 또 모든 일을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처리하시라는 것입니다.

     -롬 11 : 36, 마 5 : 16, 빌 2 : 11-20, 롬 11 : 33, 고후 3 : 5, 사 64 : 1-2, 시 67 : 1-3, 145장


문 102. 둘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둘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사단의 왕국이 파괴되는 것과 은혜의 왕국이 발전되어 우리들 과 또 남들이 그리로 인도되어 그 안에 있게 되는 것과 영광의 왕국이 하루 속히 임하는 것입니다.

     - 시 68 : 1- 2, 마 6 : 33, 숙 14 : 20, 계 22 : 20


문 103. 셋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셋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써 우리에게 능력과 기쁜 마음을 주셔서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에 복종하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히 12 : 28 시 119 : 35. 103 : 20-23, 단 7 : 10


문 104. 넷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넷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 가운데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충분히 받고 그것들과 아울러 하나님의 축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잠30 : 8-9, 10 : 22. 창 28 : 20-21. 딤전 4 : 4-5


문 105. 다섯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다섯째 간구에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진심으로 남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기에 우리가 격려를 받아 이런 간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눅 11 : 4, 마 18 : 35, 행 7 : 60, 롬 3 : 24-25


문 106. 여섯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여섯째 간구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유혹을 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아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거나, 우리가 이미 유혹을 당할 때에는 우리를 붙들어 구출해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마26 : 41, 시 51 : 10-12, 살전 5 : 23. 고전 10 : 13


문 107. 주님의 기도의 맺는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기도의 맺는 말. 곧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기도의 용기를 얻을 것과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왕국과 능력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그를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아뢰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리라고 확신하면서 우리가 "아멘' 하고 말하는 것 입니다.

    -신 32 : 43, 시 104 : 24, 대상 29 : 10-13, 롬 11 : 36, 고전 14 : 16, 계 22 : 20-22

 


 

 

 

1. 성경이야기

 

 

모든이교회의 교인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요즘 말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들에게 한 자 한 자 불러주어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기 전에는 이 주장이 맞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경건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서 글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열 번 읽으면 이 주장이 맞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종교적 기록들을 학자들이 체계를 잡고 이런 저런 설명을 붙여 만든 것이 성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백번 읽어 보면 이 주장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천 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들에게 한 자 한 자 불러 주어 기록된 것이란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도무지 오묘하여 어떤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책입니다.

 

성경의 범위

 

모든이교회는 성경의 범위를 66권으로 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기의 마틴 루터란 독일 사람의 견해을 따른 것입니다. 기독교 범주 안에 드는 로마가톨릭교회나 그리이스정교회나 콥틱교회는 성경의 범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모든이교회서는 '타나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39권

1) 토라(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권

2) 느비임(토라와 케투빔을 제외한 모든 책들): 21권

3) 케투빔(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룻기, 애가,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상, 역대하): 13권

참고: 토라, 느비임, 케투빔의 앞글자 ㅌ,ㄴ,ㅋ를 타나크라 합니다.

 

신약(모든이교회가 성격에 따라 마련한 독특한 구분입니다): 27권

1) 마태복음: 1권

2) 베드로문서 (마가복음,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3권

3) 누가행전 (누가복음, 사도행전은 바울의 영향이 컸음): 2권

4) 요한문서 (요한복음,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계시록): 5권

5) 바울서신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히브리서?): 14권

6) 기타 (야고보서, 유다서): 2권

 

성경읽기

 

성경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초보자에게 이런 읽기는 지루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먼저 읽어 두면 덜 중요한 것을 읽을 때 아주 도움이 됩니다. 물론 성경 66권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해 보면 각 권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오바댜 서 같은 것을 스가랴 서에 비견하기 어렵고, 역대기를 민수기와 결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타나크를 읽을 때는 유대인들의 읽기를 배우는 게 좋습니다.

 

성경 66권은 기록된 연대가다릅니다. 그리고 현재의 순서는 쟝르 별로 되어 있어서 기록된 연대를 따르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만약 기록된 연대에 따라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이해를 더 확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에스라 성경읽기를 추천할 만 합니다.

 

1. 유대인의 파라샤트에 따라 토라 읽기

 

유대인들은 토라를 일년에 1회독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파라샤트 하 샤부아'라 하는데 토라 전체를 54 등분해서 매주 한 등분씩읽어 가는 것입니다. 파라샤트 하 샤부아는 각각 고유한 이름이 있습니다. 전 세계 유대인들은 이 고유한 이름을 토요일 즉 안식일 칸에 적어 놓았습니다. 모든이교회 잡지 modenee 제1호 24-25쪽을 참고하십시오. 모든이교회도 이것을 <주간토라읽기>란 프로그램을 통해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느비임과 케투빔은 언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모든이교회는 파라샤트 샤부아를 정착시킨 후에 이에 대한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입니다. 참고로, 시편 1편, 19편, 119편을 읽어 보면 느비임과 케투빔은 토라를 토대로 하여 기록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느비임은 토라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투영되었나에 대한 기록이며, 케투빔은 토라가 이스라엘의 문학 속에서 어떻게 투영 되었나에 대한 기록입니다. 욥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 이전의 사람으로 추정되므로 케투빔은 하나님의 백성의 문학적 기록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2. 신약 파라샤트에 따라 신약 성경 읽기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파라샤트 하샤부아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모든이교회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로마서를 매년 1회독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럼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어떻게 읽나요? 이 부분도 모든이교회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파라샤트 방식의 성경 읽기로는 성경 전체를 1년에 1회독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꼭 1년에 1회독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읽기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성경 읽기 같은 것들은 매일 성경 읽기라는 말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뉴얼만 읽어서는 성경을 읽는 게 아닙니다. 성경 그 자체를 읽는 게 중요하고, 읽더라도 절기나 신학적 관점을 유지하며 읽는 게 유익합니다. 여름에 겨울의 것을 읽거나 슬픈데 기쁜 것을 읽으면 재미가 없지요. 유대인들은 토라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 방법을 원용해서 신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이교회는 신약을 읽을 때 마태복음으로 예수님 이야기의개요를 잡고, 베드로(류)의 문서와 바울(류)의 문서를 비교하며 읽어 가게 할 예정입니다. 여기서 묘한 은혜를 받게 되지요. 요한문서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 지면 별도로 묵상하는 게 좋습니다. 신비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내용에 접근하려면 기초 실력이 든든해야 합니다.

 

모든이교회의 성경읽기 실천

 

모든이교회는 토라 파라샤트와 신약 파라샤트를 우리 실정에 맞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파라샤트를 화, 수, 목, 금 요일 아침에 묵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인터넷에 띄워 이 사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가이드 라인으로 삼게 했습니다. 다음은 인터넷 성경 읽기의 요령입니다.

 

1) 이번 주 성경 읽기 구절을 확인하십시오. 파라샤트 테이블을 이용합니다. 파라샤트는 구약은 유대인의 파라샤트 하 샤부아, 신약은 모든이교회가 개발한 것입니다.

2) 이번 주간 묵상의 오디오 파일로 본문을 듣습니다.

3) 모든이교회 홈페이지의 콘텐츠 주간토라읽기와 주간 바울서신읽기를 클릭해 내용을 읽으십시오.

4) 3)의 내용은 모두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실천하십시오. 교회서 하는 새벽 묵상에서 해당 요일에 해당 내용을 다룹니다.

5) 금요일 오후 8시부터 있는 에레브 샤밭 때, 그 주간의 묵상 내용을 모두 다룹니다. 이때는 한국어, 영어, 히브리어, 헬라어로 본문을 듣고 토론을 합니다. 이것은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6) 수요일 오후 8시부터 있는 성경공부에서는 신약 파라샤트 전체를 다룹니다.

 

참고) 이상은 2006년 이전의 성경읽기였습니다. 현재는 홈페이지에서 주간성경읽기를 찾아 개별적으로 매일 묵상의 범위를 정합니다.

 

 

2. 성경 말씀을 내 것으로!

 

 

모든이교회의 교인이 되기 위해서 가장 파라샤트에 따라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읽기 그 자체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새기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확실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묵상을 해야 합니다. 묵상은 시간을 정해 성경을 깊이 읽고 그 감동을 삶 속에서 실천 하는 것입니다.

 

1. 묵상

 

묵상은 방해 받지 않는 장소를 정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남들이 모두 자는 새벽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방이나 기도실이 따로 있으면 언제 어느 때나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묵상을 새벽에만 하는 것으로 고정시켜 놓으면 안됩니다. 묵상을 할 때는 가장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말씀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경 책을 선택합니다. 이왕이면 뭔가 적을 수 있는 여백 성경 같은 게 좋습니다. 필자는 열린 노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펴서 일정 분량의 성경 구절을 읽습니다. 모든이교회 교인은 파라샤트를 이용하십시오. 그러나 파라샤트에 구속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이 아주 순조롭게 되고 여백에 적을 것도 많은 날이 있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날이지요. 그러나 모래를 씹을 때처럼 성경 말씀이 까끌까글하고 딱딱할 때가 있습니다. 여백이 크게 보일 때지요. 이럴 때는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것을 여백에 적고 실천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실천을 위해서는 3P로 정리합니다. 3P란 Personal, Practical,Possible입니다. 즉 개인적이고 실제적이며 가능한 적용을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3P가 적용을 못하게, 또는 적거나 작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실천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 각색하지 말고 그대로 행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면 공동체 책임자에게 알리고, 형이상학적이라면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하고, 불가능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가능해 지도록 기도합니다.  

 

묵상이 주는 유익은 매우 많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안목에서 사물이나 문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 자신 하나님의 자녀로 변해 갑니다. 마음이 평안해 지고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집니다. 증오가 이해로 변하고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죄의 문제에 민감하게 되고 마음 속에 애통이 일어 납니다. 이런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부자나 권력자나 명예를 사랑하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이 아니로구나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2. 원전 읽기

 

묵상은 필연적으로 성경 공부와 연결이 됩니다. 한글 성경을 읽어 가다 보면 부족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나크는 히브리어(일부 아람어)로,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나크는 2000년 전에, 신약성경은 1400년 전에 편집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둘을 성경 원전(原典)이라 합니다. 그런데 타나크나 신약성경에 들어가 있는 66권의 책들은 거의 다 유대인들이 기록했습니다. 유대인 아닌 사람들이 기록한 책들도 유대적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2000년 전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한글 성경은 서구 신학을 바탕으로 한 번역서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나왔어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와 상관없이 살면서 목회하고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물며 평신도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 원전을 읽는다? 억지가 아닌가? 현재 한국 교회의 형편으로 보면 억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해도 막힘 없이 성경을 읽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10년 이상 공부한 사람들도 종종 실수를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원전을 가장 쉽게 대할 수 있는 방법은 히브리어 헬라어 한글이 모두 나오는 성경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분해 대조 로고스 성경이 있습니다.  이런 성경을 보면 히브리어나 헬라어 부분이 문법적으로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알파베트만 익히면 소리를 내서 읽을 수 있고 사전을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알파베트를 익히기 위해서는 두어 시간만 쓰면 됩니다.

 

한글 성경을 읽어 가다가 이해가 되지 않거나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해당 부분을 봅니다. 문법 설명이 되어 있지요. 동사일 경우에는 이것으로 단어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변화를 모두 제거하면 기본형이 나타나는 데 이것으로 사전을 찾으면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는 명사의 경우에도 격의 변화에 따라 단어의 앞 또는 뒷 부분이 달라 집니다. 이걸 이해하면 해석이 정확해 집니다. 그런데 '스트롱 코드'를 활용하면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알파베트를 다 외우지 않았어도 원전을 대할 수는 있습니다. 분해 대조 로고스 성경의 경우 알고 싶은 단어 위를 보면 번호가 찍혀 있는데 이것이 '스트롱 코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을 변화까지 포함해서 스트롱이란 사람이 번호를 매겨 놓은 것이지요. 스트롱 코드를 사용한 히브리어나 헬라어 사전 또는 성경 사전을 마련해서 이 스트롱 코드만 찾아가면 아주 풍부한 성경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몇 번 이렇게 해서 성과를 얻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넓이와 깊이가 아주 확대 됩니다.

 

물론 히브리어를 제대로 배워서 사전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합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성경 히브리어를 배워서 성경을 읽는 것보다 현대 히브리어를 배워서 성경을 읽는 게 훨씬 쉬웠습니다. 현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전혀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은 그때 그때 성경 히브리어 사전에 의존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성경 히브리어를 배우다 보면 성경에 한 두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들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다 히브리어 자체에 흥미를 잃습니다. 이때문에 평생 히브리어와 담을 쌓고 사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어려운 언어가 아닙니다. 현대 히브리어를 배워도 타나크의 80% 이상, 신약성경의 현대 히브리어 번역판은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현대 히브리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언어 연수 가는 거 이스라엘에도 가서 울판에 몇 달 다니면 어떨까요? 평생 히브리어로 타나크를 읽을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으면 함부로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현대 그리이스어를 배워도 신약 원전을 읽을 수 있다는 데, 필자는 경험이 없습니다. 필자의 경우 오히려 현대 히브리어 신약 성경 읽기가 헬라어 신약 원전을 읽는 것보다 더 쉽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신약성경이 처음에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영어로 된 TANAKH the Holy Scriptures나 Jerusalem Bible도 성경 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3. 유대학에 대한 관심

 

성경을 공부하면 유대학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유대학에 입문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나지를 않지요. 왜냐하면 첫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기 때문에 유대학이 우리 신앙에 해로울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 때문입니다. 둘째, 유대학에 입문하고 싶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학은 기본적으로 체계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꼭 읽어야 할 간단한 필독서라는 게 없습니다. 탈무드, 쪼하르... 등 유대학에 관련된 책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양이 매우 방대하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대학은 타나크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오늘날 유대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유대교를 구태여 정의한다면 바리새인들의 유대교라 할 수 있지요.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랍비들이 나왔기 때문에 랍비 유대교라고도 합니다. 사실, 주후 90년 얌니아에서 랍비들이 타나크의 범주를 정한 것도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70인역 구약 성경 즉 셉투아진타를 의식한 것입니다. 또 미쉬나에 주석을 붙여 탈무드를 만든 것도 사실은 유대인 랍비들이 신약 성경을 의식했기 때문에 생겨 난 것입니다. 탈무드는 신약 성경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역으로 이용하면 우리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바울 서신도 이런 관점에서 분석하면 아주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4살부터 히브리어로 토라를 읽고 외웁니다. 우리로서는 신학생이 되어야 또는 모든이교회 교인이 되어야 겨우 접할 수 있는 히브리어를 태어 나면서부터 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에 적힌 대로 삽니다. 14살이 되면 성인식을 거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먹거리를 구분해서 먹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스스로 게토를 만들어서 그 곳에 살면서 신앙을 지킵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신약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 들이라 권면할 수 있다면?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 이것은 역부족입니다. 지금 우리 삶의 행태나 신학 지식을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유대학의 기본 사항을 추려서 '유대학 핸드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직 출판을 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습니다. 필자는 유대학 핸드북을 쓰면서 성경에 대한 관점이 아주 깊어지고 성숙해 졌습니다. 유대학적 배경에 대한 연구는 여러분이 관심을 갖고 항상 추구해야 할 사항 입니다.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그러 합니다. 선교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만약 유대인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4. 서구 신학에 대한 관심

 

우리는 서구 사람들로부터 성경을 전달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구 사람들은 지난 수 백 년 동안 성경 공부 방법을 잘 정립해 왔습니다. 전에 말한 스트롱 코드나 로고스 성경 같은 것들도 서구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신학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신학의 체계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특별히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체계는 '쟝 깔뱅'의 신학 체계입니다. 쟝 깔뱅은 프랑스 사람으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실천 했던 사람입니다. 깔뱅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내용에 대한 체계를 세워서 모두 4부로 이루어 진 '기독교 강요'란 책을 냈습니다. 제1부 하나님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제2부는 예수님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제3부는 성령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제4부는 국가와 교회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개혁교회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강요' 이후 개혁교회의 교리는 '삼위일체론적'인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기독교 강요'를 바탕으로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란 큼직한 책이 나왔습니다. 이를 공부하기 위해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이란 책도 만들었습니다. 모든이교회도 세례나 입교 문답을 위해 '소요리문답'을 공부하도록 합니다. '소요리문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전제 아래,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공부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구 신학은 오랜 동안 유대학을 경원시 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신학의 범주가 아주 제한되었습니다. 오늘날 서구 신학은 우리 나라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구 신학의 좋은 전통과 유대학의 경건한 부분과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반영한 우리 나름의 신학을 정립해 가야 하겠습니다. 이래야 성경 말씀이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적 고립이 되면 안됩니다. 고립은 이단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신학의 흐름. 유대학의 경건한 부분, 우리 민족의 필요를 예의 주시하면서 모든이교회의 신학, 더 나아가서 한국적 신학을 세워 가야 할 것입니다.

 

5. 말씀을 가르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나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도 되는가? 이건 직무 유기가 아닌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 주어 그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가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한 사람들은 최종적으로는 선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교사는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직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선배는 학교나 교회서 후배에게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성경을 확실하게 더 배운다는 의미도 됩니다.  

 

 

3. 성경의 이모저모

 

 

이제 3주째 공부입니다. 모든이교회의 파라샤트에 따라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성경에 들어 간 66권의 책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책들은 이른바 '모세5경'이라 하는 '토라'입니다. 토라는 우리 기독교도들만의 경전은 아닙니다. 유대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도 토라를 경전으로 생각합니다. 토라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공통적인 경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들을 '책의 백성(People of the Book)'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약'을 가지고 있고, 유대교는 '미쉬나'를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꾸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각각의 새로운 경전 때문에 종교 간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1.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경전 이야기

 

1) 기독교의 토라와 신약

 

제3 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기독교는 주후 30년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나사렛 출신의 랍비 '예슈아'의 토라 해석에 따라 생겨난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슈아의 토라 해석은 그의 정신적인 제자 '샤울'에 의해 정리되고 샤울의 정리가 서구 세계에 알려 졌습니다. 샤울은 본디 랍비였지만, 예슈아 때문에 랍비 직을 버리고 자유로운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샤울은 우리 말로 '바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 하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 하는 것은 좁은 생각입니다. 기독교에는 예슈아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 쓴 글들도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수 많은 책들이 나와 기독교의 내용을 기름지게 했습니다. 여기에다 유럽의 경건하고 아름다운 전통이 가미되어 '기독교'를 형성했습니다.

 

기독교는 한자 '기독(基督)'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독'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기독교는 사실 영어 'Christianity'의 음역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의 헬라어 의역 '크리스토스'에서 왔습니다. 마쉬아흐나 크리스토스는 모두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영어로 '머사이어(Messiah)'라 하고 이를 우리는 '메시야'라 발음 합니다. 메시야나 그리스도나 기독이나 결국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이지요. 그런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은 토라에서 비롯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론에게 순전한 향을 섞은 처녀 올리브 기름을 부어 대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기름을 붓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신약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십계명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밖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대부분 토라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토라 공부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토라를 모든이교회 파라샤트에 따르면 1년에 한 번 읽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토라에 근거해 하신 말씀은 '복음'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신약성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결국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한 것이고, 아울러 예수님께서 토라에 근거한 구세주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바울의 신학은 이 범주 밖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2) 유대교의 토라와 미쉬나(탈무드)

 

주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와 예전을 중시하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밑에서 서기관 노릇을 하며 학문과 율법의 실천을 중시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교를 매우 이론적이며 실생활적인 종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성전이 없어지면 유대교도 없어질 줄 알았는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유대교를 지속시켰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부터 유대인 마을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토라를 가르쳤습니다. 랍비는 '나의 큰 자'란 의미인데 '선생님'이라고 번역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사실은 바리새파 사람으로 랍비였습니다. 랍비들은 성전과 상관없이 토라를 가르치고 실천했기 때문에 성전이 파괴되었어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오늘날의 유대교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유대교, 즉 성전 없는 유대교를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유대교 또는 랍비 유대교라고 부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여러 유파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힐렐 학파와 샴마이 학파입니다. 이들은 서로 다르게 그리고 매우 독특하게 토라를 해석합니다. 이 해석 위에 오늘날의 유대교가 세워졌습니다.

 

바리새파 유대교 또는 랍비 유대교라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유대교는 물론 파라샤트를 통해 일 년에 한 번 토라를 읽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도들에게 '신약성경'이 있는 것처럼 유대교도들에게는 '미쉬나'라는 게 있습니다. 미쉬나는 '두 번째 경전'이란 의미입니다. 일부 유대교도들은 미쉬나는 하나님께서 70인의 장로들에게 주신 것이라 합니다. 모세가 두 번째로 40일 금식 기도를 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갈 때, 그를 따라 70인의 장로들도 시내산에 올라간 일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70인의 장로들에게 주신 것이 미쉬나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유대인들도 의문을 표합니다. 미쉬나를 만든 랍비들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대개 주후 2-3세기 때의 랍비들이 미쉬나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이때는 기독교에서 신약성경이 집필되고 있던 때입니다. 필자는 이떄의 랍비들이 신약성경을 의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필자가 미쉬나를 읽어보니 이 책은 토라의 율법 부분을 시대적 지역적 상황에 맞게 해석한 것으로 실생활에 율법을 적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분명합니다. 수 많은 랍비들이 미쉬나에 주석을 붙였습니다. 이 주석은 한도 끝도 없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을 탈무드라 합니다. '배움의 책'이란 의미 입니다. 탈무드는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쓰여졌는데 분량이 더 많고 후에 기록된 바벨론 탈무드는 주후 6-7세기에 편찬 완료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때 신약성경도 편찬 완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탈무드와 신약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날카롭게 대립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3) 이슬람교의 토라와 꾸란

 

주후 622년에 이슬람 혁명을 시작한 무함마드는 본디 기독교도로서 예루살렘을 드나들던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카는 홍해 동편에 있는 마을인데 이슬람교도들은 이곳이 바로 모세가 피신했던 미디안 광야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메카는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피신했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메카는 오늘날 이슬람교의 최고 최대의 성지입니다.

 

무함마드는 어느새 아랍 민족주의자로 성장을 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 갔다가 동굴에서 자고 있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무함마드가 사흘 동안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받아 적은 게 바로 '꾸란'이라 합니다. 이후 무함마드는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키고 아랍 민족을 명실상부한 알라의 백성으로 만들었습니다. 무함마드는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 그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바친 모리아 산 바로 그 자리, 오늘날의 바위 돔 사원 자리에서 승천을 했다고 합니다. 이 점 모리아 산이 메카 뒷 산이라는 오늘날의 주장과 차이를 보입니다.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예루살렘 지향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슬람교가 처음 30년 동안은 예루살렘만을 성지로 생각했던 점을 설명해 줍니다. 메카는 아랍 민족의 자존심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성지인 셈입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에게 있어 꾸란은 토라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꾸란에 따라 토라와 복음의 내용을 교정(?)하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 집니다. 아브라함의 후계자는 유대인의 조상 이삭이 아니라 아랍인의 조상인 이스마엘이며, 유대인 예수는 실패한 예언자이나, 아랍인 무함마드는 마지막으로 성공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은 무함마드의 이름을 알라의 이름만큼 자주 부릅니다. 무함마드는 사실상 이슬람교의 신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토라를 존중하고 있지만 토라를 나름대로 해석한 신약성경, 미쉬나, 꾸란에 따라 전혀 다른 종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서구인의 자존심을 빼낼 수 있을까... 유대교에서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세상을 위한 봉사의 사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이슬람교에서 아랍인의 열등감을 제거할 수는 없을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서구인의 자존심, 유대인의 선민사상, 아랍인의 열등감 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민족적 자존심이나 문화적 전통을 내려 놓고 토라를 있는 그대로 공부하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고 세계 평화에 대한 생각의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2. 토라와 복음

 

1) 토라

 

토라는 '가르치다, 인도하다'란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호라'에서 유래했습니다. 호라는 엄마, 임신, 춤, 보여주다, 지적하다, 명령하다, 참여하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토라는 타나크의 처음 다섯 책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다섯이란 의미의 '쿠마쉬'라 합니다. 역시 다섯이란 의미의 헬라어 '펜타'란 말을 써서 영어로는 '펜터튜-크(Pentateuch)' 라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토라는 물론 타나크와 탈무드와 할라카 등 종교적인 율법 모두를 가리켜 토라라 통칭 합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란 말을 쓸 때는 어떤 의미인지 분간해야 합니다. 토라는 본디 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숨을 쉬기 위한 쉼표 이외 장 절 구분은 없었지요. 따라서 토라를 읽을 때는 장 절을 무시하고 읽는 것이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토라의 첫 번째 책 '창세기'는 히브리어로 '브레쉬트'라 합니다. 창조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두 번째 책 '출애굽기'는 히브리어로 '쉐모트'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는 일(마탄 토라)과 성막 제조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책 '레위기'는 히브리어로 '바이크라'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과 깨끗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네 번째 책 '민수기'는 히브리어로 '베무다베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던 이야기입니다. 다섯 번째 책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을 자세히 일러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또는 모압 땅에서 주셨기 때문에 모압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명기를 썼다고 생각되는 신명기학파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토라는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그린 것이 토라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그러나 넘치는 희망을 보여 주지요. 신앙의 참 모습입니다. 그런데 토라를 율법으로 이해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토라를 '노모스' 즉 '율법'으로 번역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토라는 율법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도 충분히 기술한 책입니다. 그래서 토라를 삶의 길 또는 생명의 길(The Way of Life)이라도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이 생명의 길 토라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 하지요.  

 

2) 복음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복음서가 4권 들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복음서라 불리워지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목록을 결정하고 그 내용을 편찬했던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육안으로 본 사도들의 글만을 복음서로 인정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이른바 '사도성이 있는 복음서'지요.

 

첫 번째 복음서인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내용이 절기적으로 정확하게 구분되어 가히 유대적 복음서라 할만 합니다. 필자의 전공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승천까지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3장부터 28장까지의 내용이 일년 안에 이루어 졌습니다. 출애굽기와 비슷한 정리입니다. 주후 2세기 초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파피아스의 주장에 따르면 히브리어로 쓰인 마태란 이름의 로기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로기아를 도마가 사용했다고 하지요. 이 로기아는 복음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Q자료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두 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제자 요한 마가가 기록했다고 알려 져 있습니다. 히브리적 간결성이 돋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 직후에 기록되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지연된 종말'을 변증하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복음서인 '누가복음'은 바울의 제자인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 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한계를 확장하거나 이방인을 격려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이채롭습니다. 그리고 3년에 걸친 예수님의 공생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같이 읽어야 할 책으로 사도행전 전 편이라 할만 합니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래 살면서 많은 신비한 경험을 한 사도 요한의 글답게 신비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주후 90년 쯤에 기록된 것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부터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 까지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복음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토라를 이해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토라를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 복음서라 해서 하나로 합쳐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 복음서들을 따로 각각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님이 타나크에 예언되었고 유대인들이 기다려 온 바로 그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야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네비임과 케투빔,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 외 책들

 

1) 네비임과 케투빔

 

네비임은 우리 말로 예언서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서라고 하는 책들을 유대인들은 전기 예언서라 합니다. 전기 예언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7족을 정벌할 때부터 바벨론에게 유대왕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토라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또는 거부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케투빔은 문예적 표현이 충만한 책들입니다. 그러나 케투빔도 토라를 반영한 책입니다. 시편은 토라를 싯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1편, 19편, 119편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역대기가 네비임이 아니고 케투빔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모든이교회 파라샤트로는 네비임과 케투빔을 일부만 읽을 수 있습니다. 별도로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잠언은 31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매일 1장씩 읽으면 한 달에 한 번 읽을 수 있습니다. 초막절에는 스가랴 서를 읽습니다.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2) 신약의 복음서 외 책들

 

신약의 복음서 이외의 책들도 저자들의 삶의 자리와 역사적 지리적 특성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토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모든이교회는 토라 파라샤트와 함께 신약 파라샤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셔서 신약성경을 1년에 1독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받아들인 66권의 책들 이름은 모두 외워 두는 게 성경 공부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성경 이름과 그 이름의 한글 약자, 그리고 영어 약자도 알아 둡시다. 약자는 성경공부를 할 때 아주 중요합니다. 다음은 66권의 책들 이름과 한글 및 영어 약자입니다.

 

창세기(창,Gn),출애굽기(출,Ex),레위기(레,Lv),민수기(민,Nb),신명기(신,Dt), 여호수아(수,Jos),사사기(삿,Jg),룻기(룻,Rt),사무엘상(삼상,1S),사무엘하(삼하,2S),열왕기상(왕상,1K),열왕기하(왕하,2K),역대상(대상,1Ch),역대하(대하,2Ch),에스라(스,Ezr),느헤미아(느,Ne),에스더(에,Est),욥기(욥,Jb),시편(시, Ps),잠언(잠,Pr),전도서(전,Ec),아가서(아,Sg),이사야(사,Is),예레미야(렘, Jr),예레미야 애가(애,Lm),에스겔(겔,Ezk),다니엘(단,Dn),호세아(호,Hos),요엘(욜,Jl),아모스(암,Am),오바댜(옵,Ob),요나(욘,Jon),미가(미,Mi),나훔(나,Na),하박국(합,Hab),스바냐(습,Zp),학개(학,Hg),스가랴(슥,Zc),말라기(말,Ml)

 

마태복음(마,Mt),마가복음(막,Mk),누가복음(눅,Lk),요한복음(요,Jn),사도행전(행,Ac),로마서(롬,Rm),고린도전서(고전,1Co),고린도후서(고후,2Co),갈라디아(갈,Ga),에베소서(엡,Ep),빌립보서(빌,Ph),골로새서(골,Col),데살로니가전서(살전,1Th),데살로니가후서(살후,2Th),디모데전서(딤전,1Tm),디모데후서(딤후,2Tm),디도서(딛,Tt),빌레몬서(몬,Phm),히브리서(히,Heb),야고보서(약,Jm),베드로전서(벧전,1P),베드로후서(벧후,2P),요한1서(요일,1Jn),요한2서(요이,2Jn),요한3서(요삼,3Jn),유다서(유,Jude), 요한계시록(계,Rv)  

 

 

 

4. 히브리어 원전과 번역들

 

 

모든이교회는 타나크를 읽을 때 될 수 있으면 히브리어 원전(原典)을 읽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면 신약은 어떻게 읽을까요? 물론 헬라어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여기에 추가해서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하려 합니다. 필자로서는 헬라어 원전도 좋지만, 이것을 현대 히브리어 번역한 것도 좋았습니다. 헬라어 원전을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한 분들의 말에 따르면, 헬라어 원전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현대 히브리어 신약 성경을 읽어 가다 보면, 읽는 그 자체로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현대 히브리어는 타나크의 히브리어에 비해 세련되고  의미가 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로 신약 성경을 공부하면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현대 히브리어로 예수님의 복음이나 바울의 편지 등을 읽다 보면, 신약 원전의 모호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히브리어를 유일한 성경 신학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필자로서는 여러분도 타나크와 신약을 히브리어로 읽어 보기를 권유합니다.   

 

1. 히브리어 원전

 

성경의 핵심은 모세5경이라고 일컫는 토라입니다. 이 토라의 대부분은 출애굽 원년 하나님께서 시내산 기슭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토라를 받은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은 확실 하지만 그 이스라엘 백성 안에 중다한 잡족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토라는 인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다한 잡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토라가 유대인의 배타적 전유물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0개 언어로 토라를 주셨다는 것이지요. 70개 언어란 당시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토라가 모든 인류에게 향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토라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기록된 히브리어 토라를 보전해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보전해 온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살펴 보면 토라를 없애려 한 사악한 자들의 시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이 시도를 좌절시켰습니다. 지금도 토라를 간직하고 자녀들에게 교육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해 가고 있는 민족은 유대인 밖에 없습니다. 모세 이래로 수 많은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토라를 집대성 하는 데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요시야 왕 때의 신명기 학파, 바벨론 이후에 성전을 중심으로 나타난 역대기 학파, 그리고 얌니아 회의 때 모였던 랍비들 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타나크는 확립되었고 또한 보전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히브리어 토라에 관한 한, 이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욤 키푸르 때 시내산 꼭대기에서 들고 내려 온 두 개의 돌 판에는 히브리어로 십계명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돌 판은 성막의 벱궤 속에 보관되었다가 요시아 왕 때,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기 50년 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돌 판에 적힌 문자는 고대 히브리어였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문자는 바벨론 포수 시절에 배운 아람어 문자입니다. 그러나 성막 시대와 제1 성전 시대에는 고대 히브리어 문자가 사용되었습니다. 바벨론 포수는 유대인의 삶과 토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울러 바벨론 포수는 토라가 타나크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수는 토라의 일반화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나 읽혀 지던 토라가 수 많은 회당들에서도 읽혀 지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거하는 곳에는 반드시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회당에는 토라 두루마리가 비치되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토라를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은 평생 토라 두루마리를 필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에 의해 참으로 많은 토라 두루마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 서기관들의 필사 작업은 매우 엄격한 룰을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의 본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주석을 붙여 의견을 개진한 정도였습니다. 이 점, 헬라어 신약 성경을 공부할 때나 번역 성경들을 공부 할 때 항상 아쉬워 지는 부분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토라를 J,E,D,P 등 서로 다른 성격의 문서들로 나누어 본문을 난도질 합니다. 복음서도 마가우선설을 기초로 해서 진화론적으로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서구 신학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방인들은 속속들이 불손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의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필자로 하여금 성경 공부를 할 때는 히브리어를 사용해야 하고 유대인의 성경 연구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믿게 했습니다. 필자는 서구인들이 유대인들을 축출하고 진행한 헬라어 신약성경의 집대성 과정과 이방의 언어들로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번역자들이 저자들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해 번역을 했는지, 혹시 교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변질 시킨 부분은 없는지... 이런 의구심이 들 때, 히브리어 해득 능력은 도움과 위로가 됩니다.  

 

토라는 성경 중의 성경이었습니다. 사실 네비임과 케투빔은 토라를 근거로 만들어 진 성문서였습니다. 신약성경도 토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토라는 오늘 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방의 제왕들 가운데는 토라를 없애면 유대인들은 없어진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악독한 자들은 타나크 집대성 시기에 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틴을 지배한 셀뤼키드의 왕들과 로마의 황제들이었습니다. 셀뤼키드의 왕들은 유대인들에게 토라를 읽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해서 토라 두루마리들을 수거해서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토라 두루마리들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유대인들은 토라를 54 등분해서 매 주에 하나씩 읽어 갑니다. 이렇게 해서 일년에 한번 토라를 읽는 시스템입니다. 이걸 '파라샤트 하 샤부아'라 하지요. '그 주간의 몫'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셀뤼키드 왕들은 토라 파라샤트를 읽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토라 파라샤트의 각각의 주제에 맞게 네비임에서 54개 내용을 추려 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프토라'라 하면서 토라 파라샤트 대신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라 파라샤트와 함께 하프토라를 읽어 가고 있습니다.

 

이후 팔레스틴은 헬라인의 손에서 라틴인의 손으로 그 지배권이 넘어 갔지만, 유대인들이 토라 때문에 겪는 고초는 여전했습니다.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하여 무력 항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은 유대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토라를 없앰으로써 가능해 진다고 생각했지요. 로마의 황제들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든 문서들을 압수해서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과 팔레스틴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든 문서들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토라 두루마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10세기 쯤, 러시아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타나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타나크 두루마리에는 우리가 지금 구약의 목록 삼고 있는 39권의 책들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동유럽에서 살고 있던 '맛소라'라 하는 랍비의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루마리를 '맛소라 텍스트' 또는 '레닌그라드 사본'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맛소라 텍스트에 수 많은 점들이 찍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디 히브리어 문자는 자음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드'와 '바브'라는 두 글자가 모음처럼 사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요드를 '일 점'이라 하셨고 바브를 '일 획'이라 하셨지요. 히브리어는 자음 문자이기 때문에 읽는 방법은 전수를 받아야 합니다. 예컨대 '요드 헤 바브 헤'라는 신성4문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 신성4문자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야훼니 여호와니 하지만 아무도 그게 정확한 지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이 단어를 만나면 '아도나이(주님)' 또는 '하 쉠(그 이름)'이라고 읽어 버립니다. 본래 이 단어는 성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성전이 없어지자 이 단어를 읽는 방법도 잊혀져 버렸던 것 입니다.

 

히브리어는 정말로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발음의 차이가 엄청난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맛소라 집안에서는 히브리어 타나크를 정확하게 읽도록 각종 부호를 만들어서 원문에다 찍어 놓은 것입니다. 맛소라 집안에서 고안한 것이라 해서 '맛소라 부호'라 합니다. 맛소라 부호가 고안 된 때는 주후 8세기 쯤이라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유치원 아이들을 위한 책이나 울판 교재나 중요한 문서에는 맛소라 부호를 찍어 놓습니다. 히브리어 타나크 두루마리로 맛소라 텍스트가 발견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맛소라 부호가 찍혀 있는 것이었지요. 맛소라 부호가 찍혀 있다는 것은 이게 오래 잡아야 주후 8세기에 필사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맛소라 텍스트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셉투아진타'라고 하는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말로 '70인 성경'이라 합니다. 70인이 번역했기 때문이지요. 이 셉투아진타는 주전 2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습니다. 타나크와 외경을 포함한 성경인데 고대 헬라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이었지만 맛소라 텍스트에 비교하면 1,000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천년이란 세월의 권위를 떨쳐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맛소라 텍스트와 셉투아진타는 함께 사용이 되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에 있는 쿰란 지역의 동굴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두루마리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두루마리들 가운데는 완벽한 타나크 두루마리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맛소라 부호는 하나도 사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두루마리들은 주전 2세기부터 주후 50년 사이에 기록된 것들이었으니까요. 이 쿰란의 두루마리들 때문에 맛소라 텍스트가 더욱 더 권위를 인정 받았습니다. 쿰란의 타나크 두루마리들은 맛소라 텍스트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의 성경 보전 능력은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맛소라 텍스트가 셉투아진타보다 더 많이 학문적으로 사용 되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쿰란에서 출토된 타나크 두루마리는 지금 히브리대학교 히브리어 성경으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2. 셉투아진타와 불가타

 

주전 2세기에 이집트 왕이 알렉산드리아에 세계적인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 세계적인 책들을 비치해 두고 싶었습니다. 물론 유대인의 성경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에게 성경 전문가들을 보내 달라 했다고 합니다. 이 때 70인의 성경 전문가들이 이집트에 왔습니다. 이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에 의해 타나크가 헬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번역 기간은 고작 70일이었습니다. 70인이 70일 동안 번역하다! 그래서 셉투아진타 즉 70인역이라 합니다.

 

셉투아진타는 히브리어 타나크와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셉투아진타는 히브리어 타나크보다 확대되어 있습니다. 정경에서도 그 내용이 확대 되어 있고, 많은 양의 외경들도 정경 속에 들어 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셉투아진타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얌니아 회의에서 랍비들이 셉투아진타에 들어가 있는 책들 가운데서 히브리어 원본을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은 정경에서 제외했는데, 그 이유가 셉투아진타를 의식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셉투아진타를 정경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포괄성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톨릭'이란 말은 라틴어로 '보편적'이란 의미입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가 생겨날 때, 성경의 문서는 기껏해야 셉투아진타와 사도들의 편지들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의 편지도 진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필사된 것이어서 어느 누가 고의로 내용을 변개했는지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타나크는 구할 수가 없어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제1 세대 지도자로 활약하던 유대인들이 사라졌습니다. 헬라인들과 라틴인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서 평신도로 남아있던 유대인들도 축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약 성경이 (코이네) 헬라어로 집대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신약 성경이 집대성 되는 과정에 유대인들이 있었다면 신약 성경의 내용이 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기독교는 탈유대화 또는 반(反)유대화 했고, 그 결과 교회는 친서방화 또는 이교도화 되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더욱 더 반(反) 기독교적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어떤 타협점도 없었습니다. 이 시대에 집대성이 된 탈무드는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타'가 생겨났습니다. 4세기에 '히에로니무스'라는 라틴 사람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 동굴에 살면서 셉투아진타와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가타가 되었습니다. 라틴인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서 이 불가타는 세계의 성경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이후 불가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텍스투스 리셉투스' 즉 '공식적인 성경'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의 생동감 있는 표현이 헬라어와 라틴어의 관념적이고 권위적인 표현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약성경도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서구 교회에서 Q자료 또는 위서(僞書)라 하는 '마태라는 이름의 히브리어로 된 로기아'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마태복음을 근거로 말하고 있는 베드로 수위권이나 교회 정치에 대해서 별로 언급 하지 않습니다.

 

3. 영어와 독일어 번역 성경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랜동안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불가타는 성직자들을 위한 성경 같이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까지는 미사 때 불가타 성경을 읽었습니다. 회중이 알아 듣든 못 알아 듣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최종 해석은 교황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로마 가톨릭 교회 전통에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영국인 존 위클리프와 독일인 마틴 루터를 들 수 있습니다. 존 위클리프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너무 일렀습니다. 그는 불경죄로 화형에 처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경 번역 정신은 오늘날에도 기념이 되고 있습니다. 위클리프 바이블 트랜스레이터스 즉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 같은 게 그것입니다. 이 선교회를 통해 수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존 위클리프가 죽은 지 200년 후 드디어 종교개혁의 시대가 왔습니다. 독일의 비텐베르크의 사제 마틴 루터는 면죄부 문제를 교황에게 제기했다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축출되고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는 숨어 살면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알고 있었고 중세 3대 랍비들로부터 신학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 번역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독일어 성경은 때마침 나타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인해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독일어 성경이 독일 전체에 퍼지면서 교황의 반성경적 행태가 지적되었고 결국 종교개혁이 성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여러 나라에서 제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제임스 왕이 국가 사업으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을 동원해서 영어 성경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성경을 킹 제임스 버전이라 합니다. 킹 제임스 버전은 영어로 번역이 된 성경 가운데 오늘날에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성경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책이 레닌그라드 사본과 쌍벽을 이루는 알렢포 사본을 기초로 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히브리어의 권위를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4. 우리 말 성경

 

우리 말 성경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이 땅에 선교사로 들어 오기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한 우리 말 성경이 보부상들에 의해 반포되고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4년 부활절 아침에 인천항에 도착할 때 그들의 손에는 한글 성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일본 토쿄에서 구한 것이지요. 이수정 등 한국 유학생들이 만들어 낸 우리 말 성경이었습니다. 이 성경이 오늘 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 성경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70년대에 공동번역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이 성경에는 외경이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나름의 한글 성경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 성경도 여러 가지 버전이 나왔습니다. 새번역, 새번역 개정판, 킹 제임스 한글판, 개역 개정판 등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공부하려는 모든이교회에게는 탐탁한 책들은 아닙니다.

 

5. 복습

 

히브리어 성경이 다른 언어로 번역이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 목록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특히 케투빔에 속했던 것들이 역사서로 옮겨 지는 등 장르에 변화가 생겼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히브리 사상의 축약성과 헬레니즘의 확대성을 타나크와 셉투아진타의 목록에서 찾아 봅시다.  히브리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셉투아진타와 불가타에 나오는 것들, 즉 외경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불가타와 킹 제임스 버전 사이에는 정돈(整頓)이 있었습니다 어떤 정돈이었는지 종교개혁사상으로 설명해 봅시다. 우리말 성경 목록은 어떻게 정해졌는지 도표로 추정해 봅시다. 구약(舊約, Old Testament, OT)과 신약(新約, New Testament, NT)으로 명칭 되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이런 명칭을 온당치 못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를 추정해 봅시다. 참고) 구약 - 토라 네비임 베 케투빔, 신약 - 하 브리트 하 ㅋ하다샤.

 

 

 

5. 사도적 교회

 

 - 케뤼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참으로 긴 세월 동안 어려운 작업을 해서 타나크와 신약성경을 집대성했습니다. 타나크와 신약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수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여 기록한 책이며 피를 흘리며 지켜낸 것입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 귀중한 책을 읽으면서 그 책에 적힌대로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근거로 해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특별히 '사도적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사도적'이란 말에 관심을 가지고 이 과를 공부하십시오.  

 

1. 성경과 전통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

 

교회의 원형을 사람들은 출애굽 사건에서 찾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히브리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셨습니다. 하여 모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결국 파라오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대로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이집트를 떠난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적인 후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 수 많은 잡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이들도 함께 출애굽을 했던 것입니다.

 

출애굽은 유월절에 이루어졌습니다. 유월절은 교회의 출발입니다. 모든이교회의 창립일도 유월절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유월절에 출애굽한 사람들을 일컬어 히브리어는 '카할 아도나이'라 합니다. '주님의 회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카할 아도나이'에게 '토라'를 주셨습니다. 출애굽 원년 오순절 시내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지요. 이를 '마탄 토라'라 합니다. 마탄 토라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명실상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히브리 민족을 포함, 중다한 잡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셉투아진타는 히브리어 카할 아도나이를 헬라어 '엑클레시아'로 번역했습니다. 엑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의역인 셈이지요. 엑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의미로 그대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걸 한글 성경에서는 '교회'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카할 아도나이와 함께 하셨습니다. 성막과 그 곳에서 벌어지는 제사가 바로 그 것을 설명합니다. 항상 이동을 해야 하는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은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카할 아도나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성막의 의미는 성전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성전에서는 사두개인들을 중심으로 제사장 집단이 형성되었고, 직업적인 종교지도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 지 못했습니다. 하여 여기저기서 선지자들이 나타나 성전의 종교인들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네비임에 적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사두개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랍비들이 많았으므로 바리새파 유대교를 랍비 유대교라고도 부릅니다. 바리새파는 기독교 탄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수님도 사실 바리새파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랍비라고도 불리워 졌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랍비는 '나의 큰 자'란 의미입니다. 단순히 '선생님'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거한 세례 요한도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며, 사도 바울도 바리새파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바리새인들은 세계적인 종교 기독교를 창출했고, 예수님을 대적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속에 자리잡는 폐쇄적인 랍비 유대교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유대인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일컬어 일자무식층이라 하는데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들은 토라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혜와 계시를 존중하고 갈구했던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이들에 의해서 신약성경이 쓰여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 10.1-8, 14.15-21, 16.13-20, 눅 10.1-5, 행 2.43-47, 6.1-6 등을 참고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롬 11.13-32를 참고하십시오. 주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교회도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때 교회의 구성원들은 대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없어졌습니다. 신앙에 심각한 공황이 생겼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바리새파 전통을 존중하는 랍비 유대교로,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초대 교회로 각각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막 생겨난 초대 교회를 1500년의 전통을 가진 랍비 유대교에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졌습니다. 초대 교회는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2. 사도성(使徒性)에 대한 토론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받아 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이 일에 적극성을 보였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그의 말씀을 귀로 들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사람이었지요. 그랬던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자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글을 많이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글을 읽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글을 많이 썼습니다. 당시는 헬라 문명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헬라 문명의 특징은 수사학적 변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논한 글들 가운데는 엉터리 글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글을 읽고 예수님을 잘 못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란 누구냐?" 하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사도가 쓴 글만 읽으라 했지요. 이것이 결국 신약의 정경화 작업으로 이어 졌습니다. 아무튼 초대 교회는 '사도'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그의 말씀을 귀로 들은 자들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로부터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자들을 '속(續)사도'라 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과 속사도들이 쓴 글만이 읽을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은 사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같은 고귀한 글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결국 바울도 사도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글들도 신약 정경 속에 포함이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마 16.17-19와 요 21.15-19을 근거로 베드로를 최고의 사도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초대 교회의 이런 사도성 논란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을 정통이요 최고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에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는 최고의 사도 베드로를 내세우면서, 로마 교회의  수장(首長)은, 즉 교황은, 현재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사도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기독교인들은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그 권위를 인정하라는 말이지요. 이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에 맞선 사람들 가운데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어리석은 일이 유럽의 교회사에 잔뜩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는 사도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고 합니다. 만약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엡 1.15-23, 4.1-16, 골 1.18-29. 그래서 '사도로서의 교황'이 아니라 '사도적 직분을 감당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모든이교회도 이 입장을 지지합니다.

 

3. 사도적(使徒的)교회가 할 일

 

사도적 교회는 네 가지의 일을 하는 교회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것을 '케뤼그마(선포)'라 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아이들과 초신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기존 멤버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도록 지속적으로 가르칩니다. 이것을 '디다케(교육)'라 합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 안에서의 형제 자매로서 사이 좋게 도우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코이노니아(교제)'라 하지요. 아울러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또한 필요한 것을 채워 줍니다. 이것을 '디아코니아(봉사)'라 합니다.

 

사도적 교회는 케뤼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교회입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안됩니다. 균형 잡힌 교회로, 사도적 교회로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이 네 가지를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모든이교회는 이 네 가지를 강조합니다. 아울러 예산이나 결산도 이 네 가지 항목에 따라 실천합니다. 이 네 가지에 '리투르기아(예전)'를 보태서 사도적 교회의 5대 기능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투르기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행하는 예전은 주일 예배와 세례식과 성찬식입니다. 모든이교회는 세례식과 성찬식을 유월절에 행합니다. 교회의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는 모든이교회 멤버라면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예전입니다. 주일 예배는 케뤼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를 모두 표현하도록 합니다.

 

4. 사도적(使徒的) 교회를 이루는 사도적 인물(人物)

 

로마 가톨릭 교회가 너무 황당하게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교황을 내세우는 바람에 우리는 사도! 하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을 무시하면 사도!라는 말은 은혜로 다가옵니다. 그 사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카할 아도나이를 이끄셨듯이, 또한 사도들을 통해 많은 엑클레시아를 이끄셨듯이,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 특징은 공동체에 앞서 개인을 불러 그 공동체를 위해 준비하게 하시고 또 공동체를 일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런 패턴은 교회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패턴은 여전히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을 선택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로 하여금 그 사회, 그 나라, 또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공동체를 위해 택해 세우시는 일꾼을 필자는 사도적 인물이라 부릅니다. 이런 사도적 인물들을 통해 세계 도처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또한 그 교회들이 부흥을 했습니다. 사도적 인물은 원천적으로 복음전파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학이 한때 '사도학'으로 불리워 진 적이 있습니다. 사도적 교회는 결국 사도적 인물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선교를 세계 도처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 이외의 교회를 없애고 거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우는 것도 선교로 봅니다. 로마 제국의 침략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지요. 선교사들은 교황의 대리자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계 곳곳에 이식(移植)한다고 합니다. 교황은 사도이고, 선교사들은 교황의 대리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교황에게 책임을 집니다. 이런 말이 선교전략적으로는 합리적일 지 몰라도 성경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결국 인본주의적 색채를 드러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로마 가톨릭 교회의 행태가 지긋지긋해서 아예 사도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황은 사도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패턴, 즉 개인에게 적절한 사도성을 주시는 것까지 부인해 버렸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개인을 사용하시어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있지만 결국 이 말이 돈이 교회를 세운다는 말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전적 헌신하는 사도적 인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보냄의 신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성경과 전통

 

 

'사도적' 교회의 모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역사 속에서 사도적 교회의 모습은 훼손 되기도 했고, 또한 회복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훼손된 모습이 정통으로 받아 들여져서 회복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정죄받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사도적 교회는 소멸되지 않고 불완전한 모습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시켜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위한 우리의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번 과에서는 사도적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 봅시다. 유감인 것은 우리에게는 서구 사람들이 남겨준 자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료를 잘 분석해 보면, 오늘 날에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1. 초대 교회(주후 1~5세기)의 전통

 

1)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의 복음 전파

 

예수님 승천하신 해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는 오순절이 성령강림절로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은 그 이전에 많은 전통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 그 다음 해 오순절에 이스라엘 백성의 70인 장로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 모든 것이 오순절과 관련한 이야기들입니다. 오순절의 이야기들을 성령강림에만 제한시키지 않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은 교회의 탄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 강림은 예루살렘 마가의 집에서 있었고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열 두 사도들과 일곱 집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서 크게 부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집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전역에 크고 작은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라 하면 예루살렘이란 지역에 있는 교회를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엄청난 부흥과 역동적인 모습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인들에게 매우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단으로 몰아 처형한 예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인데, 그의 정신을 따르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었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 가운데 하나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 사도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고 집사가 죽음을 당했을까요? 아무튼 이때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을 대표한 자가 사울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집트로, 사마리아로, 다마스커스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우들 대부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본래 삶의 자리가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 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마스커스로 갔는데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복음의 적대자가 복음의 선포자로 변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1차 전도여행 때 키프로스에서 사울이란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곳 총독의 이름이 바울이어서 같은 이름을 쓴다는 핑계로 접촉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사울이란 이름대신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를 사울이라 합니다. 바울로 인해 지중해의 섬들과 오늘날의 터어키 지방과 그리이스 지방과 로마에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스페인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만 전도 여행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열 두 사도들과 일곱 집사들도 다른 지방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도 여러 번 갔습니다. 아마 복음서에 나오는 백부장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넬료가 그를 초청했었겠지요. 그리고 사도 바돌로메와 사도 도마는 오늘날 아라비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사도 도마는 인도까지 갔습니다. 도마가 세운 교회는 오늘날까지 인도에 남아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집트로 갔고 요한은 소아시아로 각각 흩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 연안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사도적 권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에 버금갈 정도로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도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 교회들은 유대인인 사도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보다 헬라인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또 라틴인들도 교회의 중요한 회원들이 되었습니다.

 

2)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신약성경 확립

 

그런데 사도들이 하나 둘 죽어 갔습니다. 순교를 했던 것이지요. 사도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아 죽었습니다. 네로, 데시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은 로마황제들로 악명 높은 박해자들입니다. 그런데 극심한 박해를 받은 로마 교회는 2세기 말에 예루살렘 교회를 대신하여 기독교의 중심 교회로 부상했습니다.

 

다시, 주후 70년으로 돌아갑니다. 주후 70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유대인들은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전이 없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의 신앙적 의미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토라를 전승하자는 운동과 함께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글로 남기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직접 쓴 글, 또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들어서 기록한 글들이 모아졌고, 이것들이 필사되어 여러 교회들에서 회람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결국 열 두 사도들의 글들은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약성경의 원본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필자 생각에는 많은 것들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이 되어 기록된 것 같습니다. 엄청난 수의 이방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면서 히브리어는 매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히브리어 대신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몰랐습니다. 오로지 라틴어만 사용했지요. 이들에게는 라틴어 복음서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2세기 말에 현재 27권의 성경 목록이 나왔습니다. 이를 무라토리 목록이라 합니다.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쓴 편지에도 이 27권의 목록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27권 외에 디다케, 헤르마스의 목자, 베드로계시록, 클레멘트의 복음, 바나바 서신, 도마복음 서 등이 교회 안에서 널리 읽혀 졌습니다. 이른바 신약외경입니다.  

 

신약성경이 확립되면서 교회에서는 많은 신학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새로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 가운데는 랍비 유대교, 헬레니즘, 조로아스터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신앙적 배경으로 복음을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에비온 파, 그노스틱 파, 마르시온 파, 몬타누스 파 등에 대해 공부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입장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각종 파벌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정통 신앙을 정리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가장 먼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함입니다. 사도신경 정립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학자들은 클레멘투스, 저스틴 마터, 폴리캅, 오리게누스, 터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입니다. 이들이 이른바 교부들입니다.

 

3) 라틴인들이 보편적 교회론으로 헤게모니를 쥐다

 

그런데 사도신경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정립한 건 좋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것을 이용해서 모든 교회의 중심이 되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민족적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자 이그나티우스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교회가 가톨릭(보편적)교회라고 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그렇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베드로 계승권 때문에... 2세기 말, 드디어 이레니우스는 사도적 계승권을 주장(2세기 말)합니다. 그리고 3세기에 씨푸리아누스(3세기)는 사도적 계승권이 있는 로마교회가 중심이 된 보편적 교회 밖에는 구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게 훗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안다니면 지옥에 간다는 말로 변질이 됩니다.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자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칙령에 서명합니다. 이후 325년에 소아시아 니케아에서 300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종교회의를 열고 로마제국의 국교로서의 기독교를 위한 기본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합니다. 이 때문에 교회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라틴 사람들과 헬라 사람들의 싸움이지요. 우리는 노바티아누스와 도나티스트의 분열을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삼위일체론을 두고 터툴리아누스적 이론과 후기 오리게누스 주의와 아리우스 주의가 심각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 씨릴 등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나 다른 사역에 매진하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내우외환(內憂外患) 속에서 기독교는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기독론과 교회론을 발달시켜 갔습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 교리의 대부분입니다. 5세기까지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사람들은 회당과 교회에 함께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들에게 유대교로 가든지 기독교인으로 남든지 선택을 하라고 강요 했습니다. 결국 이 강요 때문에 기독교와 유대교는 남남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6세기 초에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이 나타났습니다. 라틴어 성경에 있어서는 히에로니무스의 노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쯤 유대인들도 탈무드를 만들어 냈습니다.

 

2. 중세 교회(6~16세기)의 전통

 

라틴인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교회 안에서도 로마제국의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그레고리 1세는 로마제국식으로 교회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교권과 속권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레고리 1세는 교황으로 등극하고 그 이전에 로마 교회의 감독을 지냈던 모든 사람들을 교황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물론 첫 번째 교황은 베드로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로마 제국을 닮은 교회 조직 때문에 교회는 암흑 시대로 들어 갔습니다.

 

이 암흑시대에 존 후스, 존 위클리프 등 수 많은 신앙인들이 나와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교회를 운영하면 안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성경 말씀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요. 그래서 위클리프는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들은 이런 바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다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들을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으로 황제들을 통솔하는 교황에게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국 16세기에 들어서서 교황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 를 판매했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죽은 부모가 지옥이나 연옥에 있다가 천당에 간다는 엉터리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중은 무식했고 교황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결국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를 통탄히 여겼던 사람이 바로 독일 신부이며 성경 학자였던 마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교황의 주장이 비성경적이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 말씀은 자체로 권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주장은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지지합니다. 마틴 루터가 이런 주장을 했던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이 성경인 것은 교회가 그것을 성경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박한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중요하냐 전통이 중요하냐 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성경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국 성경과 전통 때문에 유럽 교회는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라틴족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게르만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과의 제목을 성경과 전통이라 했습니다. 필자는 전통보다 성경을 앞세우는 입장이지요.

 

 

 

7.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중요시 하느냐, 전통을 중요시 하느냐... 교회가 교회로서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행동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 다음 문제가 다가 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직접 불러서 적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과 이 세상의 이런 저런 전통이 모두 섞여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은 다름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고백이요, 결국 전통의 결과라고 주장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해석에 따라 다양한 입장을 보입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도 이런 토론이 아주 활발합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안에 많은 종파들이 있는 것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입장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확실히 전통이 성경보다 앞선다고 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도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확실히 전통이 성경보다 앞선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교황(敎皇)' 때문입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살아 있는 전통이며,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에 대한 최종 해석권라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이 성경을 앞선다고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성경과 전통, 이 둘 중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 때문에 약 500년 전 유럽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갈등 때문에 신구교가 나뉘어지는 어려움도 있었지요. 이걸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신구교는 나름의 길을 갔습니다. 신구교는 서로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선교 현장에서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적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신교(新敎)라 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인구가 구교(舊敎)라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인구보다 더 많기 때문에 신구교는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냐 전통이냐 하는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둘 사이를 더욱 더 벌어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산에도 동네마다 성당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교황이 해석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교회인 성당이 늘어나는 것은 신앙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는 우리에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교황무오설적 성경 해석은 우상숭배의 혐의도 느끼게 하는 점이 있어 가소롭기도 합니다.  

 

1.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의 역사

 

이미 우리가 배운대로 교회는 보편적 교회(ecclesia catholicus)와 지역교회(local church)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편적 교회를 우주적 교회(Universal Chhurch)라고도 하지요. 그리고 지역교회를 개별적 교회(Individual Church)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편적 교회, 우주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이상적인 교회를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집중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로마도 쇠약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자 로마 황제는 동쪽으로 천도를 결심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비잔틴으로 가서 황제를 칭하자, 그의 부하 막시미아누스가 비잔틴을 동 로마의 수도라며 의미를 제한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는 서 로마황제를 자처하게 됩니다 (284). 306년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서 로마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313년 동 로마 황제인 루키니우스와 함께 기독교에 대한 자유를 선포해 줍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가 로마의 국교로 삼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동 로마 황제를 쓰러 뜨리고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했습니다. 그리고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 고쳐 불렀습니다(330). 그러나 로마를 중심으로 성장한 귀족들은 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해 간 사람들을 변절자들로 생각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주후 590년부터 604년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을 지낸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the Great)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로마의 행정 담당관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하여 노년기에 교황 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교황이 된 후에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에 따라 교회의 체계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하는 교황의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권이 속권을 지배한다는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로마 황제는 멀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구 로마 귀족들과 게르만 민족들 사이에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교권 체제를 확립해 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서유럽의 유일한 종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일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서유럽 사람들의 종교 전통을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가 혼합주의로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회가 있었으니, 비록 동 로마 제국이지만, 로마 황제를 모시고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였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로마 황제가 인정한 로마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가장 권위 있는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 주장을 받아 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베드로를 정점으로 하는 사도적 교회의 전통을 세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 폴리스 교회의 갈등은 극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소피아 성당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절단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대표자이 회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성만찬 직전에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의 수장 세룰나리우스를 파문한다는 선언문을 제단에 놓고 철수해 버렸습니다. 이런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세룰나리우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 교황을 파문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1350년 이후 교회가 동(동방 정교회)서(로마 가톨릭 교회)로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 세력에 복속이 된 후에 동방정교회는 그리이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동방 정교회의 특징은 중앙집권세력이 없이 나라 별로 특색있게 발전해 갔습니다. 이 정교회들은 공산치하에서 민중과 함께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선교 열매입니다. 그래서 미국 교회와 그 이전의 영국 교회, 그 이전의 개혁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는 다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선교사들을 통해 동방 정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듣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의 동서분열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스콜라 철학이 융성했습니다. 다분히 고대 스토아 철학의 재현이었습니다. 결코 고대 이스라엘 종교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슬람 교도들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교권이 속권을 지배한다는 교리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이 실추된 권위를 만회하기 위해 교황들은 엄청난 규모로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면죄부까지 판매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극심한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정치적, 도덕적, 영적 권위는 쇠락해 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함께 위클리프, 롤러드, 후스, 신비주의자들, 수도원운동가들은 기독교의 올바른 영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교회 사람들에게 잡혀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교황에게 대드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들이라 하여 마녀를 처형하는 방법인 화형으로 처형했습니다.

 

드디어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신학교의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을 이상하게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마틴 루터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마틴 루터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사람 쟝 깔뱅은 기독교 강요를 써서 종교개혁 정신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스코틀랜드 사람 존 녹스는 깔뱅에게서 수학한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북유럽에서 여러 형태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경이 교황보다 권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종교개혁 운동에 대응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1545년 12월에 트렌트에서 소집된 공의회가 그것입니다. 1563년 12월까지 진행이 된 이 공의회에서 여러가지 바람직한 결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공의회를 종교개혁 대응(Counti-Reformation) 공의회라 부릅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 안의 종교개혁이라고도 부릅니다. 교황무오설이나 전통을 중요시 하는 생각 등은 깰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전통을 무시한다는 것이지요. 적반하장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들보다 더 오랜 신앙의 전통을 소유한 유대교에 대해 결코 존경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데에 앞장을 섰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볹질인 겸손과 섬김과는 배치되는 모습입니다.

 

2.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체계 및 교리, 그리고 저항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고대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를 본떠서 교회 행정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를 감독이 관리하는 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를 감독 관구라 합니다. 그리고 관구는 교황의 대리자들에 의해 지배하게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은 무오류(無誤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얼마나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교황의 무오류성에 대한 교리는 십자군 전쟁 때,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급조된 사상이라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모든 감독과 사제 등은 교황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결국 교황이 임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서는 감독은 교인들이 선출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상부 조직은 하부 조직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또한 교권과 속권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이 세워졌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7성사(聖事)말합니다. 즉, 영세(탄생), 견진(5세), 고해(면죄부), 성체, 종부(죽을 때, 장례), 혼배, 서품(평신도와 구분) 등입니다. 이에 대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성사는 세례와 성찬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침례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인 교리를 갖고 있는 교회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축일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축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회 생활의 주요 사건들을 상기 시키겠다고 합니다. 즉, 주일,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성탄절, 동정녀 마리아 수태기념일(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들에 의해 시작됨), 그리스도 성체절(13세기), 삼위일체주일(14세기), 성자들의 각각의 축일, 萬聖節(10월 31일)입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은 서구 유럽의 전통을 섞은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절기도 유대교와 차이를 보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050년 이후 동정녀에 대한 기도, 아베 마리아, 마리아 찬양 기도를 통해서 마리아 숭배의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 기도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중보는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무일과라는 게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의무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다기 보다 성자라고 추앙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거나 기도문을 읽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파에 따라 다른 聖務日課書를 사용하는 게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곱 번 기도를 합니다. 하루 3번 기도하는 유대인이나 하루 5번 기도하는 무슬림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선 사업과 성지 순례를 의무화 하고 있습니다.

 

 

 

8. 개혁 교회와 장로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싸운 마틴 루터는 독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교회는 그 영웅을 중심으로 교회 체제를 세워 나갔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일 전역이 루터교회로 뒤덮힌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부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새로운 신앙, 새로운 교회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런데 루터 교회는 마치 독일의 국교처럼 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은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어떤 나라가 중심이 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심은 항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 교회와 차별된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각 나라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개혁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원조가 되는 루터 교회와 대화를 했지만 각 지방이나 나라들의 독특성과 그 신앙 체계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이교회가 속해 있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는 개혁교회 전통 중 특별히 앵글로 색슨 족의 민주주의적 장로체제를 받아 들인 교회를 말합니다. 이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크게 발전했고 특히 한국에서 세계 유례가 없는 성장과 발전을 했습니다.

 

 1. 개혁교회의 사람들

 

개혁교회는 가톨릭 교회가 강한 유럽 남서부와 루터파 교회가 강한 유럽 북서부 사이에서 생긴 교회입니다. 즉 프랑스, 스위스, 북이탈리아의 계곡 지방을 고향으로 합니다. 이곳은 로마 가톨릭 세계의 변방(邊方)이었고 아울러 루터교회의 변방이기도 했습니다. 개혁교회는 이곳에서 동쪽으로는 트랜실베니아와 헝가리까지 뻗어갔고, 서쪽으로는 스위스를 거쳐 라인 협곡을 지나 홀랜드와 북해(北海)를 건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뻗어 갔습니다. 얼핏 보면 한 대(帶)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후에 이 지역출신 인사들의 이동과 선교의 결과로 개혁교회는 전 세계로 퍼져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 개혁교회 최초의 지도자 쯔빙글리

 

개혁 교회는 루터 교회보다 늦게 출발했고 루터 교회와는 다른 길을 갔습니다. 개혁 교회 최초의 지도자로는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자유로운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스위스의 환경 때문입니다. 당시 스위스에는 인문주의와 민주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수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쯔빙글리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배격했습니다. 결국 1523년 수도원 서약, 성직자 독신생활, 성자(聖者)의 중보, 연옥의 실재, 미사의 희생적 성격, 선행으로 인한 구원 획득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스스로 결혼했고, 예배당에서 성상(聖像)과 유적과 오르간을 치워 버렸습니다.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고 미사를 단절시켰습니다. 쯔빙글리는 개혁 교회의 급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만찬에 대해서도 빵과 포도주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상징설(象徵說)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공재설(共在說)로 이해하는 루터와 많이 다투었고 결국 결별을 했습니다. 공재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化體說)을 일부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2) 기독교강요의 깔뱅

 

개혁교회의 교리를 집대성한 것이 '기독교강요(基督敎講要)'입니다. 이 엄청난 책을 쓴 사람은 쟝 깔뱅(Jean Calvin 1509-1564)입니다. 깔뱅은 프랑스 노용 출신으로 빠리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신실한 종교 모임에 참석,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떠나 스위스 바젤에 가서 개혁교회 운동에 참여 했습니다. 바젤에서 그는 '기독교강요' 초판을 썼습니다. 기독교강요는 1559년에 최종판이 나왔는데 모두 4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랐다고 합니다. 제1권은 우주의 창조주, 보존자,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다루었고, 제2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구원을 다루었고, 제3권은 성령을, 제4권은 교회와 민간 정부와의 관계를 다루었습니다. 이 책에서 깔뱅은 "우리는 선행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서 의롭다 함이 선행에 의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깔뱅은 스위스 제네바를 종교 개혁의 표본이요 중심지로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민간 정부와 마찰을 빚어 2년 만에 제네바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지냈습니다. 여기서 부처(Bucer)의 도움을 받았고 이곳에서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썼으며 결혼도 했습니다. 파렐(Farel)의 요청으로 제네바에 돌아간 그는 그 도시를 신정국가처럼 운영하려 했습니다. 유럽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많은 개혁 교회 사람들은 제네바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깔뱅의 후계자는 역시 프랑스 불군디 베즈레이 출신의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입니다.

 

3) 장로교회와 존 녹스

 

존 녹스(John Knox 1505-1572)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제가 된 그는 개혁 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프랑스에 끌려 가서 노예선을 탔습니다. 노예선에서 포로처럼 강제 노동을 하다가 19개월만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서 왕실의 목사가 되었다가 메리 여왕 치하의 로마 가톨릭 교회 반동이 오기 직전에 탈출하여 제네바로 왔습니다.그리고 깔뱅과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1555년부터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에 박차를 가했고 1560년 스코틀랜드 정부는 드디어 녹스 등이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이것은 깔뱅주의적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장로교적 신앙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깔뱅주의와 저들 나름의 전통을 가미하여 장로교회(Presbyterianism)를 만들었습니다. 훗날 이 전통은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놓게 했다.

 

2. 16세기의 개혁교회들

 

16세기는 종교 개혁의 세기였습니다. 국경보다는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혁 교회는 도처에서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먼저 스위스 전역에서 개혁교회 동맹이 형성되었습니다. 중세 때 이단으로 정죄받은 발도파는 스위스에 인접한 프랑스의 뻐드몽 계곡에 도피해 있었는데 이들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깔뱅파와 교류했습니다. 이들이 발표한 1635년의 신앙고백서는 깔뱅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개혁교회로는 '카타리'라고 불리워 진 위그노 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심각한 탄압을 받았고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졌지만 지금도 프랑스의 남서부에서 여전히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보헤미야의 슬라브계와 헝가리의 마쟈르계도 깔뱅주의를 많이 수용했습니다.  

 

루터파의 아성인 독일에서도 개혁교회가 스트라스부르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개혁교회가 받아 들였습니다. 독일 안의 개혁교회의 전진 기지는 낫소, 브레멘, 헷세, 브란덴부르크 등입니다.

네덜란드에서도 개혁 교회가 피어났습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깔뱅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들도 보호했습니다. 재침례파를 보호했고 로마 가톨릭 교도들에게도 거주와 고용의 자유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레이덴 대학교 교수였던 야콥 아르미니우스에 의해서 깔뱅파의 제한속죄, 거역할 수 없는 은혜 등이 배격되기도 했습니다. 후에 알미니안 주의로 알려 진 이 파는 선택된 자들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런 이론은 감리교회가 받아 들였습니다.

 

3. 대각성운동

 

개혁 교회는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민족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개혁교회도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아메리카 13개 식민지에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 교도들만 이 곳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위해 아메리카 대륙에 온 사람들보다 돈과 명예를 위해서 온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종교적으로 아주 난잡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 즈음 독일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개혁 교회와 연결되어 대각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아울러 영국에서도 비슷한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파와  종파를 초월한 이 운동의 적극적인 가담자들로는 모라비아파의 진젠도르프, 헤른후트파, 영국의 휫필드, 웨슬리 형제,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 등을 꼽을 수 있지요. 이들에 의해 원색적인 복음 전도가 강조되었습니다. 복음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대각성운동은 교파와 종파를 초월했지만 아울러 교파와 종파를 공고히 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미 대륙에서는 유럽에서의 종교분쟁을 답보하지 않고 모든 교파와 종파들이 나름대로 발전을 구가했습니다. 특별히 영국에서 개신교가 부흥이 되었고 감리교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화를 주었습니다. 스코틀랜드로부터 많은 장로교도들이 미국에 이민하여 이곳에서 장로교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회중교회, 조합교회, 유니테리안 계열 등이 교세를 확장해  갔습니다.

 

4. 장로교회의 선교와 부흥

 

앵글로 색슨 족이 진출한 미국은 물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장로교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특별히 미국 장로교회는 1815년 경 부터 많은 중소 교단들과 통합을 해서 교세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세계 선교에 나섰습니다. 세계 선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등이 연합하여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셀러가 조선에 입국을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이식되었고 또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1884년에 입국하여 조선에 복음을 널리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으로 새문안교회와 당산동교회를 세웠고 이후 전국에 수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1) 한국 장로교회

 

한국 교회라 하면 물론 장로교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국의 수 많은 교단들과 선교단체들을 다 소개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을 중심으로 공부합니다.

 

민족 교회의 개념

 

교회는 당연히 민족을 초월하지만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힘은 항상 민족 단위로 발휘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 단위에서 교회의 힘을 나타내 보여 준 최초의 사례입니다. 이후 헬라 및 라틴인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나타났습니다. 라틴인들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개혁한 것은 게르만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즉 개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개신교회는 앵글로색슨 족에 의해서 활발하게 선교가 전개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바로 이 앵글로색슨인들의 선교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전국을 단일 노회로 하는 조직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때 미국 선교사들은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길선주, 이기풍, 송린서, 방기창을 목사로 안수했습니다.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또한 의사봉을 제정하여 교회의 전통을 수립했고, 7개 지방에 대리회를 조직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

 

1912년 독노회를 총회로, 7개 지방 대리회를 7개 노회로 개편했습니다. 총회 설립 기념으로 중국 산뚱성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한일합방으로 탄압을 받던 교회는 민족 문제에 개입

 

장로교회는 한일합방 이전에 평양에 숭실학교, 서울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세웠습니다. 1913년 4월 19일 경복궁 뒤뜰에서 주일학교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주일학교 대회는 14,700명의 어린이들이 참석하여 교회의 미래를 밝게 해주었습니다. 1919년 독립선언에 16명의 기독교인들이 민족 대표로 참여 했습니다.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의 수난

 

1930년 이후 일본제국의 군국주의는 날로 사나워졌습니다. 1934년 이후 유학파들에 의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고 교회가 신학적으로 분열을 했습니다. 1938년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모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가결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었습니다. 1939년 이후 평양에서 평양신학교 재건운동이 일어날 때, 서울에는 채필근 등이 1940년 4월 19일에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조선신학교를 세웠습니다. 1942년 친일적인 <조선혁신교단>이 생기고 1945년 7월 19일에는 모든 교파들을 합해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생겼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교회의 분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에 들어갔던 목사들이 출옥했습니다. 이 출옥 목사들과 교권주의적 목사들은 회개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했지요. 출옥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 관계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월남하여 <평양신학교>의 후신으로 <장로회신학교>를 세웠습니다. 1945년 11월 14일, 평양에서 총회 대행 기관으로 <이북오도연합노회>가 조직되었으나 공산당의 집권으로 수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1950년 4월 대구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 세 개의 신학교 문제를 논의했으나 출옥 성도들과 교권파 사이의 소란이 극심해 져서 비상정회를 하고 말았습니다. 1951년 5월 24일, 제36회 총회 속회가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모였습니다. 여기서 고려신학교를 단절시켰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새로운 교단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장로교 제1차 분열 또는 고려파 분열이라 합니다. 제36회 총회 속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없애고 <총회신학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관계자들은 기독교장로회 총회를 만들고 분열해 나가버렸습니다. 이를 장로교 제2차 분열 또는 기장측 분열이라고 합니다. 1959년 9월 24일,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이 대립했습니다. 결국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합동측이 저들만의 총회를 열고 분열했습니다.

 

통합측은 1960년 2월 17일 서울 새문안 교회당에서 저들만의 총회를 열었습니다. 이를 장로교 제3차 분열 또는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라고 합니다. WCC 문제와 4000만환 사건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통합측은 광나루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합동 측은 사당동에 총회신학교를 세우고 나름의 길을 갔습니다.

 

민족교회의 부흥

 

 4.19와 5.16 이후 민족교회로서 자각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족 복음화 운동, 전군신자화 운동이 열렸습니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 대회, 1974년 엑스플로, 1977년 민족복음화성회로 한국교회는 막대한 물량을 동원 부흥을 구가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와 남미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 100주년이 되는 1984년을 전후하여 1만 교회 운동이 일어났다. 장로교회인 통합(장로회신학대), 합동(총회신학대), 고신(고신대), 기장(한국신학대)은 나름의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대학 출신자들을 받아 목회자로 양성하고 있습니다. 1979년, 합동측이 분열했습니다. 이를 방배동파의 분열 또는 제4차 장로교 분열이라 합니다. 이후 장로교 합동측은 20개 이상의 교단으로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현재 통합측 교회 5000여 개, 교인 수 200만 명, 합동측 교회 5000여 개, 교인수 200만 명, 기타 장로교단(고신측, 반고소고려측, 방배동신학측, 합동신학원측, 대한신학교측… 100여 개 약 100만 명입니다. 통합측 교단산하 대학: 연세대, 장신대, 숭실대, 한남대, 계명대, 서울장신대, 호신대, 한일장신대, 영남신대, 부산신대, 대전신대. 기타 한국의 주요 교단: 기독교 감리회(감리교신학대), 예수교 감리회, 기독교 성결회(서울신학대), 예수교 성결회(안양대), 한국교회 교파 수 200여 개, 한국 개신교 대략 1000만 명 수준. 로마가톨릭교회 200만 명. 한국교회 해외선교사 11,000명 수준.

 

한국교회의 현재

 

다음은 한국방송공사(KBS)가 2004년 10월 2일 오후에 방송한 <선교 120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의 요약입니다.

 

"한국인의 사분의 일이 개신교도이며, 국회의원 255명 중 120명이 개신교도이다. 상장기업 임원의 43%가 개신교도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세습, 재정, 도덕성 문제가 일어나 교인 수와 헌금 액수가 줄어들고 있다. 제작팀이 여론 조사 기관에 의뢰하여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전국 20세 이상 성인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여론을 들었더니, 42.7%가 한국 근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종교로 개신교를 들었다. 천주교가 11.3%였다. 그리고 47.3%가 개신교의 장점으로 이웃돕기와 봉사활동을 꼽았다. 59.3%가 한국교회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자기교회 중심주의, 교회의 대형화와 성장 제일주의, 자격이 부족한 목회자들, 비민주적 의사 결정, 불투명한 재정운영, 세습을 꼽았다. 동 프로그램에서는 300명의 개신교도에게도 같은 여론 조사를 했다. 결과는 일반인 여론 조사와 비슷했다고 한다."

 

 

 

9.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이란 모든이교회가 속한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공동체적인 신앙고백과 교회의 운영방법을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이 헌법의 효시는 1907년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속칭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미국 교회의 신경과 정치를 가져다가 번역해서 대략 문구를 맞춰 마련한 것입니다.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총회에서 정치편집위원을 조직해서 헌법의 개정 작업을 하기로 결의 했습니다. 그리고 1921년 제10회 총회는 '조선장로회 헌법'을 채택했는데 이 헌번은 신경, 소요리, 정치, 권징, 예배 등 5법으로 구성 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특기 사항이 별로 없다가 민주화라는 시류에 맞춰 1994년 제79회 총회는 여성에게 목사와 장로 안수를 허락하는 헌법을 마련했습니다. 2003년 제87회 총회는 서구 사람들의 신앙고백과 구별되는 '21세기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이를 헌법에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또 예배와 예식을 전면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현재의 헌법은 제1편 교리, 제2편 정치, 제3편 권징, 제4편 예배와 예식, 그리고 헌법 조례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1. 교리

 

기독교인이 자신의 믿는 바를 간결한 용어로 표현한 것을 교리라 합니다. 교리는 성경을 바탕으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건전한 것이어야 하지요. 그래야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교리라면 우리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는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다양해 지고 운영 방법도 쇄신이 되면서 항상 수정될 수 있습니다. 수정 될 수 있는 것이 교리 입니다. 수정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의 교리로는 1) 사도신경, 2) 신조, 3) 요리문답,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교리들은 우리가 충분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들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개정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4세기 니캐아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독특하게 주장되었습니다. 이후 사도신경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신앙고백서로 인정되었지요. 신조는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12개 조항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가장 간결한 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요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함께 1643년 영국의 '장기의회'가 소집한 신학자 총회가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1647년에 스코틀랜드 의회의 인준을 하고 1648년에 영국 의회가 선포했습니다. 요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공부하기 위한 문답형식의 문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이후 미국 장로교회가 여러 번 개정되었습니다. 요리문답은 목회자용인 196개 조항의 대요리문답과 평신도용인 107개 조항의 소요리문답이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이 택하고 있는 요리문답은 '소요리문답'입니다. 모든이교회는 '소요리문답'을 세례를 위한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35장으로 이루어진 장문의 신앙고백서입니다. 그 내용은 대개 깔뱅의 '기독교강요'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968년에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2회 총회에서 헌법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선교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나름의 독특한 신앙고백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몇 몇 원로들을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준비했습니다. 이 고백서가 1986년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습니다. 이 고백서는 서문, 그리고 10장으로 구성되었고 선교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생각하면서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추가했습니다. 그 내용은 제1장 예배용 신앙고백서, 제2장 선언적 신앙고백서, 제3장 381년의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등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진부한 점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교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역사신학과 조직신학에 관심을 갖도록 하십시오.  

 

2. 정치

 

교회의 정치는 교회의 행정을 이끌어 가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도 성경과 양심이 바탕이 됩니다. 정치는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는 지교회를 구분하고 이를 당회의 존재 여부에 따라 조직교회와 미조직교회로 구분합니다. 교인은 원입교인(출석교인), 유아세례교인, 세례교인(입교인)으로 구분합니다. 교회의 직원으로 정년까지 직분을 향유하는 항존직이 있는데 장로, 집사, 권사를 말합니다. 임시직은 1년직인데 전도사와 서리집사가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권과 치리권을 가진 장로이며 일반적으로 장로라 불리우는 직분은 치리권만 가진 장로를 말합니다.

교회는 당회, 노회, 총회라고 하는 3개의 치리회를 갖습니다.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교회에 설치되는 당회입니다. 당회들의 모임인 노회는 당회를 보호하는 의무를 지며, 노회들의 모임인 총회는 노회를 보호하는 의무를 집니다. 총회가 노회를 거치지 않고 당회와 상대하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이런 체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 중심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반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개혁교회는 지교회 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밖에 모든 세례 교인의 모임인 공동의회, 직분을 가진 자들의 모임인 제직회, 그리고 교회학교, 전도 및 선교 활동, 사회 사업 활동을 위한 기관들이 있습니다. 아울러 외국인을 초청해서 국내에서 활동하게 하는 선교동역자에 대한 규정이 있으며, 헌법 개정에 대한 절차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3. 권징

 

교회 안에서는 개인끼리나 지교회끼리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교회 헌법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한 권징 항목을 교회 헌법에 명시해 두었습니다. 권징을 위해 교회 안에 재판소나 위원회를 설치하고 문제 해결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교단들과 교회들이 난립해 있는 상황에서 권징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친환경적 제도를 마련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4. 예배와 예식

 

교회의 모든 예식이나 행사는 성경과 전통에 따라 설치된 원칙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규정이 예배와 예식의 장(章)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와 축하와 기념의 의미가 있는 예식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모든이교회는 주일예배만 '예배'라 부릅니다. 주일예배 때는 어떠한 기념식도 어떠한 축하의 순서도 갖지 않습니다. 물론 세례나 성찬, 그리고 성경적인 절기는 주일예배 때에 언급을 하고 또한 실천을 합니다. 모든이교회서는 새벽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금요예배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학위취득축하예배, 회갑기념예배, 임직예배 등은 결코 사용하지 않는 명칭들입니다. 예배란 말대신 '경건회'란 말을 넣어 수시로 사용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0. 성서력에 대한 이해와 적용

 

 

성서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달력입니다. 그래서 성서력을 이해하면 성서(성경)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력은 유대력과 다릅니다. 유대력은 티슈리 월에 시작하지만 성서력은 그 보다 반 년 앞인 니싼 월에 시작합니다. 그래서 유대력이 아닙니다. 성서력이 니싼 월에 시작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이 바로 그 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성서력을 유대종교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유대인만의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도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교회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서구 교회가 그들의 전통 속에서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력에서 말하는 성서의 사건은 시기적인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교회력은 본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달력이었는데 여기다 개혁교회 전통 특히 미국 장로 교회 전통을 섞었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11월 둘째 주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초막절이 추수감사절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민족은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추석이 초막절과 그 시기가 비슷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실정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성서력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이교회는 성서력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이교회력을 만들었습니다.  

 

1. 창조와 회복

 

성서력의 기본 개념은 창조와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벽하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창조하셨는데 이게 인간의 죄 때문에 흐트러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완벽하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창조하신 창조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 성서의 대주제는 창조질서의 회복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회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회복의 사건은 예수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서력은 이런 회복의 사건을 기억하고 또는 재생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 성서력의 근본부터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합시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천지(天地)를 6일 동안 창조(創造)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7이라는 싸이클이 생겨났습니다. 7일은 한 주(一週)가 됩니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쉽니다. 엿새를 열심히 일한 우리 몸은 하루를 쉬면서 본디 하나님께서 만드신 건강한 상태로 회복이 됩니다. 우리 몸을 건강하게 회복하기 위해 쉬는 날을 우리는 안식일이라 합니다. 안식일의 안식을 히브리어로 샤밭이라 합니다. 그런데 샤밭은 쉬다는 의미와 함께 회복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이 안식일의 개념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물에게도 안식일 개념이 적용됩니다. 안식일에는 가축도 모두 쉬게 해야 합니다. 야생 동물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면 야생동물도 안식일을 지킬 수 밖에 없겠지요. 땅에 심은 식물은 그 생장이 동물보다 더딥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안식년 개념이 생겼습니다. 땅과 식물을 6년 열심히 가꾸고 나서 그 다음 해 한 해 땅과 식물을 함께 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년은 땅과 식물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도 6년이 지나면 아기가 어린이로, 어린이가 소년으로, 소년이 청소년으로, 청소년이 청년으로, 청년이 장년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안식년마다 의미를 부여해 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7번의 안식년을 갖고, 그 다음 해, 그러니까 안식년을 생각하고 살아간 지 50년… 이 때 인간은 희년을 맞습니다. 희년은 모든 것을 회복하는 때입니다. 대개 인간은 일생에 단 한 번 희년을 맞습니다. 희년은 한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평생 한번 제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완벽하고 아름답고 조화로운 창조 질서를 나름대로 회복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원상 회복합니다. 땅이나 집도 원 주인을 찾아서 돌려 줍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삶을 복되다 하셨습니다. 요컨데 안식일이나 안식년이나 희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은 부족하나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안식년과 희년은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회복을 위해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회복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생각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시간의 노예나 재물의 노예나 다른 인간의 노예는 회복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유인만 회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많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서는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출애굽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의 노예들로 하여금 강제 노동 수용소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강제 노동 수용소 이집트는 사막의 나라지만 나일강 덕분에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그 풍요가 제 잘 난 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다한 잡족을 권력으로 억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다한 잡족을 향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자유의 땅 가나안은 결코 유대인만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을 포함한 중다한 잡족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처음 4가지 계명은 우상숭배 금지와 안식일 준수에 대한 계명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의 계명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병이 들고 자연은 파괴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집트를 떠나는 날, 즉 출애굽 첫 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의 자유인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멍청이 파라오 때문에 이집트의 모든 장남들을 죽이셨습니다. 짐승의 장남도 죽이셨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가 칠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 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발라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그들은 이 피 때문에 장남이 죽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바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한 그들을 구속(救贖)하신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칠해 진 문설주를 보고 죽음의 사자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집을 뛰어 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이 있었던 날을 히브리어로 '페싹'이라 합니다. 뛰어 넘다란 뜻입니다. 한자어로 유월(踰月)이라 유월절(踰月節, Passover) 이라고 하지요.

 

유월절에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7주 만에 시내 산 기슭에 이릅니다. 그리고 출애굽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바로 그 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혹자는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케투바'라 합니다. 혼인서약서란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신랑과 신부의 모습과 같고 십계명은 신랑이 신부에게 보호를 약속해서 써주는 문서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곧잘 부부관계에 비유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은 날은 유월 사건이 있은 후 7일씩 해서 일곱 번이 지난 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샤부오트'라 합니다. 우리 말로는 칠칠절이라 번역 합니다. 유월절까지 넣으면 50일째가 되는 날이라서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합니다. 창조의 7이란 개념 속에 구속의 7이란 개념이 추가된 것입니다. 구속이란 자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이게 자유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당신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부터 계산해서 꼭 여섯 달 후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에 안식년과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초막절을 메시야가 오시는 절기로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안식년과 희년은 결코 제대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3.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을 예배한다

 

안식일이 시작할 때 '에레브 샤밭'이라는 행사를 갖습니다. 이때 촛불을 두 개 켭니다. 하나를 '창조의 빛'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구속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할라라고 하는 특이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안식일이 끝날 때는 '하브달라'라는 행사를 갖습니다. 이때도 촛불을 켜는데 두 개의 초를 꼬아 만든 특별한 초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창조와 구속은 하나님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브달라'는 특히 구속의 하나님, 용서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만방에 알리자고 다짐하는 전도의 사명을 강조하면서 하브달라를 끝냅니다.

 

우리의 추석 즈음에 오는 초막절을 유대인들은 하늘이 열린 절기라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고 10월을 '하늘 열린 달'이라 합니다. 신약성경을 공부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초막절에 태어 나셨습니다. 초막절이 메시야가 오시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문명 속으로 들어가면서 예수님 생일은 12월 25일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로마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던 날이었습니다. 동지가 되어 낮의 길이가 길어 지는 것을 빛의 세력이 어두움의 세력을 쫓아 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태양신을 섬기는 날을 예수님의 생일로 정한 것은 예수님은 태양신쯤은 압도하신다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초막절의 성서적인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초막절은 거의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순절은 성령강림주일로 지켜 지고 있습니다.

 

초막절 이후 꼭 6개월 지나고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지킵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3월이나 4월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오면 누룩을 없애고 1년 된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베인 하 아르바임, 즉 유월절 직전 양 잡는 시각은 오후 3시였습니다. 바로 이 시각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기독교의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이 함께 들어있는 절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님의 날 즉 주일(主日)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일은 안식일과 부활의 개념이 함께 들어가 있는 중요한 날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지키지 않고 있는 초막절, 그리고 유대인들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안식년과 희년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또는 일부 신학적 해석에 따라 지키지 말아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이나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키지 말하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절기를 가지고 폄론치 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절기는 유대 종교인들이 더덕더덕 붙여 놓은 절기였지 성서의 근간이 되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서 배격 운동과 미국의 패권주의와 강대국들의 블록화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세계 평화를 생각하는 초막절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을 바쁘게 그러나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30-40년을 열심히 살아도 허무감만 남는 우리에게, 안식년과 희년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안식년과 희년을 제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주일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년과 희년은 먼 우주 저편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안식년은 재정적 능력이 있고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안식년과 희년은 단순하게 노는 시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시간은 부모를 찾아 가는 효도의 시간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적용에 대하여

 

모든이교회는 기본적으로 주일(안식과 부활), 유월절(성금요일과 부활주일 포함), 오순절, 초막절, 안식년, 희년을 지키려고 합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에레브 샤밭'을, 주일 저녁에는 '하브달라'를, 유월절 저녁에는 '페싹 세데르'를, 오순절에는 '성경암송대회'를, 초막절에는 그 전 해 초막절 이후부터 조그만 플라스틱 저금통에 모아 온 동전을 꺼내는 '저금통깨기'를 합니다. 여기서 나온 동전은 예루살렘 방문을 위해서 또는 세계 선교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합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이교회는 2000년 유월절에 창립되었기 때문에 페싹 세데르는 모든이교회 창립 기념 파티도 됩니다. 이와 함께 오순절이 오기 전 열흘을 '선택의 열흘'이라 해서 교회 일꾼들을 선출하는 절기로 삼았습니다. 바로 이때 모세가 70인의 장로들을 뽑았고 사도들이 맛디아를 사도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대략 5월 말쯤이 됩니다. 우리는 2004년 이때 안수집사와 권사를 선출해서 임직시켰습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 투표도 이 때에 있을 것입니다.

 

유월절부터 초막절까지 6개월 동안은 토라와 복음을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이 6개월은 40일씩 3번으로 나누어 각각 수훈의 40일, 수련의 40일, 변모의 40일이란 이름으로 특정한 프로그램을 갖습니다. 수훈의 40일은 모세의 제1차 시내산 등정, 그리고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과 관련을 짓습니다. 수련의 40일은 모세의 제2차 시내산 등정, 그리고 예수님의 벳새다 사역과 관련을 짓습니다. 그리고 변모의 40일은 모세의 제3차 시내산 등정,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역과 관련을 짓습니다. 그리고 초막절부터 유월절까지 6개월 동안은 토라와 복음을 전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모세는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사이를 오가시면서 자신의 육체로 3일 만에 지을 교회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월절 직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다음 날 일몰 후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생각을 구체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6개월 동안 선교를 생각하고 구체적인 선교 활동을 합니다.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 모든이교회론

 

 

회를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라 , 역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부터 따져도 3500년이나 된다. 예루살렘 교회 이후만 따져도 2000 가까이 된다. 앞으로 얼마나 교회의 역사가 전개 될른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우리는 도도하게 흘러가는 교회 역사 어느 경점과 같은 시기에 모든이교회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얼마나 경건하며 얼마나 신실하며 얼마나 소망적인지 결론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이교회론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 성경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기실 역사의 어느 경점을 살던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또한 교회로서의 삶의 모습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질이 같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한 경점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교회로서 본질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우리 나름의 사고(思考) 정리도 필요하다.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봐도 좋겠다. 그런 차원에서 모든이교회론을 생각해 필요가 있다.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운데 으뜸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뜻대로 살게 해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명이다. 따라서 사람 이외의 모든 , 건물이나 제도나 계획은 편의적 요소일 따름이다. '모든이교회' 이름이 나타내고 있는 의미는 사람이 먼저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든이교회만 있는 아니다 다른 많은 교회들이 있다. 모범적인 교회도 있고 교회답지 못한 교회도 있다. 기준은 당연히 사람이다.

 

여기서 모든이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은 가급적 떨쳐 버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아니 우리 안에도 그런 모습들이 많다.  그러므로 모든이교회는 기왕에 교회가 해야 일이라고 주장되어 것도 검토해 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해야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 다른 교회가 당연히 하는 일이라고 우리도 해야 한다는 논리는 교회의 특성상 지지 받기 힘들다. 여기서 우리의 모든이교회론은 우리의 입장을 우리 스스로 정리하고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설명하는 데에 요긴하게 사용이 것이다.

 

사도적 교회

 

교회는 보편적으로 사도적 교회(使徒的敎會: apostolic church)이다. 사도적 교회란 필수적으로 다음 가지 기능을 나타낸다. 케뤼그마(복음 선포), 디다케(복음 교육), 코이노니아(성도의 교제), 디아코니아(구제와 봉사와 선교). 여기에 리투르기아(예전) 포함시킬 있다. 매우 다이내믹한 활동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에 있어서 현장성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여기서 지금 (here and now) 해야 일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특별한 상황에 따라서 케뤼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가운데 어떤 가지 또는 이상이 강조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가 무시되면 된다.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실천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도적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이교회가 인식하는 우선 과제: 경건한 신학자 양성과 자녀교육

 

모든이교회는 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발전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할 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온 받아온 서구식 케뤼그마가 서구에서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세속화의 문제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개혁성 부족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정신을 생각해 본다. 개혁정신을 말할 가장 널리 인용되는 사람이 마틴 루터알 것이다. 그는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보고 뭔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읽었다. 여기서 유명한 슬로건 sola Sciptura(오직 성경!) 발견할 있었다. 결국 루터는 교회의 행위가 비성경적이라고 지적했고. 자신 예기치 못한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는 당시 신학의 한계를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봄으로써 극복해 있었다.  루터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선배들이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읽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왔다. 따라서 모든이교회는 이런 전통에 관심을 가져야 것이다.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하고 또한 해석하게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경건한 신학자들을 양성해서 일을 전문적으로 하게 예정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읽게 하고 해석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읽게 하고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행동하도록 하는 신앙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번역 성경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를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자체 문화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영역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이것은 언어숙달의 특징상 나이가 어릴수록 효과가 좋다. 경건한 신학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와 가정이 함께 신앙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임무라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이교회력을 마련했고, 평신도훈련원을 마련했으며, 옐라딤예슈아를 마련했다. 아울러 이에 필요한 제반 교재를 만들기 위해 출판부를 운영한다. 출판부에서는 교재 뿐만 아니라 전도용으로 잡지를 발간하고 아울러 인터넷을 통한 사역도 감당해 것이다.

 

디아코니아 실천

 

오늘날 교회는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사회적인 기여를 별로 하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인 여론도 있다. 교회가 구제와 봉사에 힘을 쓰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데 모든이교회는 가정 또는 개인이 자립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교회의 재정이 넉넉해 지면 많은 사람들을 자립시킬 있을 것이다. 자립에 대해서는 보다 지혜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사회 봉사에 있어서 모든이교회는 교회 차원에서 나서기보다 모든이교회를 이루는 형제 자매들의 속에서 그것이 구현되도록 해야 한다. 사회 봉사를 적극적으로 수행할 있도록 가르치고 방법론을 제시하며 또한 격려를 주어야 한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소규모라로 성경공부를 인도할 있게 돕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재정적으로 선교사들을 많이 돕고 있다. 물론 모든이교회도 재정적으로 선교사들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지혜롭게 해야 한다. 모든이교회는 지역의 선교사들을 집중적으로 돕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경건한 선교신학자, 경건한 선교전략가를 양성해서 선교가 성경적이고 효과적이고 의미 있게 전개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서 우리는 선교사파송연구소를 돕고 있다.

 

교회의 편의 시설

 

모든이교회는 디다케와 디아코니아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면 교회의 편의 시설에도 관심을 갖기로 한다. 예배실은 주일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릴 있게 하되 모든이교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깨끗하게 꾸민다. 그리고 옐라딤 예슈아의 어린이 , 묵상카페, 연구실, 도서관, 선교사관 등은 필수 시설로 인식한다.

 

모든이베이트 : 코이노니아를 위한 공동체

 

코이노니아는 거룩한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 시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내일 일을 없었다. 언제 잡혀서 죽을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의 양육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탁하곤 했다. 살아 있으면 아이들을 보살펴 달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코이노니아의 본질이다.

 

 오늘날 교회는 공동체의 모습을 상실해 가고 있다. 매년 교회 구성원의 3분의 1 바뀌는 현실 속에서 교회의 공동체화는 요원한 이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꿈을 저버릴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이교회는 가능한 차원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체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옐라딤 예슈아 프로그램이 먼저 나왔다. 공동육아에서 공동체의 출발을 찾은 것이다. 이와 함께 출판사와 북카페 프로그램, 그리고 각자 분립해서 사업을 하되 생산물을 서로 사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공동체에 대한 연구는 실패 사례를 중심으로 주의 깊게 이루어 져야 것이다.

 

교회와 국가

 

교회는 국가가 하나님의 법대로 운영되도록 권면해야 한다. 아울러 교회는 국가가 제시하는 온당한 요구를 받아 들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가 국가로부터 특권을 요구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만약 교회가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는다면 교회는 국가를 제대로 비판할 없을 것이다. 2000 교회의 역사는 국가와 야합한 역사였다. 그러므로 모든이교회는 교회의 재산이나 권리를 획득함에 있어 편법이나 불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도 일정한 세금을 내야 한다.

 

모든이교회는 멤버들에게 국가나 지역사회가 부과하는 제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부당한 압력 특별히 신앙의 탄압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법으로 항거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와 교회는 함께 건강하게 공존할 있을 것이다.

 

 

 

12. 교인의 권리와 의무

 

 

케뤼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로 표현되는 사도적교회(使徒的敎會)의 네 가지 기능을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敎人)은 저마다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교회는 성경 말씀과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해 놓았다. 모든이교회의 교인들의 권리와 의무는 다음과 같다.

 

1. 세례 교인

 

교회 헌법에 따르면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공동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자를 ‘원입교인’이라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를 받은 자들만 정식 교인으로 인정해 왔다. 한 인간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으로 표현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겠다는 결심을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세례를 통하여 한 인간이 비로소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으로 인정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기 위한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세례 교육은 15세 이상으로 세례를 받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교회 치리회인 당회가 시행한다. 당회는 일정 기간 세례 교육을 시행한 후 필기 시험과 구두 문답을 통해 자격을 확인하고 세례를 베푼다. 모든이교회의 세례를 위한 기본 교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이다. 다만, 생후 2년 이전에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은 부모가 신앙교육을 충분히 시켰다고 인정하고 입교 문답 만으로 세례 교인과 같은 자격을 준다.

 

세례 교인이 되어야 비로소 교회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세례 교인은 공동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하고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할 수 있고 공동의회의 회원권을 갖는다. 모든이교회의 세례 교인은 적어도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자신의 수입의 10분의 1, 즉 십일조를 내야 한다. 그러나 십일조 액수는 스스로 정한다. 진정한 수입(real income)을 월급 명세 전액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세금을 제한 나머지로 보는 사람도 있고, 세금과 아파트 관리비와 부모 봉양 등을 제한 나머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신앙과 양심의 수준에 따라서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수입의 금액을 정하고 이것의 10%를 헌금하도록 한다. 헌금은 출석하는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인 경우, 출석하는 교회에 내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절박한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도 합당하다. 이 경우 모든이교회 교인들은 십일조는 일단 교회에 내고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전해 달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구제의 미덕은 익명성이며 자립을 염두에 둔 것이어야 한다. 아울러 모든이교회의 세례 교인은 평신도훈련원에서 적절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단, 공동의회 회원권은 18세 이상의 세례 교인이 갖는다. 모든이교회가 베푼 세례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서 정당한 세례로 인정 받는다. 그러므로 세례는 일생에 한번만 받으면 충분한 것이다.

 

2. 디다케를 위한 권리와 의무

 

세례 교인(이하 교인이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역사와 활동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모든이교회는 평신도훈련원을 통하여 이 권리를 충족시키고 있다. 평신도훈련원은 토라교실과 복음서교실, 교회사교실, 선교학교실 등을 설치하여 성경과 전통을 가르친다. 각 교실은 해당 분야를 전공한 교역자들이 강의를 담당한다. 평신도훈련원 강좌는 매년 4-6월, 9-11월에 있다. 세례 교인으로서 평신도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모든이교회 치리회인 당회가 적합하다고 교사로 선택한 사람은 디다케를 위한 의무를 진다. 그리하여 이들은 교회학교 교사로 일해야 한다. 교회학교란 태아부터 초등학생까지를 담당하는 ‘옐라딤 예슈아’와 중고등학생을 담당하는 ‘십대들의 교회’와 대학생과 대학원생까지를 담당하는 (이름 미정의) 기관을 말한다. 교회학교에는 부장, 부감. 교사, 보조교사 등의 직분을 둘 수 있다.

 

3.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위한 교인의 권리와 의무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교회가 적절하게 실천하도록 당회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특정 교인에게 직분을 준다. 이 직분으로 집사, 권사, 장로가 있다. 집사는 교인들의 신임을 받고 진실한 신앙과 지혜의 분별력이 있고 무흠 세례 교인으로 5년을 경과하고 30세 이상 된 남자로 디모데전서 3장 9-10절에 해당한 자라야 한다. 집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제직회의 회원이 되며 교회를 봉사하고 헌금을 수납하며 구제에 관한 일을 한다. 권사는 무흠 세례 교인으로 5년을 경과하고 30세 이상 된 여자로서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고 교인의 모범이 되는 자라야 한다. 권사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제직회의 회원이 되며 교역자들을 도와 궁핍한 자와 환란 당한 교우를 심방하고 위로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힘 쓴다. 장로는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능력이 있는 자로 무흠 세례 교인으로 7년을 경과하고 40세 이상 된 자라야 한다. 남녀 모두 해당한다. 장로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치리 회원이 되어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교회의 신령상 관계를 살피며 교인들이 교리를 오해하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권면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당회에 보고한다. 당회는 무흠 세례 교인 중에서 25세 이상 된 자를 서리 집사로 임명하여 제직회에 참여시킬 수 있다.

 

목사와 전도사는 교단 차원에서 양성되므로 교회는 적합한 자를 엄선하여 청빙 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이교회는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자로 M.Div. 학위 소지하고 나름의 신학 분야에서 다년 간 수련을 한 자를 교역자로 청빙 한다.

 

모든이교회는 위에서 말한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자들 가운데서 적합한 선교 목사를 선교사로 지원한다. 선교 목사는 교회가 돕도록 하고 개인적인 지원은 교회의 선교 담당자들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하도록 한다. 목사와 전도사의 생활비는 교회가 책임을 진다. 신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다. 모든이교회가 경건한 신학자 양성을 모토로 교회학교를 운영하는 한, 모든이교회는 장학금 지급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이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러므로 찬양대를 둔다. 찬양대원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된다. 찬양대에는 대장과 부대장, 파트장과 지휘자 및 반주자 등의 조직을 둔다.

 

모든이교회는 산하 각 사업단체의 책임을 교역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유치원이나 출판사나 북카페나 연구소나 인터넷방송국 등은 해당 분야 전문가를 책임자로 청빙 또는 고용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교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월급이나 연봉 등 사례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모든이교회의 사역 성격을 이해해야 하므로 평신도훈련원의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4. 교인의 권리와 의무의 확대

 

교회를 하나의 제도(制度)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수준에 이르러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 전술(前述)한 바는 그리 엄해지지 않는다.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어 각급 직분을 맡고 이에 따른 대우를 받는 것은 신앙 성숙을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바림직하게 성숙해 지면 제도나 직분에 구애 받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모든이교회의 신앙 성숙의 목표는 바로 이런 수준이다. 이런 수준에 이르면 권리와 의무의 한계가 모호해 지고, 전폭적인 헌신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있어야 하고 이에 따른 신비한 체험을 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 앗시시의 프란시스, 마틴 루터, 쟝 깔뱅, 쥴리아, 조지 워필드, 존 웨슬리, 손양원, 주기철, 마더 데레사 등은 바로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었다.  

 

 

 

13.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앙교육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였으며 가정(家庭)이었다. 가정의 중심은 남편과 아내다. 둘이 연합하여 몸이 되며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자녀를 생산하여 양육한다. 가정은 신앙교육의 출발점이며 또한 요람이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의 연장선 위에 교회의 신앙교육이 있다. 유교적 가정관을 지닌 한국인들 가운데는 가정의 핵심이 부모(父母) 아니라 부부(夫婦)라는 데에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독립할 있는 사람들이 결혼할 있고 또한 부부가 되어 자녀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있는 건전한 상식이다. 또한 부모가 자녀들을 영원히 지켜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 되는 성경적인 가정관은 자연스러우며 권장되어야 한다. ()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부부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 가족 구성원들을 섬기고 양육해야 한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 명령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에 대한 생각을 결혼 적령기 남녀의 결혼에 대한 숙고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

 

결혼준비

 

모든이교회는 결혼 적령기의 형제 자매들에게 성경적인 부부와 가정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적절한 배우자를 만나고 선택할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이왕에 만나 결혼하기로 약속한 커플에 대해서는 관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돈독해 지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결혼은 완성이 아니라 협력을 통한 가능(可能)이라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부모의 기대와 요구는 하나님의 안에서 수용될 있음도 가르쳐야 한다. 만약 부모의 기대와 요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거부할 있다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의 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루어 져야 한다.

 

새 가정 시작

 

성경은 남편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아내는 가정의 일을 생각하도록 지음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 돕는 배필이어야 한다. 오늘날 남녀 역할의 구분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신앙 교육과 함께 가정에서 가장 먼저 빛이 나야 한다. 부부는 무엇보다 먼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일과를 마친 후에 함께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부부 사이의 갈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할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부부는 자녀가 생기기 전부터 가정에서 경건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가정에서 경건회란 아침이나 저녁에 적절한 시간을 선택해서 파라샤트를 읽고 공통의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금요일 저녁에 에레브 샤밭을 도입하는 것도 유익하다.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는다.

 

임신과 함께 신앙 교육 시작

 

아내가 아기를 가지면 태교에 들어간다. 아내는 엄마가 준비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찬송을 부른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이나 지도를 보면서 태아와 대화를 시도한다. 출산을 하게 되면 동안 지켜 경건회 등의 좋은 습관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 경우는 모임 등에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 엄마가 아기를 안고 외출할 있게 되면, 가장 먼저 목사에게 연락하여 주일 예배 시간에 감사의 순서를 가질 있도록 부탁을 한다. 목사는 주일 예배 시간에 엄마가 아기를 안고 예배자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 순서를 갖도록 돕는다. 이때 엄마는 감사의 시를 낭독하고 기도를 한다. 아기는 2세가 되기 전에 유아 세례를 받도록 한다. 사실 유아 세례는 아기가 성장하여 자신의 능력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자원하여 세례를 받을 있도록 부모로서 돕겠다는 서약이다. 하나님 앞과 서도들 앞에서

 

이후 남편과 아내는 아빠와 엄마로서 아기와 함께 경건회와 에레브 샤밭과 예배 참여 등을 통해 신앙을 다져 간다. 아기는 3세가 되면 모든 지각 능력이 확립이 된다고 한다. 아빠와 엄마는 점을 무시하면 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로 취급하면 된다는 말이다. 모든이교회는 아기들의 부모와 함께 영유아들의 지각과 능력의 발달을 생각하면서 교회 교육의 내용을 만들어 가야 한다.

 

모든이교회의 옐라딤 예슈아, 그리고 부모 교육

 

모든이교회에 속한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아이들을 우리는 옐라딤 예슈아 부른다. 히브리어인데 의미는 예수님의 아이들이란 뜻이다. 옐라딤 예슈아는 4세가 되면 모든이교회의 유치원에서 신앙교육과 함께 유아교육을 받도록 한다. 모든이교회 유치원은 교육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부모교육을 자주 실시하여 가정과 교회가 함께 아이를 교육시켜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옐라딤 예슈아 방과후 학교에서 신앙교육과 함께 다른 특기교육을 받도록 한다. 우리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성경 공부다. 특별히 평일 성경공부를 통해서 주일만 신앙생활을 생각하는 폐습에서 벗어 나도록 돕는다. 아이들의 성경 공부를 위해 우리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교육을 한다. 원어로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국토 순례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을 사랑할 있게 한다.

 

중등학교 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를 위한 교육

 

한국에서는 부모들은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대학입시를 생각한다. 한국인 특유의 조급함이라 생각하여 현명한 처사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로 받아 들일 밖에 없다. 모든이교회는 부모들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신앙교육을 생각하고 또한 실천해 가야 한다. 사실 우리 교회는 옐라딤 예슈아 시절에 성경에 대하여 충분히 공부하기 때문에 중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실천을 강조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을 위한 신앙교육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여유와 확신을 갖는 것이 되어야 것이다. 가운데 경건한 신학자의 자질을 보이는 아이들에게는 마땅히 길로 가도록 격려해야 것이다.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경건한 신학자, 경건한 신앙인이 되도록 꿈을 심어 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신앙 생활을 있는 의미 있는 직업을 선택하도록 격려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부모와 함께 아이들이 견학의 기회를 자주 갖도록 도와 준다. 특별히 예루살렘 베이트를 만들어 그곳을 중심으로 자신의 미래를 있게 준다. 그리고 기독교 선진국에 가서 교회들과 학교들을 보며 나름대로 꿈을 갖도록 돕는다.

 

청년 및 대학생을 위한 교육

 

신앙은 직업에 구체적인 영향을 주고 받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청년 대학생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또한 대학생 가운데서 신학을 공부할 있는 학생을 선별해서 돕도록 한다. 교회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 하나가 경건한 신학자 양성이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매우 인색했다. 그리하여 신학적으로 매우 의존적인 교회가 되어 있다. 점을 모든이교회는 탈피해야 한다.

 

자녀 양육의 책임을 벗어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겨라

 

자녀들이 직업이나 학문을 선택해 길로 가고 나름대로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부모는 자녀 양육의 책임이 종착점에 왔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여생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손주 양육은 모든이교회서 있을 없는 일이다. 자녀는 부모가 양육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녀 양육의 경험은 남편과 아내에게 사역의 힘을 길러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 양육의 책임을 벗은 남편과 아내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사역에 나서야 한다. 교회는 목사나 직원들 만의 사역지가 아니다. 모든이교회는 교육이나 선교 또는 상담 분야에서 봉사자들을 확보하고 그들의 사역을 격려 또는 독려해 것이다.

 

 

14. 교회의 사회적 책임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상에서 무종교인, 또는 타 종교인들 등과 함께 살아 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사회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가져야 하는가?

 

1. 세상의 소금과 빛

 

이스라엘의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온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다. 이 은유는 유대적 개념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정한다. 이들에 대하여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금은 변치 않는 언약의 상징이며 아울러 맛을 내는 것이다. 빛은 주변을 밝히고 방향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빛을 보자기에 싸서 숨길 수가 없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소금처럼 변하지 않는 신뢰성 있는 집단이 되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가 처한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의 맛을 나타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처한 곳에서 진행해야 할 방향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교회의 역할은 교회의 멤버가 되는 우리 개인의 역할을 바탕으로 한다.

 

2.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세상은 시대 정신이나 국가적 이익 등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교회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구체적으로 성경을 말한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충분히 드러나 있다. 성경은 주전 2세기 이전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이 되었고, 또 주후 6세기 이전의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고문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현재의 의미로 재해석 해 볼 수는 있지만 시대 정신(Zeit Geist)이나 이익에 따라 교회가 일방적으로 행동방식을 결정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교회의 비참한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도 시대 정신이나 이익을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시대 정신이나 이익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며 저속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어 왔다.  

 

3. 세상의 정부와 교회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인정하셨고, 바벨론과 페르샤와 로마의 황제를 인정하셨다. 이들이 교회를 어찌어찌 하는 것을 내버려 두셨다. 사도 바울은 한술 더 떠서 정부에 순종하라고 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괜히 채찍을 가진 게 아니라고 했다. 잘못된 일에 대하여 그 채찍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의 정부(政府)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교회를 핍박할 때 교회는 스스로 해산(解散)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정부의 잘못된 결정, 특별히 하나님께 대하여 외람되이 행하는 짓거리에 저항을 했다. 저항을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무력적인 저항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정부가 그리스도인을 징집하여 군인으로 만들고 무기를 들라고 했을 때, 또 그 무기로 적군을 살해하라고 명령했을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엄청난 논쟁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정부의 전쟁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바람직 하지는 않지만 더 큰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도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교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정부가 전쟁을 하도록 선동해서는 안된다.

 

같은 논리로 교회는 특별한 경우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정부는 예컨대 구제 교육 봉사 등 국민을 위하여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교회가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하여 면세(免稅)하였다.면세는 물론 국민들에게 종교세를 거두어 교회에게 주었다. 이런 전통이 한국에도 들어와서 한국 정부도 교회에 대하여 면세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교회스럽지 못하게 부동산과 동산을 취득하여 치부하고 있음은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불미스런 일이다. 교회는 이런 치부에 대하여 자진납세를 해야 한다고 본다.

 

4. 무종교인과 타종교인에 대하여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만 무종교인이나 타종교인과 갈등을 빚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무종교인에게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사랑과 심판을 가르쳐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야 한다. 역사를 보면 많은 지역에서 폭력을 이용하여 세례를 받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일이 많았는데 그것이 만든 해악이 컸다. 그러므로 폭력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타종교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옳은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선교(宣敎)의 의미를 다양화 하고 있다. 타종교인들이 믿는 절대자도 결국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마찬가지 존재일 것이므로 타종교인으로 하여금 그 타종교에 더욱 더 신실해 지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종교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우리는 타종교인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우리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슬람교권에서는 교회의 존립이 어렵다. 이들은 교회에 대하여 가차없는 테러를 감행한다. 여기서 교회는 테러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소를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5. 세상의 제도 안에서 교회가 할 일  

 

교회는 선교 목적에서 병원과 학교를 많이 세웠고 지금도 세워 가고 있다. 그런데 병원과 학교에서 일하는 인력은 어느 나라에서나 인기가 있는 직종이다. 그래서 그 나라의 의료법이나 교육법의 지배를 받게 했다. 선교 목적으로 세운 의과대학에 무종교인들이나 타종교인들도 입학해서 의사가 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병원들이 일반 병원이 되어 제한적인 선교 활동 밖에는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는 외국 교회가 세운 소위 미션 스쿨이 많이 있다. 이 학교들을 통하여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고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한국에서 평준화 교육이 구가되면서 미션 스쿨이 학생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어렵게 되었다. 애당초 그리스도인 학생들만 선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새로운 선교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의 제도 속에서 선교 자원을 활용하는 다각도의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6. 사회적 책임  

 

교회는 사회에서 초월적 존재이면서 아울러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말은 선교적 목적에서 일반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하며, 아울러 사회의 일원으로 주어진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반인들이 혐오하는 일을 하면 안된다. 하나님께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해서 한밤 중에 동네 한복판에서 시끄럽게 통성 기도를 하면 안된다. 또는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백운대 등에서 목소리 높여 찬송을 부르면 안된다. 복음을 쓴 전도지라 해서 아무데나 뿌리면 안된다. 교회는 다른 어떤 기관보다도 준법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외국인근로자들을 교회가 도와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법체류자들로 하여금 합법 체류자가 되도록 돕거나 귀국하도록 종용하는 것도 교회의 임무다.

 

교회는 적어도 헌금 수입의 10분의 1은 생활보호대상자 등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구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 마비되어 있는 불완전한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육아원이나 유치원이나 양로원이나 모자원 등 사회사업 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합법적 정부를 세우기 위해 다른 시민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투표에 성실히 참여 하도록 교인들을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에 참여하면 안된다. 아울러 교회는 교회의 이름으로 금전적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을 하면 안된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헌금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운영이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정치나 경제적인 일에 뛰어 들 경우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들 가운데 유능한 정치가가 실업가가 교육자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정당, 기독교적인 기업, 기독교적 교육제도가 수립되게 해야 한다. 이것도 중요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다.

 

 

15.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과 역사 특별히 교회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그리고 이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세계관(世界觀)이라고 해두자.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의 특징

 

성경은 인간에게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세계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때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을 유한(有限)한 종말론(終末論)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이 세상은 끝없이 윤회(輪廻)한다고 하는 힌두교나 불교의 세계관과는 아주 다르다.

 

유대인의 종말적 세계관

 

유대인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때부터 2000년 동안을 '토후의 세계'라 했다. 토후는 히브리어로 '혼돈'이란 의미다. 토후의 세계가 지나고 그 후 2000년 동안을 '토라의 세계'라 했다. 토후가 토라로 정돈이 된다는 것이다. 토라의 세계가 지나면 그 후 2000년 동안 '메시아의 세계'가 온다. 메시야가 다스리시며 정의로운 세계를 일구어 가는 것이다. 메시야의 세계가 지나면 1000년 동안의 '천년왕국'이 온다. 이를 '밀레니엄'이라고 한다.  

 

2005년 2월을 유대인들은 유대력 5765년 여섯 번째 달이라고 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창조 후 5765년 6개월이 지났다는 의미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주전 1445년(유대력 2315년)에 시내산에서 모세(주전 1525-1405)를 통하여 토라가 주어졌고 이후 2000년이 지났으므로 지금은 '메시야의 시대'이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주전 5 - 주후 27)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아직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메시야는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메시야다. 그리고 그 힘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와 위엄을 회복하게 하여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예수는 힘 없이 죽었으므로 메시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종말관에도 합치하듯이 이미 메시야가 오셨고 약 33년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후에 승천하셨는데 천년왕국을 이루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세계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전수되었다. 토후의 시대는 토라로 끝났고, 토라의 시대는 복음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이전을 (Before Christ: BC)라 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복음의 시대요, anno domini (AD: years with our Lord's)의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예비적인  사건으로 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이스라엘에게 쏠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미 19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주목해 왔다. 유대인들은 유대 자본가들의 도움을 얻어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주의 운동을 벌였고, 이후 팔레스틴 땅을 매입했으며,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8년 5월 14일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생각하고 열광했다. 이후 중동 전쟁이 4번이나 일어났는데 이때마다 이스라엘이 이겼다. 그리고 이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광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팔레스틴 땅 이주는 계속되었다. 독립 당시 팔레스틴 땅의 유대인 인구가 60만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500만이 넘는다. 그리고 유대인 인구 만큼 팔레스틴 인구가 고향에서 쫓겨나 떠돌이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의 군사적이고 정치적 회복을 예수님 재림의 징조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스라엘이 군사적인 강대국이 되고,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서 성공하여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각 방면을 제패하여 이방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정말로 성경이 원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나는 선지자들은 부국강병을 꾀하는 이스라엘의 왕들을 왜 그렇게도 꾸짖었던가? 토라 자체가 그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오히려 필자는 이스라엘 공화국의 독립에 즈음하여 쿰란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성경의 사본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쿰란 사본들 덕분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걸레 취급을 받던 성경이 그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수 많은 성경의 난제들이 해결되고 있다. 아울러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회복되고 이 언어가 수 많은 사람들의 일상 용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성경의 회복이요, 신학의 회복이요, 토라의 완성인 복음의 회복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회복되어 평화가 이루어 지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것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Era of Post Christianity or Post Modernism

 

현대를 가리켜 기독교 이후 시대, 또는 근대 이후 시대라고 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신(神)을 부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신을 부정한다는 말은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생긴 말이 아니다. 창조 때부터 신에 대한 부정은 있어 왔다. 신에 대한 부정은 사실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다. 창조 이래 인류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온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이다. 물론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심각하게 왜곡된 것은 이미 우리가 살펴 본 바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말로 추구하려고 했던 공의와 정의와 진리와 평화는 여전히 기독교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 크리스챠니티나 기독교 문명이 만들어 낸 근현대의 바른 사상과 행동을 모두 폐기해 버리려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간의 죄성이 달리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 크리스챠니티와 포스트 모더니즘은 결국 같은 의미로, 정교한 언어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복음과 토라가 없던 토후의 시대로 돌아가서 제 멋대로 살자고 하는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사상에 물든 자들이 성경을 경시하고,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내부의 토후적 요소들을 살펴보고 이것을 척결함으로써 그들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도록 노력하고 선교적, 그리고 시대적 사명을 완수해 가야 한다.

 

우리의 내부 성찰

 

오늘날 소위 교회 성장(Church Growth)을 부르짖고 있는 자들 가운데는  배금주의나 물량주의가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상식에 얼마나 반하고 해로운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많은 것 같다. 이것 때문에 복음 전파가 오히려 심각한 방해를 받고 있다. 교인 1,000명, 10,000명에 따라 목사들도 그룹이 지어진다. 그룹의 급이 높은 목사들은 정부의 요인들만 상대하고 경호원을 대동하기도 한다. 담임 목사와 5분 동안 상담하는 데에 300만원을 요구하는 교회도 있고, 50만 원을 내야 주임 신부와 만나게 해주는 성당도 있다. 교회에서도 토후의 요소가 비일비재 하다.

 

여기서 우리는 토후를 쫓아 내는 데에 토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토라를 완성시키기 위해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토후와 토라와 복음은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한 장소에서 한 시기에 일어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토라와 복음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성경은 수 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 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신들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 수 많은 신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신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난 자들과는 그들이 아무리 성령을 증거한다 해도 그들의 증거는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모두 성경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가? 감사하게도 성경은 글만 알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심각하게 어려운 신학 용어는 별로 없고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 간다. 그 옛날 아담이, 아브라함이, 모세가, 엘리야가. 에스겔이, 베드로가, 바울이 만난 하나님이 지금 나와 만나고 계시는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 이 영원한 신비...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형성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다가가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가 기록한 토라로는 이룰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세의 제자들로 토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연민의 정을 갖는다. 아울러 어찌하여 토라를 알고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지 안타까움을 갖는다. 만약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우리가 유대인들만큼 토라를 알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것인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고대 유대인의 세계관을 뿌리로 한다.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나크에 대한 공부를 게을 리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 그 누구에게도 완벽한 열쇠를 들려 주시지 않는...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은 협력해야 한다는... 그 평화의 플랜. 한스 큉은 여기다 무슬림까지 보태자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세계 경영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러므로 겸손할 수 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책임감을 갖는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에 대한 의무감도 갖는다. 이 점, 유대인들은 갖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한다. 그 하나님 나라는 미구에 이루어질 이상향이다.

 

그리스도인은 태생적으로 토후의 현상이 내포된 현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느낀다. 그러므로 나이브하게 신정국가를 건설하자고 부르짖지 않는다. 신정국가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시는 국가이다. 그러므로 신정국가를 부르짖는 자는 사기꾼이요 거짓말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이 제 몫을 감당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은 자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사회적으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도 함께 생각할 줄 안다. 그래서 사회주의적 복지국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까지 인간이 살기에 최적한 최선의 제도를 창출하기 위해 힘쓴다.

 

개인의 종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 지는 세계적인 종말을 알고 있지만, 아울러 그 종말 이전에 자기 개인의 종말이 있을 것도 알고 있다. 개인의 종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잠에 빠져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종말 때에 자신은 이 잠에서 깨어나 부활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종말은 결국 세계의 종말과 연관되므로 개인의 인생은 값지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태초'를 '한 처음(a beginning)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질(質)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으로 전혀 다르기 때문에 불교의 윤회와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종말론적이지만 종말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종말론은 낙관적이다. 그리고 이 낙관적 종말론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하게 한다. 모든이교회는 이런 믿음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것을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이 세계에 적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아울러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배울 것을 배우고, 세계 모든 사람들과 복음으로 교제하여 평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   

 

16.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어느덧 16주 성경공부의 마지막 장이 되었다. 지난 15주 동안 우리가 공부한 내용은 사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략 네 가지 영역으로 단순화 해 볼 수 있다. 말씀, 기도, 교제, 그리고 증거이다. 이 네 가지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삶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이다. 이런 삶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백하곤 해야 한다.  

 

말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교회의 전통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나의 삶을 규명하고 또한 반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1)성경을 대한다. 그리고 2)위대한 신앙인들의 저술들을 대한다. 이것을 '말씀'이라고 하자. 먼저 성경을  대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성경을 대하는 방법은 듣기, 읽기, 공부하기, 암송하기, 묵상하기가 있다.

 

듣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주일 예배 시간에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모든이교회의 목사는 6년을 주기로 다음과 같이 성경본문을 다룬다. 제1년) 파라샤트를 중심으로 토라, 제2년) 모든이교회가 개발한 신약파라샤트로 복음서들, 제3년) 예언서와 바울서신, 제4년) 토라, 제5년) 복음서들, 제6년) 지혜문학서와 공동서신 및 계시록. 따라서 6년 동안 모든이교회 교인은 토라 2번, 복음서 2번,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1번씩 듣게 된다. 토라와 복음은 이미 우리가 배운 바 대로 모든 성경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다른 목사들의 설교도 자주 들어야 한다.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설교와 구리 두레교회의 김진홍 목사의 설교를 추천한다.

 

읽기: 모든이교회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에스라성경연구원이 개발한 성경통독자료로 읽기를 실천하고 있다. 이 자료의 특징은 성경을 연대 순으로 읽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타낙의 케투빔이 빠져 있는데 이 부분은 읽는 사람이 별도로 보충해야 할 것이다. 역대기는 케투빔에 속한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한다. 또한 성경을 연대 순으로 읽는 것이 단순하지는 않다. 아무튼 에스라성경연구원의 성경통독자료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여호수아→사사기→룻기→사무엘상→사무엘하→열왕기상→열왕기하 1:1-13:25→요나→열왕기하14:1-29→아모스→호세아→요엘→열왕기하 15:1-16:20→이사야 1:1-39:8→미가→이사야 40:1-66:24→나훔→오바댜→열왕기하 17:1-23:37→하박국→스바냐→예레미야→열왕기하 24:1-25:30→예레미야애가→ 다니엘→에스겔→에스라 1:1-4:24→학개→ 스가랴→에스라 5:1-10:44→느헤미야→말라기→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사도행전1:1-18:11→데살로니가전서→데살로니가후서→갈라디아서→사도행전18:12-19:20→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10:1-13:13→고린도후서 1:1-9:15→사도행전 19:21-20:2→로마서→사도행전 20:3-28:31→에베소서→골로새서→빌레몬서→빌립보서→디모데전서→디도서→디모데후서→히브리서→야고보서→베드로전서→베드로후서→요한1,2,3서→유다서→요한계시록.

 

이 순서대로 하지 않아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매일 3장씩 읽고 주일에는 5장을 읽으면 1년에 성경 1회독을 할 수 있다.  

 

공부하기: 모든이교회는 충분한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제공 한다. 4-6월 그리고 9-11월에는 매주 주일 오후 1시부터 이성계 목사는 자신이 설교한 성경의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한다. 목요일 셀 성경공부는 주보에 예시된 파라샤트를 교재로 사용한다. 파라샤트는 매주 토요일 밤에 온 가족이 함께 읽는다. 토라와 복음서에 비하여 자주 다루지 않는 바울서신, 공동서신, 요한서신, 그리고 네비임과 케투빔은 12-3월에 별도의 시간을 마련해 공부한다. 7-8월에는 여름학교도 운영한다. 평신도지도자들은 교회가 세운 계획에 따라서 주로 새신자나 셀 조직의 성경공부를 인도한다. 교회가 마련한 프로그램 이외도 개인적인 성경공부를 하면 좋다. 주제별, 인물별, 귀납적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Chapter Study이다. 성경의 한 장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분석하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들지만 본문 이해에 확실한 도움을 준다. 물론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이해할 수 있으면 이 보다 더 좋은 학습 자료는 없을 것이다.

 

암송하기: 암송은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내 머리 속에 넣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삶에서 말씀을 적용하고 싶을 때, 또는 성경공부 인도 때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치매 예방에 아주 효과적이다. 모든이교회는 오순절을 전후하여 암송대회를 개최한다. 암송은 습관이기 때문에 옐라딤 예슈아 시절부터 중요한 성경구절을 외우는 요절 암송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암송 자료는 네비게이토 선교회가 만든 암송 60구절, 240구절을 추천한다. 작은 카드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휴대가 간편하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처럼 장이나 책을 통채로 외우는 것도 시도해 볼 만 하다.

 

묵상하기: 묵상은 성경 말씀의 아름다운 원리를 듣기, 읽기, 공부하기, 암송하기로 섭취한 후에 개인적인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의 본질적 의미대로 내 삶을 바꾸는 일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다섯 손가락 예화에 따르면 묵상은 엄지에 해당한다고 한다. 묵상이 없으면 듣기, 읽기, 공부하기, 암송하기는 세속적 걱정에 파묻히기 쉬우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가 어렵다고 본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면 3P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Possible, Practical, Personal이 그것이다. 즉, 가능해야 하고, 실제적이어야 하며,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아뢰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모임을 갖고 끝내기를 할 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Lord's Prayer)'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기도문은 예수님께서 히브리민족의 쉬모네 에스레 기도문을 요약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의미는 그대로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양식에 따라 기도하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기도하는 양식으로 ACTS가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Adoration, Cofession, Thanksgiving, Supplication이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의 말을 아뢴다. 이후에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한다. 그리고 감사를 드린다. 이후에 필요를 간구한다. 간구는 남을 위한 것이 있고 나를 위한 것이 있다. 남을 위해 간구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간구를 기도로 보는 것은 단견이라 할 수 있다. 모든이교회는 다음과 같이 기도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주일 예배 때의 기도순서들: 묵상기도는 주일 예배 시간에 아주 중요한 순서로 취급된다. 먼저 예배를 준비하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자백의 기도를 하면서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지은 죄를 생각하고 용서를 빈다. 예배 시간에는 목사가 하는 목회의 기도가 있다. 이것은 목사가 제사장의 입장에서 참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이때 목사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특별한 위치에 서서 예배자들을 위해 기도하므로 그의 기도를 통한 성령의 역사가 크다.

 

새벽 기도회 또는 새벽 묵상의 시간: 예수님은 매일 아침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즐기셨다. 그래서 습관을 좇아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한다. 이 모습을 우리 한국교회가 그대로 받아들였으니 대부분의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새벽기도회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전통 가운데 하나다. 새벽기도회 참석은 한 사람의 하루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도 있다. 새벽기도회 때문에 이른 아침에 예배당을 오가는 어른들 가운데는 이것이 100세 가깝도록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모든이교회는 새벽기도회의 모습이 바꾸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새벽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훈련 된 사람은 접근이 가장 용이한 장소에서 새벽 묵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교회의 새벽기도회를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모든이교회는 새벽기도회를 새벽묵상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 새벽묵상 때 목사가 설교하는 일은 없도록 했다. 오로지 묵상 자료를 제공한다. 이렇게 한 것은 평신도들도 혼자 묵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이교회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한 사람들이라면 자료만 있으면 새벽 묵상쯤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묵상 후에는 홀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한다.

 

금요중보기도회: 모든이교회는 금요일 밤에 중보기도회를 갖는다. 남을 위해 간구하는 것도 중요한 기도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기도할 때 나의 필요는 저절로 채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중보기도만을 하는 선교단체들이 많이 있다. 모든이교회의 금요중보기도회에서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한국의 안정과 통일을 위해서, 사회의 평등과 복지를 위해서, 한국교회의 정상적인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모든이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그리고 중보기도회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기도 노트를 마련하면 좋다. 기도 노트에는 기도 제목과 함께 간구를 시작한 날짜와 간구를 끝낸 날짜를 쓸 수 있는 칸을 만든다. 1년 후에 대부분의 기도가 적절하게 응답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식 마련) 개인적인 기도 이외에 식사 전후에도 기도하도록 하고, 부부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에도 기도하도록 한다. 기도할 때 꼭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항상 기도할 수 있도록 눈을 뜨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도 좋다. 찬송은 곡조있는 기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찬송을 자주 부르는 것이 중요하다.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예수원에서는 아침 6시에 아침예배, 정오에는 정오예배,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예배를 갖는다. 하루 24시간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다. 아침의 것을 조도, 정오의 것을 대도, 저녁의 것을 만도라고 하는데 모두 기도로 표현한 것이 이채롭다. 특히 정오의 것을 대도라 함은 중보기도를 말한다. 예수원 식구들은 중보기도를 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기도제목을 요청하는데 그 요청을 받으면 마음이 무척 포근해 진다. 나를 위해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기도해 준다는 것보다 더 좋은 말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교제

 

교제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사귐을 말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서로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해서 오해 없이 친밀해 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주 친교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모든이교회는 주일 점심식사 시간을 통해서 교제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셀 모임을 통해서 교제의 시간을 갖는다. 또 절기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교제의 모임을 갖는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그 세대의 특성에 맞는 교제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모든이교회에서 중요한 교제의 모임은 토요일 에레브 샤밭이다. 이를 통해서 가족이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 때에 다른 가족을 초청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교제의 지경을 가정을 바탕으로 다른 가정으로까지 확대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적으로 또는 선교적으로 교제를 형성해 가도록 한다. 우리의 교제는 우리 교회 안에서 끝나면 안된다. 교제의 차원은 개 교회의 범주를 넘어 교단적 차원으로 커져야 한다. 물론 교단 안에서만 교제가 있어서도 안된다. 교단도 뛰어 넘어야 한다. 그리고 각종 선교회들과 외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도 교제의 범위를 넓혀 가야 한다. 그러자면 물론 내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증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증거로 표현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 나라 인구의 40%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40% 이상이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70% 이상이 가족 친지 친구 선배들에게 전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직장 동료로부터는 4% 미만이며, 전도지를 통해서는 2% 미만이다. 여기서 우리의 선교전략이 어떠해야 하는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아울러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직장에서도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문서 선교는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게 필요하다.

 

증거의 최고 차원은 역시 세계 선교다. 세계 선교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를 위해 우리 교회는 선교사파송연구소를 유치하고 운영하고 있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외국인도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다국어 전도지를 만들어서 외국인들에게 배포해야 한다. 그리고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돕고, 이 땅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적절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결 과제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국내외 봉사 현장에 우리 멤버들을 파송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OAT 작성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 기도, 교제, 증거를 가지고 OAT 작성을 해서 실천하도록 한다. OAT는 Object, Action, Time Table을 말한다. 이는 대개 연초에 만들어서 연 단위로 실천하는 것이다. 즉, 말씀의 국면에서 생각해 본다고 하면... 작년에 읽기가 부족했다면 금년에 성경 1독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작년에 증거의 삶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면 금년에 3명 전도의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타켓으로 할 건지, 어떤 행동을 할건지, 언제 그 행동을 할 건지 결정하는 것이다.  

 

 

말씀

기도

교제

증거

목표

 

 

 

 

행동

 

 

 

 

시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주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힘들게 일해야 하는 직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게만 되는 것도 아니다. 우선 단편적으로는 말씀, 기도, 교제, 증거가 이루어 질 때 어느 정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이루어 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신자 교육을 끝낸 여러분은 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모든이교회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숙해 지기를 바란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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