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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셨고 유대인으로 교육받으셨으며 유대인의 문화 속에서 랍비로 사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리고 그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유대인의 토라를 재해석하신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적인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면 별 다른 도구 없이도 이해하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유대교와 유대적 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유대교를 왜곡시켰고 또한 예수님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대교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와 다르다. 그래서 바리새파 유대교 또는 랍비 유대교라고 부른다. 바리새파적 율법주의와 랍비적 교육시스템이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유대교라 해도 율법주의적 그리고 랍비적 왜곡을 제거해 버린다면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유대교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유대적 유산을 물려받은 기독교는 교황 제도가 생긴 후 교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종교로 바뀌어져야 했다. 교황은 유대적 유산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대적 유산을 유럽의 이교도적 언어로 개사하고 이교도적 풍습으로 덧칠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면 유대교에 적대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기독교의 반유대적 습성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유럽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보여 준 반예수적 행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우리는 서구문화로 코팅된 반유대적인 기독교를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였다. 비판할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에 조금만 접근해 보면 유대인들을 제거한 기독교 신학은 오늘날 인문학으로 변질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서구 신학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 구원을 예수에게서 찾지 않고 힌두교의 베다나 불교의 미륵 사상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또한 존중하셨던 고대 유대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유익한 유대교 전통을 우리의 교회에 받아들이고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예수님께서 읽으셨던 성경을 우리도 그때 그 언어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랍비 유대교 안에서 아직 오염되지 않고 살아있는 유대인 전통을 발굴해 내서 그 전통의 이유를 탐색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마틴 루터의 말대로 성경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이 모든이베이트가 유대적목회연구소를 만들려 하는 이유다.    


 

모든이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Presbyterian Church of Korea: PCK) 평북노회에 속한 교회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에 속한 장로교회이며 장로교 전통을 존중하는 교회라는 말이다. 아울러 모든이교회는 리투르기아, 케뤼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로 표시되는 교회의 5대 기능을 나타내는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 또는 Universal Church)’를 지향한다.

 

리투르기아

 

이 말은 예배 또는 예전이란 의미를 갖는다. 모든이교회는 장로교식 예배모범을 따라 주일 예배를 드리며 또 필요한 경우 성찬식과 세례식으로 구성된 성례전을 갖는다. 그런데 모든이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만든 서구 교회력 보다 예수님도 지키셨던 성서적 절기에 주목한다. 서구 교회력은 로마의 양력에 맞춘 것이나 성서적 절기는 예수님의 환경이기도 했던 유대력이라는 음력에 맞춘 것이다. 그래서 성서의 절기들은 서구 교회력에 따르는 것보다 유대력에 맞추는 것이 더욱 더 사실적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서구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현현절 또는 수세일은 1월에 들어 있고 이어 사순절이 시작되는 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시며 일하셨던 팔레스틴 상황과 맞지 않는다. 어떻게 벼락치고 천둥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지독하게 추운 1월에 예수님을 포함한 수 많은 무리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만 듣고 요단강으로 모여 들어 집단적으로 세례를 그것도 침례를 받을 수 있는가? 집단적으로 감기 몸살 걸릴 일이 있는가? 요단강에 물이 넘쳐 흐르는 유월절 어간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던 무리 속에 예수님이 계셨고 그때 유월절의 선지자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요단강 길목에서 무리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받으라 하므로 많은 무리가 세례를 받았으며 그때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렇다면 사순절은 유월절 이후에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수세 후에 40일 금식기도를 하셨기 때문이다.

성서의 절기는 안식일, 토라적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리고 안식년과 희년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안식일을 우리가 주일로 지키고 있는 일요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 계명은 우리에게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계명이 아니다. 사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려면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샤밭(안식)하셨기 때문에 샤밭(안식일)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이지 안식일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이 진실로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안식일이라 하신 날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날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일주일에 하루 공동체 예배와 가정에서 행해지는 부모에 의한 자녀들을 위한 신앙 교육이며 아울러 개인적 휴식을 위해 생업과 관련한 일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란 사회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 토요일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일요일이 자연스러운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고 비난 받고 싶지 않다. 만약 자연스럽게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때를 안식일로 지킬 용의가 있다.

 

모든이교회는 예배란 명칭을 주일예배에만 붙이고 있다. 그 밖에는 모두 경건회라고 한다. 새벽경건회, 수요경건회, 심방경건회, 가정경건회… 당연히 임직축하예배나 박사학위취득감사예배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예배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경건회는 사정에 따라 참석할 수도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모든 멤버들이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석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을 마음 속에 새기기 위함이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은 토라적 절기다. 유월절과 초막절은 양력으로 8일이나 되므로 그 기간 안에 주일이 있다. 그 주일에 유월절 또는 초막절 예배를 드리면 된다. 자연스럽게 유월절 예배는 부활절 예배가 되고 초막절 예배는 추수감사절 예배가 된다. 부활절 예배 때 성례전을 하면 안성맞춤이다. 양력으로 이틀인 오순절은 보다 가까이 오는 주일에 오순절 예배를 드리면 된다. 이것을 맥추절 예배 또는 성령강림절 예배라고도 한다.

 

안식년과 희년을 우리 수준에서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은지 고민한다. 안식년과 희년은 유대력을 알아야 지킬 수 있다. 유대력 연도에서 7의 배수가 안식년이고 50의 배수가 희년이다. 모든이교회는 2000년 유월절에 창립이 되었는데 2009년 4월 현재 안식년을 두 번 보냈다. 2000년 9월부터 2001년 9월까지 유대력 5761년으로 안식년이었고 2007년 9월부터 2008년 9월까지 유대력 5768년으로 안식년이었다. 다음 안식년은 유대력 5775년이므로 2014년 9월에 올 것이다. 희년은 유대력 5800년이므로 2039년 9월에나 올 것이다. 안식년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사실 유대인들도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키시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70년 동안 바벨론 포수의 삶을 살게 한 것이 안식년을 70번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이교회는 다가 오는 안식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우리 수준에서 옳은지 고민하고 있다.

 

케뤼그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이게 제대로 되야 선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토라 즉 모세5경을 54등분해서 매주 1등분씩 다루는 ‘파라샤트 하 샤부아(이하 파라샤트라 함)’라는 전통이 있다. 금요일 밤에 갖는 에레브 샤밭 때 온 가족이 함께 파라샤트를 읽고 공부하고 토론 한다. 같은 파라샤트를 가지고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토라학교도 운영한다. 모든이교회도 이 전통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도 아니고 따라서 토라만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신약도 54등분해서 토라 파라샤트와 함께 읽는다. 느비임(전후기예언서)과 케투빔(지혜문학서)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토라 파라샤트와 함께 ‘하프타라’라는 것도 읽는다. 그러나 하프타라는 토라의 병행 구절이라 토라를 읽지 못했던 시절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케투빔은 아예 이런 것도 없다. 그래서 모든이교회는 나름대로 느비임과 케투빔을 각각 54등분해서 느비임은 유대력 홀수연도에 읽고 케투빔은 짝수 연도에 읽는다. 이렇게 하면 토라와 신약은 매년 읽을 수 있고 느비임과 케투빔은 격년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매주 읽어야 할 성경 구절이 정해 진다. 이것을 가정에서 실천하고 교회서도 실천하는 것이다. 모든이교회의 모든 설교나 공부는 그 주간의 파라샤트에 따라 진행이 될 것이다.

 

모든이교회는 한글개역성경이나 한글개역개정성경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둘 다 비슷한 번역서들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원전 성경이나 헬라어 원전 성경은 좋은 사전들이 많기 때문에 알렢벹 또는 알파벹만 익히면 원전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한글을 배웠다는 일본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기 위해서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글자라도 외우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모든이교회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원음 그대로 발음하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읽고 들으려는 우리의 노력일 뿐이다. 

 

디다케

 

이 말은 신앙 교육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교육은 쉐마의 말씀에서 볼수 있듯이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앙 교육을 부모에게 맡기셨다. 가정에서 신앙 교육이 불가능하면 결국 신앙 교육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부모가 신앙 교육을 실천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하겠는가? 그러나 한국적 상황에서 이것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 내로라 하는 목사, 장로, 집사들 가운데도 어릴 때 가정에서 신앙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가정 예배가 신앙 교육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의 90% 이상이 가정 예배 조차 없다. 그래서 모든이교회는 가정에서 신앙 교육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설득이 필요하고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열심히 이 일을 한다고 해도 다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오늘도 태어나고 있고 태어난 아이들은 쑥쑥 빠르게 자라난다. 가정에서 신앙 교육이 불가능하면 결국 신앙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모든이교회는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팔짱 끼고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수수방관하다가는 다다음 세대에도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은 불가능할 것이다.

 

디아코니아

 

상담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출6.9)”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으나 그들은 그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 동안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상처와 혹독한 현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상처가 있는 자신과 진실한 만남을 가지지 않는다면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심으로 교회 봉사를 한다고 해도 삶의 변화나 성숙한 삶을 살기 힘들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해 졌지만 정서적으로나 인간관계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오랜 시간 우리 내면에서 괴롭혀왔던 상처로 인하여 생긴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상담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이 상처를 발견해 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을 불안이나 두려움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방어했던 자신과 만나고 내면 깊숙이 숨어있었던 상처를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됨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변화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구조화된 상담과정을 통해 자신의 부모나 사회가 지워졌던 가치관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가면의 자신의 모습에서 참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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