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CENTURY STUDY

HOME | 주일학교

 

2023년 10월 1일

 

레위기 23장 39-44절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새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 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 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마태복음 21장 6-11절

[0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0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0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쑤코트 - 초막절

 

로쉬 하 샤나에서 15일이 지나면 쑤코트, 즉 초막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3장에서 봄에는 페씩, 즉 유월절을 지키고, 여름에는 샤브오트, 즉 오순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쑤코트, 즉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토라의 3대 절기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이지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를 영어로는 God's Appointed Time이란 말도 쓴답니다.

유월절에는 하나님께 곡물의 첫 이삭을 제사장에게 갖다 줍니다. 아울러 일년 된 숫양도 바칩니다. 오순절에는 떡 두 개를 요제로 바치고 아울러 일년 된 숫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화제로 드립니다. 그런데 초막절에는 아름다운 나무 실과,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무 가지, 시내 버들을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고 초막절 7일 동안 초막에 머무는 것이 전부 입니다. 하나님 앞에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보면 사람들이 위의 사진과 같은 아르바 미님, 즉 네 가지 식물을 준비하여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초막절을 지키셨지요. 그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겉옷과 함께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고 합니다. 이 나뭇가지가 바로 초막절의 네 가지 식물, 즉 아르바 미님이 되겠습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초막절에 무엇을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합니까?

2) 초막절에 초막에 들어가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어째서 초막절에는 하나님 앞에 동물의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습니까?

 

 

 

 

 

 

2023년 9월 10일

 

마태복음 5장 6-10절

[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로쉬 하 샤나

 

지금 이스라엘에 가보면 새해를 맞았다고 축제를 벌이는 등 요란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이 새해지? 아직 9월밖에 안됐는데... 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인 걸 어쩌겠어요? 바벨론 시대부터 지켜 온 전통이랍니다. 2500년이나 되었지요.

로쉬 하 샤나는 모세가 두 번째로 십계명판을 받고 호렙산을 내려왔던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가 내려왔던 때는 욤 키푸르인데 그보다 열흘 전 일몰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하라고 알려 줍니다. 그래서 아흐레 동안 자기가 죄를 지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야 욤 키푸르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히브리어로 새해를 '로쉬 하 샤나'라고 합니다. 일년의 '머리'란 뜻이지요. 그래서 스페인에서 살던 유대인들, 즉 스파르딤은 생선의 머리를 먹는 전통을 가졌답니다. 생선의 머리를 먹으면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독일에서 살던 유대인들, 즉 아쉬케나짐은 생선의 머리 대신 닭을 먹는다고 하지요. 로쉬 하 샤나에는 둥근 할라빵과 꿀에 찍은 사과와 석류를 먹습니다. 한 해가 둥글둥글 잘 돌아가라는 의미, 달콤한 한 해가 되라는 의미, 석류처럼 번성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름 후에 오는 초막절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초막을 만들어야 합니다. 초막은 대개 아빠와 아들이 만들지요. 물론 딸도 치장을 하고 그림을 붙이고... 등을 해야 합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로쉬 하 샤나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데 유대인들은 왜 지키나요?

2) 로쉬 하 샤나와 욤 키푸르의 관계에 대해 알아 봅시다.

3) 로쉬 하 샤나의 음식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2023년 9월 10일

시편 137편 1-3절

[0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0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0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마태복음 5장 5절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은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에레쯔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을 위한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에레쯔 이스라엘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군대에 의해 바벨론으로 잡혀 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군대가 그들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미움을 사면 원수들의 노리개가 되고 말지요.

다행히 바벨론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갈 날을 손 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 즉 에레쯔 이스라엘을 시온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시온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남쪽 지역을 의미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에레쯔 이스라엘 대신 쓰이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에레쯔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 했던 죄를 하나님께 회개 했습니다. 그리고 애통해 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그들의 달력에 나타내고 매년 이 일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즉, 10월인 탐무쯔 17일부터 11월인 아브 9일까지 3주간 애통의 기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11월인 아브 10일부터 12월인 엘룰을 지나 다시 1월인 티슈리 1일까지 7주간 위로의 기간을 갖는 겁니다. 그리고 11월인 엘룰의 25일부터 창조의 6일을 갖습니다. 그러면 26일은 창조의 2일이 되고 27일은 창조의 3일이 되고 티슈리 1일은 창조의 6일이 되지요.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놀랍게도 위로의 7주간을 창조의 여섯 번째 날로 끝내게 만들었지요. 애통과 위로의 결과는 새로운 창조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새롭게 하셔서 바벨론 포로의 생활을 면하고, 시온, 즉 에레쯔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지요. 그리고 결국 돌아가서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 온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온유란 가난하고 상처받은 심령을 소유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다시 받게 되었지요.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창조의 1일부터 7일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적어 봅시다.

2) 애통의 3주간과 위로의 7주간에 대해 정리해 봅시다.

3) 하나님의 위로는 새로운 창조로 끝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2023년 9월 3일

마태복음 5장 5절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땅을?

 

예수님은 여덟 가지 복들 가운데 세 번째 복으로 온유하면 땅을 기업으로 얻는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 없는 말로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가 차용한 단어로 보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온유'를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현대 히브리어 번역을 보면,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하다는 의미 보다, 가난하다고 상처 입다란 의미를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현실을 한번 봅시다. 가난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땅을 많이 차지 하나요? 아니면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이 땅을 많이 차지 하나요? 사실 둘 다 아니지요. 우리가 봐온 지주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로 부터 가나안 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야 풀리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 백 년 동안 가나안 땅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힘이 센 나라가 그들을 밖으로 내쫓았지요. 그래서 그들은 밖에서 가나안 땅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온유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히브리어로 말하면 가난하고 상처 입은 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따뜻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게 온유한 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다윗 시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에서 나일까지 넓은 땅을 얻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 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을 말씀 하셨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라고! 가난하고 상처 입은 자가 되라고! 그래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가나안 땅을 돌려 주신다고...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우리 말 온유는 어떤 뜻입니까?

2)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온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3) 땅은 누가 주는 겁니까?

 

 

 

 

 

 

2023년 8월 27일

마태복음 5장 4절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과 위로 3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들, 즉 팔복은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 두 번째 복인 애통하는 자를 위한 위로는 예배와 관련이 있어서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에 있어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물론 코로나가 만연했을 때는 좀 다르긴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몇 명이 와도 제한이 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독재자 시진핑이 불도저를 동원해서 교회 건물을 밀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어야 할 곳에 자기 사진을 붙였다고 하지요. 자기를 하나님 처럼 섬기라는 말이지요. 이런 곳에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아주 위험할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벨'로 표현하셨습니다. 가인의 동생 헤벨을 가리키는 말이 헬라어 번역 이후로 아벨이 되었답니다. 아벨, 아니 헤벨은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형 가인의 질투를 사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게 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헤벨을 위로하시겠지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 적도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집요하게 우상숭배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예루살렘 성전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예배가 아닌 회당 예배와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귀하게 보셨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성전도 짓게 하셨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종교인들이 성전을 이용해서 나쁜 짓들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까지 죽이는 무도한 자들이었지요. 이때 예수님은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셨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애통이 히브리어로 아벨이 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셨습니까?

3) 지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023년 8월 20일

마태복음 5장 4절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과 위로 2

 

우리는 지금 8월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가면 8월이라고도 하지만 또 '엘룰' 월을 맞았다고도 합니다. 그 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 달력에 따르면 지금 엘룰 월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에 따르면 엘룰 월의 '엘룰'이란 말은 아가 서 6장 3절 상반절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러 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는 "아니 르도디 브로디 리."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앞 글자만 따오면 알렢 라메드 바브 라메드가 되는데 이걸 붙여 읽으면 '엘룰'이 되지요.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표시하곤 합니다. 성경을 이용한 좋은 행동입니다.

결국 엘룰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는 물론 우리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포함이 된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게 하셨지요.

엘룰 월에는 모두 29일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29일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위로의 7주간이 포함 됩니다. 위로의 7주간을 설명하려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데 오늘은 생략하도록 하지요.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엘룰 월 25일부터 티슈리 월 1일까지 엿새를 창조의 6일이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 하시되 일곱 가지로 위로 하시는데 그 마지막이 창조입니다. 창조는 새로운 창조, 즉 회복을 의미하지요. 이에 대해서는 차차 하나씩 공부해 가리로 해요.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유대인들이 해석하는 '엘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2) 탐무즈 월 17일부터 아브 월 9일까지 '애통의 3주간'이라 하고 아브 월 10일부터 티슈리 월 1일까지 '위로의 7주간'이라 합니다. 기억해 둡시다.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마지막으로 위로 하시는 방법이 회복입니다. 회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2023년 8월 6일

마태복음 5장 3-4절

[0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함, 그리고 애통함에 대한 복들

 

공생애 첫 해, 오순절이 오자, 예수님은 가버나움 뒷산으로 제자들을 모우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이 오면 십계명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예수님도 당시에는 토라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에 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십계명 강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계명보다 먼저 팔복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팔복을 살펴 보면 십계명에 관련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팔복을 산상수훈의 서론으로 삼으신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기도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은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셨나… 하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오늘은 여덟 가지 복들 가운데서 첫 번째 복과 두 번째 복을 다루겠습니다. 팔복 중 첫 번째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말 번역을 다시 한번 더 읽어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저는 헬라어 성경을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을 꺼내 봤습니다. 그리고 팔복의 첫 번째 부분을 찾았습니다. "아슈레이 아니에이 하 루아흐, 키 라 헴 말르쿠트 하 샤마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되는 심령… 이것을 헬라어는 ‘프뉴마’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는 하 루아흐’로 번역합니다. 프뉴마는 별 뜻이 없는 번역어에 지나지 않지만 하 루아흐는 아주 중요한 토라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 루아흐는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는 부분을 말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입으로는 맛을 느끼지요. 코로는 냄새를 맡고요. 그리고 어떤 부분으로는 이성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처럼 우리 몸은 하나 하나 뭔가를 느끼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 루아흐는 하나님을 느끼고 알게 되는 부분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것을 만들어 우리 몸 안에 두셨지요. 이게 하나님과 교감하여 우리를 영생으로 가게 합니다. 영생…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지요. 히브리어로 ‘하야’ 헬라어로 ‘조에’ 라틴어로 ‘비타’ 영어로 ‘라이프’라 합니다.

하지만 하 루아흐가 막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신론자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가 바로 그런 자들이지요. 눈이 막혀 있으면 장님이라 하고 입이 막혀 있으면 벙어리라 하지요. 하 루아흐가 막혀 있으면 무신론자 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라 합니다. 이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지요. 이들은 성경을 공부해도 영생은 빼고 공부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스스로 삭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지요. 이들은 하 루아흐, 즉 심령은 허망하다는 말을 내뱉곤 합니다. 그래서 하 루아흐에는 헛것이란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1828년 남부 러시아에서 태어난 레프 톨스토이는 이후 82년을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대문호가 되었지요. 하지만 작품성에 있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금방 나오는 평가입니다. 톨스토이는 장편도 많이 썼지만 단편도 많이 썼습니다. 단편 중에 ‘두 노인’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러시아 어떤 마을에 에핌이란 사람과 엘리사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핌은 욕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사에 그리스도인 다운 처신을 하면서 맺고 끊는 게 분명 했기 때문에 그는 부자로 살았습니다. 이에 비해 엘리사는 보드카와 코담배를 끊지 못해 괴로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지런히 벌을 키워 꿀을 따서 나름대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사… 그 이름대로 그는 대머리였습니다. 불빛 밑에서는 엄청 밝은 빛을 내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하고 생각하는 바도 같아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나이가 60이 넘자 죽기 전에 예루살렘 순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순례는 기독교인의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 였습니다. 하지만 부자인 에핌에게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강권으로 에핌은 일을 잠깐 멈추기로 했습니다. 엘리사는 양봉 일을 옆집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100 루블의 돈을 마련해서 성지 순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에핌은 비상금을 챙겼을 겁니다. 그들은 자기 마을에서 우크라이나에 있는 오데사 항구까지 800킬로미터를 걷기로 했습니다. 오데사에 가면 흑해를 지나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알렉산드리아에 들렀다가 욥바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욥바에서는 60킬로미터만 걸으면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배는 사흘에 한 번 출항 했다고 합니다. 배삯은 왕복이 40루블이었습니다. 오늘날 루블화는 그리 값이 나가지 않지만 톨스토이 시절에는 요즘 달러화 처럼 값이 많이 나갔나 봅니다. 이 두 사람은 오데사를 향해 열심히 걸었습니다. 하지만 체구가 작고 몸이 약한 엘리사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넘치는 에핌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어떤 마을에 이르러 좀 쉬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에핌에게 농가에 들어가 물 좀 얻어 마시고 곧장 뒤 따라 갈테니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에핌은 오데사를 향하여 가고, 엘리사는 한 농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농가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한 가족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노모와 중년 부부, 그리고 어린 딸과 아들… 그들은 드러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우물을 찾아 물을 길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빵으로 수프를 만들어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엘리사가 사흘 동안 그들을 보살피자 그들은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의 땅이 저당 잡혀 있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장 잡혔던 땅을 찾아주고, 말과 수레와 소를 사주었습니다. 100루블을 헐었더니 13루블 하고 동전 몇 개가 남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에핌은 한참 가다가 그늘에서 쉬었는데 잠이 들었습니다. 잠에서 깬 에핌은 엘리사가 자기를 보지 못하고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오데사 항구에 도착해서 40루블짜리 왕복표를 끊었습니다. 그때 수도사 차림의 사내가 에핌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예루살렘 순례가 두 번째인데 배를 몰래 타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하면 공짜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에핌은 경건한 사람이라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 수도사는 에핌에게 1 루블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지갑을 잃어버렸다면서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핌은 열심히 예루살렘 순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엘리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엘리사는 대머리라 빛이 나므로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에핌은 역시 엘리사가 먼저 와 있었군… 했는데 다가가 보면 엘리사의 모습은 사라지곤 했습니다. 동작 한번 빠르군… 하면서 에핌은 엘리사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에핌은 욥바로 내려와 오데사 행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오데사에서 집까지 800킬로미터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엘리사와 헤어진 마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소녀가 나와서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가세요. 괜찮으시면 하루 주무셔도 돼요.” 에핌이 소녀의 말을 듣고 농가로 들어가자 모든 식구가 그를 반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의 도움으로 다시 살게 된 바로 그 농부네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에핌에게 엘리사의 도움을 받은 일을 말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에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엘리사… 나의 사랑스런 친구… 자네 몸은 예루살렘에 없었지만, 자네 영혼은 예루살렘에 있었네… 내가 다 봤지.”

이 이야기에서 에핌은 예루살렘에서 본 엘리사의 영혼을 말합니다. 그 빛나는 대머리… 저는 이게 바로 엘리사의 루아흐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사는 고향에 돌아가서도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있는 에핌을 생각했겠지요. 바로 그 루아흐가 에핌의 눈에 보였던 것 입니다. 엘리사는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루아흐와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의 루아흐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자 발동이 되었습니다. 뭐가 중한디… 결국 엘리사는 스스로 예루살렘 순례를 포기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루아흐가 이것을 결정하게 했다고 봅니다.

물론 에핌은 여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에 가서 성지를 둘러보고 감격했습니다. 예수님 무덤 교회, 예수님 부활 교회, 예수님 탄생 교회 등… 볼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요. 여기서도 우리는 루아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핌의 루아흐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을 받은 농부의 딸이 에핌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녁 식사를 하시고 하룻밤 묵어 가세요.” 우리는 이 말에서도 루아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에게 향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합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저들의 것임이요…가 이루어 졌습니다. 번역에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팔복 중 두 번째 복에 대해 말씀 드립니다. 한국어 번역은 이렇습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현대 히브리어 신약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슈레이 하아벨림, 키 헴 여누ㅋ하무.” 애통하는 자가 히브리어로는 ‘하 아벨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벨 동사는 마음 아프게 통곡한다는 뜻인데 아담의 둘째 아들 헤벨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헤벨을 흔히 아벨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헤벨이 헬라어 성경 즉 셉투아진타로 번역이 되면서 아벨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성경 뿐만 아니라 라틴어, 영어 성경 등이 셉투아진타의 아벨을 그대로 채택해 쓰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헤벨을 아벨로 보고 히브리어 아벨을 적용 시켜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누구입니까? 들판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었지요. 아벨이 명사로는 들판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 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말 입니다. 아마도 루아흐적인 예배였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아벨의 형인 가인도 아담의 아들인지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이 죽으면서 냈던 핏소리… 이것이 바로 애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에게 위로를 주신다고 합니다. 이미 이 땅에서 죽었는데 무슨 위로…

이미 말씀 드렸지만 하 루아흐의 세계는 우리의 생물학적인 삶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루아흐의 세계는 하늘 나라의 삶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벨은 비록 이 땅에서는 생물학적인 목숨이 다했지만,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에서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용해 다른 이야기를 창작해 볼 수도 있지요. 만약 엘리사가 농부의 가족을 살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맞아 죽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엘리사는 죽어가면서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었는데… 이 때문에 돈이 떨어져서 예루살렘 순례도 포기했는데… 왜 나같은 사람에게 강도를 보내 내 생명까지 빼앗게 하시는가…

이때 흘리는 눈물이 바로 애통의 눈물입니다. 가인에게 맞아 죽으면서 아벨이 흘렸던 눈물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위로는 히브리어로 ‘나ㅎ캄’ 동사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슬프게 생각하시고, 하나님께서 편안하게 하신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애통의 눈물을 흘리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 또는 죽어 갈 때, 그 현장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의 이야기를 정리해 봅시다.

2) 루아흐와 아벨은 어떤 뜻입니까?

3) 하늘 나라가 향한다 함과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2023년 7월 30일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생명을 위하여!

3)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다 하심은?

 

예수님은 여덟 가지 복들 가운데서 첫 번째 복을 받을 조건으로 '심령이 가난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5장 3절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한국어나 영어나 헬라어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거의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현대 히브리어 성경으로 이 말씀을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히브리어 성경의 이 말씀은 "아슈레이 아니에이 하 루아흐, 키 라 헴 말르쿠트 하 샤마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령이 루아흐의 번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루아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알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있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루아흐'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루아흐, 즉 심령에 대해 잘 알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난한 게 복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인 소유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간절해 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간절해 지면 하늘 나라, 즉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앞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의지하면 되는 것이지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서서 그들을 인도한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성경공부의 목적이지요.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면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 지고 하늘 나라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루아흐가 무엇인지 알아 봅시다.

2)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마음과 그 뜻을 알 수 있나요?

3) 심령이 가난한 것이 어째서 첫 번째 복이 될 수 있습니까?

 

 

 

 

 

 

2023년 7월 23일

마태복음 5장 3-12절

[0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생명을 위하여!

2) 복이 있는 자여...

 

오늘부터 8복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기로 해요. 8복은 여덟 가지 복이란 뜻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과 좀 달라요. 이걸 늘 생각하고 8복을 대해야 해요.

예수님은 유월절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장 유대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지요. 이후에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그 복음의 첫 번째가 바로 8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8복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8복은 마태복음 5장 3-12절에 기록된 것인데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8복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천천히 그리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복을 히브리어로는 '아슈레이'라 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라고 하지요. 라틴어로는 '베아티튜도,' 영어로는 '블레스'라 합니다. 이 모든 말들이 다 독톡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이라도 다 다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쓰는 '복'이란 말은 사실 중국에서 온 말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요. 그래서 복이란 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란 사실입니다. 물론 건강이나 총명이나 부유함이나 미모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마음을 드러내는 바로 이것이 복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드러내라고 하시는가... 앞으로 하나하나 알아가기로 해요.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기도 후에 갈릴리에 가셔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게 8복이라 했지요? 8복이 뭔지 본문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볼까요?

2)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어떤 게 있을까요?

3) 성경이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다를까요?

 

 

 

 

 

 

 

2023년 7월 16일

마태복음 5장 3-12절

[0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0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0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0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생명을 위하여!

1) 쉬모네 에스레

 

우리는 에레브 샤밭을 할 때 포도주를 마시면서 “레-카이-ㅁ”이라고 합니다. ‘레’는 ‘~를 위하여!”란 의미이고, ‘카이’는 ‘생명’이란 뜻이고 ‘ㅁ’은 복수 어미 입니다. 그러므로 ‘레카임’은 ‘많은 생명들을 위하여!’라는 의미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에레브 샤밭 때 포도주를 마시는 구호로 사용하고 있지요.

생명이란 뜻을 가진 ‘카이’는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 입니다. 카이는 히브리어의 여덟 번째 글자인 ‘헤트’와 열 번째 글자인 ‘요드’로, 즉 헤트 요드 두 글자로 된 아주 간단한 단어 입니다. 그런데 헤트의 숫자 값은 10이고, 요드의 숫자값은 8이어서  글자 값은 ‘18’이  됩니다. 우리는 복 삼 자라 해서 ‘3’이란 숫자를 좋아하고 중국인들은 돈이나 재물을 의미하는 ‘9’란 숫자를 좋아하지만 유대인들은 생명을 뜻하는 ’18'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재외 공관을 살펴 보면 18층에 세들어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대인들이 안식일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기도문을 ‘쉬모네 에스레’라고 합니다. 쉬모네 에스레란 히브리어로 18이란 뜻인데, 따라서 쉬모네 에스레 기도문은 18 가지 기도 제목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로만 쉬모네 에스레이고 실제 암송하는 기도 제목들은 모두 19가지 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내용을 12 번째 다음으로 추가해 넣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쉬모네 에스레의 13번째 기도문이 예수님을 저주하는 내용이라… 게다가 13은 서양 사람들이 아주 싫어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생명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쉬모네 에스레에다 생명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을 저주하는 내용을 추가해 놓은 랍비 최고 시대의 유대인들이 저지른 사건…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 져서 놀랄 수 밖에 없는 일 입니다.

메시야 예수님이 제외된 쉬모네 에스레… 지난 주간에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해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은 예수님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을 위한 십계명 강의라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십계명 공부를 하니까요.  오순절은 ‘나탄 토라’의 사건이 일어난 절기 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를 주신 날이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그걸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어보면 토라 더 좁게 이야기 하면 십계명에 대한 해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산상수훈의 시작인 마 5.3-12에 기록되어 있는 팔복에 대한 의문 입니다. 팔복을 자세히 읽어 보면 팔복에서 끝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9복이나 10복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요. 그래서 필자도 팔복을 10복으로 보고 십계명을 해석해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만족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팔복에다 십계명을 더해 보면 18가지 계명들이 됩니다. 이게 바로 쉬모네 에스레가 되더란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2의 언약인 팔복과 제1의 언약인 십계명을 합쳐서 쉬모네 에스레의 언약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우리 한번 이 용어도 사용해 보자구요.

다음 주일부터 팔복을 하나하나 다루어 보겠습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유대인들이 18이란 숫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생명이 좋은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3) 팔(8)복과 십(10)계명의 숫자들을 기억해 둡시다.

 

 

 

 

 

 

2023년 7월 9일

마태복음 5장 17-20절

[17] 내가 토라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토라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오순절 토라 공부를 통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

 

예수님은 40일 금식 기도 후에 갈릴리에 오셔서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열 둘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집중적으로 토라 공부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순절부터 십계명을 포함한 토라를 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토라가 ‘율법’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율법이란 번역은 매우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기 때문에 오해를 많이 불러 일으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란 말이 나오면 토라로 생각해야 합니다. 토라는 풍부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토라’란 히브리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토라는 호라 동사에서 나온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토라는 대개 모세5경을 일컬을 때가 많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지요. 히브리어로는 브레쉬트, 쉐모트, 바이크라, 브미드바르, 드바림 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토라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 그래서 토라를 완전케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토라를 엉터리로 읽고 엉터리로 적용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히브리어로 적힌 토라를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가진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 되어 있어서 헬라어로 알아봐야 합니다. 참 힘들지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란 헬라어 ‘플레로오’ 동사를 쓰는데 물동이에 물을 채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모세5경 즉 토라는 잘 못 해석이 되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제 멋대로 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토라는 항상 모자란 듯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토라를 모자라지 않게 하겠다고, 완전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토라의 아주 작은 부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5경에서 우리가 지울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5경, 즉 토라를 받아 들여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우리가 유대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라의 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빼놓지 말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토라를 정리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는데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은 별 게 아니고 오순절에 토라 공부를 하신 것이지요. 토라와 함께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복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 값 없이 주신 은혜지요. 그러나 그것은 값을 측량할 수 없어서 값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는 얼마 짜리 일까요? 알 수 없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도대체 얼마 짜리 일까요? 이것을 논함에 있어 토라는 아주 재미있는 척도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토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고, 따라서 불행히도 구원에서 멀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오순절에는 왜 토라 공부를 합니까?

2) 토라의 내용에 대해 알아 봅시다.

3) 예수님이 토라를 완전케 하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주신 토라는 작은 것도 소중합니다. 무엇이 작은 걸까요?

5) 예수님은 토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것에 순종하셨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토라를 우습게 봅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이 미워서? 계명에 얽매이기 싫은 내 마음대로 정신 때문에?

 

 

 

 

 

 

2023년 7월 2일

마태복음 16장 13-20절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너는 돌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났고 이후 제사장 훈련을 받다가 유대 광야로 나가서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문에 이집트의 카이로로 피신 하셨다가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셔서 사셨지요. 아마도 가까운 마을 찌포리에 있는 외가에 가셔서 머물면서 그 곳에 있는 토라학교에 다니셨을 겁니다. 그리고 집이 있는 나사렛에 오셔서는 목수인 요셉을 도와 목수 일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기를 좇아 예루살렘 성전에도 가셨고 그 곳에서 토론도 벌이셨습니다. 그러면서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사랑스런 젊은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셨을 때 스스로 세례 요한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지요. 세례터는 요단강 동편 구릉 지대의 냇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지요. 공생애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유대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다. 이후에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시면서 예수님은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그 열 두명의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하신 것이 산상수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더운 여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이 곳은 물이 많은 휴양지인데 지금은 '바니아스'라고 부릅니다.     

 

바니야스에서 여름 컨퍼런스를 여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컬으실 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다니엘 서에 그 말이 메시야란 의미로 쓰ㅇ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선생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 하데요, 또 다른 이는 엘리야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데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이란 제자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을 매우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시몬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지요. 예수님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십니다. 이것을 시몬이 알았으니, 이게 어찌 시몬의 능력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요. 이후 예수님은 시몬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헬라어입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드로라고 말씀하신 것 같지만 예수님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방언을 쓰셨을 겁니다. 갈릴리 방언으로 돌을 '게바'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이 '게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후 사도 바울도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갈라디아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드로라 하지 않고 게바라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돌을 에벤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말 때문에 시몬에게 돌,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최초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시몬에게 돌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중요한 약속을 돌에 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그러했지요. 예수님은 시몬의 신앙고백을 돌에 새긴 것으로 보시고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예수님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된 시몬에게 천국의 열쇠까지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했지요.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시몬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봅시다.

2) 예수님은 왜 시몬에게 돌, 즉 베드로라 하셨습니까?

3) 돌 위에 세우는 예수님의 교회란 무엇입니까?

4) 베드로가 가진 천국의 열쇠를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5) 시몬이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을 외워 봅시다.

 

 

 

 

 

 

 

 2023년 6월 25일

마가복음 1장 9-15절

[0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니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을 만나시고 유대 광야로 가셔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다른 어린이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서 다른 점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토라에 밝으시고 그래서 어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셨다는 게  특이하고 재미있지요. 예수님은 서른 살 즈음하여 당시 최고의 선지자로 존경을 받고 있는 세례 요한을 찾아가셔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로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선포와 함께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성경을 읽을 때 예언과 결실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세례 요한을 처음 보시긴 했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미리암)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친족 간으로 서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에 살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직후에 예루살렘에 살던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눅 1.26-45. 따라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신 게 되지요. 세례 요한이 유월절에 태어났으니 예수님은 6개월 후인 초막절에 태어나셨네요.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유대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광야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록지대를 말합니다. 산록지대지만 봄을 제외하면 풀도 없어서 메마른 광야라 할 수 있지요. 낮의 온도가 섭씨 50도가 넘기도 하고 밤의 온도는 영하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곳에 베드윈 족이 양떼를 치며 살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로 가셔서 40일 동안 계시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셨지만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유대 광야를 떠나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상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은 제1 언약, 즉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메시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목숨을 걸고 자세히 말한 바로 그 분이지요.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을  받아들여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의 결단도 우리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 예수님은 궁전으로 가시지도 않고 벧엘의 유적지로도 가시지 않고 유대 광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모세처럼 40일 동안 그 척박한 곳에 머무시면서… 하나님의 종들은 닮은 점들이 참 많지요. 그래서 이와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공생애가 무엇입니까?

2)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 살에 공생애를 시작했나요?

3) 예수님은 유대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요?

4) 유대 광야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5)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2023년 6월 18일

 

누가복음 2장 41-52절: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 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생후 12년 유월절에 일어난 일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요셉이 알고 고민할 때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 하면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기가 태어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했다고 합니다. 마 1.23,25. 그러나 눅 1.31에 따르면 엘리사벳이 잉태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눅 2.21에 따르면 할례할 팔 일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이것은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준 이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이고, 마리아에게 준 이름은 구원하다란 의미의 ‘예수’였습니다.

 

마 2.19,23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난 하셨다가 헤롯대왕이 죽은 후 갈릴리 나사렛에 가서 사셨다고 합니다. 그 곳은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눅 2.21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은 정결예식의 날이 차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시므온과 안나를 만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는데 자라시면서 강해지고 지혜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눅 2.41 이하에서 예수님은 열 두 살의 나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토론을 하셨다고 합니다. 눅 2.52는 이렇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요약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마 13.55에 따르면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였습니다. 막 6.3에 따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불리워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토라학교를 다니시면서도 일을 하셨는데 그게 바로 목수의 일이었고 그래서 목수라고 불리워 지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에게서 목수의 일을 배우셨던 겁니다. 예수님의 목수에 대한 자의식은 요 14.2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요 14.2-3에 따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거처를 예비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그리고 막 6.3에 따르면, 예수님께는 형제들만 아니라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거룩한 것이었지만 우리 인생의 탄생과 다를 게 없었다. 예수님도 육체적 성장 과정을 거치셨고 아울러 지적인 성장 과정도 거치셨다. 예수님은 토라의 규정을 그대로 따르셨고 또한 토라 공부를 많이 하셨다. 이로 인해 어른인 율법사들과 토론을 할 수 있으셨고 그들을 가르치실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 토라에 대해서만 잘 아시는 게 아니라 예의범절에 대해서도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이셨다. 또한 예수님은 건강하고 탄탄한 육체를 가지셨으니 운동을 하신 게 아닌가 싶다. 또한 그 육체로 목수 일을 하셔서 돈을 버셨고 그 돈으로 어머니와 가족을 부양하셨다. 예수님은 어느 면으로 보나 부족함이 없이 자라나셨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입니까?

2) 그 이름들이 지어진 때가 언제이며 뜻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서 율법 선생님들과 토론을 벌이신 때가 몇 살 언제 입니까?

4) 예수님의 육적, 지적, 인격적, 신앙적 성장에 대해 알아 봅시다.

5) 예수님은 토라 공부를 하시면서 일도 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2023년 6월 11일

 

마태복음 2장 1-18절:

 

[0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0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0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0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0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0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0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떄를 자세히 묻고

0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0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아기 예수님이 겪으신 일들

 

예수님은 헤롯 대왕이 죽기 전인 BC 4년 이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요. 예수님이 탄생 하셨을 때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전갈을 받고 예수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이후 8일 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셔서 할례를 받으셨지요. 눅 2.8-24. 목자들 뿐만 아니라 동방의 박사들도 예수님을 찾아 뵈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수를 했지요. 헤롯 대왕의 궁전에 들어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어봤던 겁니다. 이 때문에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이하 사내 아이들을 다 죽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전에 주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이집트로 갔습니다. 마 2.1-18. 천사같은 두 살 아래 사내 아기들이 예수님 대신 죽었습니다.

이집트는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떠나라고 하신 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가나안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땅을 잔인한 권력자인 헤롯 대왕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 대왕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 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곧 죽이셨습니다.

이집트에 가신 아기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오늘 날 카이로의 어떤 산 동네에서 숨어 사셨습니다. 돈이 없던 그들은 동방박사들이 준 황금 유향 몰약을 팔아서 생활비로 썼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산 동에서는 나일강 건너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잘 보이지요. 아마도 아브라함과 그의 식솔들, 그리고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 예루살렘 멸망 후에는 이집트로 내려간 요셉 지파 사람들과 예레미야 등이 이 산 동네서 살았을 겁니다. 건물은 짓지 못하고 동굴을 파서 그 안에 들어가 살았지요. 지금도 이 곳에 가보면 예수님의 탄생교회라는 게 있습니다. 이집트 기독교인 콥틱 교회 소속이지요.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곧장 이스라엘로 돌아와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사렛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또한 선지자들의 한결같은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성장지이지 탄생지가 아닙니다.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동방박사들은 누구인지 알아봅시다.

2) 왜 헤롯대왕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동방박사들이 말한 시기를 따져서 두 살 아래로 다 죽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를 이집트로 가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이집트로 가실 때까지 시간이 걸렸겠지요?

5) 베들레헴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곳은 유다 지파의 땅이고 보아스와 룻의 땅이었으며 아울러 다윗의 땅이었습니다.

 

 

 

 

 

 

 

2023년 6월 4일

 

누가복음 2장 1-7절:

 

[0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0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0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0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0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0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0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예수님이 태어나시다

 

역사를 나눌 때 BC와 AD로 나눈답니다.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입니다. 그리고 AD는 anno Domini의 약자랍니다. 따라서 BC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이란 뜻이고, AD는 '예수님의 연대'란 뜻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후를 가리키는 게 되겠습니다. 요즘에는 BC 대신 BCE, AD 대신 CE를 쓰지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Christ란 말을 쓰고 싶지 않아 하니까요. CE는 Common Era의 약자로 '일반적인 시대'란 뜻이고, BCE는 Before Common Era의 약자로 '일반적인 시대 이전'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장은 호적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다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요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은 BC 4년 즈음 하여 아마도 초막절에 베들레헴 언덕의 지하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에는 아름답게 지어진 탄생교회가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히브리어 미리암)라는 레위지파 여인을 통해 유다지파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야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메시야이시지만 우리와 똑 같은 몸과 생각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곧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이란 혈통공동체 보다는 신앙공동체를 강조하며 말하는 언어이기 때문이지요.

 

드라쉬 (경건한 신학자가 되거나 경건한 신학자를 돕는 자가 되라.)

1) 역사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나뉘어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 어째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 중요합니까?

3) 유대인은 신앙공동체란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갑시다.

 

 

 

BeitModenee

 

10357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255-8호

#255-8 SanduRo, IlsandongKu, Koyang, Kyonggi, 10357 S.Korea

Tel: 031-905-8291(ex), modenee@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