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48

Ps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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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6일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라..."  시편 119편 1-8절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References  마가복음 10장 46-52절: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복이라 하는 것은 동양에서는 주로 오복을 말합니다. 다섯 가지 복이란 말이지요. 다섯 가지 복이란, 첫째, 오래 사는 것입니다. ‘장수입니다. 둘째, 부유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입니다. ‘라고 하지요. 셋째,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강녕이라 합니다. 넷째, 덕을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덕을 베풀며 산다는 것은 귀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호덕이라고 하지요. 다섯째, 좋은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고종명이라 합니다. 고종명은 자기 집에서 편하게 죽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아울러 자손을 많이 낳고 죽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은 이와 다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는 복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오복과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9편의 1절은 말하기를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합니다. 율법을 따라 행하는 복이란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법률 같은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토라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다섯 가지 경전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인데, 이걸 토라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토라는 율법만 말하는 아닙니다.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와 신명기에 율법이 나오지만 많은 부분이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토라를 율법이라 번역하지 않고하나님의 말씀이라 번역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토라를 율법으로 번역한 것은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될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시편 1절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행위가 온전한 사람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목은여호와의 온전한 말씀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행위를 온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사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시내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지요. 항상 물을 빨아들이는 나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수로 빨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결과가 아니고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여덟 가지의 , 팔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복도 시편 1편이 말하고 있는 과정으로서의 복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의 복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고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었지요. 그리고 헬라어로는 있는 사람을마카로이라고 합니다. 마카로이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글자 그대로 보면 마카로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마카로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이란 오래 살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등을 의미하는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다섯 가지의 ...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까지 오해하기 만드는 바로 그것, ... , , 강녕, 유호덕, 고종명을 말해 주는 책은 서경입니다. 성경이 아니고 서경입니다. 중국 고전인 서경이라는 책의 홍범편에 오복에 대한 말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경보다 성경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을 누려야지 금방 갈증을 느끼게 되는 서경의 복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짜 있는 사람은 아니게 됩니다. 시편 119 1절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있는 사람이란, 서경에서 말하는 오복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체가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경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성경을 가까이 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비록 가난하다 해도,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 해도, 비록 자손이 없다 해도, 심지어 요절을 했다고 해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여호수아는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말을 음미해 보면 그는 확실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여호수아 23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할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모세가 전해 토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다 가지를 덧붙이지요. 바로 토라의 완성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라와 복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다 우리의 운명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완벽한 것을 근거로 해서 사는 사람은 있는 사람이 됩니다. 불완전한 오복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에 운명을 거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닐 없습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은 유명한 바디매오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란 맹인이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지요. 바디메오는 유대 땅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확실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서경이 말하는 오복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수도 있겠습니다. “유대땅에 사는 유대인이면 뭘하나? 그는 맹인인데다 거지인데...”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복 논리에 따르면 맹인이요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을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생각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었고 거지였습니다만, 그는 유대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야에 대한 소문을 들을 있었습니다. 오복을 누리고 살아도 메시야의 소문을 들을 없다면 그게 무슨 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유대 땅은 비록 척박했지만 메시야가 오시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복된 땅이었지요. 어느 , 바디매오는 메시야라 하는 우리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여리고였습니다. 유대 땅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는 메시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떤 땅에서도 일어날 없는 일이 여리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곳은 유대 땅이었습니다.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가 오늘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바디매오의 마음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메시야라면 그는 눈을 뜨게 하실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런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소경이 눈을 뜨게 된다... 이사야 선지서에 없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유대인이어서 어렸을 부터 그런 기록을 대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야는 눈을 뜨게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옳았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믿음을 가진 자체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소경으로 거지로 살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희망이 솟았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나면... 그리고 이것은 자체로 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디매오는 길가에 서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말을 번이나 반복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다고 하니 여러 말을 반복했을 겁니다. 정도로 그는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바디매오가 얼마나 목소리로 예수님을 불러댔는지 예수님은 인파 속에서도 바디매오의 소리를 들을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불러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시편 119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진심이 아니고 전심입니다. 전심이란 말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심장의 모든 것으로...’라고 번역할 있습니다. 영어로는 with the whole heart라고 있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부를 심장의 모든 것을 해서 불렀습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했던 것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벗어둔채 예수님께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맹인이었으니 누가 데려다 주었겠지요. 결국 바디매오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말씀에 바디매오의 심장은 뛰었습니다. 그가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을 만난 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가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결코눈을 떠라, —”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구원 이전에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구원을 이루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믿음은 자체로 복입니다. 구원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체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헬라어로 보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앞에휘파게 말이 붙어 있습니다. 제가 보는 우리 성경에는 말이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휘파게는가라!” 의미지요. “가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예수님은 가장 먼저가라!” 말씀을 하셨던 걸까요?

바디매오는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성경에는 바디매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맹인이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후 바디매오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한 같습니다. 그거 예수님 옆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맹인이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지로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눈을 뜨게 되었고 이제는 믿음의 증거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3절은 말하기를 있는 자들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의 도를 행한다고 했습니다. 불의란 주의 도가 아닌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닌 것은 불의입니다. 불의란 한계가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거는 사람은 실패하는 삶을 없습니다. 실패하는 삶을 없으니 자체로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시편 119 1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지키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주의 법도란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주신 토라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모두 갖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이스라엘인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법도는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에게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가 후에 아들에게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도는 당연히 믿음의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조상에게서 후손에게 전해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에머랄드 판에 당신이 직접 쓰신 십계명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을 지키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십계명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명기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죽기 전에 신명기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책을 쓰라고 하셨을까요? 후세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별명이 쉐마입니다. 이스라엘의 후손에게 전하는 말씀을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은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는 곧장 여호수아에게 전달되어 실행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세겜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모세가 신명기를 전했습니다.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세겜의 바위에도 적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실천하는 자는 그리심 산에서 선포된 복을 받고, 말씀을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는 에발 산에서 선포된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시시때때로 세겜에 와서 돌에 적힌 계명을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과 함께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자자손손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의 모판이었습니다. 준비의 땅이었다는 말이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는 아브라함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말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가뭄을 피해 가나안 땅을 일방적으로 버리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물이 많은 이집트에 살면서 그들은 복귀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노예가 되니 하나님의 말씀 대신 사람의 말을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주인이 되게 하셨고 땅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면적으로 보면, 이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최선을 다해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의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걸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장소였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독일 남부의 뮌헨에서 동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서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잘쯔부르크란 도시가 있습니다. 소금이 부족했던 유럽에 소금을 공급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잘쯔부르크입니다. 잘쯔는 독일어로 소금이란 뜻이지요. 현재 인구가 15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잘쯔부르크가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합니다. 음악적 전통 때문입니다. 잘쯔부르크에 가면 음악가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모여 든다고 합니다. 잘쯔부르크는 음악의 천재인 모짜르트의 고향이라고 합니다. , 고요한 거룩한 밤을 작곡한 요한 모르의 고향이고, 베를린 하모니의 영원한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카라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헤르베르트 카라얀은 조수미를 출세시켜 사람이어서 한국에서도 유명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앞으로도 잘쯔부르크에서 걸출한 음악가가 태어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곳이 바로 잘쯔부르크이기 때문입니다.

잘쯔부르크가 세계적인 음악가의 땅이라고 한다면, 가나안은 하나님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사람들의 땅이라 있습니다. 땅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태어났고 예수님도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모판이었지요. 예수님 이후에 가나안 땅의 역할을 감당하게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마디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입니다.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쯔부르크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운명을 걸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자기 운명을 거는 사람들은 교회가 가나안 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태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어렸을 부터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제대로 들어가 박히면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라날 밖에 없습니다. 일을 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지키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고 또한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아울러 역사적인 사명입니다. 우리가 명령에 성실하고 사명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5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한국교회는 아직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란 이념 때문에 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때문에 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념이나 ... 이것은 교회가 지향해야 바가 아닙니다. 이념이나 돈을 향해 가는 길은 교회가 결코 걸어가서는 안되는 길입니다. 길로 가다가는 우리가 수치를 당할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이런 뜻을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굳게 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고  또한 우리를 살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명료한데 이것을 무시하고 함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생명이 끊어질 있습니다.

인테넷은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거짓 뉴스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위 댓글부대 때문입니다. 댓글부대는 본래 컴퓨터를 아는 대학생들이 대입 학원을 위해서 알바를 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일류 대학 학생들이 푼의 돈을 받고 대입 학원을 선전해 주고 아울러 상대편 학원의 유명 강사를 깎아내리는 댓글을 다는 업무였다고 합니다. 이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악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국정원과 기무사도이 댓글부대를 운영했고 이것이 부정선거에 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지금도 댓글부대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재벌이 돈을 댄다고 합니다. 재벌은 입맛에 맞게 정부의 정책을 변경 시키려고 댓글부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에 심지어 목사까지 동원이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퍼뜨리는 데에 목사까지 동원이 되다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없습니다. 시편 119 6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할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끄럽게 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푼에 양심과 지식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그것이 애국하는 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해야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7절에 따르면, 주님의 의로운 판단을 배우면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의로움과 정직함은 같은 것입니다. 의로워야 정직할 있고, 정직해야 의로울 있습니다. 그리고 의와 정직으로 인해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패턴을 우리의 마음 속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을 확인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고, 길을 가는 동안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감사할 있게 하시는 ... 그래서 결국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 우리가 포기할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8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오니 나를 떠나지 마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당연히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교회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갈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청년이 무엇으로 행실을 깨끗하게 하겠는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음 주일에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시편 119편을 말씀드리고 넘어갈까 합니다.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장입니다. 모두 176절이나 됩니다. 이렇게 길어졌냐 하면, 히브리어 스물 자로, 여덟 줄의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6절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1 부터 8절까지는 히브리어의 스물 가운데 가장 글자인 알렢이 줄의 앞에 나옵니다. 알렢으로 여덟 줄의 시를 지은 것이지요.

1 부터 8절까지 줄의 앞에 나온 단어만 말해 볼까요? 아슈레이, 아슈레이, 아프, 아타, 아칼리, 아즈, 아오드카, 아트쿠케이카. 모두 아로 발음되는 알렢으로 시작합니다. 9 부터 16절까지는 히브리어의 번째 글자인 베트가 앞에 나옵니다. 베트로 여덟 줄의 시를 지은 것이지요. 바메, 브콜, 블리비, 바루카, 비슈파타이, 브데레크, 브피쿠데이카, 브후코테이카... 모두 브로 발음되는 베트로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스물 번째 글자인 타우에 이르기까지 각각 여덟 줄씩 모두 일백 칠십 여섯 줄의 시를 지은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119편입니다.

그럼 시편 기자는 무슨 의도로 이런 시를 지었던 것일까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히브리어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실 히브리어로 주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를 하나님의 언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히브리어에 매이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도 알고 보면 제약이 많은 언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하나님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스물 자로 176절에 달하는 거대한 서사시를 짓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럼 글자당 여덟 줄로만 시를 썼을까... 일곱이 거룩한 숫자인데 일곱 줄로 하지 않았을까... 일곱 줄로 쓰기가 거북해서 그랬을 겁니다. 일곱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메노라는 가지가 일곱 개인데 회당에 있는 메노라는 가지가 여섯이나 여덟입니다. 원본은 일곱이지만 사본이기 때문에 여섯이나 여덟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시도 일곱 줄로 쓰지 않고 여덟 줄로 썼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편 119 기자는 자기가 시가 성경이 줄은 몰랐을 겁니다. 감히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마가도 자기가 예수님 이야기가 마가복음이란 이름으로 성경이 줄은 몰랐을 겁니다. 요한도, 마태도, 누가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성경이 되게 하셨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편은 본래 모세5, 토라를 시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119편은 토라를 시로 나타낸 시편을 히브리어 문자 스물 개로 정리한 것입니다. 글자당 여덟 줄로 말이지요. 토라를 히브리어 문자로 정리한 지극히 문학적인 시가 바로 시편 119편입니다. 그래서 시를 히브리어로 외우면 히브리어 공부에 아주 도움이 됩니다. 물론 토라에 대해서도 공부가 되겠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시편 119 부터 외우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 어째서 시편 119편은 176절이어야 합니까?

2) 시편이 말하고자 하는 토라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토라를 율법으로 번역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013년 9월 8일

시편 119편 121-128절: [121]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2]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123]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24]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6]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References  사도행전 23장 16-30절: [16]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17]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샤나 토바

요즘 제 페이스북에 죄에 대한 고백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에서 오는 소식과 함께 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일몰부터 다음 주 금요일 일몰까지 고백과 용서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백과 용서로 새해를 맞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새해를 맞으면 처음 아흐레 동안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러 다닙니다. 성서력의 로쉬 하샤에 따른 전통입니다. 이와 관련한 좋은 경구가 있기에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영어로 된 경구입니다.

“In the blink of an eye, everything can change. So forgive often and love with all your heart. You may never know /when you may not have /that chance again. 눈 깜빡 할 사이에, 모든 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을 다해서 자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언제 그런 기회를 다시 가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비는 것도 때가 있고, 용서를 해 주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용서를 비는 것도 어렵게 되고 용서를 해 주는 것도 어렵게 됩니다. 일년에 한번 기간을 정해서 용서를 빌고 또한 용서를 해 주는 전통은 정말 고마운 전통입니다. 이런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일까요? 그래서 에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금요일 저녁까지, 여러분도,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해주는 전통에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뿌듯한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욤 키푸르 때, 여러분을 찾아 오실 겁니다. 이번 주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24시간이 욤 키푸르, 즉 속죄절입니다. 이 날은 검은 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상속자인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바로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쉬 하샤나 전통은 고백과 용서를 기반으로 즐거움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성서력의 새해, 즉 로쉬 하샤나를 즐기려고 합니다. 점심 식사를 로쉬 하샤나 음식으로 차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머릿고기 요리입니다.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한 해 동안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자는 의미에서, 우리는 생선 머리 요리를 먹을 겁니다. 유대인들을 생선 머리 고기도 먹지만 양 머리 고기도 먹는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우리도 소머리 고기를 먹으며 로쉬 하샤나를 지키면 어떨까 합니다.  이 한 해, 크게 번창하라는 의미에서 포도를 먹습니다. 유대인들은 석류나 대추야자를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포도가 친숙하므로 포도를 먹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새해가 되라는 의미에서 사과를 꿀에 찍어 먹습니다. 사과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사과를 꿀에 찍어 먹는 것은 이 한 해 동안 우리 생명이 달콤한 환경 속에서 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다시 돌아 온 새해를 축하하고 이 한 해를 둥글둥글 살아 보자는 의미에서 둥글게 만든 로쉬 하샤나 할라빵을 먹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샤나 토바.

히브리 알파벳 22, 한 자에 여덟 구절씩 총 176구절인 시편 119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9편은 독특한 시 입니다. 성경에서 절 수가 가장 많은 장이지요. 절 수가 자그마치 176절이나 됩니다. 이렇게 많은 구절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알파벹 스물 두 자로 시를 짓되, 한 자 당 여덟 구절로 시를 지었기 때문 입니다. 22 곱하기 8을 하면 176이 되지요. 그러니까 시편 119편은 여덟 구절이 한 연이 된 22연의 시인 것입니다.

이왕 말이 나온 거, 조금 번거로워도 하나 배우고 갑시다. 오늘 주보 제4면을 보실까요? 히브리어로 세 연의 시를 실어 놓았습니다. , 시편 119편에 들어 있는 스물 두 연의 시들 가운데서 세 연만 골라서 수록해 놓은 것입니다. 오른쪽에 절 수가 써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가므로 절 수가 오른쪽에 있는 것이지요.

처음 여덟 구절은 119 1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앞 부분이 모두 같은 글자로 되어 있지요? 이게 히브리어 알파벹 스물 두 자 가운데 첫번째 글자인 알렢입니다. 두번째 시는 시편 1191211부터 128절까지 인데요,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이 시는 열 여섯번째 연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벹의 열 여섯 번째 글자인 아인으로 시작하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히브리어 알페벹 아인이 각 구절의 첫글자로 여덟 번 나오고 있습니다. 세번째 시는 169절부터 176절까지 인데, 스물 두번째 연으로 시편 119편의 마지막 연입니다. 히브리어의 마지막 글자인 타브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타브 글자가 각 절의 첫 글자로 여덟 번 쓰였습니다. 176절로 시편 119편은 끝나게 되지요.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시편 119편을 읽으면 그저 긴 시편이라고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보면 참으로 애써서 만든 시편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스물 두 자를 사용한 워드 플레이, 즉 말 장난이지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무슨 이유로 이런 워드플레이를 했을까요?

시편 119편은 시편 제1편이나 시편 제19편처럼 토라 그 자체의 가치를 논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히브리어를 하나님의 언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히브리어로 새겨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기자는 히브리어의 알파벹 스물 두 자로 아름다운 토라의 시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어째서 이스라엘 백성은 히브리어를 하나님의 언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렇다면 119편은 토라를 어떻게 노래하고 있을까요?

아쉬레이: 복 있는 자는하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자

시편 119편 기자는 첫번째 글자인 알렢을 사용해서 아쉬레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시를 시작합니다. 아쉬레이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복 있는 자는이란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복 있는 자라고 번역을 하면 복이 소유물처럼 인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쉬레이를 복 있는 자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복이란이러 이러 한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복된 자라고 해야 좀 더 원 뜻에 가까울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도 아쉬레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우리 말 성경은 이것도 복 있는 자는뭐라 뭐라 했지요. 복을 소유처럼 번역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된 자라고 해야 옳을 겁니다. 복은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어로 보면 좀 더 확실합니다. 우리는 가끔 God Bless You라는 인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속 뜻은 하나님만 네게 복을 주실 수 있다입니다. Bless라는 단어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I Bless You You Bless Me 같은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할 뿐이지요. 축복이란 무슨 뜻입니까? 복을 빈다는 의미의 한자어 입니다. 복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말도 틀렸습니다. 복은 소유가 아니고 상태입니다.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하므로 다시 말씀 드립니다. 복이란 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복을 소유로 다룹니다. 내가 내 손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야 복으로 여긴다는 말이지요. 사실 우리가 말하는 오복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즉 내 소유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돈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그걸 복 있다고 하지요. 내가 건강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복 있다고 합니다. 내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복 있다고 합니다. 내가 많은 실력자들을 거느리고 있으면 그걸 복 있다고 합니다. 내 손에 소유하지 않으면 복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시편 119편도 그렇고, 산상수훈도 그렇고, 성경 전체가 복을 어떤 소유로 말하지 않습니다. 복은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복 있는 곳에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복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에 관련한 유명한 예화가 복음서에 들어 있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입니다.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가 버리는 쓰레기를 먹고 살았지요. 우리가 보기에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거지가 무슨 복 있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비록 거지로 살았지만 실제로는 복된 사람이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옥에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가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은 이 세상의 모습으로 복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비록 거지라 해도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 나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지식이나 권력을 누구 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으면 나는 복된 사람이 아닌 겁니다. 한 줌 흙에 지나지 않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소유적인 의미의 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이것을 달라고 기도 한다면, 이것이 바로 기복적인 기도입니다. 이런 기복적인 기도는 100%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복적인 기도를 할 바에야 차라리 기도를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사실 복된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이란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별로 남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서 세속인이라 한다면, 나는 고민을 좀 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914절은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 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나이다라고 합니다. 127절은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62절은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금이나 재물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 때, 재물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재물은 어디까지나 보너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붙여 주는 것이 바로 재물입니다. 재물은 이 땅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재물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더 소중합니다. 시편 119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특히 생명과 관련한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결코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즉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코로 불어 넣어 주시는 생기입니다. 그리고 그 생기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

시편 119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얼마나 단지 자기 입에 꿀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그것을 종일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원수보다 지혜로워 지고, 모든 스승보다 명철해 졌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경험이 많은 노인보다 명철해 졌다고 합니다. 105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고, 내 길에 빛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시적으로 나를 이끌어 주시고, 거시적으로 나를 통찰케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행복해 집니다. 사는 게 기뻐집니다. 그래서 복된 삶이 가능해 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자의 모습이요, 또한 복된 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느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든지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로 살았습니다. 오랜 묵상 끝에 바울은 주후 47년부터 선교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0년이 채 안되어 두번이나 장기 선교여행을 하면서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이스 지방을 훑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주후 56년 갑자기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주후 56년이면 헤롯대왕이 시작한 성전 증축 사업이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70년이나 걸린 거대한 사업이었지요. 유대인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전 세계로부터 모여든 많은 유대인들로 인해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솔로몬 성전 이후 처음 갖게 되는 성전다운 성전에 그들은 감동하고 또 감동했습니다.

주후 56년 오순절 즈음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이레 동안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선교 여행 중에 많은 유대인들과 싸웠거든요. 그들은 바울을 이단자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던 바울을 그의 대적 유대인들이 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서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로마군 경비대가 출동해서 바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연유를 추궁하게 되었지요. 유대인들은 바울이 사악한 도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군 경비대 대장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였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바울을 신문해 보니 바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있다면 유대인 사이의 율법 문제였습니다. 그건 로마 군인인 자신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로마 시민권 소지자로 자신의 문제를 로마 황제에게 직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에 가서 황제의 재판을 받도록 선처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 극렬분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런 자는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다시 산헤드린으로 끌어내서 과거 스데반처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 바울의 생질이 그들 가운데 있다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생질이란 누나의 아들을 말하지요. 바울에게 누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생질은 로마 군영 영내에 있던 바울을 찾아가서 만난 후 유대인들의 계략을 일러 주었습니다. 바울은 생질이 천부장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고 천부장은 생질의 말을 듣고 경비를 더 철저하게 해서 그를 압송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사히 로마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은 훗날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으로 비화됩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 갈등의 핵심에 로마군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지적한 대로 율법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인간인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다니 그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우상숭배자들이라고 하지요. 이것이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유대인들 만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을 우상숭배자라고 한다면 일리가 있다고 봐야 되는 게 아닌가이 점에 대해 재고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그래서 재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메시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로지 예수님만 메시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라도 성전을 회복하는 자가 메시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란 말을 듣고 싶어서 유대인들을 향해 성전을 지어 주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헤롯대왕이 성전을 지어준 것도 유대인의 메시야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예루살렘 문제에 개입하고 성전을 지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교황을 메시야로 모실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라고 하시면서도 성전을 회복하려 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메시야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지도자로 살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도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로 보시고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논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나셨으면서도 구원에 있어 유대인의 우선권이랄까 우월권이랄까 이런 걸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땅엣것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것보다 땅엣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미국의 시리아 공격도 그 땅엣것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 유대인들의 압력을 받은 오바마 행정부는 화학무기를 사용한 시리아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의이고 공의이며, 인도적인 전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방위군은 미국과 합동 작전을 벌일 준비를 끝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리아 정교회의 수장인 그레고리 3세는 오바마 행정부의 시리아 공격은 범죄 행위라고 규탄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9 7일을 기도와 금식의 날로 선포하고 미국의 시리아 공격이 멈춰 지도록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도무지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다 땅엣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복된 삶이 불가능한 겁니다.

시편 119 1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자신의 간증을 선포했던 예루살렘 성전그 성전은 그로부터 3년 후인 주후 6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해 예루살렘의 하누카는 참으로 요란했을 겁니다. 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큰 헤롯 성전을 만들어 놓고 유대인들은 감격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백배의 찬양을 올리고 또한 제사들 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10년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주후 70년 아브 월 9, 티토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헤롯 성전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서쪽 벽 하나만 남긴 채 폐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2천 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 성전은 재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곳에는 이슬람교의 사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헤롯 성전을 거부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성전 회복이 복된 삶과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소유하면 복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거기서 모세의 율법대로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유대인들을 보호하시고 이 세상의 지도자로 삼아 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시편 119 1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아침, 소설가 이외수 씨가 희망은 막연하게 기다리면 찾아와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서 가슴에 간직하는 것입니다라는 트윗을 날렸더군요. 휴머니스트로서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희망을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탁해진 공기 속에서 가슴이 시원해 질 수 없습니다. 가슴이 시원해 지려면 창문을 열고 밖에 있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셔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희망도 밖에서 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희망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희망을 만들어 가슴에 간직해 보십시오. 정말로 여러분이 희망스러워 질 수 있는가그렇지 않습니다. 희망은 하나님 편에 서야 비로소 갖게 되는 겁니다. 복된 사람이 되어야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는 성서력으로 5774년입니다. 내년 이맘때는 성서력 5775년입니다. 그런데 5775 7로 나누면 825로 딱 나누어 떨어 집니다. 성서력을 7로 나누어 떨어지면 안식년이고, 5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희년입니다. 내년이 바로 안식년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90년 동안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70년 동안 포로로 살았다는 거 아닙니까바로 그 안식년우리가 안식년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복된 삶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 복된 삶을 위해 우리는 한 해 준비를 좀 해야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금년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 편에 섬으로써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 봅시다. 복된 사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만끽해 봅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게 해 봅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2010년 8월 20일

시편 1199-16절: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13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16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사도행전 198-21절: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모든 재물을 즐거워하듯이

 

제가 자랄 때는 우리나라의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모든 순위를 뒤에서부터 따지면 더 빠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갈 즈음,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북한의 그것보다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국가 기밀 사항이었습니다.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산다고 하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절이므로 교회서 사탕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동네 아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들었습니다. 환등기를 돌린다고 하면 옆 동네 아이들까지 몰려 왔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가운데 현실도피적인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믿고 천당 가서 거기서 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잘 살기 글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천당에 들어가기 위한 티켙처럼 생각했습니다. 이 즈음에 하와이에서 선교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가서 예수 믿고 천당 가십시요라고 하면, “우리가 사는 이곳 하와이가 천당인데, 어디 또 좋은 데가 있다고 가라고 하느냐그런 이유에서 예수를 믿으라 한다면 우리는 안 믿겠다고 하더랍니다. 저는 그때 하와이 사람들이 참 교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와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하와이 사람들은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었지만 문란한 성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때 선교사들이 이 문제를 지적했다면 복음 전파에 성공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조차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 행 티켙을 얻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시아나 아프리카 빈국에서는 예수 믿고 천당!이라 해도 전도가 된다고 합니다. 환경이 너무 괴로우니까요.

지금 우리는 북한보다 40배나 더 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국방비는 우리가 북한보다 열 다섯 배나 더 많이 지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근면한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는 대개 기독교인들이 우파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정치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표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지난 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은평 을구의 이재오 후보가 야당 후보를 엄청난 표차로 누르고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 뒤 담화를 들어보니 은평구의 기독교인들이 그를 엄청나게 지지했더군요. 은평구의 목사님들을 적절하게 동원한 결과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보 진영에 속한 한상렬 목사님은 북한에 가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찬양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존경하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라면 그냥 그곳에 남아 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실 것이지 왜 판문점으로 돌아오시다 체포가 되시는지그 분이 체포될 때에 수 많은 기독교인들은 통일대교에 몰려 가서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부르짖으며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북주의자요 주체사상 신봉자인 한상렬을 처단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먹고 살만한 나라에서는 기독교가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독교 세계에서 클래식이 된 하나님의 모략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 달라스 윌라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천국행 티켙으로, 또는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참 유감이다. 우리 주님의 복음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33년 동안 사셨다. 우리 주님은 저 세상의 사도가 아니었다. 정치의 사도도 아니었다.”

인생은 가치 있고 아름답다

개그맨들이 하는 말 중에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니까 춤추고 놀자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의 인생이 별 볼 일이 없습니까? 하긴 8남매, 9남매 중에 절반은 병으로 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열 살도 넘기지 못하고 이런 저런 병으로 죽어 간 아이들의 인생은 참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열 살을 넘기면 이제는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서 죽습니다. 이것도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거에 비해 아주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여든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있는 정열을 다해서 키워 낸 우리 아이들과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회사와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그 찬란한 열매를 보면서도 인생 뭐 있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은 오히려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셨고 그런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가꾸어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인생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하면서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은 소명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이 소명의 시간이란 걸 제대로 알았던 분입니다. 그가 환갑이 넘어 순교를 당할 때까지 그는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을 귀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 많은 전도의 책들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바울 같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의 인생입니까? 이제 다시는 인생 뭐 있어 하면서 몸을 흔들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루하루를 알차게 만들어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죽어서 천국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성숙한 민주사회는 덤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녔던 능력이 바로 이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와 달랐던 점은 그는 하나님 말씀에 전폭적으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르는 능력으로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에베소에다 기독교 최초의 신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두란노 서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의 강의를 듣고 수 많은 사람들이 전도자로 헌신했습니다. 그들 역시 바울과 같은 놀라운 체험을 했고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사용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 아픈 자들에게 대니까 병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능력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을 하면 그런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그것을 약속하셨고 또한 능력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토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토라에 대한 설명이 시편 1, 19, 그리고 119편에 있습니다. 오늘은 시편 119편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시편 119

시편 119편은 모두 176절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장 긴 장입니다. 하지만 작자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 박식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스물 두 개입니다. 신이란 글자와 쉰이란 글자를 다르게 보고 스물 세 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알파벹은 스물 세 개라 해도 틀리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편 119편은 신과 쉰을 같은 글자로 봅니다. 결국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스물 두 개로 봅니다. 그리고 이 스물 두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를 만들었니다. 하나의 글자로 여덟 개의 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22 곱하기 8, 176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을 읽을 때는 8절씩 읽습니다. 그러면 토라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주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을 쓴 달라스 윌라드 목사님은 주님의 복음은 우리의 일상을 이끌어 준다고 말했습니다. 일상을 이끌어 주는 주님의 말씀바로 이것이 히브리어로 토라 라고 합니다. 토라는 물론 모세5경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더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토라를 The Way of Living이라고 합니다. 살아가는 방법이란 말입니다. 토라를 자꾸 율법이라 하고 우리말 성경에도 율법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생각할수록 참으로 답답한 번역입니다. 토라는 율법을 포함하고 있지만 율법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 어찌 율법입니까? 요셉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을 용서해 준 것이 어찌 율법입니까?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죽은 것이 어찌 율법입니까?

토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유대인들이 이 토라를 엄청나게 왜곡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것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구체화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왜곡시켰던 것 보다 더 심하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라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닙니다. 토라를 왜곡시킨 유대인들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교회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마치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억울한 마음이 없는 바 아니지만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니 그저 마음만 답답할 뿐입니다. 교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교회를 다 아는 양, 나는 교회에는 안 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연민의 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택의 자유인 것을그리고 복음을 현실도피로, 또 정치도구로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이런 점에서 시편 119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라가 무엇인지 분명해지면 복음도 자연스럽게 분명해 집니다. 토라와 복음이 분명해 지면 이제 우리는 주저할 게 없습니다. 무서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재물 같은 토라

시편 119 14절은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재물을 즐거워함과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한다는 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재물을 즐거워하는 이유는 재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입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또한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로 우리의 품위를 유지할 수도 있고 또 좋아하는 용역이나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재물로 확실하게 문제를 해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재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모우라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좋은 일이고 즐거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재물을 즐거워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도 즐거워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기가 어디 그리 쉽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 눈에 보이지 않으며 또 확실한 방향이 있어서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재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 없는 재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용하면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가끔 정식 직원에 돼서 첫월급을 받아 내복을 사 들고 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참 당당해 보입니다. 비로소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축복을 해줍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첫월급이라고 봉투째 들고 오기도 합니다. 첫월급을 몽땅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만류를 해보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런 젊은이들 앞에서는 제가 좀 부끄러워 집니다. 저는 첫월급을 받고도 쓸 일이 많아 십일조만 바쳤거든요. 그런데 첫월급을 몽땅 헌금한 사람들은 평생 그 사실을 즐겁게 말하며 살아갑니다. 이건 참 중요한 자세 같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즐거워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쉽지를 않지요. 그러나 첫월급을 하나님께 바치면 이게 쉬워질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재물을 즐거워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재물만큼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재물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재물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재물이 있어야 늙어서도 외롭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노후대책을 서두르지요. 어떤 보험회사에서는 30대부터 노후대책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어떤 보험회사는 아기 때부터 노후대책을 하라고 합니다. 보험회사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노후대책을 하기 위해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아주 확실한 노후대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가서 뵙기를 원하는 어른들은 돈 많은 어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런 어른들입니다. 그런 어른들을 찾아 가야 제대로 된 말씀을 듣고 만족해 합니다. 이 젊은이들이 그냥 가겠습니까? 맛있는 음식과 하얀 봉투에 넣은 용돈을 들고 가겠지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신앙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힘을 주십니다. 이 신비한 힘이 젊은이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어른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젊은이들의 미래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던 신앙의 어른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그 가운데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어른도 계셨습니다. 이 어른께서는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하시는 말씀이 주옥 같아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그 집은 화기가 넘쳤고, 그 어른은 이 때문에 항상 즐거워하셨습니다. 그 어른은 특별히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셨고 결국 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큰 일을 해내고 가셨습니다. 씨알의 소리란 잡지를 내시던 함석헌 할아버지 입니다. 저의 외할머니께서는 정말 무학이셨습니다. 그러나 평생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아 둔 재산이 없었지만 자녀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평화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어른을 찾아 뵐 때마다 성경을 읽고 계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이 어른께서는 자녀들이 찾아오면 항상 성경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모든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고 또 자랑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중앙대학교의 원로교수로 박승이란 분이 계십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분인데 강직한 경제학자이며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이 분께서는 최근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독교 선진국가에서는 아이들에게 서로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공동체 교육을 시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저만 잘 살 수 있는 개별적인 교육을 시키고 있다이렇게 개별적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까 그게 걱정스럽다

요즘 많은 한국인들이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한국인들이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몇 일 전에도 미국 일리노이에서 한국인들끼리 서로 총을 쏘고 싸웠다고 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한국인들끼리 총질하며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어글리 코리언이 누구냐 하면 대개 유학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변호사나 의사나 회계사가 돼서 돈을 많이 벌려다 이게 안되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어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을 즐거워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동영상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이제 말만으로는 교육이 안됩니다. 부모가 행동을 보여 줌으로써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경건한 삶 밖에 다른 삶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질문

1) 히브리어 알파벹 23자를 써봅시다.

2) 히브리어 알파벹이 22자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시편 119편을 8절씩 나누어 한 연을 만들고 그 연의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 봅시다.

4) 시편 119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5) 시편 119편과 주제가 같은 것들이 시편 안에 얼마나 있는지 알아 봅시다.

6) 시편 편집자가 이런 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7) 유대인들에게 있어 특히 바벨론 포로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히브리어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이번 주 시편 파라샤트는 시편 119편입니다. 이 시는 모두 176절로 되어 있어 성경에서는 가장 긴 장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문자는 모두 23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씬(f)과 쉰(v)이란 글자를 하나로 보아 22개라고도 합니다. 글자가 같고 점만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시편 119편 기자는 씬과 쉰을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119 161-168절을 보세요. 161, 162, 166은 씬으로, 나머지는 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글자 하나에 8절의 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이 22(문자) X 8()로써 176절이 된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22연으로 된 워드 플레이(word play)의 재미있는 시가 됩니다. 이것을 우리 말이나 영어로 읽으면 토라를 묵상하고 그대로 살라는 그런 말씀이구나정도로 이해가 되지만 히브리어로 읽으면 이 시를 쓴 이의 언어적 신앙적 재치가 대단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자와 단어와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원전으로 읽어야 합니다.

 

1.  8절씩 읽어 가야 하는 시편 119

 

시편 119편은 8절씩 끊어 읽으며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8의 배수가 마지막 절이 됩니다. 여기에 1을 더한 숫자가 당연히 시작 절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에서 22개의 주제를 뽑아 낼 수도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전반적인 주제는 토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라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으니 토라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1-8절은 행위가 완전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토라를 삶의 지표로 삼으면 반드시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산다고 합니다. 9-16절에서는 어려서부터 토라를 따라 사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토라에 따라서 사는 것은 돈을 버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라고 합니다. 토라에 따라 사는 것은 수도자의 삶이 아니라 인생을 즐기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17-24절은 토라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즐거움이요 모든 자들을 이길 수 있는 지혜라고 합니다. 25-32절은 우울해 질 때 토라는 힘을 주어 다시 서게 한다고 합니다. 33-40절은 토라는 탐욕으로 향하는 마음을 돌이켜 허탄한 것 대신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한다고 합니다.

 

2.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 119

 

41-48절은 훼방을 받는 자가 있다면 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 훼방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토라야 말로 만병통치의 약이 아니겠습니까? 49-56절은 토라를 통해 소망이 있으며 토라는 결국 나의 재산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재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57-64절은 악인이 비록 나의 몸에 줄을 칭칭 감았어도 토라 때문에 승리를 확신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과 그 분의 명령인 토라를 신뢰하는 것은 복입니다. 65-72절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으나 이후에는 토라에 따라 산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결국 고난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지요

 

3.  전진하려는 자들의 진취적인 기상으로서의 토라

 

73-80절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토라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승리를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행복한 승리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81-88절은 구원만 바라고 있지 말고 토라에 따라 행동하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89-96절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한계가 있지만 토라는 너무 넓다고 합니다. 97-104절은 토라는 모든 스승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준다고 합니다. 토라는 꿀처럼 달고 또 나를 명철하게 하여 악을 미워하게 합니다. 105-112절은 토라는 내 삶에 랜턴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질문과 대답

 

1) 시편 119편은 왜 176절로 되어 있습니까?

2)  시편 119편의 22개 주제를 뽑아 봅시다.

3)  토라는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까? 무엇이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줍니까?

4)  토라는 어째서 돈 버는 것만큼 즐거운 것입니까? 토라가 재산이 될 수 있겠습니까?

5)  권력자들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토라로써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예를 생각해 봅시다.

6)  우리가 공격을 받을 때 우울해 지지 말고, 또한 구원만 바라고 있지 말고 토라 대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7)  토라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토라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나 모든 스승보다 낫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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