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7

Jr. 46-52

Home  Torah  Kethuvim  NewTestament 

Text & Listening

 

2021년 12월 12일

 

예레미야 51장 50-64절: [50]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51] 외국인이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느니라 [52]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부상자들이 그 땅에서 한숨을 지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3] 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높은 곳에 있는 피난처를 요새로 삼더라도 멸망시킬 자가 내게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4] 바벨론으로 부터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도다 갈대아 사람의 땅에 큰 파멸의 소리가 들리도다 [55]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사 큰 소리를 끊으심이로다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 [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 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 [59] 유다의 시드기야 왕 제 사 년에 마세아의 손자 네리아의 아들 스라야가 그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갈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씀을 명령하니 스라야는 병참감이더라 [60]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61]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 [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

마태복음 9장 27-31절: [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9-8  바벨론에 대하여

  

오늘로 예레미야의 신탁을 끝냅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신탁은 46장에서 시작하여 51장 58절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1.64의 마지막, 즉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가 예레미야 서가 끝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스라야에게 준 계시의 말씀이 끝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52장이 붙어있고 이 장은 51.59-64의 내용과 관련이 있어서 추가문이 붙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대목의 칠십인역은 순서가 다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스라야에게 주었던 신탁의 책에 대한 이야기는 책을 강물에 빠뜨리라는 이상한 당부로 끝납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의 비밀 당부의 예화에서 그 의미를 찾아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고 또한 신탁은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으며 선지자의 예언 활동이 세속의 권력에게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함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좌우간 입이 무거워야 합니다.

렘 51.50-53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증오하시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칼을 피한 자들에게 먼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멀리 잡혀 갈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겁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제멋대로 성전에 들어갈 겁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니 함부로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한 곳까지 짓밟을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얼굴에다 책망과 수치의 모욕을 뒤덮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우상들을 벌하고 그 중에 부상을 입은 자들이 한숨을 지을 겁니다. 그리고 바벨론 본진을 파괴하실 겁니다.

바벨론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고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큰 파멸의 소리가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시고 그 큰소리를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하나님의 보복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소위 용사들이 사로 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여졌습니다. 하나님이 보복의 하나님이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라.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바벨론의 중추가 마비되었고 곧 죽을 겁니다. 이제 바벨론 성벽은 무너집니다.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타고 그것을 막으려는 백성의 노력은 헛짓이 될 겁니다. 그것을 안타까워 하는 다른 민족들의 수고도 불에 타서 쇠잔해 지고 말 것입니다.   

 

스라야가 책에 돌을 매어 유프라테스 강 속에 던지며…

  

예레미야 선지자의 시대에 스라야(שְׂרָיָ֣ה Seraiah)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세아의 손자였고 네리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충성스러운 비서였던 바룩도 네리야의 아들이었으니 바룩과 스라야는 형제였습니다. 바룩이 형이었을 겁니다. 렘 32.12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매매증서를 바룩에게 부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룩이 관공서의 보증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스라야도 이와 비슷한 일을 맡았을 겁니다. 둘 다 율법을 공부하고 서기관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서 문서 관리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위인인 예레미야 선지자를 잘 도왔던 것으로 보아 이들 역시 레위인으로 예레미야의 친척이거나 레위 지파에 속하는 명문가 출신으로 추정합니다.  

시드기야 왕 4년에 스라야가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갔는데 이때는 주전 594년으로 느부갓네살 2세 치하였습니다. 렘 27.3에 언급된 반란 모의를 설명하기 위해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직접 찾아간 것이지요. 이때 스라야는 시드기야 왕을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시드기야의 ‘싸르 므눜하’였습니다. 휴식 담당관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병참감으로 번역하는데, 아무튼 시드기야가 신뢰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스라야가 왕을 모시고 떠날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아마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였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에 이르러서 두루마리에 적은 모든 것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즉 바벨론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이상한 주문을 합니다.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하라!”

예레미야의 신탁은 이것으로 끝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스라야에게 말하라고 한 ‘나의 재난’은 렘 51.50-53에 간단한 싯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가 하나님을 욕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처참히 무너뜨리실 겁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계시를 예레미야에게 주셨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스라야에게 주었고 스라야는 그것을 바벨론 땅에 가서 읽었습니다. 하지만 스라야는 그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 속에 던졌습니다. 예레미야와 스라야만 아는 계시는 20년 후 성전이 파괴되고 이후 48년만에 바벨론이 망하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비밀을 지키면서…

   

유대인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파라샤트라 하는 주간 성경읽기 이고, 다른 하나는 메오딤이라 하는 성경의 절기 입니다. 주간 성경읽기 라는 씨줄과, 성경의 절기 라는 날줄을 사용해서,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성경을 만들어 낸 사람들, 즉 유대인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요. 극동에서 태어나서 피선교적 위치에서 살았던 우리는 이런 특권을 줘도 누리지 못합니다. 성경에 대해 늘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입장 때문이지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어떤 대통령 후보가 ‘시뇨리지’라는 말을 알아 듣고 제대로 대답을 했다고 해서 화제라고 합니다. 시뇨리지는 중세 때 유럽에서 나온 말로, 화폐를 발행하는 사람이 그 권력 때문에 얻는 수익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력이 없기 때문에 시뇨리지라는 말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한때 이후락 이란 사람이 떡을 만지는 사람은 그 손에 떡고물이 묻게 되어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지요. 하기야 떡을 만지는 사람 손에 떡고물이 묻는 걸 어찌 하겠습니까? 억울하면 자기도 떡을 만지면 되겠지요. 그러면 손에 떡고물이 묻을 테니까요.

저는 시뇨리지나 떡고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있습니다. 이 관심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세상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관심은 커지고 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믿음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파라샤트와, 메오딤을 정리하려고 섬세하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처럼 이에 대한 필요를 처절하게 느끼는 분들이 적어서 유감입니다.    

메오딤에 대해 한 말씀만 더 드리면… 오늘은 우리 달력으로 12월 12일 입니다.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날이지요. 고작해야 12.12사태가 일어난 날입니다. 그러네 메오딤으로 생각하면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력으로 테벹 월 8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몰 부터 테벹 월 10일이 되네요. 테벹 월 10일은 ‘아싸라 베 테벹’이란 절기입니다. ‘테벹의 금식일’이란 절기지요. 주전 588년 바로 이 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는 군대를 끌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포위는 주전 586년 티샤 브 아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큰 뱀이 그 길다란 몸으로 양 한 마리를 휘감아 싸고 질식 시키는 그런 그림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루살렘은 서서히 무너져 갔던 것입니다. 이게 겨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싸라 베 테벹을 생각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메오딤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을 매우 슬퍼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외국인들이 거룩한 성전에 들어간 것에 대해 “수치와 모욕이 우리 얼굴을 덮었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부상자들이 그 땅에서 한 숨을 지으리라.” 외국인들이 왜 거룩한 성전에 들어갔겠습니까? 설마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들어갔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 둔 모든 것을 헐어버리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들의 우상들을 세웠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본래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과 겨루겠다고 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높은 곳에 있는 피난처를 요새로 삼더라도 멸망시킬 자가 내게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자가 바벨론에 와서 바벨론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무적의 바벨론 군대가 사로 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일 겁니다. 그리고 바벨론을 다스리는 고관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멸망에 대한 계시를 주신 것은, 시드기야 왕 제 4년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전 594년 이전이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8년 전이 되겠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것을 알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도 결국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을 두려워 하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가엽게 생각했고, 아울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바벨론 사람들이 가소로웠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 장중에 있는 것인데, 그걸 인정하지 못하니까, 나뭇잎이 떨어져도 두려워 하고, 그래서 낙엽따라 비굴해 지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쪽 사람들은 그 반대로 제멋대로 자만하고 오만해 집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학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벨론의 모든 것이 60년 안에 볼장을 다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 속에서 긍휼함이 솟아났습니다. 신탁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시드기야 제 4년, 그러니까 주전 594년, 느브갓네살 2세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왕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느브갓네살 2세는 시드기야 왕이 주변 나라들과 함께 바벨론을 칠 궁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왕이 부르는데 시드기야 왕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행차를 했습니다. 왕이 행차하면 수 많은 신하들이 동행을 하지요. 그 동행인들 가운데 스라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비서로 예레미야의 신탁을 기록하는 일을 하던 바룩이란 사람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룩도 마세아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이요, 스라야도 마세아의 손자요 네리야의 아들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레위인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친척이요 측근이었지요.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라야는 시드기야 왕의 신망이 투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싸르 무눅하’라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시종장 또는 병참감으로 되어 있는데 시드기야 왕의 식량을 맡은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으로 갈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두루마리 책 하나를 스라야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이르면 그의 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두루마리 책을 펼쳐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대해 멸망을 선포 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정한 스라야의 선포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주께서 이곳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라 하셨나이다.” 물론 이 선포는 방 안에서 스라야 혼자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듣는 사람이 있으면 안되었습니다.

또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두루마리 책을 다 읽은 후에 그 책에다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참 유난스럽기도 하지요. 스라야가 머무는 곳은 바벨론 성이었고, 그 성은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강 속에 두루마리 책을 던지면서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물론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와 스라야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이 두루마리 책을 찾으려고 강바닥을 뒤지는 수고를 했다고 합니다. 물론 헛된 수고였지요.

그러고 보니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비밀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발설하지 말라고 그 입에다 자물쇠를 채우는 일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런 예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반포하신 후에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지요. 그때마다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통해 많은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소녀를 살리신 이적을 일으키신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인자, 즉 휘오스 안트로푸스와 같은 의미입니다. 메시야를 일컫는 별칭이란 말이지요. 두 맹인은 이적을 일으키시는 메시야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싶었지요. 그리고 정상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 들어가시자 두 맹인도 그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눈이 안보이는 맹인들이 그 집 안으로 들어오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고 인도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집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두 맹인은 회중으로 부터 분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분리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 안에서 예수님은 맹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피스튜에테 호티 뒤나마이 투토 포이에사이?” 내가 활력을 만들리라고 너희는 믿느냐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맹인들은 “나이 퀴리에…”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여, 그렇습니다.”란 뜻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 불렀다가 이제는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좀 더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대답을 한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카타 덴 피스틴 휘몬 게네테포 휘민…”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진 믿음에 따라 너희에게 이루어 지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너희 믿음대로 너희에게 되어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맹인이 눈을 뜬 것입니다. 그리고 사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맹인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지긋지긋 하게 따라 다니던 맹인이란 호칭이 그들과 관계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헬라어로 ‘호라테 메데이스 기노스케토’라 되어 있지요. 보라,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See, nobody knows가 되겠지요. 이런 표현은 우리 말에는 없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우리 말 성경은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자주 나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닉의 모티브라고 말합니다. 은닉의 모티브는 특히 이적을 베푸신 후에 나오곤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사람은 이적을 경험한 당사자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 이적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사자는 침묵을 해야 하지만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후 사도로서 오히려 이런 이적을 증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메시야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메시야 증거를 이적에서만 찾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다면, 그 ‘아무’ 속에 제자들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따라서 제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입을 닫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입을 닫으라고 하셨다는 말씀까지 들어간 채 이적의 내용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편치 않은 대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을 보면 요한복음 기자의 독특한 멘트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 25절에도 비슷한 멘트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믿음과 생명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목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그렇고 신약 성경에도 그렇고 많은 이적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이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적을 나타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와 맞는 것인지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지에 따르면 믿음과 생명에 관련되지 않은 이적은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라야가 두루마리 책에 돌을 달아서 유프라테스 강에 던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봉함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좀 색다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니느웨로 갔던 요나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였지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와 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요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큰 풍랑과 큰 물고기였습니다. 요나는 풍랑 때문에 바다로 던져졌고 마침 큰 물고기가 그를 삼겼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속에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니느웨로 갔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건성으로 그 일을 감당한 것 같습니다. 사흘은 다녀야 했던 니느웨를 오로지 하루만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컸지요.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었던 요나… 그러나 니느웨를 위해서 하루만 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선포를 통해 니느웨를 구원하셨지요. 훗날 니느웨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지요.  

그런데 스라야의 경우는 요나의 경우와 비교해 180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명령하시기를 오로지 그가 묵고 있는 방 안에서 혼자 두루마리 책을 펴서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문구에 따라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예레미야 선지자가 건네 준 두루마리 책을 바벨론의 주 강인 유프라테스 강에다 수장시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에다 큰 돌을 매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그 책은 바벨론에서 가까운 강 속에 있으면서 바벨론의 멸망을 지켜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게 도대체 무슨 싯츄에이션이냐…라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니느웨를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들이 12만 명에 달했습니다. 바벨론의 도시국가들 인구가 5만 내외인 것을 생각하면 니느웨는 과연 큰 성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가축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요나를 통해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론을 불쌍하게 보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바벨론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멸망을 선포해도 그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멸망을 선포했다는 사실은 유프라테스 강 속에 남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니느웨와 바벨론을 비교해 보면, 니느웨의 경우에는 회개의 기회를 가졌고, 바벨론의 경우에는 회개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바벨론은 회개의 기회를 갖지 못했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치와 모욕으로 유대인의 얼굴을 덮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자신에게 수치와 모욕을 안긴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박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바로 이 말씀은 바벨론, 특히 느부갓네살 2세와 그의 참모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자는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하지만 회개도 할 수 없는 자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는 곧 생명을 잃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마귀를 좇고 마귀를 숭배하겠지요. 그리고 하나님께 수치와 모욕을 안기려 하겠지요.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께 보복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예수님은 또 다른 이유로 우리에게 이적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은닉의 모티브라고 한다 했지요?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상대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믿느냐…?” 그럴 때마다 상대 당사자들은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지요. 그것은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은 의사와 환자의 대화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대화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적을 베푸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을 경험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적을 경험하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적을 경험하고 변절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있어  아주 중요한 은닉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적의 당사자들에게 당부하여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네가 본 이적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에 가보면 마을마다 신사가 있고 집집마다 불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심이 매우 깊은 나라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신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릅니다. 동전 몇 푼 던지고 오늘의 재수를 논하기 때문이지요. 일본의 종교는 매우 세속적이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들의 속성에 잘 맞는 음식이 바로 라멘입니다. 왜냐하면 라멘이 참 세속적인 음식이거든요. 그래선지 일본 사람들은 라멘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본에 가보면 우동 가게나 오뎅 가게 보다 라멘 가게가 더 많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일본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라멘을 매우 좋아하다가 결국 라멘 가게를 냈습니다. 주인이 된 그는 면도 최상으로 뽑고, 수프도 최상으로 끓이고, 고명도 최상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최고급의 라멘을 만들었는데 왜 손님들이 찾아주지 않을까… 그는 다른 라멘 가게를 찾아다니며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를 찾아와 라멘 한 그릇을 먹은 손님이 넌지시 던진 말이 마음에 들어오더랍니다. 이 집 라멘은 참 맛있는데 집에서 먹는 것 같아요… 주인은 그제서야 자기 라멘의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된 라멘에다 화학조미료를 쳤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손님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라멘 맛집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 이야기에 손뼉을 친다고 합니다. 공감이 되니까요. 하지만 가정에서는 구태여 화학조미료를 써가며 가족의 입맛을 유혹할 필요를 느끼지 않지요. 가정은 가게하고 다르니까요. 그래서 교회는 가정을 바탕으로 일어났습니다. 가게를 바탕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요즘 교회를 보면 꼭 가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적을 추구하는 모습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이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로 바글바글 하게 되겠지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나 소망에 관계 없이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올 겁니다. 아픈 사람들이나 기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이런 이적이나 기적은 화학조미료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은닉의 모티브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라멘 집은 화학조미료를 쳐서 손님을 끌 수도 있지요. 하지만 교회가 화학조미료를 쳐서 사람을 끈다면 결국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가게 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교인 아닌 고객이 많아지고 따라서 헌금도 많아지겠지요. 이게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교회는 돈이 너무 없어도 문제지만 돈이 너무 많으면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진리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교회가 순수하게 노력한다면 교인이 많든 적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생각을 하면 교인이 많아야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이적을 이용한다면 결국 하나님까지 이용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교회를 망치게 하겠지요. 우리가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세속적인 교회를 용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요즘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생기는 문제가 결국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신비를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성경에도 신비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비를 추구할 때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은닉의 모티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믿음과 생명이 제대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런 바탕에서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가 나올 수 있고, 또한 스라야 같은 성실한 일꾼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바탕이 이렇지 못하면 결국 교회는 일본의 신사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무당 비슷한 자들이 나와서 교인들을 현혹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기도의 내용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이지요. 왜 예수님은 주기도문까지 가르쳐 주신 것일까요? 함부로 기도하지 말고 제대로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예레미야 51장 64절은 스라야의 이야기와 함께 예레미야의 말이 끝난다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서는 이렇게 끝난다는 말이지요. 아니, 예레미야 서는 52장까지 있는데 51장으로 끝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서는 51장으로 끝납니다. 52장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를 다룬 것으로 후대 편집자가 갖다 붙인 별도의 장입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된 70인 역은 끝 부분이 매우 다르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 편집자들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슬픈 이야기를 예레미야 서의 마지막에 붙임으로써 그 슬픔을 배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예레미야 애가 서로 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70인 역 보다 휠씬 더 유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레미야 신탁에 대한 묵상도 오늘로 끝입니다. 언제 다시 이 부분을 다룰 수 있을까… 쉽게 다시 다룰 수 있지는 못하겠지요. 다음 주일 부터 예레미야 애가 서를 묵상하면서 묵직한 연말연시를 맞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코로나로 인해 허우적 거리는 교회의 모습에 적절하겠지요.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애가 서를 통해 우리에게 이 시대를 향한 통찰력을 주시고 또한 갈길을 제시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 하나님께서 스라야에게 하라 하신 일의 의미는?

2) 예수님의 은닉의 모티브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정리해 봅시다.

 

 

 

 

 

2021년 12월 5일

 

예레미야 51장 33-49절: [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 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 거리며 [39] 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 내가 그들을 끌어내려서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 [41] 슬프다 세삭이 함락되었도다 온 세상의 칭찬 받는 성읍이 빼앗겼도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 [42] 바다가 바벨론에 넘침이여 그 노도 소리가 그 땅을 뒤덮었도다 [43] 그 성읍들은 황폐하여 마른 땅과 사막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도다 [44]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끌어내리니 민족들이 다시는 그에게로 몰려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졌도다 [45]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라 [46] 너희 마음을 나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소문은 이 해에도 있겠고 저 해에도 있으리라 그 땅에는 강포함이 있어 다스리는 자가 다스리는 자를 서로 치리라 [47] 그러므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바벨론의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그 온 땅이 치욕을 당하겠고 그 죽임 당할 자가 모두 그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이며 [48]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리니 이는 파멸시키는 자가 북쪽에서 그에게 옴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9]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죽여 엎드러뜨림 같이 온 세상이 바벨론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리라.

누가복음 18장 1-8절: [0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0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0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0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 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0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0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0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0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9-7  바벨론에 대하여

  

예레미야 서 50-51장에 기록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바벨론에 대한 계시를 8주 계획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7주차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시에 대해 구석구석 자세하게 실증적으로 살펴 보기는 여러 가지로 역부족이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서 50-51장을 8주간에 걸쳐 묵상하겠다는 계획을 예전에는 세워 본 적이 없는 터라 이나마 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 묵상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서 46-51장에 기록된 계시에 대한 묵상은  다음 주로 끝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계시를 통해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한탄을 읽었습니다. 그 한탄은 처음 부터 끝까지 반복적이라 지겹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지닌 지겨운 본성에 대한 성실한 경고였습니다. 사람이 창조주를 떠나서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우매함에 대한 한탄이었습니다. 본래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를 위해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세웠고 다른 사람들을 그 신 앞에서 기가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우상 앞에 기가 죽은 불쌍한 자들 위로 우상을 타고 올라가서 기꺼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도 망한 원인은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우상을 통해서 다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이기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이 대목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했던 겁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옛날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2세가 처들어와서 성전을 훼손하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는 아람 족에 속한 갈대아 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의 후손이란 말이지요.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도 부족해서 바벨론에다 마르둑 신전을 만들고 마르둑 뿐만 아니라 세삭, 벨 등 고대 우상들을 갖다놓고 섬겼습니다. 물론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민중의 마음을 사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결국 신을 부정하는 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신이 되는 것이거든요. 이런 이유로 느부갓네살 2세의 바벨론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삭과 벨

  

예레미야 선지자의 신탁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우상이 ‘세삭’과 ‘벨’입니다. 이것은 이 두 우상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했다는 말입니다. 세삭은 메소포타미아에 그리도 많았던 여자 우상들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벨은 수메르 인의 우상으로 창조의 신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까지 존재했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에 아무튼 창조의 신앙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어쩌면 인간적으로 변질된 창조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렘 51.41에 언급된 ‘세삭(שֵׁשַׁ֔ךְ)’은 바벨론에서 말하는 소위 밤의 여신입니다. 밤이란 탈법, 쾌락, 비정상 등을 의미합니다. 주보 1면에 실린 그림이 세삭의 모습인데 이게 유일한 모습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바이블 코드에 따르면 세삭의 ‘ㅅㅅㄱ’은 ‘ㅂㅂㄹ’를 뜻하는 것으로 결국 음란한 바벨론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유대인 요한이 그 코드를 사용해 요한계시록을 서술하면서 바벨론을 음녀에 비유했습니다. 이 음녀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세삭입니다. 세삭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계 18.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삭은 스스로 여황이라 했고 과부가 아니며 결코 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하루 만에 그녀를 심판 하셨으니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 닥치고 세삭은 불살라지고 말았니다. 세삭을 핑계 대고 음행을 일삼고 사치하던  열국의 왕들은 세삭이 불에 타며 연기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울면서 가슴을 쳤겠지만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왕들이 어쩌겠습니까?  

예레미야 시대에 세삭을 주 여신으로 섬기던 바벨론은 강력한 패권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바벨론을 적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벨론 편에 서려고 했지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세삭을 가리켜 온 나라들의 찬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최고였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바벨론이 지구 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짐짓 자신을 높였습니다. 쓸 데 없는 짓을 가치있게 여겼던 것이지요.

세삭은 유쾌하게 호사스럽게 사치스럽게 음탕하게 그리고 절제하지 않고 사는 여왕을 말합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여자였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지닌 힘이 정말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세삭은 바벨론의 자부심이었고 아울러 바벨론의 힘에 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세삭은 온 나라들과 정을 통했고 열국에 남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도 바벨론을 넘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그 자신이 세계의 표준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표준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발뒷굼치로 뭉개 버리셨습니다.    

 

---

끝까지 견디시오.

   

지난 8월 22일 부터 우리는 소위 예레미야의 신탁이란 것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서 46장 부터 51장까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16주째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주일로 예레미야의 신탁에 대한 묵상에 있어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 다룰 것은 피날레의 장식 같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내용은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다룬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자세하게 다룬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 부분을 다룰 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예레미야의 신탁을 다루었습니다. 참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밝히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최선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내용은, 우리가 구약의 본문으로 읽은 그대로 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레미야의 신탁을 다루면서 가장 많이 다룬 것입니다. 열국의 멸망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귀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명확해 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식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예고 하시고서도 그것을 뜸을 들이시면서 실행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공연히 엄포만 놓으시는 것 같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 심판의 날은 도둑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걸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 만큼 더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유난히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이름이 둘 있습니다. 41절에 등장하는 세삭과 44절에 등장하는 벨입니다. 벨에 대해서는 이미 한번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땅에 존재했던 신들은 3,600개 이상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신들의 존재 방식은 대개 남신과 여신이 짝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짝을 통해 조화가 이루어 지고 결실이 맺어지고 그러다가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에 각기 대응하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들도 인간들과 똑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만들어 진 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벨이란 신은 좀 독특한 신이었습니다. 벨은 수메르 때부터 있었던 신인데 소위 창조의 신이라고 합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 평원에는 12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나타나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족 단위로 성을 짓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시국가마다 나름의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수메르 족이 세운 바벨론이란 도시의 수호신은 마르둑이었습니다. 앗수르 족이 세운 아슈르란 도시의 수호신은 니므롯이었습니다. 우루투나 갈대아 우르의 신들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민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신이 바로 바벨론의 마르둑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바벨론이란 도시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이란 도시에게 정통성을 부여했습니다.

이에 비해 수메르의 벨이란 신은 숨어있는 신이었습니다. 찾아야 겨우 찾을 수 있을까 말까한 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벨은 창조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벨은 창조의 신이었지만 마르둑처럼 권력을 손에 쥔 신은 아니었습니다. 벨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민중의 기억 속에서 마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신이었습니다. 불확실한 존재였단 말이지요.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민중이 권력지행적이고 세속적인 인간들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근본을 생각하는 인간들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창조란 개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 비하면 정도가 낮게 또는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런 권력지향적이고 세속적인 곳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전쟁 포로란 신분으로 유대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바로 그 곳에서 토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자료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토라를 만들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토라를 통해서 당신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유대인들이 당신의 백성으로 새 출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곳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귀향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들은 아브라함과는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토라를 손에 들고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만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는 비손 강을 찾았을 겁니다. 순금이 있고 약초인 베델리엄이 있으며 또한 각종 보석이 있는 하윌라 땅으로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으로 간 유대인들은 그 손에 토라를 들고 전 세계를 향해 마치 불꽃처럼 각 방향으로 퍼져 나아갔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족쇄가 되었던 바벨론을 없애셨습니다. 그래서 북쪽에서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를 일어나게 하셨고, 남쪽에서 메데와 엘람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무섭게 바벨론을 쳐서 초토화 시키셨습니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레미야가 신탁을 통해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고귀한 메시지였습니다. 이제 수메르 시대 부터 있었다는 창조의 신 벨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토라를 편찬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창조주가 되신다는 진리를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의 계시, 또는 예레미야의 신탁은 그것을 믿는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또 다른 신 하나가 남아있습니다. 이 신에 대해서 설명하면 이제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게 됩니다. 그 마지막 신은 41절에 등장하는 세삭입니다. 오늘은 세삭에 대해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전쟁 포로로 바벨론에 간 유대인들은 히브리 문자를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안보를 이유로 오로지 저들의 아람어 문자만 썼습니다. 이 아람어 문자가 지금 우리가 히브리 문자라고 쓰는 바로 그 문자가 되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쓰던 히브리 문자는 따로 있습니다. 저에게 고대 히브리 문자로 기록한 성경이 있습니다. 원하시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2세의 경찰관들은 바벨론으로 끌려 온 유대인들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유목민들인 유대인들은 항상 품에 칼을 품고 다니거든요. 그래서 바벨론 경찰은 유대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몸을 철저하게 검사하고 또한 그들의 문서들을 검열했습니다. 특히 종교문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이 만약 종교 문서에다 필요가 있어서 바벨론이라고 쓰고 바벨론을 저주하는 글을 써두면 바벨론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검열관들이 그 문서를 파손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 비싼 문서가 파괴가 되면 유대인들만 손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트바쉬 암호라는 것을 썼습니다. 스펠링의 순서를 바꾸어 쓰는 겁니다. 바벨론을 아람 문자로 그대로 쓰면 베트 베트 라메드가 됩니다. 하지만 베트 베트 라메드라 쓰고 거기에다 욕을 해대면 바벨론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문서를 파괴하지요. 그럼 안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베트 베트 라메드를 쉰 쉰 카프로 바꾸어 표기했습니다. 쉰 쉰 카프를 발음하면 세삭이란 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문서를 받아보는 사람은 세삭을 세삭으로 이해하지 않고 바벨론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아트바쉬 암호를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걸 알지만, 바벨론 경찰은 이걸 모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트바쉬 암호를 사용하는 목적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삭이란 말을 쓰고 거기다 온갖 나쁜 말을 다 갖다 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바벨론을 욕하는 것인 줄 압니다. 하지만 바벨론 경찰은 그것이 세삭을 욕하는 것인 줄 알겠지요. 예레미야 25장 26절을 보면 “북쪽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세삭 왕은 당연히 바벨론 왕을 말합니다. 세삭이란 말을 써서 바벨론이란 말을 가린 겁니다.

이런 양식은 요한계시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있던 유황 광산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이 곧대로 계시를 기록하면 로마 관리들이 요한의 문서를 파괴할 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아트바쉬 암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를 바벨론에 비유하면서 세삭이란 여신을 언급한 것입니다. 로마 경찰은 이걸 보고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로마를 욕하는 것인데 알 수 없는 세삭이란 사람을 욕한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로마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나와서 소아시아 전역에 퍼졌고 또한 유럽 대륙 전역에 퍼질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17장과 18장에서 사도 요한은 세삭을 이용한 바벨론에 대한 저주를 로마를 향한 저주로 바꾸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벨론을 바라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시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세삭의 멸망에 비유하고 그 자세한 내용을 코덱스에 옮겨 적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경철은 이 코덱스를 봐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 경찰은 사도 요한이 고대 바벨론의 어떤 사람을 저주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가 바벨론이나 바벨론 황제처럼 망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트바쉬 암호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는 세삭이란 바벨론 제국의 밤의 여신을 말합니다. 이상하게 세삭을 아트바쉬 암호로 나타내면 바벨론이 된단 말이지요. 세삭은 분명히 바벨론 제국의 밤의 여신의 이름인데 말이지요. 이것도 하나의 신비라면 신비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밤은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휴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세삭은 밤의 여신이므로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주관합니다. 세삭은 탈법과 쾌락과 비정상을 주무릅니다. 그리고 사람을 파멸로 빠뜨립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실린 그림을 보십시오. 이것은 바벨론에서 발견되어 지금 영국의 브리튼 박물관이 소장한 세삭의 부조 점토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삭의 얼굴은 이게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삭은 참으로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또한 그만큼 바벨론이 타락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삭의 육체가 매우 육감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에 운명의 고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세삭은 점쟁이였습니다. 날개도 있네요. 날개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조가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고보니 세삭의 발은 맹금류의 발입니다. 채가는 무서운 발이지요. 그리고 그 무서운 두 발은 두 마리의 야수 등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야수를 자세히 보면 머리가 두개에 앞발이 두개인 괴물입니다. 그리고 밤을 상징하는 부엉이가 양 옆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바벨론의 타락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계시록 18장 7절을 세삭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합니다.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세삭은 자기를 가리켜 스스로 여왕이라 했습니다. 스스로 여왕이라 할 만큼 인기가 있고 그래서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과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삭은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남자가 다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남자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세삭은 그런 말을 흘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음탕한 언사입니까? 그리고 세삭은 말하기를 자기는 결코 애통함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와서 자기를 도와주기 때문에…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세삭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댔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그릇 판단하게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 18장 8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하루 만에 그녀를 심판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 닥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삭은 순식간에 불살라졌습니다. 세삭을 핑계 대고 음행을 일삼고 사치하던 열국의 왕들은 세삭이 불에 타며 연기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울면서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세속의 왕들이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찌기 이런 말을 로마서 13장 11-13절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믿음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도시의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든 이 재판장은 로마 황제만 두려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근본이 다른 이방인이었단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자도 귀찮아서 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부는 그녀의 원수가 저지른 일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그 원수를 처벌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장은 과부를 우습게 봤습니다. 아마도 과부의 원수를 의식했을 수도 있지요. 아무튼 재판장은 과부의 일에 대해 차일피일 했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재판장은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저 과부의 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귀찮게 되겠구나… 아주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국 재판장은 과부의 소를 들어주고 원한을 없애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화를 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적극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바벨론의 밤의 여왕 세삭은 자기가 과부가 아니라고 했다지요. 아마 자기를 지켜 줄 남자들이 많다고 생각했던가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과부는 자기의 부지런함 외에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재판장을 찾아가서 바로 잡아달라고 소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에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가는 과부를 좋게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에 원한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말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으기 걱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인자는 휘오스 안트로포스, 즉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뜻입니다. 다니엘 서에서 비롯된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실까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재림에 대한 믿음을 재림 때까지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어렵다는 것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러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마음 속에 재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한때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이 만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은 반드시 메시야 사상과 연결됩니다. 아라랏 산 부근에 생긴 아름다운 호수를 중심으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고 구원에 감사하며 살아갔을 겁니다. 다시는 노아의 홍수같은 징벌을 자초하지 말자고 다짐했을 겁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죄를 고백하곤 했을 겁니다. 수메르 문명 이전에 그런 아름다운 일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활의 터전이 메소포타미아 들판으로 옮겨지면서, 많은 사람들로 인해 삶 자체가 각박해 지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희미해 지고, 그 아름다운 믿음의 삶도 농도도 약해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벨론 황제가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되었고 또한 세삭이라는 음란한 여신이 나타나서 밤의 황제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황제 느부갓네살 2세는 이들까지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들을 바벨론에 데려와서 살게 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민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들판에 마치 마른 뼈들 처럼 널려져 있는 창조의 이야기들을 모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날로 짜고 씨로 엮어서 토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이었지요.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바벨론 땅에서 새롭게 정립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안트로푸스 휘오스, 즉 인자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 지는 메시야 사상을 다져갔습니다. 수 천 년 전, 노아의 후손들이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비록 100년도 살지 못하는 무상한 인생이지만, 우리의 신앙은 창조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구원으로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신앙, 이 믿음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피곤해도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 우리의 원통함을 적극적으로 고할 수 있습니다.    

 

아마존 상류 지역에 브라질과 베네주엘라와 가이아나가 한 지점에서 만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이 곳에 로라이마가 있습니다. 브라질에서는 호라이마라고 하지만 이게 베네주엘라에 있기 때문에 베네주엘라 발음으로 로라이마라고 합니다. 로라이마는 테이블 마운틴, 탁상형 산이란 뜻입니다. 그 높이가 우리의 백두산 정도입니다. 로라이마 옆에 쌍둥이 산이 있는데 크기는 작지만 올라가기 힘든 부캐넌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부캐넌에 올라간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하지요. 아무튼 여기에 가려면 베네주엘라의 국경 도시 산타 엘레나까지 가야 합니다. 여기서 팀을 꾸려서 20킬로미터 북동쪽에 있는 로라이마로 갑니다. 가는 데에 이틀, 그 곳에 머무는 데에 이틀, 돌아오는 데에 이틀, 모두 6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가고 오는 시간까지 합치면 두 주는 걸립니다.  

로라이마가 유명한 것은 지질학적 가치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분리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자그마치 15억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유럽이나 아시아 대륙에는 이런 흔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일컬어 신대륙이라고 한다지요? 그만큼 무상한 인간은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있어서 정확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로라이마를 보면서 15억 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15억 년 동안 지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라이마를 본 사람들은 죽을 때 그런답니다. “그래도 나는 로라이마를 본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괴가 움직이고 지하 100킬로미터 이하에 있던 용암이 멘틀을 뚫고 올라온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용암이 바닷속에 생긴 사암을 코팅했습니다. 이 중 극히 일부가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이게 바로 로라이마와 부캐넌입니다. 로라이마와 부캐넌의 내부는 하나로 된 사암 덩어리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용암이 코팅을 했지요. 그래서 우리 눈에는 이게 현무암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이때 용암에서 분출된 뜨거운 열기가 해양을 끓게 했고 그 바람에 플랑크톤 등이 석유로 변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베네주엘라에 유전이 많다는 겁니다.

인생은 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로라이마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입을 다물 수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불교의 용어라고 합니다. 무상이란 변화가 무쌍하다는 뜻입니다. 같은 게 없다란 뜻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항존적이고 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창조주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주님이 되시지요. 예수님은 이 믿음을 종말까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때에 믿음을 보겠느냐…하는 것은 그때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의 항존성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의 변치 않음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변치 않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생각에 있어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인간으로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태고로 부터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인생은 무상하다 보고 이런저런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저런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닌 일반적인 행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수 천 개의 우상을 만들어 내서 인기가 있으면 계속 만들고 인기가 없으면 찍어 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레미야 시대에 이르러 세삭과 벨만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어느 누구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계시와 신탁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만듭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 만이 구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100년도 살지 못하는 무상한 사람에게 주신 엄청난 자유입니다. 자유 가운데서 최고의 자유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도 발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삭을 쫓아다니는 것이지요.

 

1) 바벨론 제국의 멸망 과정을 정립해 봅시다.

2) 세삭과 벨이 마지막까지 남은 이유는?

 

 

 

 

2021년 11월 28일

 

예레미야 51장 15-32절: [15] 여호와께서 그의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16] 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치게 하시며 그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7]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8] 그것들은 헛된 것이요 조롱거리이니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 [19] 야곱의 분깃은 그와 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이스라엘은 그의 소유인 지파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 [21] 네가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며 네가 병거와 병거대를 부수며 [22] 네가 남자와 여자를 분쇄하며 네가 노년과 유년을 분쇄하며 네가 청년과 처녀를 분쇄하며 [23] 네가 목자와 그 양 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 [24]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26] 사람이 네게서 집 모퉁잇돌이나 기초돌을 취하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영원히 황무지가 될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7] 땅에 깃발을 세우며 나라들 가운데에 나팔을 불어서 나라들을 동원시켜 그를 치며 아라랏과 민나와 아스그나스 나라를 불러 모아 그를 치며 사무관을 세우고 그를 치되 극성스런 메뚜기 같이 그 말들을 몰아오게 하라 [28] 뭇 백성 곧 메대 사람의 왕들과 그 도백들과 그 모든 태수와 그 관할하는 모든 땅을 준비시켜 그를 치게 하라 [29] 땅이 진동하며 소용돌이치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계획이 섰음이라 [30] 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그들의 요새에 머무르나 기력이 쇠하여 여인 같이 되며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으며 [31] 보발꾼은 보발꾼을 맞으려고 달리며 전령은 전령을 맞으려고 달려가 바벨론의 왕에게 전하기를 그 성읍 사방이 함락되었으며 [32] 모든 나루는 빼앗겼으며 갈대밭이 불탔으며 군사들이 겁에 질렸나이다 하리라.

누가복음 22장 35-38절, 47-53절: [35]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36]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나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예레미야의 계시 9-6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신탁을 통해 당신은 창조주이심을 강하게 어필하십니다.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통해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고 또한 하나님이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고 비를 위해 번개를 치게 하시고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고 합니다. 멋진 서사시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해서 이런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금장색마다 자기 신상을 만들지만 그로 인해 수치를 당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상은 우상이며 거짓히고 그 속에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 무수히 세워져 있는 신상들은 헛된 것이고 조롱거리이니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징벌하실 때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야곱의 분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분깃은 이스라엘이며 만물을 지으신 분, 곧 만군의 여호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소유한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해 당신의 철퇴 곧 무기로 삼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나라들을 분쇄하고 국가들을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고 그들의 병거와 병거대를 부수고, 남자와 유자를 분쇄하고 노년과 유년을 분쇄하고 청년과 처녀를 분쇄하고 목자와 양떼를 분쇄하고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소해고 도백과 태수를 분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시온에서 했던 짓을 있는 그대로 바벨론과 갈대아 주민에게 갚으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이 바위에서 굴리고 불 탄 산이 될 겁니다. 그래서 그 산에서는 집 모퉁잇돌이나 기촛돌을 취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산은 영원히 황무지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를 동원하십니다. 이들 나라 또는 민족에 대해서는 뒷장을 참고하십시오. 이들이 결국 메소포타미아의 우상숭배자들을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메대의 왕들과 그 도백들과 그 모든 태수들과 그 외의 권력자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우상숭배자들을 칠 겁니다. 땅이 진동하고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바다가 아니고 땅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이 황폐하게 하시고 주민들이 없게 하실 겁니다. 그런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의 용사들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요새에 머무르며 여인처럼 됩니다.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습니다. 보발꾼이란 보발꾼은 모두, 전령이란 전령은 모두 바벨론 왕에게 달려가서 성읍 사방이 함락되었다고 알릴 겁니다. 나루는 빼앗겼고 갈대밭이 불에 탔으며 군사들이 겁에 질렸다고 보고할 겁니다.

 

아라랏(우라르투), 민니, 아스그나스

  

예레미야 51장 27절에 나오는 이름들입니다. 꼭 가보고 싶은 산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타북에 있는 라오즈 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르메니아와 터어키와 이란의 국경이 한꺼번에 만나는 아라랏 산입니다. 이왕이면 터어키 쪽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둘 다 외국인은 출입금지라고 합니다. 국가 안보 문제 때문이랍니다. 라오즈 산은 의견이 분분하니 제외하고… 아라랏 산의 경우, 이 일대를 아르메니아 고원이라 불렀는데 요즘은 아나톨리아 또는 터어키 동남 고원이라 부릅니다. 터어키 정부의 요청이지요. 하기야 여기에 쿠르드 인들이 1,500만 명이나 살면서 쿠르디스탄 독립 운동을 하고 있고, 게다가 적지 않은 수의 아르메니아 인들도 살고 있다고 하니 터어키 정부로서는 골치 아프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예레미야 신탁은 바벨론을 논하면서 드디어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를 등장시킵니다. 아라랏은 ‘우라르투’라는 나라를 말한다고 합니다. 제가 가보고 싶은 터어키 쪽 아라랏 산 자락이 우라르투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에 이 지역에서는 가장 큰 민물 호수 ‘반’이 있지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호수입니다. 우라루트는 ‘비아이’라고도 하는데 기원전 860-586년에 존재한 나라입니다. 예레미야가 언급한 아라랏은 우라르투를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이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의 전설적인 왕들이 등장합니다.  

반 호수에서 동남쪽으로 2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우르미아 호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란의 북서지방에 해당합니다. 반 호수와 우르미아 호수는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고원 지대에 있습니다. 우르미아 호수는 중동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였지만 이란측의 무분별한 관개시설로 물이 90%나 말라 소멸 중이라 합니다. 지금 중동 지방에서 가장 큰 호수는 반 호수라고 합니다. 이 우르미아 호수 남쪽을 가리켜 성경은 ‘민니’라고 합니다. 민니는 땅 이름이기도 하고 아울러 민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우르미아 호수 인근에 마하바드, 바네, 마라그헤, 미아네란 지명이 산재합니다.

아스그나스는 창 10.3에 따르면 노아의 아들 야벳의 손자가 됩니다. 그리고 아스그나스란 이름의 민족이 오늘날 아르메니아 인근에서 거론이 되었다고 합니다. 앗수르 문서에 따르면 아스그나스가 민니의 동맹국으로 이 둘이 앗수르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바벨론 탈무드에 따르면 아스그나스의 아버지 고멜은 본래 게르마니아로 발음이 되었는데 이것은 시리아 북서부의 게르마니카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쉬케나즈가 게르마니카와 관련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독일의 라인 강변에 있던 유대인 거주지를 아쉬케나즈로 불렀는데 이게 독일계 유대인을 아쉬케나즈로 지칭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잡하네요.    

 

---

칼을 준비하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유대인들 것만이 아닙니다. 그 신앙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신앙을 지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네 밑에 사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중간에 있고, 그 아래 사물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질서가 되겠습니다. 이 창조질서가 뒤집어 지는 것을 우리는 우상숭배 또는 사이비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나 사물이 올라가는 것, 사람의 자리에 하나님이 내려 오시거나 사물이 올라가는 것, 사물의 자리에 하나님이 내려 오시거나 사람이 내려 오는 것… 이 모든 것이 우상숭배요 사이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상숭배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가 농담 반 진담 반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인즉… 사람들이 옛날에는 지오디, 즉 God을 믿었는데 요즘에는 디오지, 즉 Dog을 믿는다고… God을 믿었지만 특별한 댓가가 없었고, 그대신 사람을 믿었는데 오히려 배신을 당했고, 그래서 God 대신 Dog을 모시게 되었는데 아직 Dog으로 부터 배신은 당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불면증 때문에 난독증이 생겨서 지오디를 거꾸로 읽어보니 디오지로 발음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그래서 인권보다 개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비록 워드 플레이에 지나지 않지만 좀 오싹해 지는 느낌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개탄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된 것이요 조롱거리니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다.”  

어째서 사람은 금을 얻으면 그것을 녹여서 신상을 만드는 걸까요?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금으로 만든 신상을 하나님 자리에 올린다고 그게 올려집니까? 그것은 거짓 형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양의 창조물을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또한 우상은 그 안에 생기가 없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만든 자와 그걸 섬기는 자는 헛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황금 십상이라는 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영을 두셨지요. 예레미야 51장 17절에 나오는 ‘생기’라는 말은 시편 51편 10절에 나오는 ‘영’과 똑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하지요. 이 루아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루아흐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그 뜻대로 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물에는 이런 루아흐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사물에는 영도 없고 생기도 없다고 한 것이지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라랏 산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라랏, 민니, 아스그나스로 표현된 사람들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북쪽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지요. 여기서 아라랏은 예레미야 시대에 존재했던 ‘우라르투’란 나라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라랏 산 밑에 있는 반 호수 가에 있던 나라입니다. 아라랏 산은 지금도 터어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5,165미터라고 합니다. 봉우리는 만년설로 뒤덮여져 있습니다. 이 만년설이 녹아 주변에 호수들을 만들었습니다. 반 호수, 우르미아 호수 등… 천 미터가 넘는 고원 지역에 위치한 호수들이라 겨울에는 매우 춥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울만 제외하면 살기에 좋다고 합니다. 또한 아라랏 산을 바라 보면서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주보 1면에 실은 사진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 호수 가에서 아라랏 산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라랏, 민니, 아스그나스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무장을 하고 나가 바벨론을 치라고 하신 겁니다. 물론 메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북쪽과 남쪽에서 바벨론을 협공하라고 하신 겁니다. 너무나도 살벌한 전쟁을 명령하신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바벨론을 멸망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바벨론을 멸망시키려고 하셨을까… 오늘 본문 24절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신 바벨론 제국, 즉 갈대아 제국의 두 번째 왕 느부갓네살 2세… 그가 예루살렘을 둘러 싸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많은 잔혹한 짓과 나쁜 짓을 했었습니까? 게다가 성전의 기물들을 모두 훔쳐내고는 그 성전마저 불태우고 무너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갈대아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사실 이 갈대아 족도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던 아람 인들 중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을 점령하고 그들은 마루둑이란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메소포타미아 주민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보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을 무너뜨리실 겁니다. 이 일에 아라랏, 민니, 아스그나스도 동원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북쪽에서 내려와 갈대아 제국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의문을 갖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칼을 들게 하시고 그 칼로 원수들을 무찌르게 하시는가…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칼을 들게 하신다고? 그러실 리가 없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말아야 한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지 않을까?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과거의 경험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산상수훈 직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각처로 파송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대와 배낭과 여분의 신발도 갖지 말고 가라고 하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무런 결핍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족한 게 없었으니까요. 현지에 가보니 필요했던 모든 것들이 적절한 때에 조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면 부족함이 없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대와 배낭과 신발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게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나선 때였습니다. 하지만 곧 예루살렘의 종교경찰이 엄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게 두 번째 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도 예수님은 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칼을 주러 왔노라.”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칼은 구체적인 무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의 칼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게세마네로 가시던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무기로서의 칼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팔아서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비폭력 무저항을 부르짖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칼은 식칼이나 과일칼이 아니었습니다. 칼집에 들어가 있는 제대로 된 무기로서의 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에 대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은 이미 확보한 칼 두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예수님을 앞질러 가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개의 칼을 보시고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히카논 에스틴’으로 되어 있는데 그걸로 좋은 상태야… 준비가 되었군… 이란 뜻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칼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무슨 칼을 두 개나 준비했느냐… 하셨을 것 같은데 오히려 만족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한 시간 쯤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종교 경찰이 그 곳에 당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가 칼로 칠까요? 예수님께서 고개를 한번만 끄떡하셨어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편에 있던 한 성급한 사람이 칼을 들더니 그 칼을 휘둘렀습니다. 본문은 잘려나갔다는 의미의 ‘에페일렌’ 동사를 씁니다. 상대편 한 사람의 오른쪽 귀가 잘려나갔다는 말이지요. 요한복음 18장 10절에 따르면, 이때 칼을 휘둘렀던 사람은 베드로이고, 그 칼부림으로 오른쪽 귀가 잘려나간 사람은 ‘마르코’라고 합니다. 그는 당시 대제사장의 종이었습니다. 이걸 보면 베드로가 칼잡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칼을 휘둘러 귀만 도려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신 예수님은 칼부림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셨을 때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을 때, 그 각각의 때에 있어 예수님의 마음이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때 사이에 겟세미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 기도 중에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하셨지요. “아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에아테 헤오소 투투”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더 이상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마르코의 귀를 만져서 낫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떨어져 나간 귀를 제자리에 붙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마르코는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경찰에게 끌려 가셨고, 제자들은 도망을 쳤다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로지 베드로만 먼 발치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조치는 비폭력 무저항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뜻이기도 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말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칼을 사용해서 적을 격퇴시키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칼을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우리는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하늘의 천군천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무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무기를 버려라, 무조건 평화를 위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조건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뜻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이걸 더해라 저걸 더해라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해 지는 건 아닙니다. 오로지 목이 점점 더 마를 뿐입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에 유학해서 변호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에 거하면서 인도인을 위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도인 영국인들에게 힌두교도인 인도인들이 차별을 받고 있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독립을 위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무기를 사용하며 인도인들의 독립운동을 억압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에 대해 마음의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인도는 다른 식민지에 비하여 비교적 평화롭게 독립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을 주도한 마하트마 간디는 결코 기독교도가 아니었습니다. 산상수훈을 외우고 있었지만 그는 예수님에 대해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도인 영국인들을 기독교적 교리를 이용하여 설득을 했을 뿐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에 대해서는 숨겨진 일면이 더 재미있는데 그도 역시 사람이었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한스컨텐츠에서 나온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을 한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보수 기독교가 마치 성경적 진리 처럼 여기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에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비폭력 무저항을 외치면서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을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독재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시녀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또 하나의 기득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빈축을 사고 있지만 보수 기독교는 이걸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보다 코이노니아란 거룩한 이름으로 동호인 활동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코이노니아가 무슨 뜻입니까? 순교한 사람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자기 자녀처럼 기르는 것을 말하지요.

하지만 오늘날 코이노니아는 출세를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자기 교회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세속적인 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속에 젖어 있는 사람을, 손바닥에 왕 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큰 교회 목사들이 나서서 보호해 줍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투표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한국교회의 사활에 걸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태도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기독교도를 상대로 한 힌두교도들의 독립운동이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영국인에게는 통했다는 말이지요. 그래도 영국인들은 신앙 양심이 있어서 결국 인도의 독립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독재자들은 이런 신앙 양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저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대에게 비폭력 무저항은 의미가 없습니다. 말로 안되면 칼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여기서 칼로 망한다 함은 칼 때문에 제 명에 죽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칼에 의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칼을 가진 사람들도 그 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매듭을 끊고 정리하는 데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매사를 칼로 매듭을 끊듯이 살아갈 수는 없지요. 여기서 우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비폭력 무저항을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말씀하신 거지요.

오늘 저녁부터 하누카가 시작됩니다. 하누카는 우리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수전절로 기록 되어 있는 하누카는 히브리어로 ‘봉헌’이란 뜻을 갖습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the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합니다. 봉헌의 축일이란 뜻이지요. 수전절이란 성전을 수리했다는 의미로 봉헌보다 소극적인 번역입니다. 차라리 봉헌절로 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신 바벨론 제국은 메데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메데는 아주 짧은 시간 존재하다가 페르시아에게 무너졌습니다. 페르시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에게 무너졌지요. 마케도니아를 우리는 헬라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신 바벨론 제국 부터 헬라 제국까지 200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주전 5세기 중엽 부터 3세기 중엽 까지이므로 이때는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이 격변의 시기가 끝난 후 헬라가 200년 동안 인도를 포함한 서남아시아에서 이집트까지 통치했습니다.   

신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 2세가 주전 586년에 불태우고 무너뜨린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해가 주전 516년이었으니 꼭 70년만이지요. 그러므로 헬라인들이 준동할 때 예루살렘 성전은 나름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주전 2세기에 들어서면서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의 성전 예배를 금지함으로써 유대인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때 유다는 셀류퀴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주전 167년, 셀류퀴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좀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헬라 우상들을 섬기라고 강요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헬라 우상들을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 헬라인은 스스로 자기 이름을 에피파네스라고 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신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기가 신이라는 인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섬기라고 했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오히려 칼을 들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신망이 있는 마타디야라는 사람에게  대리자를 보냈습니다. 마타디야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제사장이었지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제사장 마타디야에게 헬라의 신을 섬기고 헬라 식으로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타디야는 그런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할 바에야 차라리 칼을 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타디야는 다섯 아들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왕의 대리자를 죽였습니다. 이후 고프나 산지로 가서 무장 봉기를 했습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물론 칼로 무장을 하고 말이지요. 이들은 우상숭배 요구에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고 쳐들어 오는 헬라군에게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벌일 수도 없었습니다. 헬라군과 일전을 각오했지요. 이렇게 마타디야에게 온 유대인들을 가리켜 우리는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하시딤은 게릴라 전으로 헬라군을 괴롭혔습니다. 사실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헬라군 용병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헬라군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타디야의 군대는 헬라군과 전투를 할 때마다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마티디야 군대는 헬라인들이 만들어 둔 우상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했고 무너진 회당을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장 마타디야는 그 다음 해인 166년에 죽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용감한 셋째 아들 예후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예후다의 별명은 마카비였습니다. 마카비는 망치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카비는 게릴라 전을 벌였던 아버지와 달리 헬라군과 맞장을 뜨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승리는 마카비의 것이었습니다. 결국 주전 164년 키슬레브 월 25일에 마카비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본래 티슈리 월 15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초막절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여의치 않아 두 달 열흘이나 늦어진 것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선 마카비는 메노라를 켜기 위해 올리브 기름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석에 하루 분 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마카비는 그 하루 분 기름으로 메노라를 켰습니다. 그런데 그 메노라의 빛이 여드레를 갔다고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하누카를 빛의 절기라고도 합니다. 메노라는 본디 가지가 일곱 개입니다. 그러나 훗날 하누카를 기념하면서 가지가 여덟 개가 있는 메노라가 나왔습니다. 이 여덟 개의 가지가 있는 메노라를 하누키야라고 합니다. 보통 때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메노라를 쓰다가, 하누카 때 만큼은 여덟 개의 가지가 있는 메노라를 씁니다.  첫째 날은 첫 번째 가지에 불을 켜고, 둘째 날은 두 번째 가지에 불을 켭니다.  

주전 164년 키슬레브 월의 기적 이후 마카비는 셀류퀴스 왕조에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해서 유다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헬라군과의 교전은 계속 되었습니다. 주전 160년, 모데인 남동쪽에 있는 엘리사에서 마카비의 군대는 셀류퀴스 군과 교전을 했습니다. 여기서 예후다 마카비가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마카비는 칼을 너무 오래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칼로 망한 것입니다. 마카비가 죽자 그의 동생 요나단이 그의 뒤를 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마타디야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주전 153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141년에 완전히 독립하여 하스모니안 왕가를 세웠습니다. 하스모니안은 요나단의 아버지 마타디야가 살던 곳의 이름이었습니다. 이후 요나단의 후손들이 유다의 왕이 되어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하스모니안 왕가는 주전 63년까지 존속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두메 사람 헤롯이 로마제국의 후광을 입어 헤롯왕가를 세우고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하스모니안 왕가는 하누카의 기적 부터 따지면 101년 동안 존속한 셈이 되겠습니다. 순수 유대인 혈통으로는 마지막 왕가였습니다. 우리는 마카비의 하스모니안 왕가가 좀 더 오래 존속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수 백 년 동안 존속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헬라 문명에서 로마 문명으로 바뀌는 세계사적 혼란의 시기에 100년 동안 유다 왕국이 존속하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정립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바리새인들이 출현했고, 그들에 의해서 성경과 주석이 바리새인 식으로 세워졌으며 그래서 유대교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바탕 위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전개되었던 것이지요. 이 점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예레미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을 펴셨고, 그 목소리로 하늘에서 많은 물이 생기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물이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생명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신 바벨론 제국은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변 모든 나라들을 불러 일으켜 세우시고 신 바벨론 제국을 치게 하셨습니다. 이때 북방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도 동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 바벨론 제국은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태초 부터 지금까지 없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 신앙은 노아에 의해 전달이 되었고 아라랏 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지켜 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 잡혀 간 유대인들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더 다지셨습니다. 이 바탕 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겉옷을 팔아서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칼을 사용할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기까지 가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칼로 선 자는 칼로 넘어지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칼로 섰다가 칼로 넘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그 이름으로 영생에 이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동호인회와 같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교회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그야말로 종교기관의 하나로 존속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동호인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시간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 후손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미션이고 선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칼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 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칼의 주인도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그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라고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완전한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겉옷을 팔아 칼을 사야하나… 이런 문제를 놓고 늘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으니 우리의 고민은 좀 더 실제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응징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3) 아라랏 산에 대해 알아봅시다.

 

 

 

 

2021년 11월 21일

 

예레미야 51장 1-14절: [0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을 부추겨 바벨론을 치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를 치되 [02] 내가 타국인을 바벨론에 보내어 키질하여 그의 땅을 비게 하리니 재난의 날에 그를 에워싸고 치리로다 [03] 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옷을 입고 일어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의 활을 당길 것이라 그의 장정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며 그의 군대를 전멸시켜라 [04] 무리가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질 것이요 관통상을 당한 자가 거리에 있으리라 [05]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 [06] 바벨론 가운데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07]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08] 바벨론이 갑자기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말미암아 울라 그 상처를 위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09]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10] 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11] 화살을 갈며 둥근 방패를 준비하라 여호와께서 메대 왕들의 마음을 부추기사 바벨론을 멸하기로 뜻하시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것 곧 그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시는 것이라 [12]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수꾼을 세우며 복병을 매복시켜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주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계획하시고 행하심이로다 [13] 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목숨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메뚜기 같이 네게 가득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환성을 높이리라 하시도다.   

누가복음 17장 22-35절: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 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9-5  바벨론에 대하여 (독배)

  

아수르가 메소포타미아의 패자였을 때 (기원전 9세기- 7세기 후반) 갈대아 인은 왕이 있는 도시 바벨론을 여러 번 침범 했습니다. 산헤립 왕 때 갈대아 인 무셰지브 마르두크는 용병으로 바벨론을 점령했지요. 기원전 689년 앗수르는 9개월 만에 바벨론을 재탈환하고 이때부터 갈대아 인에 대한 유화책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인의 신전과 마르둑 신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다 앗수르의 신인 니므롯의 상을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산헤립은 암살 되었습니다. 이후 앗수르의 도시 바벨론은 혼란을 거듭 했지만 민중 반란의 빌미가 되어 온 마르둑 신상은 바벨론에 두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626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인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후, 갈대아 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그곳을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어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 2세는 바벨론에서 대규모 토목공사을 일으켜서 에메테난키 지구라트, 이슈타르 문, 왕비를 위한 공중 정원 등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마르둑 신전과 신상을 중건했습니다.

마르둑은 본래 아카드 인의 주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모리 인도 아카드 인 이후 바벨론을 접수한 쿠프 인으로 부터 바벨론을 접수한 후에 여전히 마르둑을 주신으로 삼았습니다. 마르둑은 메소포타미아 민중의 신앙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모르 인 이후 바벨론을 접수한 카이사트의 중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1세도 마르둑 신앙을 드높였다고 합니다. 앗수르 인이 바벨론을 접수한 후 앗수르의 주신인 니므롯을 내세우며 니므롯이 곧 마르둑이라고 주장 했지만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인은 마르둑을 비호하며 민중의 마음을 샀고 결국 느부갓네살 2세 때 마르둑은 신 바벨론 제국의 주신이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는 마르둑 앞에 벨이란 칭호를 덧붙여 ‘벨-마르둑’이라고 했습니다. 벨은 수메르의 주신입니다. 느부갓네살 2세는 앗수르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민중 전체의 지지를 받고 싶었나 봅니다.      

 느부갓네살 2세와 같은 갈대아 인이었던 아브라함은 그보다 1,500년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2세는 벨과 마르둑을 구태여 같이 섬겼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던 창조주 하나님의 성전을 불태워 버렸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려 먹으려 했습니다. 그런 느브갓네살 2세의 신 바벨론 제국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렘 51.7에 따르면 신 바벨론 제국은 독배였습니다. 세계가 미칠 겁니다.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바벨론

 

메소포타미아(Μεσοποταμία)는 그리이스 어로 알렉산더 왕 때 부터 쓰여진 지명입니다. Μεσο는 가운데, ποταμί는 강들, α는 땅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는 ‘강들 사이에 있는 땅’이란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강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를 말합니다. 유프라테스 강은 아라랏 산 기슭에 있는 반 호수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티그리스 강은 반 호수와 인근에 있는 하지르 호수에서 출발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오늘날 터어키의 타우르스 산맥 동쪽에 있습니다. 따라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는 근원이 같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반 호수와 하지르 호수는 오늘날 터어키, 아르메니아, 이란의 국경이 한 점으로 모이는 곳의 서쪽 산 너머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를 흘러 페르시아 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은 마리, 아카드, 바빌론, 마라드, 우르크, 우바이드, 에리두, 라르사 우르를 거쳐 오늘날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 있는 알쿠르나에 이릅니다. 티그리스 강은 두르샤루킨, 니느웨, 모술, 님루드, 앗수르, 바그다드, 키시, 니푸르, 이신, 기르수, 라가시를 거쳐 알쿠르나에 이릅니다. 두 강은 알쿠르나에서 만나 함께 바다로 갑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12만 년 전 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고, 기원전 3000년에 수메르 문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수메르 문명은 쐐기 문자로 쓰여진 점토판을 많이 남겼습니다. 하지만 수메르 문명 이전에도 또 다른 문명이 있어서 상형 문자로 쓰여진 점토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2500년에 일어난 아카드 문명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쐐기문자는 살아남아서 좀 더 발달된 아카드 문자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2334년에 아카드 제국을 세운 사르곤 왕이 유명한데, 그의 출생 이야기는 모세와 비슷합니다. 그는 왕궁 정원사로 일하다가 결국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와 비슷한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 합니다.

기원전 20세기 경 메소포타미아 서쪽에 살던 아모리 인들이 남동쪽으로 이주하면서 바벨론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들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1894년에 수무아붐이 바벨론 제국을 세웠는데 이것을 고 바벨론 제국이라 합니다. 고 바벨론 제국은 기원전 18세기에 이르러 함무라비에 의해 크게 발전했습니다. 기원전 1595년 경부터 카이사트 인들이 패권을 차지하여 440여 년 동안 바벨론은 카르두니아로 불리워 졌는데 이것을 중 바벨론 제국이라고 합니다. 이때 아람의 갈대아 인들과 앗수르 인들이 각축을 벌였지만, 기원전 9-7세기 후반의  메소포타미아는 앗수르 인들이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626년에 아람의 갈대아 인 나보폴리사르는 앗수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유다를 멸망시킨 느부갓네살 2세입니다. 이때를 가리켜 우리는 신 바벨론 제국이라 합니다.

 

 

---

바벨론의 마지막 날

   

예루살렘의 올드 시티, 즉 구 시가지는 참 작습니다. 그 넓이가 1평방킬로미터도 되지 않으니까요. 정확히 0.9 평방킬로미터라고 합니다. 마두동이나 주엽동 쯤 되는 넓이 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올드 시티가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좁은 곳에서 하도 싸워대니까, 1600년 경에 기독교인 구역, 유대인 구역, 무슬림 구역, 아르메니안 구역 등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모로코 구역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네 구역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아르메니안 구역이라는 게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시온산 마가의 다락방 인근 부터 다윗의 탑이 있는 자파 게이트까지 아르메니안 구역입니다. 아르메니아란 나라는 터키 북동부에 있는 나라로, 인구는 3백 만이고, 면적은 남한의 3분의 1 정도 입니다. 수도는 아라랏 산 동쪽에 있는 예레반인데 인구는 백 만 명 입니다. 작은 나라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작은 나라가 어떻게 예루살렘 올드 시티의 한 구역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아르메니아의 열 두 사도 교단이 이미 서기 200년에 예루살렘에다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이집트의 콥틱교회와 맞먹을 정도로 오래 된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올드 시티에 이런저런 구역을 설치할 때, 아르메니아 열 두 사도 교회에다 한 구역을 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르메니아 인구 중 95%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열 두 사도 교단에 속한 교인들입니다. 이들은 특히 사도 야고보에게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전도를 받았다고 아주 자랑스러워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이니까…

아르메니아의 역사는 5천 년이나 됩니다. 아르메니아 문명은 수메르 문명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오늘날 터키 지역을 옛날에는 아나톨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역사가들은 아나톨리아 고원에 세워진 하투사를 찬양합니다. 히타이트 족이 세운 하투사는 아나톨리아의 자존심이라고… 그러나 하투사를 세운 사람들은 히타이트 족이 아니고 앗수르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이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바로 그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이 앗수르 사람들을 아나톨리아에서 내쫓은 사람들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곳으로 전도 여행을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 곳에 야고보가 와서 전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에 의해 세워진 아르메니아의 열 두 사도 교단은 제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4세기에 이슬람 교도들이 아나톨리아에 들어오고 이 땅에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면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 동쪽으로 쫓겨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고원에 살았지만 오스만 제국은 그들을 고원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동북쪽에 있는 흑해 해변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영내에는 여전히 많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 중에 오스만 제국은 영내에 있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1915년 부터 1917년까지 3년 동안 160만 명의 아르메이나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에 사는 아르메니아 사람들 부터 잡아다 죽였습니다. 죄명은 러시아와 내통한 간첩 혐의였습니다. 이때 수 많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세계 도처로 떠났습니다. 지금 전 세계로 흩어진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숫자는 800만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 300만이 살고 있지요. 500만은 외국에 나가서 사는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학살할 때, 이들 중 수 천 명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아르메니안 구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현재 예루살렘 올드시티의 아르메니안 구역의 인구가 총 4천 명입니다. 이 가운데 3천 명은 이때 들어온 난민의 후손들이라고 하지요. 이들이 모이는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안 열 두 사도 교회 대기실 벽에는 이런 글이 붙어 있습니다. “이민족이 교회를 부수고 십자가를 불사를지라도, 그 칼에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아르메니아 인이 있다면 교회를 위해 첫 삽을 뜰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서의 본문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공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시온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특히 올드시티의 아르메니안 구역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시온 산을 말하지요. 저는 여기에 있는 아르메니안 열 두 사도 교회도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오랜동안 메소포타미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봐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이 왜 망했는지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 아라랏 산은 터어키와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공동 국경이 됩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아라랏 산의 전경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백두산을 성산이라 하듯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아라랏 산을 성산이라고 합니다. 이 성산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코르 바랍 수도원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를 만드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보려면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메소포타미아를 볼 수 없고 아라랏 산을 넘어 터키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터키는 이곳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6절 말씀… “바벨론 가운데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아르메니아는 바벨론으로 부터 도망해 나와서 생명을 구원한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바벨론으로 부터 격리되어 있습니다. 아라랏 산 때문에…

오늘은 예레미야의 신탁을 다루는 열 네 번째 주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을 다루는 다섯 번째 주간입니다. 드디어 예레미야 51장으로 들어섰습니다. 4주 내에 예레미야의 신탁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바벨론까지… 저도 처음 자세하게 예레미야의 신탁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좀 지루하시겠지만, 오늘도 바벨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라랏 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반 호수… 여기서 유프라테스 강이 시작됩니다. 엄밀히 따지면 티그리스 강도 이리저리 돌아서 반 호수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같이 시작이 되고 같이 끝나는 커플 강이 되겠습니다. 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함께 메소포타미아라는 거대한 들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강이 메소포타미아 들판을 기름지게 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말하기를 12만 년 전에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워낙 살기가 좋다보니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는 않으니 문제가 생기겠지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민족 단위로 뭉쳐서 살다보니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민족이 바탕이 되는 도시를 형성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들판에는 수 많은 도시들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고 했습니다. 한 도시의 인구는 5만 남짓이었다고 하니 고대에는 꽤 큰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 가운데서도, 유독 바벨론이란 도시가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합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바벨론은 본래 이름이 하늘의 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바벨탑이 세워졌다는 겁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피곤해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지요. 그때 천사들이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그 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돌로 단을 쌓았습니다. 바벨론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벧엘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 곳이고,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은 마르둑이란 우상을 섬긴 곳이었습니다.

아무튼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고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바벨론을 점령하는 지도자를 황제로 또는 마르둑의 선지자로 추앙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무엇보다 먼저 바벨론이란 도시를 점령해서 바벨론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카드 인은 바벨론이란 도시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는 아카드 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때 유명한 사람이 사르곤 1세였습니다. 하지만 곧 아모리 인이 들어와서 아카드 인으로 부터 바벨론을 빼앗았습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는 아모리 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모리인의 시대에 유명했던 사람이 바로 함무라비 왕입니다. 이후 아람 인이 살짝 얼굴을 쳐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람 인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이란 도시를 앗수르 인에게 쉽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9세기에 앗수르 인이 바벨론이란 도시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벨론이란 도시의 수호신은 마르둑이었지요. 그런데 앗수르의 주신은 니므롯이단 말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앗수르의 니므롯은 바벨론의 마르둑이다!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리고는 바벨론 신전에서 마르둑의 신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저들의 니므롯의 신상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 마르둑을 니므롯으로 바꾸었느냐… 이런 이유로 민중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민중 봉기로 인해 앗수르 왕 산헤립은 그의 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행동을 한 산헤립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장본인입니다.

앗수르는 아람 인들, 특히 갈대아 인에게 멸망했습니다. 갈대아 인들은 바벨론이란 도시를 점령하고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것을 신 바벨론 제국이라고 합니다. 갈대아 족이란 아브라함의 직계 입니다. 갈대아 족의 근거지는 갈대아 우르였지만 바벨론이란 도시를 점령한 후에는 모든 것을 재빠르게 바벨론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갈대아 족은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을 존중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후 갈대아 족은 바벨론 신전에 있던 니므롯의 신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다 마르둑의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후 갈대아 인들은 바벨론을 새롭게 꾸몄습니다. 느브갓네살 2세는 아들의 이름에 마르둑이란 이름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메데인 아내를 위해서 공중정원이라는 기묘한 건축물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르둑을 섬김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얻은 그는 이집트 원정을 나서기도 했고 그 여세를 몰아 남 왕국 유다를 멸망 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7천 명의 유대인 엘리트들을 포로로 잡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는 바벨론이란 도시를 튼튼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천년만년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족속인 갈대아 인이 마르둑을 섬기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왕족으로 호의호식을 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독배를 마신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즐겁게 술을 마시면 되겠습니까? 그 술은 독배에 든 독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사람들의 눈에는 바벨론이 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예레미야의 눈에는 바벨론이 달리 보였습니다. 예레미야 처럼 달리 볼 수 있는 눈…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 가질 수 있는 눈입니다. 그 눈으로 보면 바벨론은 금이 아니라 독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포도주는 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마시는 자는 미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이란 도시를 소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야 메소포타미아의 왕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벨론이란 도시를 점령하는 순간, 그들은 마르둑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바벨론의 신은 마르둑이었고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바벨론 왕이 마르둑을 섬기길 원했습니다. 바벨론을 점령한 자가 마르둑을 섬기지 않으면 메소포타미아 민중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독배였고 그 안에 든 것은 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독주를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가 미칠 줄도 모르고…

아카드 인이 바벨론을 점령하고 우르에 살던 갈대아 인을 못살게 굴 때,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당신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구원이었습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갈대아 우르는 걔중 나은 곳이었습니다. 학문의 자유가 있고 신앙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늘을 연구하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곧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자연스러운 외지로 떠났습니다. 그가 항상 보고 살던 유프라테스를 건너 다른 땅으로 갔습니다.

지난 목요일 자 뉴욕타임즈 탑 뉴스는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8개 월 전, 그러니까 2019년 3월 18일,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를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 시리아쪽 강변에 위치한 바구즈의 작은 마을... 찾아 보니 밧단아람, 즉 아람의 들판이네요. 아브라함과 야곱이 살았던 하란에서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마을에 드론이 뜨더니 곧장 미군기들이 날아와 두 번에 걸친 폭격으로 500여 양민들 대부분을 학살 했다고 합니다. 명분은 IS 소탕이었는데 죽은 사람들은 거의 노인들과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실은 사진이 이들이 희생되기 전에 소개되는 장면입니다. 참 안되었습니다. 이것을 미국 정부가 지금까지 숨겨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죽은 불쌍하고 아까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슬퍼할 뿐이지요.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에 대한 댓가를 톡톡이 치루고 있습니다. 미국도 역시 바벨론 독배를 마신 겁니다. 그래서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군조차 유지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인들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의 시진핑의 손에서 대만을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한반도 종전선언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지요. 미국은 바벨론이 금인 줄 알고, 그것을 손에 쥐려고 함부로 대들었다가 결국 독주를 마시고 미쳐 버린 겁니다. 기독교 선진국인 미국이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대신 바벨론의 마르둑을 섬겼던 갈대아 우르와 같은 결과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민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했는데, 이것이 참 미욱한 행동이었던 겁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종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예로 드셨습니다. 여기서 노아의 때는 아브라함 이전을 말합니다. 롯의 때는 아브라함 이후를 말하지요.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를 건너기 전에도 종말은 있었고, 건넌 후에도 종말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노아 때도 그렇고 롯 때도 그렇고 그게 진짜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종말을 맞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끝장 내시는 종말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종말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 메시야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 해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는 것에 주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 이야기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롯을 움직이시던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반드시 봐야 할 역사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오스만 제국에게 학살 당하는 것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미국의 전투기들에 의해서 시리아에 태어나 어렵게 생명을 부자하던 노인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의 무고한 생명이 날아가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도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쾌락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쾌락을 위해 음식을 먹고 또 먹고 그리고 토하고 또 먹는 것입니다. 쾌락을 위해 이성을 도구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돈 때문에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저 남자에서 그 남자에게 가는 겁니다. 미모에 반해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저 여자에서 그 여자에게 가는 겁니다. 갈팡질팡 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까짓 패권이 뭔데 하나님을 배반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롯의 때에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더라고 하셨습니다. 노아 때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간다고 하셨는데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아브라함 이후라 사람들의 머리가 좀 깨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상업에 그리고 농업에 그리고 부동산에 신경을 쓰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모든 것을 태워 버렸습니다.

롯의 때는 요즘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입지 조건, 역세권을 따집니다. 땅값 때문입니다. 거기다 농장을 만들고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값을 수 십 배, 수 천 배로 올립니다. 이 값을 유지하기 위해서 검사 판사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줍니다. 우리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큰 돈을 뇌물로 주는 겁니다. 뇌물로 나가는 돈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도 이익이 되니까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강남에 똑똑한 집 한 채 사두고 싶은 사람들이 그 농간에 넘어 갑니다. 그래서 싼 집을 터무니 없이 비싼 값을 치루고 삽니다. 그리고 그 집값이 떨어질까봐 노심초사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노력은 헛되이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물 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목숨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메뚜기 같이 네게 가득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희를 향하여 환성을 높이리라.”

많은 물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란 무슨 뜻입니까? 바벨론에는 기본적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두 강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지류들과 운하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들과 지류들과 운하들을 이용해서 장사를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요. 그래서는 바벨론 가까운 곳에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집을 지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영원히 살리라… 하지만 그게 곧 한계에 달합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이 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서 그 땅을 빼앗고 그 집을 빼앗고 거기서 저들이 농사를 지을 것이며 그들이 그 집에 살면서 장사를 할 겁니다. 이런 꿈에 부푼 자들이 바벨론을 무너뜨리면서 환성을 지를 겁니다. 우리는 이제 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곧 한계에 부딪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반복이 되며 세속적인 사람들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강남에 똑똑한 집 한 채 사두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면 모든 것이 타 버릴 겁니다.  하지만 똑똑한 집 한 채가 없어도 하나님만 섬기며 사는 사람들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 한 채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지 똑똑한 집 한 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며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종말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종말은 이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지만 언제 올 지 모르는 죽음과 함께 하는 종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종말을 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종말을 대비하며 살아도 졸리면 자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맷돌을 돌리며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은 밤에 자다가 죽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고, 일을 하다가 죽음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휴거를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성경에도 에녹과 엘리야와 예수님 외에는 휴거를 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또는 킹 메이커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심리를 분석해 주고 있습니다. 성공한 부모 때문에 받은 열등감, 또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생겨난 인정 욕구… 그래서 부모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고 싶어한답니다. 그래서 대통령까지 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가 놀라니까…. 이런 인정 욕구는 참 이기적인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적인 병리현상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런 인정 욕구가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잘못하고 있으니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이지요.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잘 하기 전에 죽으면 심판을 받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정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이기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들 처럼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그런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남에 똑똑한 집 한 채 가진 사람에게 열리는 게 아닙니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 대통령에 도전하는 성취인들에게 열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삽을 잡는 아르메니아 사람 등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인정은 이기적이지 않으며 세속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남을 사랑하게 합니다.         

 

1)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가 된 이유는?

2) 무슨 이유로 바벨론은 독배가 됩니까?

3) 바벨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2021년 11월 14일

 

예레미야 50장 33-46절: [3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지손이 함께 학대를 받는도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는 다 그들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아니하리라 [34]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반드시 그들 때문에 싸우시리니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리라 [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칼이 갈대아인의 위에와 바벨론 주민의 위에와 그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의 위에 떨어지리라 [36]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37] 칼이 그들의 말들과 병거들과 그들 중에 있는 여러 민족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여인들 같이 될 것이며 칼이 보물 위에 떨어지리니 그것이 약탈되리라 [38] 가뭄이 물 위에 내리어 그것을 말리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무서운 것을 보고 실성하였음이니라 [39] 그러므로 사막의 들짐승이 승냥이와 함께 거기에 살겠고 타조도 그 가운데에 살 것이요 영원히 주민이 없으며 대대에 살 자가 없으리라 [4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뒤엎었듯이 거기에 사는 사람이 없게 하며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시리라 [41] 보라 한 민족이 북쪽에서 오고 큰 나라와 여러 왕이 충동을 받아 땅 끝에서 일어나리니 [42] 그들은 활과 투창을 가진 자라 잔인하여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그들의 목소리는 바다가 설레임 같도다 딸 바벨론아 그들이 말을 타고 무사 같이 각기 네 앞에서 대열을 갖추었도다 [43] 바벨론의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손이 약하여지며 고통에 사로잡혀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하는도다 [44] 보라 사자가 요단의 깊은 숲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에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자리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출두하라고 나에게 명령할 자가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 [45] 그런즉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과 갈대아 사람의 땅에 대하여 품은 여호와의 생각을 들으라 양 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어가고 그들의 초장을 황폐하게 하리니 [46] 바벨론이 약탈 당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부르짖음이 나라들 가운데에 들리리라 하시도다.  

마태복음 10장 23-28절: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   

 

예레미야의 계시 9-4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그들을 사로 잡은 자들에 의해 학대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시니 그는 만군의 여호와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땅은 평안할 겁니다. 하지만 갈대아 인과 바벨론 주민과 그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들 위에 칼이 떨어질 겁니다.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져 어리석은 자로 만들고 또한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져 놀라게 할 겁니다. 칼이 말들과 병거들과 그들 중의 여러 민족 위에 떨어져 그들이 여인들 같이 될 것이고 칼이 보물 위에 떨어져 그것이 약탈됩니다.

가뭄이 물 위에 내려 그 물을 말리니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고 그들은 무서운 것을 보고 실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땅에 사막의 들짐승이 승냥이와 함께 살고 타조도 살고 영원히 주민이 없게 되고 대대로 살 자가 없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뒤엎으셨듯이 바벨론은 무인지경이 될 겁니다.

한 민족이 북쪽에서 오고 이를 보고 큰 나라와 여러 왕들이 충동을 받고 땅 끝에서 일어날 겁니다. 그들은 활과 투창을 가졌으며 잔인하고 긍휼함이 없습니다. 바다의 설레임같은 그들의 목소리… 그들이 이미 바벨론 앞에 대열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의 손이 약해져서 고통에 사로잡힌 해산하는 여인처럼 될 겁니다.

요단의 깊은 숲에서 나온 사자… 그같은 자가 견고한 처소를 칠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거기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세우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아무도 이를 만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대해 계획을 갖고 계시고,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 대해 생각을 품고 계십니다. 바벨론과 갈대아의 대적들은 어린 양뜰을 끌어가고 초장을 황폐하게 만들 겁니다. 바벨론이 약탈 당하는 소리에 땅에 진동하고 그 부르짖음이 많은 나라들 가운데 들릴 겁니다.  

팁)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고학적 발굴 중 가장 오래 된 것이 수메르 문명의 것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수메르 문명은 주전 4천 년 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긴 것이지요.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에서 사람이 산 것은 12만 년 전 부터라고 합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의 후손들 가운데 수메르란 이름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수메르의 기록으로 성경의 기록을 가짜라 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요. 성경의 기록을 수메르 인들이 왜곡했을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메소포타미아와 하나님의 말씀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 2.10-14.

힛데겔은 앗수르 동쪽을 흐르니 티그리스 강을 말하고, 유브라데는 유프라테스 강을 말한답니다. 길이 2,800킬로미터의 유프라테스 강은 터키 동쪽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수량의 90%가 터키 산입니다. 길이 1,900킬로미터의 티그리스 강은 아나톨리아의 토로스 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디야르 바키르를 지나 이라크로 들어와서 자그로스 산맥 서남쪽 산자락을 따라 흐르다가 키르쿠크 유전과 모술과 바그다드를 지납니다. 이후 이 두 강들은 알쿠르나에서 합쳐져 ‘샤트알아랍’이란 이름으로 걸프 만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에덴 동산에서 발원하는 4개의 강들 가운데서 두 개가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흐른다… 이것은 이 설화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생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갈대아 우르 출신의 아브라함도 이 설화를 알고 있었고 그의 후손들에게 에덴 동산의 설화를 이야기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유다의 후손인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곳을 황금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덴에서 나오는 첫 번째 강 비손이 둘렀던 하윌라 땅을 생각나게 합니다. 순금의 땅이요, 베델리엄이라는 향료도 있었고 호마노라는 마노석의 보석도 있는 땅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식솔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히브리’인이 된 것은 하윌라 땅에 가기 위함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 땅은 아니었지요. 구스로 갈 수 있는 이집트는 하윌라가 아니라 기혼 강이 흐르는 곳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생성된 설화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있었는데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 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주변 나라들이 인공위성까지 띄워서 방주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물론 메소포타미아에서 생성된 설화들은 수메르 인들, 아카드 인들, 아람 인들, 아모리 인들, 앗수르 인들, 메데 인들, 엘람 인들, 그리고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서 각색이 되고 보급이 되었을 겁니다. 아람 인 중 갈대아 인이었던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와서 살면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에다 모세의 이야기를 보탰지요. 그리고 신 바벨론 시대에 유대인들에 의해 토라가 편집이 되고 편찬이 되었습니다.

 

---

내 백성을 위해 그들을 불안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 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사람들은 불안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말 번역이 그렇습니다. 히브리 번역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땅을 치유하시지만 바벨론에 사는 사람들은 벌벌 떨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수 천 명은 바벨론으로 잡혀와 학대를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 중 대다수는 아직도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치유를 받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결단에 따라 생겨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야곱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 야곱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 사람들과 함께 이집트를 떠난 중다한 잡족들을 포함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런 꿈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지시를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높이 평가 합니다. 하지만 이 대목을 유대인의 시각에서 깊이 들여다 보면, 거기에 아브라함의 순수한 용기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람 사람이었고, 그 중에서도 갈대아 족에 속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종교적인 도시로 또한 학문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갈대아 족속에게 그런 DNA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도 종교적인 열정이 있고 또한 학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았던 때를 대략 주전 2천 년 경으로 추정합니다. 지금으로 부터 4천 년 전이 되겠습니다. 이때 갈대아 우르가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수메르 문명이 말기에 접어들고 이를 대체 할 아카드 문명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을 잠재우고 아카드 문명을 세우기 시작한 사람은 아카드 인인 사르곤 왕이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250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사르곤이란 이름이 훗날 앗수르 왕에게도 붙여졌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르곤 왕이란 이름이 나오면 이게 아카드 인인지 앗수르 인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와 가까운 사르곤 왕은 아카드 사람입니다. 아카드 왕 사르곤은 태어나자마자 갈대 상자에 넣어져서 유프라테스 강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 구조되었고 왕궁의 정원사가 되었다가 왕이 되었다고 하지요. 이 때문에 모세가 태어난 후 갈대 상자에 넣어져서 나일 강에 버려졌다는 이야기는 사르곤 왕의 이야기를 베낀 거라고 하지요. 하지만 사르곤 왕의 갈대 상자 이야기는 모세보다 훨씬 후에 나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모세 이야기를 사르곤 왕의 이야기에 끼어 넣은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의 권위가 낮아지겠기 때문이지요. 이런 게 참 많습니다.

아카드 왕 사르곤에 의해서 시작된 이 아카드 제국을 우리는 고 바벨론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르곤 왕으로부터 250년 후에 아브라함이 나타났고, 아브라함으로 부터 250년 후에 아모리인으로 바벨론의 왕이 된 함무라비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아카드의 사르곤 왕으로 부터 500년 후에 고 바벨론 제국의 왕권은 아카드 인에서 아모리 인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아모리 인들 가운데 일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끈질기게 저지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 이런 자들이 다 함무라비와 피를 같이 하는 아모리 족속입니다. 아모리 인의 바벨론 제국은 함무라비 왕으로 부터 시작이 됩니다. 함무라비 왕 부터 고 바벨론 제국 제 3기라고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아브라함은 아카드의 사르곤 왕 보다 250년 후 태어났고, 아모리 의 함무라비 왕 보다는 250년 전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카드 인도 아니었고 아모리 인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람 족에 속한 갈대아 인이었습니다. 갈대아 인은 예레미야 시대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권력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르란 도시에 모여서 저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 이름을 갈대아 우르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갈대아 우르도 앗수르 인들의 핍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앗수르를 무너뜨린 사람이 바로 갈대아 사람 느부갓네살 2세였습니다. 이 사람의 나라를 신 바벨론이라 부릅니다.   

아무튼… 갈대아 우르는 고 바벨론 제국에서 종교의 도시요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종교라는 것은 마르둑을 경배하는 우싱 종교를 말합니다. 당시 아카드 인들은 마르둑을 창조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창조의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를 전 국민에게 보급하고 이것으로 마르둑 우상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에누마 엘리쉬의 내용은 지금 점토판 기록으로 남아 있어 우리가 그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카드 인의 마르둑 우상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단 말이지요. 아브라함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마르둑이란 우상을 경배하라는 에누마 엘리쉬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다른 창조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카드 이전에도 있었고, 수메르 이전에도 있었던 그 창조의 이야기… 싸움과 죽음으로 얼룩진 에누마 엘리쉬가 아니라 평화로운 창조의 이야기… 이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고 아브라함은 바로 이 창조의 이야기를 받아 들였을 겁니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내로라 하는 유명한 학자였다고 합니다. 특히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보고 가뭄과 홍수를 예측했는데 그 결과가 아주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르둑을 섬기는 고 바벨론의 왕들도 아브라함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아브라함은 하늘을 관찰하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둑을 섬기지 않으면 핍박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 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장 31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가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목표라는 것은 데라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하란에 머물렀고 그의 장남인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갔던 겁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게 아닙니다. 이 대목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에덴 동산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창세기 2장 8절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강이 흐르게 하셨는데 이것이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덴 동산에 발원지를 두고 강이 네 개나 생겼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강은 비손 강인데 하윌라 땅을 흘렀다고 합니다. 두 번째 강은 기혼 강인데 구스 온 땅을 둘렀다고 합니다. 세 번째 강은 힛데겔 강인데 앗수르 동쪽을 흘렀습니다. 앗수르 동쪽을 흐르는 강은 티그리스 강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힛데겔 강은 티그리스 강이 되는 겁니다. 네 번째 강은 유브라데 강입니다. 유브라데 강은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의 서쪽을 지나는 강입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발원하는 네 개의 강들 중에서 오로지 첫 번째 강이 흐르는 하윌라 땅에 대해서만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하윌라 땅은 금이 있는 곳인데 그 금은 모두 순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베델리엄이라고 하는 향료도 있었고, 호마노라는 마노석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노석은 많은 보석들이 함유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윌라 땅은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땅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가 하윌라 땅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번째 강인 힛데겔과 네 번째 강인 유브라데 강은 알고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힛데겔, 즉 티그리스 강이지요.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남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유브라데, 즉 유프라테스 강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강도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강은 기혼 강인데 구스 온 땅을 둘렀습니다. 구스는 북 아프리카에 있는 이디오피아와 수단을 말하지요. 이 지역을 흐르는 강은 나일 강입니다. 그런데 하윌라 땅을 흐르는 비손 강은 어디인가…   

아브라함은 에덴 동산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북쪽에 있는 티그리스 강을 건너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니므롯 우상을 섬기고 있는 앗수르 인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다고 메소포타미아의 동쪽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산악지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메소포타미아의 서쪽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지중해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남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란에다 아버지와 동생을 두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대아 인이란 이름 대신 히브리 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히브리 인이란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강을 건넌 사람들이란 이름 속에는 비손 강이 흐르는 하윌라 땅을 찾는 사람들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 이야기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추정을 해보는 것은 예루살렘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은 뒤, 거기에다 성전과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금과 보석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이것으로 예루살렘을 황금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을 황금의 도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건물을 황금 돔 사원이라고 하지요. 이전에는 이 돔에다 60만 근의 황금을 붙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 약탈 당하고 지금은 금 도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예루살렘을 황금의 도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황금의 도시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예쁜 예루살렘의 석양 때문입니다. 이 석양 때문에 예루샬라임 쉘 자아브란 노래가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은 황금의 도시인데 너무 아름답다는 내용의 가사입니다. 저는 유대인들의 이런 표현이 비손 강이 둘렀던 하윌라 땅을 염원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통해서 배운 바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때 유달리 많은 순금을 동원해서 법궤와 메노라와 분향단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옷에 보석을 붙이라고 하셨고, 제물에 향유를 뿌리라 하셨지요. 그러고보니 금과 보석과 향유는 하윌라 땅을 언급할 때 모두 등장한 것들입니다. 순금, 베델리엄, 호마노… 모두 하윌라 땅에 있는 것들이지요. 결국 비손 강이 흘렀던 하윌라 땅은 에덴 동산으로 가기 위한 전 단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에덴 동산은커녕 하윌라 땅이라도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브라함도 그걸 알고 싶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정착했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건설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땅, 즉 에레쯔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면서 약 600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느부갓네살 2세가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 처럼 아람 인에 속한 갈대아 족이었습니다. 성과 본이 같은 사람이었단 말이지요. 결국 느부갓네살 2세는 가나안 남쪽에 있던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대인 중에서 엘리트 약 7천 명을 바벨론으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는  이스라엘의 꿈과 이상 뿐만 아니라 자기 선조에 속하는 아브라함의 꿈과 이상마저 짓밟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했던 선조들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선조들의 아름다운 생각을 칼과 창으로 짓밟아 버렸습니다. 참 괘씸한 일입니다. 그래서 갈대아 인과 바벨론 주민과 그 고관들과 지혜로운 자들 위에 칼이 떨어질 겁니다. 칼이, 자랑하는 자들 위에 떨어져서 어리석은 자로 만들고, 또한 칼이, 용사들 위에 떨어져 그들을 놀라게 할 겁니다. 칼이 말들과 병거들과 그들 중의 여러 민족들 위에 떨어져서 그들로 하여금 여인들 같이 되게 할 것이고, 칼이 보물 위에 떨어져서 그것이 약탈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물이 충분하고 땅이 기름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가뭄이 물 위에 내려서 그 물을 말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이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거기에 사막에서나 사는 짐승들이 살고, 승냥이는 덤으로 함께 살게 되고, 타조도 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주민이 없어지게 되고 대대로 살 자가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뒤엎어 고립무원으로 만드셨듯이 바벨론도 무인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서운 것을 보고 실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보 1면의 사진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서 함께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그 넓은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물이 이 정도만 남았습니다. 이 마저 유전으로 인해 마시기 어려운 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신 바벨론을 향해 한 민족이 북쪽에서 올 겁니다. 아마도 메데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느부갓네살 2세가 메데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메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메데가 아무리 그래도 메소포타미아는 메데의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메데의 준동을 보고 큰 나라와 여러 왕들이 충동을 받고 땅 끝에서 일어나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은 활과 투창을 가졌고 잔인하고 긍휼함이 없었습니다. 바다의 설레임같은 그들의 목소리… 그들은 이미 바벨론 앞에 대열을 갖추고 섰습니다. 저는 이것을 페르시아와 엘람의 연합군으로 봅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의 손이 약해져서 고통에 사로잡힌 해산하는 여인처럼 될 겁니다. 요단의 깊은 숲에서 나온 사자… 그 사자같은 자가 바벨론의 견고한 처소를 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벨론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거기다 택한 자를 세우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아무도 이를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바벨론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고,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 대해 생각이 있으십니다. 바벨론이 약탈 당하는 소리에 땅에 진동하고 그 부르짖음이 많은 나라들 가운데 처절하게 들릴 겁니다. 바벨론과 갈대아의 대적들은 어린 양들을 끌어가고 그 아름다운 초장을 황폐하게 만들 겁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한 결과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은 그렇게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이렇게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예수님은 선생님과 제자, 주님과 종이란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계급을 나누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알세불이란 바알-제불, 즉 집 주인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입니다. 집 주인이 있으면 그 집 사람들도 있겠군요. 바알세불과 그 집 사람들… 이것도 역시 공동 운명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선생님이시고, 주님이시고, 또한 집 주인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제자이고, 종이고, 또한 집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2세에게 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든든하게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윌라 땅을 찾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도착했지만, 여기가 아닌가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이집트로 갈 수도 있지요. 거기 흐르는 나일 강을 보고 이게 기혼 강일거야… 그렇다면 구스는 어딜까… 이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으로 가는 길을 감추셨습니다. 게다가 천사들로 하여금 불칼을 들고 에덴 동산의 울타리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근본이 이러하거늘 우리가 어떻게 여기가 하윌라 땅이다, 좀 더 가면 에덴 동산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삶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는 북 왕국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 중 수 천 명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노예로 부려 먹을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그의 신 바벨론 제국은 멸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그 사람들은 결코 노예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이 태어났고 또한 토라가 편찬되었습니다. 거짓말이 횡행하는 바벨론에서 진리의 말씀을 편찬하는 것은 급선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루살렘에는 없었던 회당을 이곳저곳에 많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이게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는, 결국 몸과 영혼을 능히 살리실 수 있는 분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몸만 죽일 뿐이고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란 결국 희망이 없는 자들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살리는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과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또한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나는 아브라함처럼, 이스라엘 백성처럼, 실수에 실수를 거듭해도,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의 근본입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신 바벨론 제국의 멸망 이후 좋아졌는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후 메데의 신들이 들어왔고, 이후 페르시아의 신들이 들어왔고, 이후 헬라의 신들이 들어왔고, 이후 로마의 신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신들은 단순한 우상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가치관이었고, 또한 몸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의 지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토라를 손에 쥔 그들은 다른 가치관이나 다른 지식을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을 광명한 데서 말했습니다. 또한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했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 같은 자들이 이후에 많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을 학대했지만, 그들의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몸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 놀라 자빠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힘이 의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몸과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몸까지 살리심으로써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몸에 붙잡힌 우리는 몸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본 우리는 역시 몸과 영혼이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깨달아 지면 이방인의 신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방인의 신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윌라 땅 저 너머에 있는 에덴 동산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누리지 못한 행복입니다. 예수님과 하나인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지요.

벌써 11월 중순입니다. 올해도 한 달 반 남았습니다. 2021년 한 해를 돌아보기에 아주 적절한 시간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을 뽑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세어 봅시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후 우리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수 있겠지요.  

 

1) 아브라함의 가나안 행의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2) 동족인 느부갓네살 2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데려갔을까요?

3) 하나님의 백성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2021년 11월 7일

 

예레미야 50장 21-32절: [21]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올라가서 므라다임의 땅을 치며 브곳의 주민을 쳐서 진멸하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다하라 [22] 그 땅에 싸움의 소리와 큰 파멸이 있으리라 [23] 온 세계의 망치가 어찌 그리 꺾여 부서졌는고 바벨론이 어찌 그리 나라들 가운데 황무지가 되었는고 [24] 바벨론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여 걸렸고 네가 여호와와 싸웠으므로 발각되어 잡혔도다 [25] 여호와께서 그의 병기창을 열고 분노의 무기를 꺼냄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갈대아 사람의 땅에 행할 일이 있음이라 [26] 먼 곳에 있는 너희는 와서 그를 치고 그의 곳간을 열고 그것을 곡식더미처럼 쌓아 올려라 그를 진멸하고 남기지 말라 [27] 그의 황소를 다 죽이라 그를 도살하려 내려 보내라 그들에게 화 있도다 그들의 날 그 벌 받는 때가 이르렀음이로다 [28] 바벨론 땅에서 도피한 자의 소리여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보복하시는 것 그의 성전의 보복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소리로다 [29] 활 쏘는 자를 바벨론에 소집하라 활 당기는 자여 그 사면으로 진을 쳐서 피하는 자가 없게 하라 그가 일한 대로 갚고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라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라 [30] 그러므로 그 날에 장정들이 그 거리에 엎드러지겠고 군사들이 멸절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32]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그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리니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을 다 삼키리라.

마태복음 27장 15-26절: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으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싶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9-3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적들에게 므라다임 땅을 치고 브곳의 주민들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므라다임은 바벨론 남쪽 지역에 위치하는 지명이고 브곳은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아람 족속의 도시를 말한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이것은 워드 플레이로 므라다임은 히브리어로 ‘반란을 일으키다’란 뜻을 가지며 브곳은 ‘(벌을 주려고) 찾아가다’란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세계의 망치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벨론은 황무지가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하나님께서 쳐두신 올무에 걸렸고 하나님과 싸운 게 발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즉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끔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바벨론의 병기창을 여실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기를 꺼내 바벨론을 무찌를 것입니다. 대적들이 와서 바벨론의 곳간을 열고 그 안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릴 겁니다. 바벨론의 황소들도 다 도살이 될 겁니다. 바벨론 땅에서 도피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보복과 그의 성전이 보복하는 소리가 전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활 쏘는 자들과 활을 당기는 자들을 바벨론으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리고 바벨론 사람들을 철저하게 응징하실 겁니다. 그 응징의 날, 바벨론 장정들은 쓰러지겠고 군사들은 멸절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도장 꽝! 이제 그 날이 올 겁니다. 교만한 자가 그의 끝장을 보게 될 겁니다. 이제 그 교만한 자는 걸려 넘어지고 그를 일으켜 줄 수 있는 자는 없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바벨론의 성읍들에 불을 지르시겠지요. 그래서 바벨론 뿐만 아니라 그 주위가 다 소멸될 것입니다.

12만 년 전 부터 사람이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알 수 없는 먼 옛날 부터 이 지역에서는 농업기술과 관개기술이 발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행정적 정치적 기술도 발달했지요. 이 바탕 위에서 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나타나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과학의 수준은 이집트 문명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이 발전했습니다. 10진법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산물입니다. 갈대아 인의 종교적 심성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별들에 대한 연구를 촉진 시켰습니다. 법률도 발전했는데 그 근거가 주전 180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이 법전에 앞서 수메르 인의 법전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떠돌던 이야기들로 봐도 되지요.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이런 문명이 만들어 낸 신 바벨론 제국은 결국 하나님께 교만하여 대청소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요약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수메르 인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셈 어족에 속한다는 것 외에 다른 인종적 특징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메르 인이 세운 우르, 라가쉬의 역사는 주전 3천 년 이전에 시작 되었습니다. 이집트 보다 오래 된 역사인데, 도시마다 산처럼 쌓인 ‘지구라트’는 인공물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수메르 북쪽에 살던 아카드 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를 병합 했습니다. 이들이 세운 도시가 바로 바벨론 입니다. 이때 유명한 사람이 아카드 왕 사르곤 대왕이지요. 그리고 우르에는 아람 인 중 하나인 갈대아 족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이지요. 밧단아람과 우르는 아람 인 중에서도 갈대아 족의 본향이 되었습니다. 주전 1800년 경 부터 아모리 인의 피가 섞인 종족이 메소포타미아에 들어와 활기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곧 지방할거 시대로 들어가서 메소포타미아는 오랜 동안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백가쟁명의 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주전 12세기, 갈대아 족으로 추정되는 느브갓네살 1세가 바벨론 제국을 일으켰으며 이것을 구 바벨론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곧 사막에서 들어온 이민족의 침략으로 구 바벨론 제국은 쇄약해 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틈타 메소포타미아의 북쪽 도시 아쉬르를 중심으로 앗시리아가 일어났고, 주전 680-627년에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앗시리아는 오늘날 서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수 차례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여 그 힘을 약화시키도 했습니다. 또한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갈대아 인은 메데 인과 손을 잡고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를 멸망 시켰습니다. 메데는 메소포타미아 동북쪽에 있던 이민족으로 그 언어가 인도유럽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후 바벨론을 중심으로 바벨론 제국이 다시 일어났는데 이것을 신 바벨론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주전 625-539년에 존재했지요.

신 바벨론 제국은 4명의 왕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두 번째 왕인 느부갓네살 2세가 유명합니다. 그는 메데 인의 공주를 데려와 왕비로 삼았고 그의 아들에게 아카드의 권력자 니므롯의 이름을 중간 이름으로 넣었습니다. 이로 보아 느부갓네살 2세는 아브라함처럼 아람 인의 갈대아 족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드의 우상 문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민족인 메대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유다를 침략하여 무너뜨리고 수 천 명의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데려 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디아스포라 시대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신 바벨론 제국의 네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 벨사살 왕 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메데와 엘람이었습니다. 이후 페르시아가 들어왔지요.  

 

---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라

   

오늘도 예레미야의 신탁은 계속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므라다임을 치고 브곳의 주민들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므라다임과 브곳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므라다임과 브곳은 지명으로 생각이 되지만 사실 워드 플레이라고 합니다. 므라다임에서 므라는 쓰다란 의미를 가진 ‘마라’란 단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3절에 마라의 쓴 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 광야에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었습니다. 얼마나 목이 탔을까요. 그러다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맛이 써서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마라라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취해서 쓴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물을 마시고 해갈을 했습니다.

이런 쓴 물이 바벨론 남부에도 있었나 봅니다. 바벨론 지역은 북부가 산악지대이고 중부가 메마른 들판이고 남부는 늪지대라고 합니다. 늪지대는 페르시아 만에 접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강으로 역류해 들어 옵니다. 이런 이유로 물 맛이 짜게 되지요. 짠 것을 쓰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늪에서 역청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전이지요. 하지만 옛날에는 유전을 유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지요. 하나님은 그 곳을 므라다임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므라다임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바벨론 남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워드 플레이였습니다.  

이런 바벨론 남부가 사실은 바벨론 문화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강으로 바닷물이 역류해 들어와도, 역청 냄새가 극심해도 열심히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갈대로 배를 만들어서 역청으로 방수 작업을 한 후 타고 다니는 식이었지요. 하지만 바벨론 문명을 일으킨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산재해 있었지만,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여 권력을 움켜쥐는 자들이 행세를 했습니다. 바벨론 남부에서 출토된 점토판에 쓰여진 길가메스 서사시나 함무라비 법전 등은 바벨론 사람들이 얼마나 교만했는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바벨론 문명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을 떠받드는 문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적들에게 므라다임의 땅으로 올라가서 그들을 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문화를 결코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상 문화는 결국 하나님보다 특정한 사람들을 높이고, 그 특정한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납니다. 그래서 창조주가 되시고 구원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상 문화를 없애려고 하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므라다임을 치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이후에 하나님은 브곳의 주민을 쳐서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23장 23절에 따르면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들을 가리켜 갈대아의 모든 무리라 했습니다. 이들은 티그리스의 낮은 지역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사이에는 자그로스 산맥이라는 게 있습니다. 자그로스 산맥은 지금도 이라크와 이란의 자연적인 국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그로스 산맥 서쪽에는 브곳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에스겔이 언급한 소아와 고아 사람들도 이 일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국경을 지킨다는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을 지켰던 므낫세 사람들 같은 것이었지요. 브곳 주민들은 바벨론을 위해서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브곳 주민들이 진멸 된다면 바벨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페르시아가 침공할 때 막을 사람들이 없겠지요. 브곳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신탁은 페르시아에게 바벨론을 넘겨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벨론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신탁이었지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이것도 모자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잡아와 학대하는 바벨론… 하지만 하나님께서 몇 번이나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사람들의 창조주이시기도 하고 또한 구원의 주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뿌리쳤던 것일까요? 그들은 정말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그들을 지켜 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우상들이 그들의 문명을 지켜 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아마 그들도 그걸 믿지 않았을 겁니다. 우상들에게 힘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왜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현상유지를 원했던 겁니다. 기득권층의 기득권 유지만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좋은 문명은 위력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가 일어설 때 바벨론 사람들은 페르시아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결국 바벨론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에 싸움의 소리와 큰 파멸이 있으리라… 두려운 말씀입니다. 싸움 소리가 나고 파멸이 있으면 일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땅에 싸움의 소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큰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우상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무당의 말을 듣고 손바닥에 왕 자를 쓰는 자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 까불지 말라고 하는 방자한 자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무리를 지어 저들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일을 꾸미는 자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래서 큰 파멸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나타났을 때, 독일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복수를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조차 히틀러를 이용하기 위해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고 하지요. 수 많은 독일 사람들은 히틀러의 탈법 조치와 인명 살상을 묵과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만 아니라 시키지 않은 것도 자발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독일 청년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 학살이 괴로운 사람들은 동원에서 빠져도 좋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원에서 빠지겠다고 하는 청년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에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선진국인 독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이것을 사회심리학자들은 악의 평범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은 독일의 문제라기 보다 인간의 문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 멸망의 신탁을 발하셨을 때 바벨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주요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사람들은 우상 문화를 엄청나게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감성을 따르면서 다른 인간을 적으로 보며 도구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바벨론 사회도 결국 악의 평범성에 기인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가리켜 온 세계의 망치라고 하셨습니다. 파티쉬 콜 하-아레쯔… 망치를 파티쉬라 합니다. 파티쉬와 같은 말로 미케베트란 말도 있습니다. 마케베트를 마카비라고도 하지요. 마카비! 하면 하누카가 떠오릅니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하누카가 빨리 옵니다. 하누카가 늦을 때에 비하면 한 달이나 빨리 오는 셈입니다. 금년은 11월 28일 일몰에 하누카가 시작됩니다. 8일 동안 계속 되는 절기입니다. 주전 164년에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을 물리치고 성전을 탈환했습니다. 그때는 초막절로 부터 두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초막절에 성전을 탈환하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막절을 상기하며 메노라에 불을 붙이려 했습니다. 구석에 하루 분의 기름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기름도 귀중하여 메노라에 붓고 불을 붙였습니다. 하루만 지나면 메노라의 불이 꺼질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불이 여드레를 가더랍니다. 이걸 하누카의 기적이라고 하지요. 이후로 제2의 초막절이라 할 수 있는 하누카를 여드레 동안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마카비 장군이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태조 여로보암 1세는 초막절을 한 달 후에 지키면서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이것을 헤쉬반 15일의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이라 합니다. 이 때문에 여로보암 1세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마카비 장군은 두 달 열흘이나 늦은 초막절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유대인의 마지막 왕가인 하스모니안 왕가의 태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카비 장군의 마카비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망치, 즉 파티쉬와 같은 의미의 단어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전 세계의 망치로 삼아주셨습니다. 망치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엄청나게 큰 집도 지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그 망치가 제멋대로 놀다가 꺾여서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서 황무지로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오랜동안 바벨론이 전 세계의 망치로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 하는지 지켜 보셨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은 너무 교만해 지고 너무 도도해 지고 너무 무도해 졌습니다. 망치는 도구가 되어야지 흉기가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바벨론이란 망치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흉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걸 바벨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태도를 돌변하여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우상들이고, 하나님께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바벨론 사람들은 하나님께는 대들고 우상들에게는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화가 나신 하나님은 당신의 병기창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분노의 무기를 꺼내셨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병기창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분노의 무기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상황 종료가 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있는 자들을 동원하셨습니다.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한통속이 되었으니 불러서 일을 맡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바벨론을 치게 하시고 바벨론의 곳간을 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모든 것은 초토화 될 것 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황소들은 모조리 도살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벌 받는 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벌을 받는데 황소 자랑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시온에서 바벨론에게 보복하실 겁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짓밟은 것에 대해 보복하실 겁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시온이나 성전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아울러 하나님은 활 쏘는 자들과 활을 당기는 자들을 바벨론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전투에 능한 용사들을 바벨론을 멸망시키기 위해 불러들이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바벨론을 철저하게 응징하실 겁니다. 그 응징의 날, 바벨론 장정들은 쓰러지고 군사들은 멸절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망치였던 바벨론을 세계의 흉기로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도다.” 교만한 자는 넘어질 겁니다. 그러나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모든 성읍들을 불지르실 겁니다. 그리고 불은 그 주위에 있는 것들 까지 모두 삼켜버릴 겁니다.  

 

스위스에 루체른이란 도시가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로 로마 시대 부터 군 진영이 있었습니다. 또한 루체른은 19세기 중엽까지 스위스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루체른 중앙 공원에는 스위스 사람들의 용맹을 나타내는 빈사의 사자상이 있습니다. 온몸에 창상을 입은 사자가 죽어가면서도 그 위엄을 잃지 않는 모습이지요. 이 사자상 가까이 로이쓰 강이 흐릅니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차가운 물이 루체른 시내를 관통하는 로이쓰 강을 흘러서 루체른 호수로 들어가는데 이 로이쓰 강에 카펠교가 놓여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카펠교가 나무로 만든 다리들 중에 가장 크다고 합니다. 이 다리에서 루체른 사람들은 북쪽에서 온 쮜리히 사람들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이 루체른에 한스 큉이란 신학자가 살았습니다. 한스 큉은 교회론의 대가였는데 Die Kirche, Das Judentum 같은 명저를 남겼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분도출판사의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아주 분명하고 확신에 찬 글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금년 4월에 93세를 일기로 독일 튀빙엔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2년쯤 튀빙엔에서 입원치료를 했다고 합니다.  

한스 큉이 살던 루체른의 남서쪽에 큰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필라투스 입니다. 본래 이름은 필라투스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필라투스라고 합니다. 높이가 해발 2,128미터나 됩니다. 하지만 정상까지 기차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정상에는 만년설이 있고, 호텔이 두 개나 있습니다. 저는 호텔 기념품 가계에서 모자를 하나 산 적이 있지요. 필라투스 정상에 올라서면 동북쪽으로 파란 루체른 호수가 보이고 그 너머로 그림같은 루체른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필라투스 산의 필라투스… 그 이름이 왠지 익숙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빌라도라 하고 영어로는 파일레이트라 하는 그 이름… 이걸 독일어로 필라투스라고 발음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준 바로 그 빌라도 총독을 말하는 것입니다. 루체른의 필라투스 산은 빌라도 총독과 관련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몇 년 더 유대 총독으로 근무 했습니다. 그러다 유대인의 왕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그를 중상모략을 했는데 이게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주후 36년에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빌라도가 로마로 가고 있는데 소위 황제의 밀정이란 자가 와서 황제는 네가 자살 하기를 원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다고 하지요. 타의로 자살한 빌라도…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의 시신은 로마로 가는 강 둑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강이 매년 범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게 빌라도의 망령 때문이라고 황제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빌라도의 시신을 수습해서 북방 변두리에 갖다 버리라고 했답니다. 로마 군인들은 빌라도의 시신을 가지고 북방으로 가서 국경의 어디엔가에다 버렸다고 합니다. 이게 훗날 필라투스 산 정상에 있는 호수로 밝혀졌지요. 그래서 산 이름이 필라투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시체가 버려진 정상의 호수는 16세기에 이르러 루체른에 있던 수도사들이 없앴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죽은 빌라도가 참 억울해 할 거 같습니다. 내가 예수를 죽였나?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 한 게 아닌가? 나도 예수를 살리고 싶었고 그래서 바라바를 대신 죽이면 안될까…하고 유대인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던가… 그때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나?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아내의 권유도 있고 해서 관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 앞에서 물로 손을 씻지 않았냐 이 말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소리 질렀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사정이 이러 하거늘, 나는 어째서 영원히 저주 받는 영혼이 되었단 말인가… 지금도 수 십 억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매 주일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하지 않는가… 이건 나를 계속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도 많이 저질렀단 말이냐… 히틀러 보다 많이 저질렀어? 징기스칸 보다 많이 저질렀어?

루체른 대학의 정원에 서서, 남서쪽에 있는 필라투스 산을 바라 봤을 한스 큉… 이게 뭐 한두 번이었을까요? 필라투스 산을 바라보면서 한스 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 지는 그의 책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그의 생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발트를 존경했고 그의 사상을 많이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베네딕트 16세가 된 라찡어 추기경에 의해서 파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스 큉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더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말을 듣고 손을 씻는 매우 비겁한 행동으로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마무리 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런 소극적인 행동은 영원한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이 정말로 필라투스 산정에 묻혀 있는지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빌라도가 우리에게 던진 숙제입니다. 그리고 한스 큉은 최선을 다해서 그 숙제를 해내려고 했단 말이지요. 이것이 시골뜨기 학생을 세계적인 학자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내놓고 영원한 저주를 샀지만 한스 큉은 그런 빌라도를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한스 큉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후일을 아시는 유일한 존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주가 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고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분이 우리에게 무엇이라 명령을 하신다면 우리는 그 명령에 충성을 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스 큉은 필라투스 산을 보면서 빌라도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로마의 교리나 교황의 명령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중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그의 말과 그의 책은 이 세상에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또한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나오는 바벨론 사람들은 빌라도 처럼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신 바벨론 제국이 생겨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참으로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이 수메르 사람이든, 아카드 사람이든, 아모리 사람이든, 앗수르 사람이든, 아람 사람이든, 아람 인 중 갈대아 족이든,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점토판에 쓰거나 또는 돌에 새겨서 후대가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 출신의 아브라함도 이것을 봤겠지요.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왔을 겁니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 등 그의 후손들에게 그 말씀을 전했을 겁니다.

신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2세는 유대인들을 수 천 명이나 잡아갔습니다. 바벨론에 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바벨론에  산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해서 토라 두루마리를 편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반드시 좋았을 겁니다. 사실 토라 두루마리 편찬은 유대인들이 이룬 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금까지 인정하고 계신 유일무이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토라 두루마리는 결국 성경이 되어 지금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빌라도에게 바나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토라 두루마리를 편찬하는 유대인들을 보고도 신 바벨론의 왕들은 결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왕들, 즉 느부갓네살 2세와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힘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을 이용하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분수에 지나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이나 위협이 되긴 했지만, 모범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을 오로지 세금을 내는 도구로, 전쟁에 필요한 도구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바벨론 왕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도 이스라엘 백성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오는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앞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벨론의 유대인들 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뭐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갈 때가지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요. 빌라도 처럼 기회주의적으로 살아봤자 영원히 저주 받는 인생이 될 뿐입니다. 필라투스 산을 바라보며 교회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던 한스 큉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한스 큉 처럼 삽시다.  

 

1) 아람 인의 갈대아 족에 대해 알아 봅시다.

2)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 알아 봅시다.

3) 신 바벨론 제국이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2021년 10월 31일

 

예레미야 50장 11-20절: [11] 나의 소유를 노략하는 자여 너희가 즐거워 하며 기뻐하고 타작하는 송아지 같이 발굽을 구르며 군마 같이 우는도다 [12]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13]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주민이 없어 완전히 황무지가 될 것이라 바벨론을 지나가는 자마다 그 모든 재난에 놀라며 탄식하리로다 [14] 바벨론을 둘러 대열을 벌이고 활을 당기는 모든 자여 화살을 아끼지 말고 쏘라 그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15] 그 주위에서 고함을 지르리로다 그가 항복하였고 그 요새는 무너졌고 그 성벽은 허물어졌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내리시는 보복이라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는도다 [16] 파종하는 자와 추수 때에 낫을 잡은 자를 바벨론에서 끊어 버리라 사람들이 그 압박하는 칼을 두려워하여 작기 동족에게 돌아가며 고향으로 도망하리라 [17]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뼈를 꺾도다 [1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19]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양을 기를 것이며 그의 마음이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리라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요한복음 14장 25-31절: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9-2  바벨론에 대하여

 

바벨론은 이스라엘(유다)를 노략하며 타작 마당의 송아지 처럼 방방 뛰며 즐거워 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강한 전투 말처럼 히힝 거리며 잘난 체를 했습니다. 이런 우스운 바벨론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낳은 자에게 수치와 치욕을 안겨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났지요. 따라서 메소포타미아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름진 땅이 광야가 되고 마른 땅이 되고 거친 계곡이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이런 변동은 손 바닥을 뒤짚는 것과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주민이 없어지고 황무지가 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지나가는 자마다 그 모든 재난에 놀라며 탄식할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예레미야의 신탁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에돔에게 그랬고 암몬에게 그랬습니다. 이제는 바벨론 차례가 되겠습니다. 바벨론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벨론을 둘러싸고 활을 쏘겠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실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유다에 대해 너희가 범죄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너희를 때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벨론의 생각이었고 실은 바벨론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를 때렸기 때문입니다. 어디라고 함부로…

바벨론 주위에서 바벨론을 대적하는 자들이 고함을 지를 겁니다. 아마 승리의 고함일 겁니다. 바벨론이 항복했고 바벨론 요새가 무너졌고 성벽이 허물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유다에 행한 것과 똑 같이 앙갚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보복이었습니다. 이제 메소포타미아에서 파종하는 자와 추수하는 자를 보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각기 동족에게 돌아가고 고향으로 돌아가겠기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명의 선진 땅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황무지가 되었거든요.

여기서 다시 하나님의 탄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흩어진 양이라 하신 겁니다. 사자들이 이스라엘을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자들은 앗수르 왕이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되겠습니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을 먹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의 뼈를 꺾었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가게 하리라.” 이제 갈멜과 바산이 양의 목장이 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과 길르앗 산에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오라클)로 알 수 있는 것들  

 

예레미야 선지자는 신 바벨론 시대를 산 사람이지만 그 제국이 그에게 무슨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결국 예레미야 서를 통해서 그를 이해할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서를 읽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신학적 시오니즘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오라클’의 헬라어 및 히브리어 번역과 편집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 많은 민족과 나라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표시하는 곳이 어딘지 찾는 게 쉽지 않네요. 아랍어를 뚫어야 하고 헬라어를 뚫어야 하고 각 지역의 셈어를 뚫어야 합니다. 이후에 확실한 땅을 파야 합니다. 땅 속도 켜켜이 쌓인 먼지가 많습니다.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야 조금 판독이 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서의 오라클 부분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팔레스틴 사람들이 누구인지 의문을 갖습니다. 크레타 섬에서 이주한 블레셋 사람들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하맛, 아르밧, 이스라엘, 유다,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갈대아 우르… 이 사람들 다 아람 족의 갈대아 사람들 같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심각한 멸망을 선포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실 바벨탑 사건은 갈대아 사람들의 소행은 아니었습니다. 앗수르를 멸망시킨 신 바빌로니아가 훗날 메데와 엘람에 점령되고 이어 페르시아에 먹힌 것은 예레미야 서를 읽는 우리에게 어떤 경각심을 심어 주나요? 도대체 무슬림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중국과 일본 사이에 사는 한국인으로 매우 다양한 생각을 가져 봅니다.

 

--- 

하나님이 허락 하신 곳에서 만족하리라

   

오늘은 제 504 주년 종교개혁기념일 입니다. 신학교에서는 1주일 전부터 종교개혁기념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마틴 루터는 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안일 속에서 하루하루 보신하며 살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틴 루터와 같은 사람들을 여럿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사람들처럼 살라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이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목자의 책임을 물으시자 군말 않고 미스바 공동체 사람들을 따라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다 뼈를 묻었습니다. 이집트는 아브라함과 야곱과 또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를 경험한 땅이었습니다. 미스바 공동체 사람들도 이집트에서 실패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목자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도 바벨론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벨론은 신 바벨론을 말합니다. 신 바벨론은 남 왕국 유다를 노략하며 타작 마당의 송아지 처럼 방방 뛰며 즐거워 했습니다. 또는 강한 전투 말처럼 히힝 거리며 잘난 체를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바벨론 처럼 위대한 제국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게 나대는 바벨론 제국이 괘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낳은 자에게 수치와 치욕을 안겨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을 누가 낳았습니까? 메소포타미아 땅이 낳았지요.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가 치욕을 안게 될 것입니다. 그 기름진 땅이 광야가 되고 마른 땅이 되고 거친 계곡이 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광야가 되었고 마른 땅이 되었으며 거친 계곡이 되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 물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 사이에 끼여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사람이 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게 2500년 전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기름진 땅이 황무지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살던 사람들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들린 사람들은 그 모습에 놀라며 탄식했습니다. 물론 그런 탄식은 에돔에게도 있었고, 또한 암몬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모습은 참담했습니다. 그렇게나 강하던 바벨론 제국은 포위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적하는 자들이 바벨론을 향해서 활을 쏘아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실을 아끼지 말고 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완전히 없애 버릴 생각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여호와께 범죄했다니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지난 주에 우리는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징벌하셨다고 듣지 않았던가… 그렇지요. 바벨론은 남 왕국 유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범죄 했기 때문에 우리가 너희를 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하려거든 우리를 원망하지 말고 너희 하나님을 원망하라.” 그래서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게 멸망했듯이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이 여호와께 범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유다를 때렸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때린 것은 여호와께 범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변의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바벨론을 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바벨론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신탁에 들어 있는 모순을 발견합니다. 언제는 유다를 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언제는 유다를 친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인가…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의 바벨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지만, 갈대아 우르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던 갈대아 족은 예레미야 시대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패권을 차지하자마자 아카드 인이 세운 유서 깊은 도시 바벨론을 점령하고 그 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노쇄한 패자 앗수르 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갈대아 족은 메대와 엘람 등의 도움을 받아 주전 627년에 당시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함락시키고 앗수르 제국을 멸망 시켰습니다. 이때는 앗수르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95년이 지나는 시점이었습니다.

갈대아 족은 2년 후에 드디어 바벨론 제국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 바벨론 제국의 첫 번째 왕은 나보폴라쌀 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바로 느부갓네살 이었습니다. 이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장본인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을 가리켜 역사가들은 느부갓네살 2세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1200년 경에 메소포타미아에는 바벨론 제국이 또 있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갈대아 족의 나라였습니다. 이 바벨론 제국을 가리켜 고 바벨론 제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 바벨론 제국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느부갓네살이었는데 이 사람을 가리켜 역사가들은 느부갓네살 1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1세와 느부갓네살 2세 사이에는 600년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1세는 고 바벨론 제국의 왕이고, 느부갓네살 2세는 신 바벨론 제국의 왕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시대의 바벨론 제국은 신 바벨론 제국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둘 다 아람 인들 중 갈대아 족속에 속하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기억해 두어야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다룰 때 혼돈을 피할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1세가 힘을 쓰던 주전 1200년 경은, 구 바벨론 시대는, 출애굽 시대였고, 아울러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시대였습니다. 람세스 2세는 아나톨리아에 근거지를 둔 히타이트 족과 평화를 이루어 갔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전 1200년 경의 구 바벨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보다 600년 앞 선 시대입니다.

구 바벨론 시대로 추정되는 시기의 이야기 하나가 민수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빌람에 대한 이야기지요. 그는 브올의 아들이라 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계곡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빌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그러니까 주전 1200년 경, 예레미야 보다 600년 앞 선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바벨탑을 쌓았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실린 사진이 바로 바벨론 지역에 있는 바벨탑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에게 아람 인 갈대아 족의 신관은 특이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구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제국을 재건한 나보폴라싸르 왕은 쉽게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나보폴라싸르는 그의 제국이 오래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선조의 이름을 그의 아들에게 붙여주었습니다. 바로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을 말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2세… 그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갈대아 족들에게, 더 나아가서 아람 사람들에게 희망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느부갓네살 2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선대했고, 그다랴를 유다 총독으로 세우고 미스바 공동체를 유지하게 했습니다. 그다랴 시해 사건 이후에도 느부갓네살 2세는 유대인들이 우려 했던 그런 강압 조치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잡아간 수 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활동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토라를 편찬하고 회당을 세우고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힘 쓸 수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공부하다보면 대개 유대인들과 관계된 부분이 부각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기독교와 관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적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후세에 설명하는 데에 있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노력이 컸단 말이지요. 메소포타미아에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서로 먹고 먹히는 데에 급급했지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소홀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 문명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는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게 힘, 즉 군사력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는 유대인들의 경건한 신앙과 거룩한 삶을 보고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완악했고 세속적이었으며 정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메대의 공주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에게 니므롯이란 중간 이름을 더했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니므롯은 하란을 죽이고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게 사람입니다. 아카드 인의 악명 높은 독재자 입니다. 바벨탑을 세운 자도 니므롯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니므롯은 여러가지 의미로 유행했던 이름이었습니다. 이런 이름을 아들에게 준 느부갓네살 2세의 영성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 바벨론 제국은 86년 동안 지속하다가 4대 왕인 벨사살에 이르러 메데 인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벨사살은 외가쪽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신 바벨론 제국은 주전 539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지 47년 만이었습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은 메데 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메데 인은 인도유럽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메르, 아카드, 아람, 앗수르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셈 어를 쓰는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던 메소포타미아는 인도유럽어를 쓰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의 신탁에 나타난 모순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 바벨론 제국이 남 왕국 유다를 쳐서 멸망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불신앙과 불경건함을 하나님께서는 신 바벨론 제국을 통해 응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 바벨론 제국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삶을 보고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 바벨론 제국이 유다를 두 번째로 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유대인들을 신 바벨론 제국의 복판에 갖다 놓으신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신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신 바벨론 제국을 괘씸하게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메대를 통해 징벌하셨습니다. 메대는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2세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벨론에 대한 예레미야의 신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순이라 생각했던 그 모순도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바벨론에 대한 신탁에 따르면, 멸망의 그 날, 바벨론 주위에서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나 고함을 지를 겁니다. 그 고함은 그들의 승리를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이 항복했고, 바벨론 요새가 무너졌으며, 바벨론 성벽이 허물어 졌다고 알리는 고함이었습니다. 대적하는 자들은 바벨론이 유다에게 했던 것과 똑 같이 바벨론에게 앙갚음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은 신 바벨론 제국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보복이 될 것 입니다. 이제 메소포타미아에서 파종하는 자와 추수하는 자를 보지 못하게 될 겁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살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고, 또한 고향으로 돌아갈 것 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땅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땅은 황무지로 변하는 겁니다. 그리고 잠시만 황무지로 변하는 게 아닙니다. 영원히 황무지로 변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라크와 시리아 땅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이 신탁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신탁은 현재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가리켜 흩어진 양이라 하셨습니다. 삯군 목자들이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부분이지요. 그래서 그는 이집트로 가서 유대인들 곁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기 때문에 사자들이 그들을 따른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사자들은 앗수르 왕과 같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을 먹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의 뼈를 꺾었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그의 목장으로 가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갈멜과 바산으로 가서 거기다 목장을 마련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멜은 이스라엘의 서쪽에 있는 산이고 바산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는 산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에브라임과 길르앗에서 만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브라임은 갈멜에서 가깝고 길르앗은 바산에서 가깝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땅이 시작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디자인 하신 바로 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 비하면 매우 작고 좁은 땅입니다. 하지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므로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 돌아갈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 수 없는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날이 언제란 말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를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돕는 자란 뜻이지요. 성령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설명해 주시는 분이고, 또한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평안은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에이레네는 히브리어의 샬롬을 직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이레네 또는 샬롬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같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파워 밸런스 입니다. 세력 균형이란 말이지요. 내 쪽에서 처들어 가면 저 쪽에서도 처들어 오기 때문에 서로 손해가 됩니다. 그래서 피차 처들어 가지 않는 겁니다. 이게 세력 균형이고 이게 세상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군사력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에이레네는, 샬롬은, 세력 균형의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임금에 대해 관계할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임금과 관계가 없는 것이지 세상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명하신 것을, 예수님이 직접 실천하시는 것을 또한 세상이 알게 하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그 평화는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10월 29일 로마의 산티냐시오 성당에서는 136개의 십자가가 진열되고 사이사이에 촛불이 켜졌습니다. 136개의 십자가는 휴전선의 철조망으로 만든 것으로 분단의 아픔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청와대가 이에 대한 사진을 몇 장 발표했는데 마음이 뭉클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저런 퍼포먼스를 서울에 있는 개신교 예배당에서는 할 수 없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개신교회들 가운데는 남북대화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런 퍼포먼스를 정권연장 획책이라고 비난 하기도 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이북을 지옥으로 만든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는 하나님을 배격하는 사탄이기 때문에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때려 눕히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이게 개신교의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도 6.25를 경험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있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오늘은 10월 31일 입니다. 정확하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일이 되겠습니다. 504주년이 되겠네요. 오늘도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 안에 있는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의 관 앞에서는 종교개혁 기념예배가 있겠지요. 왜 우리는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비텐베르크 성당의 종교개혁 기념예배에 관심을 가질까요? 솔라 스크립투라! 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것은 성경 말씀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직 말씀만!으로 받아들입니다. 오직 말씀만!이란 슬로건은 종교개혁자들이 내걸었던 순수하고 거룩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도 그 순수함과 거룩한 태도를 본 받고 싶은 거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말씀만!이란 슬로건을 다시 드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슬로건을 들기에 우리로서는 참 생각할 게 많은 것 같습니다. 뭔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들이 우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복잡한 것들을 떨쳐 버리고 순수하게 솔라 스크립투라!, 즉 오직 말씀만!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레위기 공부를 통해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하나님은 광야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메추라기를 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부터 받은 예물 가운데 조류는 비둘기가 유일 했습니다. 메추라기는 빠져 있었단 말이지요. 옛날 비둘기는 작아서 메추라기나 비둘기나 비슷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둘기보다 닭을 더 좋아했습니다. 오리와 거위도 좋아했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조류로는 오로지 비둘기만 예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로 주신 것과 예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를 바쳐도 집 비둘기나 산 비둘기 중에서 새끼를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비둘기는 메추라기 정도로 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새끼라면 또 얼마나 더 작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신 것은 새끼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비둘기 고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비둘기 고기를 좋아했습니다. 당연히 새끼보다 성체가 먹기에 좋았겠지요. 그리고 비둘기도 집 비둘기가 있고 산 비둘기가 있고 그 사이에 잡 비둘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셋 중에서도 잡 비둘기 성체의 고기가 가장 맛이 있다고 합니다. 잡 비둘기란 집 비둘기와 산 비둘기 사이에서 생겨난 종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물로 바치는 비둘기는 오로지 집 비둘기와 산 비둘기 중에서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잡종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제한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경건이 되고 거룩이 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 즉 말씀만!이란 슬로건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자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이 경건이고 이것이 거룩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는 왜 합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바에야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없지요.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시나… 이것을 알기 위함 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요. 평안이 없으면 성경공부를 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은혜를 구가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예물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집 비둘기나 산 비둘기 새끼를 바치라고 하셨는데, 나는 잡 비둘기 성체를 바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하나님도 가장 맛있어 하실거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무진장 누리면서도 자꾸 이런 실수를 범합니다. 그러면서 경건과 거룩에서 멀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딱 부러지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이 경건이고 거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가들이 지녔던 신앙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의 신앙에 따르면 우리는 북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북한 사람들을 사탄이라고 하면서 사탄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원수입니까? 그들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서울의 개신교 예배당에는 철조망으로 만든 십자가를 놓아둘 수 없는 걸까요? 그건 형식이기 때문에? 그럼 내용은 충실한가요? 여러가지 의문을 낳는 종교개혁기념일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권면대로 마음에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신 에이레네, 샬롬, 즉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말씀만!을 생각하며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속에 살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1)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먹히고 뼈가 꺾이도록 두신 이유는?

3) 이스라엘이 만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021년 10월 24일

 

예레미야 50장 1-10절: [01]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02]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03] 이는 한 나라가 북쪽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게 하여 그 가운데에 사는 자가 없게 할 것임이라 사람이나 짐승이 다 도망할 것임이니라 [0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유다 자손도 함께 돌아오되 그들이 울면서 그 길을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0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라 하리라 [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07] 그들을 만나는 자들은 그들을 삼키며 그의 대적은 말하기를 그들이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그의 조상들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인즉 우리는 무죄하다 하였느니라 [08]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나오라 양 떼에 앞서가는 숫염소 같이 하라 [09] 보라 내가 큰 민족의 무리를 북쪽에서 올라오게 하여 바벨론을 대항하게 하리니 그들이 대열을 벌이고 쳐서 정복할 것이라 그들의 화살은 노련한 용사의 화살 같아서 허공을 치지 아니하리라 [10] 갈대아가 약탈을 당할 것이라 그를 약탈하는 자마다 만족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9-1  바벨론에 대하여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있는 도시로 수메르 인과 아카드 인이 살았는데 여기서 발흥한 나라가 바빌로니아 제국 입니다. 갈대아는 바벨론 보다 더 (유프라테스 강)하류에 위치한 ‘우르’란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르를 갈대아 우르라고 부릅니다. 갈대아 인들은 아람 족의 한 갈래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우르’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6장 25절은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르의 갈대아 인들은 천문학을 좋아했고 이와 관련한 많은 학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즈음하여 우르의 갈대아 인들이 바벨론 사람들을 누르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 했는데 이것을 역사학계에서는 ‘신 바빌로니아’라고 부릅니다. 사실 앗수르에 멸망한 아람 제국이 부활한 것이지요. 이후 갈대아는 바벨론과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 바빌로니아는 메데와 엘람 등의 견제를 받다가 결국 메데와 엘람을 흡수한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최고 우상은 벨(Bel)인데 주인 또는 제왕이란 의미의 바벨론 수호 신으로 가나안의 바알(Baal)과 같은 신이며 ‘마르둑’이라고도 합니다. 마르둑을 히브리어로 ‘므로닥’이라고 발음 합니다. 벨을 네르갈 탐무스와 함께 바벨론의 세 가지 중요한 신들이라 합니다. 벨은 가장 중요한 태양신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우상들이 수치를 당하고 부스러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은 북쪽에서 온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시온으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리라…고 울부짖으면서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 칭하시면서 그들을 잃어 버린 양 떼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을 잘 못 만나 돌고 돌며 쉴 곳도 잊었습니다. 심지어 대적들에게조차 하나님께 범죄해서 벌을 받는다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갈대아 인의 땅에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과거 아브라함이 들었던 음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벨론은 심판에 직면하게 되고 곧 멸망하게 될 것 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를 강탈해 갔습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할 것 입니다. 바벨론에 주민이 없어질 겁니다. 평화롭게 농사 짓는 자도 없어질 것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다시 그들의 목장으로 돌아갑니다. 갈멜과 바산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에브라임과 길르앗으로 돌아갑니다.     

 

바벨론과 갈대아

 

갈대아는 아카드어로 ‘칼두’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카스딤’이라 하는데 아람 족의 한 부류 입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늪 지대나 호수 지대에 살면서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찌감치 아라비아 북부와 페르시아 만 사이에 정착해서 살았고 ‘우르’를 중심 도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우르를 ‘갈대아 우르’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전 800년 경에 한 동안 앗수르를 섬기다가 제후 므로닥발라단이 일시적으로 바벨론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사 39장 참고. 느브갓네살 2세의 아버지 나보폴랏살 시대에 이들은 신 바벨론 제국을 세웠지요. 이때 부터 갈대아란 말과 바벨론이란 말이 같은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의 제사장들 가운데는 천문학적 점성술에 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사람이라고 하면 점성술사와 천문학자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 출신의 갈대아 사람으로 천문학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을 관찰하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지요.

바벨론은 아카드어 ‘바빌로니아’의 우리식 음역입니다. 바빌로니아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과 아카드 인이 연합하여 세운 왕국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이라 할 만큼 기름지고 경작하기 쉬운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통팔달의 교통망으로 인해 일찌감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는 ‘바빌론’이란 도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 국호가 생겼다고 합니다. 바빌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주전 23세기에 제작된 점토판으로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왕의 치적을 적은 것이라 합니다.  

주전 612년 바빌로니아는 메데와 함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격하여 궤멸 시켰습니다. 이후 느부갓네살 2세는 주전 586년에 유다를 멸망시켰고 주전 585년에는 페니키아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주전 567년에는 이집트를 공격했습니다. 주전 539년 엘람 왕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공격하여 궤멸 시켰습니다. 이때 바빌로니아의 내부 분열과 유대인들의 도움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람의 피를 받은 왕들이 지배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정복자로서 바빌론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다리우스가 죽은 후 바빌로니아는 주전 521년 10월 부터 주전 520년 8월까지 잠깐 독립을 했다가 다시 페르시아에게 점령이 되었습니다. 주전 514년 바빌론에서 아리카가 봉기하지만 바빌로니아의 수도가 셀레우키아로 옮겨지면서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벨 신의 사원인 에 사갈리는 한동안 보전 되었지만 결국 그리고 바빌론 성이 석재로 이용되기 위해 철저히 파괴가 되면서 그 사원도 없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

목자들의 잘못이라…

   

오늘 부터 우리는 예레미야의 신탁 마지막 부분을 다룹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바벨론에 대한 것을 다루고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문제는 이 부분이 예레미야의 신탁 중에서 가장 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론과 이스라엘이 관련된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 예레미야의 바벨론 신탁을 다루면서 우리의 믿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50장 1절에 이런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의 땅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 알-빠벨 엘-에레쯔 카슈딤… 바벨인데 카슈딤의 땅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인데 갈대아의 땅이라 하셨습니다. 바벨론은 갈대아 이전의 바벨론과 갈대아 바벨론으로 나눕니다. 이게 예레미야 시대에 생긴 구분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이전에는 바벨론에다 갈대아란 말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문화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세계 4대 문명에 대해서 배웁니다. 이 중 하나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데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문명이란 뜻이지요.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두 강이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말합니다. 터어키의 동쪽 고원에서 발원하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둘 다 동남쪽으로 흘러서 너른 들판을 적시고 걸프만으로 들어 갑니다. 티그리스 강은 북쪽으로 흐르고, 유프라테스 강은 남쪽으로 흐릅니다. 그 사이에 있는 넓은 들을 우리는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을 일컬어 비옥한 초승달이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매우 기름지고 그 생김새가 초승달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만 년 전 부터 수 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 많은 민족들 중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수메르 인과 아카드 인이라고 합니다.  

수메르 인과 아카드 인이 일으킨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바빌론’이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성장했다고 합니다. 현지 사람들은 바빌론을 가리켜 바벨이라고도 합니다. 바벨은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합니다. 이 곳에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데 마르둑이 쌓은 바벨탑의 흔적도 있고, 느부갓네살 왕의 왕궁도 있으며 또한 벨사살 왕의 궁전도 있다고 합니다. 주전 1900년 경에 이곳 바벨에서 바빌로니아 제국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고 바빌로니아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이때는 아브라함이 존재했던 시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벨에서 서남쪽으로 230킬로미터 떨어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우르는 카슈딤, 즉 갈대아 인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라고 부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다메섹에 대한 신탁을 묵상했습니다. 아울러 하맛과 아르밧에 대한 신탁도 묵상했지요. 다메섹과 하맛과 아르밧은 모두 아람 사람들의 도시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아람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카슈딤, 즉 갈대아 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챨디언이라고 합니다. 밧단 아람을 근거로 살던 아람 사람들이 유프라테스 강 하류로도 진출해서 우르라는 도시를 만들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갈대아 인이라 했다는 말씀이지요.

갈대아 우르의 문명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여러가지 학문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천문학이 뛰어났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아브라함도 천문학자였다고 하지요. 어릴 때 부터 하늘을 보고 가뭄이나 홍수를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늘을 보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서 팔던 사람이었다고 하지요. 갈대아 우르는 문명의 수준은 높았지만 바벨의 우상을 그대로 가져다 섬겼습니다.

바벨에 살던 권력자들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람 사람들을 견제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견제구를 던졌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이 매우 혼란했다고 합니다. 이 혼란 때문에 데라의 셋째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막내 동생이 되는 하란이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나…하는 추정을 해봅니다. 이것은 아람 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정의 슬픈 역사라고 합니다.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죽은 후 데라는 장남 아브라함과 차남 나홀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와 그들의 본거지인 밧단아람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람의 들판 어딘가에 정착을 하기로 했습니다. 데라는 자기가 정착하기로 한 그 곳에 하란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연히 막내 아들 하란을 추모하기 위함이었지요.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밧단아람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아버지 데라, 둘째 동생 나홀과 결별하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데라가 식솔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데라는 하란에 주저 앉고 그의 장남 아브라함만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마자 가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까지 내려갔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집트에서 파라오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은 미련없이 이집트를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온 아브라함은 기름진 요단 들판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척박한 헤브론으로 이주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이 당했던 어려움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야곱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할아버지 처럼 이주하며 살았습니다. 야곱은 브엘쉐바에서 태어났지만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밧단아람 하란에 있는 외가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 20년 동안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야곱도 가뭄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이집트에서 기별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살기 위해서 식솔을 이끌고 이집트로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400년 노예 생활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26장 5절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면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야곱을 가리켜서 방랑하는 아람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람 사람이긴 하지만 아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들의 근거를 아람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람 사람들 가운데 갈대아 족이 예레미야 시대에 이르러 큰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밧단아람에 살다가 유프라테스 강 하류로 내려간 갈대아 사람들이 우르를 세우고 거기서 힘을 길렀습니다. 그러더니 유서 깊은 도시인 바벨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멸망시켰습니다. 이후 아람 사람들은 바벨에 모여들어 패권을 차지하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람 사람들이 주인이 된 바빌로니아를 역사가들은 신 바빌로니아라고 부릅니다. 또는 갈대아 인의 바빌로니아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신 바빌로니아, 또는 갈대아 인의 바빌로니아는 아람 사람들의 자존심이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도 그렇고, 에돔도 그렇고, 모압과 암몬도 그렇고, 다메섹과 하맛도 모두 아람 사람들이 세운 나라 또는 도시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신앙을 받아들인 나라는 이스라엘 뿐이었습니다. 아람 사람들이 세운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메소포타미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사실 아람 인들의 유일 신 사상은 도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에돔 출신의 현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정확한 말을 하는 게 나옵니다. 그리고 에돔을 도와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왔던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 빌람… 그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아람 사람으로 봅니다. 오늘날 유일 신 알라를 믿는 이슬람 교도들이 이 지역에 참 많지요. 이것은 아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시대의 아람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 바빌로니아의 종교와 우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50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여기서 바벨론은 당연히 아람 족의 바벨론, 즉 신 바빌로니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족에게 심한 유감을 가지고 계신 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도 마음껏 창조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더라면 그는 결코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막내 동생인 하란도 죽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상숭배자들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살 수 없었습니다. 하란도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를 설득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겁니다. 데라가 하란에서 정착하려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데라는 더 이상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만 가나안 땅으로 갔던 겁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람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차지하고도 메소포타미아의 우상들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만났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그들은 여전히 벨을 섬기며 살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벨을 위해서 므로닥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므로닥 우상만 세운 게 아니었습니다. 온갖 우상들을 다 세웠습니다. 바빌론 신전은 그 우상들로 가득 찼습니다. 주보 1면의 그림이 바로 바빌론 신전에 들어선 우상들을 그린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이 신전에서 우상들에게 절하고 그들에게 예물을 바치며 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에 창조주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을 해대며 살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신을 가리켜 벨(Bel)이라고 합니다. 벨은 가나안의 주신인 바알(Baal)과 같은 신 입니다. 벨은 바알처럼 주인 또는 제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벨을 ‘마르둑’이라고도 합니다. 마르둑은 바벨탑을 세운 권력자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마르둑을 히브리어로는 ‘므로닥’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권력자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란을 죽이고 아브라함을 쫓아냈을  권력자를 신의 반열에 올린 메소포타미아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지독한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지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3대 신이 있었습니다. 벨과 네르갈과 탐무스 입니다. 벨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마르둑을 말합니다. 최고 신으로 태양 신이라고도 하지요. 탐무스는 아카드 인의 신으로 히브리력에도 그 이름이 차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이 모든 바벨론 우상들은 수치를 당하고 부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바빌로니아 제국은 북쪽에서 쳐들어 온 나라에게 망할 것입니다. 나라가 우상을 섬기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제국이 망하면 그리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은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꼐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길을 물으며 시온을 찾아 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성의 남쪽 봉우리를 말합니다. 이곳에 다윗의 궁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을 갖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 언약은 여호와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모든 신들을 버리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갈대아 우르를 나와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오로지 하나님만 섬겼던 아브라함 처럼 그들도 하나님만 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잃어버렸다는 번역은 원문과 비교하면 참 약한 번역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원어인 ‘아바드’란 단어는 소멸되었다, 멸망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다는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단어 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이유로 소멸이 되었는가… 우상숭배를 하다가 소멸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다른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소멸하게 된 이유를 그들의 목자들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자들이란 제사장이나 선지자같은 종교인들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권력자들도 에둘러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목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잘 못 인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소멸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잘못은 목자가 했는데 그 잘못으로 인해 받는 고통은 온전히 양떼의 몫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이 고생 하는 것은 너희 자신이 여호와 곧 의로운 처소시며 너희 조상들의 소망이신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때문이 아닌 것이야…”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대적들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맞은 것이지 때린 우리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이야… 참 기가 막히지요. 궤변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목자들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은 이에 대해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말할 힘도 없었지만 자기들이 잘 못 한 것이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이 무엇입니까?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지요. 양들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목장 안에는 많은 통로들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통로마다 적절한 곳에 문을 달아 놓습니다. 양들은 열린 문을 통해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되지요. 그러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목자가 엉뚱한 문을 열어 두면 어떻게 될까요? 엉뚱한 문으로 들어간 양들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고 결국 위험에 빠지게 되고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처 없이 가다가 이리를 만날 수도 있지요.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문으로 들어가서 안전한 통로를 통해 쉴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양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양의 문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하면 모든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이 곧 선한 목자이니 얼마나 안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고 생명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삯군 목자도 있다고 합니다. 삯군 목자에게 중요한 것은 삯 입니다. 삯은 돈 이지요. 삯군 목자에게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돈입니다. 양을 보살피기 때문에 삯을 주는 것인데 삯군 목자에게는 양이 보이지 않고 돈만 보입니다. 따라서 양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왜냐하면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고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삯군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리가 방어할 힘이 없는 양을 아주 쉽게 물어가서 헤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비하여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가 왜 거기 있는 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양떼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그 목자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가 인격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와 양들 사이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목자와 양들 사이에는 돈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아시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알아야 되겠지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처럼 거룩하고 고귀하고 고상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소멸된 책임을 그들의 목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잘 지키고 인도 했더라면 이스라엘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도 이스라엘의 목자입네…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은 소멸 되었고 이스라엘의 목자들도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탁을 통해 바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미스바 공동체를 따라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여생을 보내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했습니다.

요즘 수요 성경 공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주 부터 드디어 레위기를 다루기 시작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타나 있는 모든 율법들은 이집트에서 오랜 동안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집트 문화에 쩔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로 이해할 수 있는 율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막도 이집트의 신전과 비슷했고 제사장의 옷도 이집트 제사장의 옷과 비슷했으며 그들이 지킨 절기도 이집트의 절기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빨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 율법은 적절하지 않은 게 참 많습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지혜이고 그래서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과 직접 통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율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이런 문제에 부딛혔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닭을 먹고, 거위를 먹고, 오리를 먹고 살았습니다. 물론 비둘기도 먹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먹었다면 그들과 함께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도 당연히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조류 가운데서는 오로지 비둘기만 예물로 바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왜 비둘기만?

이집트 사람들은 당연히 쇠고기와 양고기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슴고기도 먹었고 돼지고기도 먹었고 심지어 악어와 뱀의 고기도 먹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가축 중에서 예물을 고르라고 하셨습니다. 야생의 것을 사냥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흠 없는 수컷 송아지와 수컷 어린 양과 수컷 어린 염소만 예물로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제한을 하셨을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주셨습니다. 얼만큼 자유를 주셨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만큼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배반할 자유까지 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고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상숭배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즉각 대응하셨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를 지적하시고 그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목자라면 우리가 잘 못 했을 때 우리의 죄 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우려를 우리에게 전달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한 목자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의 가장 중요한 미션은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제대로 지적하지 않고, 예물을 많이 가져 오는 것을 좋아하고, 복만 추구하는 목자는 삯군 목자입니다. 그리고 삯군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선한 목자를 갖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도무지 가질 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돌이킬 수 없으면 파멸 외에는 기대할 게 없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들 가운데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율법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율법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자신과 맺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온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다 쉽게 시온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부담을 경감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물을 송아지와 어린 양과 어린 염소와 새끼 비둘기로 제한하신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예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없도록 신경을 쓰란 말씀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고귀하고 고상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선한 목자를 따를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지요. 선한 목자가 제시하는 길은 쉽습니다. 그리고 간단하지요. 그래서 분명합니다. 게다가 효율적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결과를 얻게 합니다. 참 소중한 것이지요.   

선한 목자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우리 교우들과 우리 후손들에게 선한 목자를 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요 미션이 되지요. 선한 목자는 삯군 목자와 다르지요. 돈이 목표가 아닙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선한 목자의 목표지요. 참 어려운 목표이긴 합니다. 하지만 간단하고 분명해서 마치 하나님께 바치는 흠 없는 예물과 같습니다.

참고로 덧붙이면, 성경을 묵상할 때 그 책의 키 워드를 발견하면 그 책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키 워드를 발견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서를 이해할 수 있는 키 워드는 선한 목자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발견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끝까지 선한 목자로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를 키 워드로 하여 예레미야 서를 묵상하면 예레미야 서의 모든 것을 제대로 그리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를 키 워드로 해서 예레미야 애가 서를 묵상한다면 어떨까요? 저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예레미야 애가 서를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줄 것입니다. 하지만 바벨론 신탁이란 거대한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몇 주간 우리는 바벨론을 헤집고 다녀야 합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1) 왜 바벨론을 갈대아 라고도 부릅니까?

2) 아브라함을 방랑하는 아람인이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3)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신인 '벨'에 대해 알아 봅시다.

4) 이스라엘 백성을 속인 자들이 누구입니까?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하게 하신 이유는?

 

 

 

2021년 10월 17일

 

예레미야 49장 23-28절: [23] 다메섹에 대한 말씀이라 하맛과 아르밧이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흉한 소문을 듣고 낙담함이니라 바닷가에서 비틀거리며 평안이 없도다 [24] 다메섹이 피곤하여 몸을 돌이켜 달아나려 하니 떨림이 그를 움켜잡고 해산하는 여인 같이 고통과 슬픔이 그를 사로잡았도다 [25]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26]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런즉 그 날에 그의 장정들은 그 거리에 엎드러지겠고 모든 군사는 멸절될 것이며 [27] 내가 다메섹의 성벽에 불을 지르리니 벤하닷의 궁전이 불타리라.

 

예레미야의 계시 6 ‘다메섹’

 

본문 23-27절은 다메섹 또는 아람에 대한 신탁 입니다. 아람은 시리아의 한 지방 이름이지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맛과 아르밧이란 도시들도 함께 나옵니다. 이 세 도시들은 각기 한때 아람의 수도 였습니다. 오늘날의 수도도 역시 다마스커스, 즉 다메섹 입니다. 다메섹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관련이 깊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메섹 왼편 호바 까지 가서 롯을 구해 냈습니다. 이 작전에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유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다메섹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창 15.2. 하지만 아람 또는 시리아는 오랜 동안 아나톨리아의 헷 제국과 이집트 제국 사이의 중립지대 였습니다. 그래서 시리아는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다메섹은 하맛, 아르밧과 함께 주전 8세기 중엽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고 이후에는 뚜렷하게 주목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왕하 24.2에 기록된 아람 부대가 사실 시리아 병력으로 추정하지만, 예레미야 시대에는 다메섹, 하맛, 아르밧은 이스라엘의 국경에 접한 도시들 이라는 것 외에는 특이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 있는 아람 왕 벤하닷의 궁전은 불에 탈 겁니다.

 

---

 

예레미야 49장 28-33절: [28]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29]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그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 할지니라 [3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칠 모략과 너를 칠 계책을 세웠음이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32] 그들의 낙타들은 노략물이 되겠고 그들의 많은 가축은 탈취를 당할 것이라 내가 그 살쩍을 깎는 자들을 사면에 흩고 그 재난을 여러 곳에서 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하솔은 큰 뱀의 거처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거기 사는 사람이나 그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7 ‘게달과 하솔’

 

본문 28-32절은 게달과 하솔에 대한 신탁이 엉켜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동일한 족속들로 추정이 됩니다. 게달은 창 25.13에 따르면 이스마엘의 두 번째 아들로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시 120.5에 따르면 게달의 장막은 불편한 곳을 말합니다. 게달 족은 오늘날의 요르단 동쪽에 있는 아랍 사막에서 살았습니다. 하솔은 본래 ‘하쩨르’로 발음하는데 역시 요르단 동쪽 사막에 사는 사람들 입니다. 수 11.1 이하에 따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메롬 물가 전투에서 가나안의 병력을 모아 온 사람이 바로 하솔 왕 야빈 이었습니다. 이들은 주전 7세기 중엽과 주전 6세기에 모압과 암몬을 침략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주전 6세기 초반에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29절에 휘장과 낙타가 언급되어 있고 31절에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산다고 한 것은 그들이 유목민들이었기 때문 입니다.  

 

---

 

예레미야 49장 34-39절: [34] 유다 왕 시드기야가 즉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엘람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 가는 활을 꺾을 것이요 [36]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오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 엘람에서 쫓겨난 자가 가지 않는 나라가 없으리라 [3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엘람으로 그의 원수의 앞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재앙 곧 나의 진노를 그들 위에 내릴 것이며 내가 또 그 뒤로 칼을 보내어 그들을 멸망시키리라 [38] 내가 나의 보좌를 엘람에 주고 왕과 고관들을 그 곳에서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9] 그러나 말일에 이르러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8 ‘엘람’

 

렘 49.33-39은 엘람에 대한 신탁 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셈… 그 셈의 장남이 엘람 이었습니다. 창 10.22에 따르면 그 형제들로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등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엘람이 앗수르와 아람 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4.1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관계 있는 고대중동전쟁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참전했다고 합니다. 고라의 후손 가운데도 엘람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후손들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레위인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엘람은 오늘날 이란의 서부와 남서부에 위치 했던 고대 문명의 집결지 였습니다. 그 영토는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까지도 뻗어 있었다고 합니다. 엘람 사람들은 당시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지도력을 나타냈습니다. 수도는 ‘수사’로 수산궁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엘람은 청동기 시대에 도시화 되었는데, 수메르 보다 조금 앞서는 주전 3000년 경에 엘람 문화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엘람은 청동기 시대에 이란 고원에서 왕국을 세웠고, 주전 2천 년 경에 수사에 수도를 정했습니다. 엘람 문화는 훗날 페르시아 문화가 되었는데 이때 엘람어는 공식 언어 중 하나 였습니다. 엘람 인들은 오늘날 Lurish를 사용하는 Lurs로 남아 있습니다.

엘람의 영토는 오늘 날 걸프 만의 북쪽과 동쪽 지역에 위치합니다. 주전 640년 경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지만 10년쯤 지난 후에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주전 612년 니느웨(앗수르)가 무너진 다음, 엘람은 메데의 통제를 받은 것 같습니다. 메데와 바벨론은 앗수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을 했지만, 앗수르가 무너진 다음에는 서로 견제 하며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느브갓네살 즉위 9년에 엘람이 바벨론에 대하여 적대적 행위를 했다면 이것은 메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엘람이 시드기야에게 어떤 행위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하나님은 엘람의 으뜸 가는 활을 꺾고 하늘의 사방에서 바람을 불게 하여 엘람 사람들을 사방에 흩어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엘람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지 못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엘람은 페르시아에 병합 되면서 페르시아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엘람이 강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왕들은 엘람 인들이 모여 살지 못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신탁은 이런 역사가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람에 대해서도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14절: [0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0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0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0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0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0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0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란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서야 끝이 오리라.    

 

---

종말이 이를 때까지

   

우리는 종말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45억 년이나 된 지구를 유한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도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종말이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종말이 언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메시야입네…하면서 종말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겠지만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메시야들은 거짓말을 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때,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때, 당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무너진다 해도 끝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성막 이후 하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끝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니다.

여러분, 창조 후 부터 지금까지 난리와 난리 소문이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창조 후 부터 지금까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또한 창조 후 부터 지금까지 곳곳에 기근이 있었고, 또한 지진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난리와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근과 지진도 여전합니다. 최근에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 하겠다고 합니다. 시진핑의 정치 기반을 안정화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을 우리는 종말이라 하지 않습니다. 집단 지성에 의해 전쟁 억지력이 발동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기근과 지진에 대해서도 사람은 내성을 길러왔고, 관련 학문의 발전으로 피해를 줄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말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으셨습니다. 종말 문제는 오로지 하나님께 맡기고 천국 복음 운동에 열심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되면 그때 비로소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아는 종말은 종말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종말은 천국 복음과 관계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그리고 천국 복음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은, 운명론자들, 결정론자들이 말하는 종말론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사람의 입술에 달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예레미야의 신탁은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 그 지역의 종말에 관한 것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듯이 종말처럼 보였던 그 종말은 결국 종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지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운 것 입니다. 항상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천국 복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의 종말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종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다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종말이 아니며 결국 회복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신탁에 대한 묵상도 끝나 갑니다. 종말에 이른 것이지요. 하지만 이 종말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다메섹과 게달과 하솔과 그리고 엘람을 한꺼번에 다루려고 합니다. 넷을 다루지만 그 내용이 지난 주에 다룬 에돔 정도 입니다. 이후 바벨론에 대해 다루면 예레미야의 신탁에 대한 묵상은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바벨론에 대한 신탁이 문제 입니다. 엄청 길거든요. 50장과 51장, 두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가장 깁니다. 이집트 보다 훨씬 더 길지요.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가져 봅니다. 바벨론에 대한 신탁에서 우리는 또 다른 소망을 발견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서 49장 23절 부터 27절까지는 다메섹에 대한 신탁 입니다. 다메섹은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말합니다. 다마스커스를 시리아 발음으로 다메섹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는 다메섹은 다메섹 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메섹을 수도로 했던 아람 제국을 말하는 것 입니다. 아람 제국… 그 아람 제국의 아람이란 말을 우리는 밧단아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밧단 아람이란 아람의 들판이란 뜻 입니다. 여기서 아람 족이 생성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이곳에 정착 하고 자기가 사는 마을의 이름을 하란이라고 했습니다. 본디 하란은 데라의 세 번째 아들의 이름 입니다. 아브라함의 막내 동생의 이름이었지요. 그러니까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는 롯이란 사람의 아버지 이름이 하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막내 아들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죽자 자기 식솔들을 이끌고 그 동안 살아왔던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밧단아람으로 왔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데라는 밧단아람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착한 곳의 이름을 하란이라고 했습니다. 막내 아들을 영원히 지명으로 남겼던 것 입니다. 밧단아람, 즉 아람의 들판은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람 제국이 출발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람이란 이름은 창세기 10장 22절에 처음 나옵니다. 노아의 아들 셈의 다섯 번째 아들이 아람 입니다. 그리고 아람이 낳은 아들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 입니다. 아람의 위치가 비교적 높은 것으로 봐서 아람 족속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있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람 사람들은 오늘날 시리아의 북쪽 지방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전 11세기 말에 유프라테스 강변으로 진출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살면서 강의 동쪽에 아르밧을, 서쪽에 하맛과 다메섹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때 아람의 영토는 지중해 해변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로는 엄청난 넓이의 영토를 소유한 제국이 되었습니다.

아람 족속은 다윗 왕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다윗 왕 시대 이스라엘의 힘이 매우 강력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솔로몬 왕 말기에 르손이란 사람이 나타나서 다메섹을 중심으로 아람 제국을 강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아람은 전성기를 맞았고 바벨론 지역까지 진출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 진 남북조 시대에는 아람이 수시로 북 왕국 이스라엘을 침공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 왕국 유다와 동맹을 맺고 북 왕국 이스라엘을 협공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절에 활동한 선지자들이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 입니다.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바로 이때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의 이스라엘 출신 계집 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에 왔지요. 그리고 엘리사의 권면에 따라 요단강에 내려가서 자기 몸을 일곱 번이나 강물에 담갔습니다. 그랬더니 문둥병이 완치 되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아람 제국은 북쪽에서 앗시리아, 즉 앗수르가 발흥 하면서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주전 740년 아람의 아르밧을 점령했습니다. 이후 앗수르는 주전 732년에 다메섹을 점령했고, 주전 722년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렸으며, 주전 720년에는 하맛을 점령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람 제국은 앗수르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람 제국이 무너지고 150년이 지나서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신탁에는 다메섹에 대한 생생한 신탁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에도 아람 제국의 일부 세력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은 다메섹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마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5절을 보면 다메섹과 관련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하나님은 다메섹을 일컬어 찬송의 성읍이라 하셨고, 또 나의 즐거운 성읍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메섹에 가서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 곳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가서 일부가 살았겠지요. 그래선지 히브리어 원전에는 하나님께서 다메섹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타 이후 모든 성경은 이 대목을 버렸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말이 되긴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전은 버리지 않았다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부정사 ‘로’가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는 어떻게 처리 해야 하나… 그런데 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다메섹의 성벽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벤하닷의 궁전이 불에 타겠다고 하셨지요. 종말로 소망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해석이 참 어려운 부분 입니다.  

참고로 다메섹에 대해 추가 말씀을 드리자면… 성경에서 다메섹이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장 15절 입니다. 요르단 계곡에서 벌어졌던 고대 중동 전쟁 이야기 입니다. 그때 롯이 사로 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과 그의 종자들은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가서 한밤 중에 습격을 하여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아브라함의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15장 2절에 따르면 엘리에셀은 다메섹 사람 이었습니다. 다메섹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롯을 구하는 작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다메섹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아브라함에게 대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훗날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지시에 따라 밧단 아람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 왔습니다. 이것도 엘리에셀이 다메섹과 그 인근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가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서 이스라엘과 에돔이 나왔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제 책상 위에다 커다란 지도를 펼쳐 놓았습니다. 이 지도는 지중해 동쪽 해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이릅니다. 그리고 북쪽은 카스피 해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레이트에 이릅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이 다루고 있는 지역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당시의 세계 였습니다. 이 지도를 자세히 보니 예루살렘에서 암만을 거쳐 동쪽으로 쭉 사막 길을 가면 바그다드가 나오네요.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갈 때 구태여 다메섹을 거쳐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밧단 아람을 거쳐 바벨론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후자를 말하고 있고 우리는 후자의 루트에 익숙합니다. 아마 암만을 거쳐 사막 길로 들어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메섹을 거쳐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밧단 아람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바그다드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사막 길이 위험한 것은 자연적인 이유도 있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난폭하고 잔인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다룰 게달과 하솔이 바로 그런 자들 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 에미레이트, 오만 등이 있는 지도를 보면 국경선이 모두 직선으로 그어져 있어 아주 인위적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최근에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국경선이 없었습니다. 게달과 하솔 같은 유목민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며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베드윈 족이지요.  

오늘 본문의 28절 부터 33절까지는 게달과 하솔에 대한 신탁 입니다. 게달과 하솔은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의 중앙 사막에서 살아간 유목민들 입니다. 게달이 성경에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25장 13절 입니다. 이에 따르면 게달은 이스마엘의 두 번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게달은 거친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시편 120편 5절을 보면, 게달의 장막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라는 시인의 노래가 있습니다. 아가 서 1장 5절을 보면 시인은 자신의 검은 몸을 게달의 장막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게달은 검은 색 텐트를 치고 살았나 봅니다. 이스라엘에게 게달은 공포의 대상 이었습니다.

하솔은 하쩨르로 발음 합니다. 여호수아 서 11장 1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메롬 물가에 모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가나안 연합군을 모은 자가 바로 하솔 왕 야빈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하솔은 모압과 암몬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하솔은 사막에 사는 악명 높은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솔의 근거지는 이제 큰 뱀의 거처가 될 것 입니다. 아무도 그 곳에서 살지 않을 겁니다.   

게달과 하솔은 성문이나 문빗장 없이 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성문이 필요 없었고 성문이 필요 없으니 문빗장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이 머무는 곳이 그들의 성이었고 그들의 결심이 그들의 문빗장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마음대로 살았던 것 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낙타들과 가축들이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많은 재물을 모우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한부 입니다. 그들 보다 더 사나운 자들이 오면, 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을 더 사나운 자들에게 빼앗기고 말 것 입니다. 그들 보다 더 사나운 자들이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몰고 온 침략자들이었습니다. 게달과 하솔은 지금 어디 있나… 아마도 베드윈으로 살거나, 쿠웨이트, 또는 아랍 에미레이트로 들어 가거나 했을 겁니다. 석유를 팔아 잘 살고 있겠네요.   

 

오늘 본문의 34절 부터 39절까지는 엘람에 대한 신탁 입니다. 엘람… 한반도에서 인도를 논하는 것 처럼 생뚱 맞은 나라 입니다. 엘람은 바벨론에서도 동쪽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다 왕국과 엘람은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 가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레미야가 가지고 있는 엘람에 대한 정보를 우리는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요르단 암만에서 사막 길을 따라 동쪽으로 쭉 가면 바그다드가 나온다고 했지요? 그 바그다드를 지나서 동쪽으로 계속 가면 곧 바로 엘람의 영토가 나타납니다. 엘람은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나라 입니다. 엘람은 큰 나라 였습니다. 그 영토가 바그다드 인근에서 시작해서 오늘날의 걸프만 동쪽 이란의 영토 대부분에 이릅니다.

엘람이란 이름은 창세기 10장 22절에 처음 나옵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셈… 그 셈의 장남이 엘람 입니다. 그의 동생들은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등 이었습니다. 앗수르와 아람도 엘람의 동생이었군요. 그리고 창세기 14장 1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참전했던 고대 중동 전쟁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참전했다고 합니다. 엘람은 그 지역에서는 일찌감치 지도력을 지닌 나라 였습니다.

엘람은 오늘날 이란의 서남부 고원지대에 자리를 잡고 문명을 꽃 피웠다고 합니다. 수메르 보다 조금 앞선 주전 3000년 경에,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5천 년 전에, 엘람 문화는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문화 유적 중 찌그라트는 것이 유명합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있는 사진이 엘람의 찌그라트 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층층이 피라미드라고 합니다. 찌그라트는 엘람의 문화를 드러내는 유명한 유적이기 때문에 이 곳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엘람 인들은 4천 년 전에 수사란 곳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수사는 훗날 페르시아의 여름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수산 궁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부림절 투쟁이 바로 이 수산 궁에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람 문화는 훗날 페르시아 문화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문화 속에서 엘람 문화는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엘람 어는 페르시아의 공식 언어들 가운데 하나 였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엘람 인들을 루르 족이라 부르면서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언어도 루르 어라는 이름으로 아직 남아 있는데 이란어와는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엘람은 주전 640년 경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지만 10년 후에 회복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무너지자 엘람은 독립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인근에서 일어난 메데가 워낙 강해 메데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즉위 9년에 엘람이 바벨론에 대해 적대 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메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람에 대한 신탁이 유다 왕 시드기야 즉위 직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람이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어떤 행위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하나님은 엘람의 으뜸 가는 활을 꺾고 하늘의 사방에서 바람을 불게 하여 엘람 사람들을 사방에 흩어 버리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엘람의 강력한 군사력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람에 대해서도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강한 나라 엘람은 언젠가 회복이 될 것 입니다. 이것이 오래 전에 종말을 맞아 지금은 없어져 버린 엘람의 소망이 되겠지요. 회복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엘람 처럼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도 회복이란 복을 받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 입니다. 그 하나님은 엘람의 하나님도 되시고 또한 고구려의 하나님도 되시며,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문제는 천국 복음 입니다.

미얀마와 태국은 역사적으로 자주 전쟁을 벌였습니다. 미얀마는 버마 족의 나라이고, 태국은 타이 족의 나라 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카렌 족이 있습니다. 미얀마가 패권을 잡으면 카렌 족은 버마 족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태국이 패권을 잡으면 카렌 족은 타이 족의 종이 되었습니다. 카렌 족은 이러나 저러나 종의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카렌 족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메시야가 오시면 카렌 족이 잘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국 복음이 카렌 족에게 전파 되었습니다. 지금 카렌 족의 30%가 기독교 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카렌 족의 정치적 위치도 매우 높아 졌습니다. 미얀마 군부에 대항하는 자들도 카렌 족이라고 합니다. 카렌 족은 미얀마와 태국에 걸쳐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터어키와 시리아와 이라크에 걸쳐 사는 쿠르드 족 같지요.

카렌 족과 쿠르드 족은 나라가 없어서 고생 하고 있는 것 같지요. 하지만 이제 이들은 종말에서 벗어났습니다.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 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따라서 자치령도 주어졌습니다. 또한 이들을 돕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카렌 족의 나라, 쿠르드 족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이들의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경험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천국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천국 복음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 물론 나라가 독립이 되는 소망을 갖게 하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소망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이 땅에 있는 것 뿐이라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 입니다. 종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천국 복음에 있으면 우리는 종말을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에는 종말이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을 가진 우리 같은 사람들을 협박할 사람도 없고 억누를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 복음이 이런 것입니다. 천국 복음은 이 땅의 모든 소망을 초월해 영원한 소망을 추구하게 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샘플처럼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신탁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론이지요. 이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복음 그 자체 입니다.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그러나 종말은 아닙니다. 얼마 후 날씨는 도로 따뜻해 질 겁니다. 오히려 더워 질 겁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란 말 앞에 위축 될 필요가 없습니다. 종말이란 말은 대개 협잡이나 협박으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독재자나 셀럽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우리는 그 아래서 살아가고 있으니 세상은 항상 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1) 다메섹과 하맛에 대해 알아 봅시다.

2) 아람은 어떤 나라입니까?

3) 게달과 하솔 유목민들의 생태에 대해 알아 봅시다.

4) 하나님께서 엘람까지 신탁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021년 10월 10일

 

예레미야 49장 7-22절: [07]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 [08] 드단 주민아 돌이켜 도망할지어다 깊은 곳에 숨을지어다 내가 에서의 재난을 그에게 닥치게 하여 그를 벌할 때가 이르게 하리로다 [09]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네게 이르면 약간의 열매도 남기지 아니하겠고 밤에 도둑이 오면 그 욕심이 차기까지 멸하느니라 [10] 그러나 내가 에서의 옷을 벗겨 그 숨은 곳이 드러나게 하였나니 그가 그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하였은즉 그가 없어졌느니라 [11] 네 고아들을 버려도 내가 그들을 살리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술잔을 마시는 습관이 없는 자도 반드시 마시겠거든 네가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너는 반드시 마시리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보스라가 놀램과 치욕거리와 황폐함과 저줏거리가 될 것이요 그 모든 성읍이 영원히 황폐하리라 하시니라 [14] 내가 여호와에게서부터 오는 소식을 들었노라 사절을 여러 나라 가운데 보내어 이르시되 너희는 모여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 [15] 보라 내가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작아지게 하였고 사람들 가운데서 멸시를 받게 하였느니라 [16]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에돔이 공포의 대상이 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리로다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이 멸망한 것 같이  거기에 사는 사람이 없으며 그 가운데 머물러 살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19] 보라 사자가 요단 강의 깊은 숲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니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에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와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냐 [20] 그런즉 에돔에 대한 여호와의 의도와 데만 주민에 대하여 결심하신 여호와의 계획을 들으라 양 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고 다니며 괴롭히고 그 처소로 황폐하게 하지 않으랴 [21] 그들이 넘어지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며 그가 부르짖는 소리는 홍해에 들리리라 [22] 보라 원수가 독수리 같이 날아와서 그의 날개를 보스라 위에 펴는 그 날에 에돔 용사의 마음이 진통하는 여인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장 34-39절: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레미야의 계시 5  에돔에 대해

  

에돔에 대한 신탁으로 오바댜 서가 유명하지요. 오바댜 서는 모두 21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 서에 나오는 에돔에 대한 신탁은 모두 15절로 이루어져 있어서 바벨론, 이집트, 모압 다음으로 길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데만에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명철한 자의 책략이 끊어지고 그 지혜가 없어 졌다는 말씀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욥에게 매우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지요. 이런 지혜로운 자들이 데만에서 사라졌다는 말씀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 입니다. 데만은 에돔의 북부 지방을 일컫는 말 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에돔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된다고 합니다.

드단 주민에게 돌이켜 도망하여 깊은 곳에 숨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에서의 재난을 그에게 닥치게 하여 그를 벌할 때가 되었기 때문 입니다. 드단은 고대 에돔어로 남쪽이란 뜻이라 합니다. 현재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속한 ‘엘-울라’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드단은 남쪽 사막 지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드단은 중앙 아라비아 사막까지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네게브가 남쪽이란 뜻이고 그 남쪽은 사막이란 의미를 생각하면 관련성이 있지요.

에돔에도 포도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포도는 모두 약탈이 될 것 입니다. 에서가 멸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 치고박고 싸웠지만 사실 공동운명체 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아들을 살리고 과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실 겁니다. 에돔은 반드시 진노의 술잔을 받게 됩니다. 에돔의 수도 보스라는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높은 곳에 위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처절하게 파괴 되어 후세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랄 겁니다. 에돔은 작아지고 멸시를 받게 될 겁니다. 높은 바위 틈에 살면서 스스로 높이던 자가 아래로 내려 올 것 입니다.   

데만 주민들, 즉 남쪽 사막에 사는 사람들도 곤란을 겪게 됩니다. 그들이 당할 어려움은 땅이 진동하고 비명이 홍해에 들릴 지경이 됩니다. 이제 원수가 와서 보스라를 덮칠 겁니다. 그 원수는 독수리 같아서 높은 산 위에 있는 보스라를 쉽게 무너뜨리겠지요. 그래서 에돔의 용사들 조차 그 마음이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스럽게 될 것 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 입니다.    

 

붉은 땅 에돔을 찾아서

 

우리가 요르단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요르단 남부에 있는 과거 에돔의 땅에 대해 잘 알기가 어렵겠지요. 더구나 그 땅은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 입니다. 붉은 색의 땅이라 에돔이라 한답니다. 에돔에 살던 에서의 후손들… 그러고 보니 에서란 이름이 붉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에서는 제 이름에 맞는 땅을 찾았던 걸까요?

야곱의 쌍동이 형이 에서 입니다. 아비 이삭을 속여 장자의 명분을 얻은 야곱은 형 에서에게 해를 당할까봐 어미 리브가의 요구대로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창 28.7) 야곱이 그 곳에서 일가를 이루는 동안 에서도 집을 떠나 세일에 정착했습니다. 그래서 20여 년 후 야곱이 얍복 강에 이르렀을 때 에서는 400명의 사병을 데리고 그를 맞으러 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에서를 만난 야곱은 그에게 가축떼를 선물하고 세일로 가서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창 33.14) 이후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일은 요르단 남쪽의 산악지대 입니다. 해발 800미터에서 1500미터에 이르는 높은 봉우리들이 연이어 있는 곳입니다. 에서는 아마도 이 봉우리들 가운데서도 높은 곳을 선택해 살았던 것 같습니다. 훗날 에돔 족속의 수도인 ‘보스라’가 해발 1000미터나 되는 곳에 건설 된 것으로 추정이 되니 말 입니다. 이 산악지대에서 북쪽에 있는 지방을 데만이라 하는데 모압과 가까운 곳이고 살기가 좋아서 지혜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 같습니다. 이 산악지대의 남쪽 지방을 드단이라 하는데 드단은 ‘남쪽’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드단은 서쪽으로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과 만나고 동쪽으로 아라비아 중앙 사막과 만납니다.

모세는 에돔의 변방 모퉁이의 한 성읍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에돔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민 20.17) 아마 왕의 대로만 사용하겠다고 했겠지요. 하지만 에돔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왕의 대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을 거치게 됩니다. 호르 산에서 아론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아론의 지위를 계승했습니다. (민 20.28) 그들은 호르 산을 지나 결국 모압 평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결코 에돔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원망은 했겠지요.   

에돔의 수도 ‘보스라’가 있는 산악지대의 남서쪽 기슭에 그 유명한 바위의 도시 ‘페트라’가 있습니다. 이 산악지대로 왕의 대로가 나있는데, 왕의 대로는 남쪽으로 바란 광야와 모세의 강, 그리고 아라비아의 타북, 메카 등과 직선으로 연결이 됩니다. 아라비아의 타북은 김승학의 ‘떨기나무’에 따르면 미디안의 호렙산이 있는 곳 입니다.  

 

---

내 십자가는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에돔에 대한 신탁을 묵상합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다섯 번째 입니다. 참 많이 다룬 것 같은데, 이제서야 예레미야의 신탁을 반쯤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섬세하신 존재 입니다. 사물의 하나하나를 살피시고 그 사정을 일일이 이해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 이시란 증거 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그러 하시기 때문 입니다. 우리를 하나하나 살피시고, 우리 사정을 일일이 이해 하시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 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데만은 세일 산의 북쪽 기슭에 펼치진 들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또 드단 주민들에게 돌이켜 도망 하고 깊은 곳에 숨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에서의 재난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단은 세일 산 남쪽 기슭에 펼쳐진 사막 지역을 말합니다. 바로 이 곳에 우리가 잘 아는 페트라가 있습니다. 물론 그 유적은 에돔의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수 백 년 후에 출현한  나바티아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트라 유적은 그 지역이 얼마나 험한 바위 지역인지 가르쳐 줍니다. 북쪽 데만과 남쪽 드단 사이에 높은 산악지대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세일 산 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에돔이 근거지로 삼아온 지역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의 옷을 벗겨 그 숨은 곳이 드러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일 산 높은 꼭대기에 있는 에돔의 수도 보스라가 원수들에게 점령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실린 사진이 바스라의 모습 입니다. 에서의 형제와 이웃이 멸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을 위해서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고립무원이 되었다가 결국 소멸할 것입니다. 에서는 참으로 많은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무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댓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25장부터 에서와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쌍동이였습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이었습니다. 자라나면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장막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도우며 집안 일을 했단 말이지요. 에서와 야곱은 적지 않은 나이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당시 그들이 살았던 곳은 브엘쉐바였습니다. 브엘쉐바는 네게브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에서는 나이 40에 히타이트 여자 둘과 결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가 마음에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에 우상을 섬기는 며느리가 둘이나 들어왔으니 그 가정이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에서에게 돌아갈 장자의 명분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어머니 리브가가 사주한 것이었습니다. 고부간이 얼마나 안좋았으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에서는 화가 나서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익숙한 사냥꾼이었던 에서에게 야곱을 죽이는 일은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이런 사단이 난 것이 자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친정이 있는 밧담아람으로 보냈습니다. 피신을 시킨 겁니다. 리브가는 생각하기를, 몇 일이 지나면 에서의 화가 사그러 질 것이다… 그러면 야곱을 불러 들여야지…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지만 세상 일이 그리 쉽게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심지어 자녀들을 위해 신앙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은 집에서…

이 와중에 에서는 또 장가를 들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얻으려 했던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이번에 데리고 온 신부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 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할랏도 리브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에서는 집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떠나자 얼마 후 에서마저 떠나고 말았습니다. 몇 일 후에 야곱을 부르려 했던 리브가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브엘쉐바에 있는 이삭의 집은 적막강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리브가도 죽고 말았습니다. 오로지 이삭만 그 집에 남아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외롭게 살아갔습니다. 믿음의 조상 이삭의 집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있는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네 여자를 통해 아들 열 하나와 딸 하나를 얻었습니다. 에서도 부모를 떠나 식솔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거처를 세일 산으로 정했습니다. 처음부터 세일 산 꼭대기에 거처를 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네게브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브엘쉐바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산악지대가 바로 세일 산이라고 하는 에돔 땅입니다. 오늘날 요르단의 남부 지방을 말합니다. 에돔 땅은 네게브 사막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드단 사막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드단 사막은 동쪽으로 중앙 아라비아 사막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네게브 사막과 드단 사막과 아라비아 사막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사실 네게브와 드단은 똑 같이 남쪽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관계 있는 족속들에게 있어서는 네게브 사막과 드단 사막이 삶의 남단이었습니다.  

드단 사막에서 북쪽으로 왕의 도로가 나있습니다. 이 왕의 도로가 세일 산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세일 산 남쪽 입구에 페트라가 있지요. 페트라에서 왕의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800미터, 1500미터에 이르는 돌산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가 에돔 인들이 살던 세일 산이었습니다. 세일 산 북쪽 1400미터급 봉우리 바로 밑에 에돔의 수도인 보스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에돔의 수도는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창세기 36장 31절 부터 43절 까지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돔이 망할 즈음의 수도는 산꼭대기에 있는 보스라 였습니다. 그래서 에돔에 대한 신탁에 이런 말씀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세일 산 북쪽은 들판입니다. 에서는 아마도 여기에서 산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산 속에 들어가서 바위 틈에 살지는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의 후손들이 침략자들을 피해서 세일 산 꼭대기 바위 틈에 올라가 살았습니다. 에서는 세일 산 북쪽 들판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돌아올 때 에서는 야곱을 만나기 위해 바로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400명의 사병들을 데리고 말이지요. 에서가 왜 400명의 사병을 데리고 갔을까… 동생 야곱을 원수로 본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닙니다.

에서가 야곱을 만나기 위해 출발한 세일 산 북쪽 들판… 그 곳이 바로 데만이 있었습니다. 데만은 에돔인들이 만든 지혜자들의 도시였습니다. 욥기에도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나옵니다. 엘리바스는 데만 출신의 지혜자로 보입니다. 에돔의 지혜에 대해서는 우리가 따로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돔의 지혜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 역시 이삭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이 식솔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마하나임에 이르러 형 에서에게 사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 에서는 에돔 들판에 있었다고 합니다. 에서는 야곱의 기별을 받고 400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북쪽을 향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뵌 후, 브니엘이란 지점을 지나서 비로소 에서를 만났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세일 산으로 가서 같이 살자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권유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헤어졌고 야곱은 세겜으로 에서는 세일 산으로 갔습니다. 이후 형제는 아버지 이삭의 장례식 때 다시 만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에서는 이방인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압이나 암몬처럼 사사건건 이스라엘과 대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에돔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0장 17절에 따르면 이때 모세는 에돔의 변방 성읍 가데스에게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에돔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에돔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에돔 땅의 호르 산을 거쳐 모압 평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호르 산에서 아론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인데, 그것도 쌍동이 형제인데, 에돔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지나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에돔 인을 이두메 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두메 인들 속에서 헤롯 왕이 나왔습니다. 헤롯 왕은 헤롯 왕가를 만들어서 100년 이상 유다왕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 100년이란 기간 속에 예수님의 생애가 있었단 말이지요. 예수님 시대는 로마 시대 였지만, 이두메 인들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당연히 헤롯 왕가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2절에 따르면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눈을 흘기며 살던 헤롯과 빌라도였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헤롯은 빌라도 보다 더 완악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쌍동이 형제였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헤롯이 예수님께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리라”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2장 1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군천사들이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가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을 생각하면 이 어려운 부분이 풀릴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싸웠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서로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라이벌 의식은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지원하고,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지원하면서 더욱 더 격렬해 졌고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영향은 후대에도 적극적으로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여기서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속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쌍동이 형제는 비극적으로 갈라서게 된 것 입니다. 물론 이후에 에서와 야곱이 서로 협력하는 게 몇 번 나오긴 하지만 그 두 사람 사이의 화해는 결코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무서운 결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자녀 교육을 실천하지 않은 이삭과 리브가에게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원수가 집안 식구이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지 않는 경우 집안 식구라도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아둔한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자기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배가 고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 하나로 야곱을 이삭의 장자로 세우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 적이 없었습니다. 에서도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데 왜 하나님을 몰랐겠습니까? 또한 아브라함의 가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왜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익숙한 사냥꾼을 히브리어로 ‘요데아 차이드’라고 합니다. 사냥을 아는 자란 뜻이지요.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것은 능통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사냥을 다녔으면 사냥에 대해 능통해 질 수 있을까요? 물론 에서에게는 사냥꾼이 될 수 있는 기질과 능력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수 많은 짐승들과 수 많은 새들을 잡아 죽였을 겁니다. 그래서 사냥에 대해 능통해 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사냥꾼의 기질이 있다고 에서 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물로 만든 별미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의 사냥 기질을 북돋워 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실패를 했지요.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주지도 못했고, 또한 두 아들 모두 집을 떠나는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삭을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에서가 사냥꾼의 기질을 타고 났어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사냥 만큼 능통하게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사냥꾼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냥꾼의 기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목적에 따라 사용했을 겁니다. 이것을 낮은 수준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저는 그렇다고 말하겠습니다.

에서는 헷 족속의 여자 둘을 얻어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여자가 리브가를 괴롭게 해서 고부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이 얼마나 컸으면 리브가 뿐만 아니라 이삭의 마음에도 근심이 되었을까요? 더우기 리브가는 헷 족속의 여자들 때문에 내 삶이 싫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이스마엘 족속의 여자와 또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자 에서는 아예 집을 떠나 세일 산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장자의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겼어도 에서는 집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를 모셔야 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도 자기 십자가로 여기고 해결 했어야 합니다. 에서가 만약 부모와 자기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했다면 아마도 다른 역사가 쓰여졌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이삭의 장남으로 인정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이삭이 애초에 하려고 했던 대로… 하지만 에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집을 떠나 세일 산에 자리를 잡고 부모를 원망하고 또한 동생 야곱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에서의 후손들, 즉 에돔 사람들도 에서 처럼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서 세속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사건건 이스라엘 백성과 부딪혔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북쪽으로는 모압 사람들과, 남쪽으로는 이스마엘 사람들과 친절하게 교류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과는 결코 선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누르고 싶어 했습니다. 너희들이 누구냐 사기꾼 야곱의 후손들이 아니냐… 우리는 사냥꾼 에서의 후손이다. 너희들 형이다… 이것이 에돔 사람들의 기본 입장이었습니다. 에돔 사람들이 이런 강박을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우로 선대하고 사랑했다면 하나님께서 에돔을 얼마나 높이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오바댜 선지자는 21절로 이루어진 오바댜 서를 통해서 에돔을 무정하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결국 에돔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높은 산 바위 틈에 지어진 그들의 성읍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졌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려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과연 신탁의 말씀대로 에서는 옷이 벗겨져서 그 숨은 곳이 드러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였고 이삭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장남이었지요. 하나님은 에서의 후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에돔의 고아들을 살리리라. 그리고 에돔의 과부들은 나를 의지하리라.” 모압이나 암몬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에돔에게도 회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원수는 교회 안에서 나타납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매 주일 설교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결국 교회의 원수가 되어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부합한 것이지요. 이것도 교회 안에서 조차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거나 잠재하거나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쉽게 그리고 널리 펴고자 하는 자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잘못한 것이 없어서 믿음의 조상들이 된 게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우리와 비교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랬던 그들을 귀하게 보시고 높이 올려 주셨습니다. 자기 욕망 때문에 높이 올라간 자들은 쉽게 떨어져서 다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높이 올려 주신 자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명성이 떨어질 수 있을까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조차 돈을 추구한 자들, 명예를 추구한 자들, 권력을 추구한 자들은 결국 교회를 욕보이고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서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에돔에 대한 예레미야의 신탁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 기독교인도 부적을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걸까요? 하지만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자기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가지로 좋다는데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녀도 되겠습니까?라고 우리가 하나님께 여쭈어 본다면 하나님은 무어라 대답 하실까요? 부적은 죽은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하시지 않을까요? 부적은 인간의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것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물론 죽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의 기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도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낮은 수준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낮은 수준의 십자가는 참으로 많을 겁니다.

그런데 높은 수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말씀 드리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것 입니다. 이 목숨을 생물학적인 것으로만 생각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목숨은 여러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목숨은 돈일 수 있고, 명예일 수 있고, 권력일 수 있고, 학문일 수 있고, 예술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높은 수준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다 함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목숨으로 생각하는 것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자는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적을 붙이는 사람과 같습니다. 손바닥에 왕 자를 쓰는 사람과 같지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 길을 지켜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니 결국 그 자신이 목숨처럼 아끼는 것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내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가장 큰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에돔의 고아들과 과부들을 구원해 주신 것처럼 구원해 주실 것 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줍니다. 구원을 확신한 사람들은 활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질러도 많이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 삶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지요.

십자가를 지고 아무나 좇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좇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가 건강해 지고 영혼이 건강해 집니다. 육체가 건강하고 영혼이 건강해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알차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뜻을 추구하며 살아 보십시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적어도 내 가족 안에서는 내가 원수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가족을 등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백 프로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가족에게 원수가 되지 않는 사람이 남에게도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얻게 되지요. 이게 이 세상을 알차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며 아울러 그 완성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에서의 행동이 그 후손 에돔 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 에돔 인들이 산 위 바위 틈에 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3)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손으로 어떻게 살아야 했나요?

 

 

 

2021년 10월 3일

 

예레미야 49장 1-6절: [01]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이 자식이 없느냐 상속자가 없느냐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들에 사는 것은 어찌 됨이냐 [0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전쟁 소리로 암몬 자손의 랍바에 들리게 할 것이라 랍바는 폐허더미 언덕이 되겠고 그 마을들은 불에 탈 것이며 그 때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점령하였던 자를 점령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03] 헤스본아 슬피 울지어다 아이가 황폐하였도다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울타리 가운데에서 허둥지둥 할지어다 말감과 그 제사장들과 그 고관들이 다 사로잡혀 가리로다 [04] 패역한 딸아 어찌하여 골짜기 곧 네 흐르는 골짜기를 자랑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재물을 의뢰하여 말하기를 누가 내게 대적하여 오리요 하느냐 [05]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06]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암몬 자손의 포롤르 돌아가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누가복음 15장 11-24절: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몇 일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예레미야의 계시 4  암몬에 대해

  

암몬 족속은 롯의 둘째 아들 벤암미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모압 땅 북쪽에 살면서 모압 족속과 똑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암몬의 수도는 ‘랍바’인데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입니다. 그래도 암몬이 암만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어딥니까? 암몬은 얍복강 북쪽에 살던 이스라엘의 갓 지파가 무너지자 그들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셨지요. 그래서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그 백성이 그 성읍에 사는 게 어찌된 일이냐고 하셨습니다. 말감은 왕상 11.5에 기록된 밀곰으로 몰렉이라고도 하는 암몬의 신입니다.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받아들인 페니키아의 신 아스다롯의 복사본이지요. 결국 갓 지파는 암몬에 편입이 되어 말감을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에 살던 르우벤 지파는 일찌감치 모압에 편입이 되어 그모스 신을 섬기며 살았겠지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가운데 두 지파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과를 암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랍바가 전쟁에 휩쓸려 폐허의 언덕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징벌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를 점령했던 자를 점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갓 지파가 회복된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압에 의해 소멸된 르우벤도 회복될 수 있을까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르우벤에 대해 달리 행동하실까요?

암몬은 남쪽의 헤스본이란 도시를 모압과 공유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헤스본은 모압에게는 북쪽의 도시로 이미 우리가 모압의 신탁에서 여러 번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모압이 망하면서 암몬쪽 헤스본도 황폐해 졌습니다. 그 영향은 수도 랍바에 그대로 전해졌고 드디어 말감의 제사장들과 고관들이 다 사로잡혀 가니 그 모습이 모압과 똑 같았습니다. 형이 못났으면 동생이라도 좀 다르게 살지… 그 형제는 똑 같았습니다. 롯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잊고 페니키아의 신을 그모스 말감으로 받아들여 살다니… 그렇게 살다보니 그들은 재물을 의뢰하며 살았습니다. 우상은 결국 돈과 통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며 재물에 의뢰하는 삶을 골짜기에 살면서 골짜기를 자랑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골짜기는 본래 물이 흘러나가는 곳입니다. 앞날이 뻔히 보이는데도 암몬 사람들은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사방에서 두려움이 올 것입니다. 모든 암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흩어질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암몬에게도 마지막 희망을 주셨습니다. 돌아가게 하리라… 그들은 롯의 후손들이었으므로…    

 

암몬의 수도 랍바 그리고 암몬의 우상들

 

암몬 족속의 땅은 얍복강 남쪽에서 모압의 도시인 헤스본 북쪽까지 였습니다. 서쪽은 요단강까지이고,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을 대하는 산악이었습니다. 수도는 동쪽에 있는 랍바였습니다. 랍바 주변에는 아이라는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오늘날 요르단의 국토는 암몬과 모압을 합친 것으로 보이는데, 수도는 암만입니다. 암만은 본래 암몬의 수도였던 랍바입니다. 당연히 암만은 암몬에서 왔습니다. 오늘날 요르단 사람들은 그 베이스가 암몬 인과 모압 인, 그리고 이스라엘의 르우벤 및 갓 지파 사람들로 보입니다.

신 3.11에 따르면 르바임 족속의 바산 왕 옥의 철 침상이 랍바에 있다고 했습니다. 수 13.24에 따르면 갓 지파의 영토가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삼하 11장 이하에 따르면 다윗 왕은 요압을 보내 암몬 특히 랍바를 멸하라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가 전사를 합니다. 요압은 결국 랍바를 점령했고 뒤늦게 다윗 왕도 랍바에 가서 암몬의 왕관 등을 탈취했습니다. 삼하 12.26,29에 따르면 랍바는 암몬 자손의 큰 도성이라 합니다.

암만 성채 발굴시 발견된 비문에는 밀곰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암몬 자손은 밀곰이란 이름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어떤 계곡에서 발견된 인장에 ‘바알야사의 종 밀곰우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알야사는 렘 40.14에 나오는 암몬 왕 바알리스와 동일 인물입니다. 미스바 공동체 시절,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그다랴 총독을 찾아가서 암몬 왕 바알리스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시켜 너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다랴 총독은 이에 개의치 않고 이스마엘과 아마도 로쉬 하샤나 식사를 하다가 시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암몬으로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요하난이 이것을 저지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탈출했지요. 결국 요하난은 미스바 공동체를 이끌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예레미야도 이런 이유로 이집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고 결국 이집트를 시작으로 하는 하나님의 신탁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서기관 바룩의 수고를 잊을 수 없지요.  

암몬의 신인 밀곰은 페니키아의 요소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요소도 있다고 합니다. 수염이 있고 이집트의 오시리스의 왕관인 아테프를 다양하게 만들어 씌웠다고 합니다. 암몬의 왕들을 표현한 조각품들 가운데도 이런 관을 쓴 자들이 있는데 모두 이집트의 길게 늘어진 꽃 형상을 쥐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세계를 다스리는 자란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독특한 개념은 파라오를 지배했던 이집트 신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아버지는 당신을 기다리십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동쪽에 붙어 있는 아랍 국가 입니다. 인구가 천 만이 좀 넘는 입헌 군주국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70만 명이나 되는 팔레스틴 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요르단은 1967년 7월에 발발한 6일 전쟁 이전만 해도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7일 전쟁 이후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 빼앗겼지요. 현재 수도는 암만이고, 하심 왕가가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왕자 하나가 전투기를 몰았다고 화제가 되었습니다. 요르단은 우리에게 고작해야 이런 나라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요르단은 엄청난 이야기를 배경에 깔고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은 요르단 국민들을 아랍인들로 퉁치고 지명도 모두 아랍어로 바뀌었지만, 사실 요르단은 모압과 암몬, 그리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동북쪽 경계선을 이루는 길르앗 언덕에 살던 므낫세 반 지파도 지금은 어쩌면 요르단 국민들 중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요르단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지요. 요르단이란 요르단 강, 즉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들판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양보했던 땅입니다. 목축하기에 좋은 기름진 땅이었지요. 바로 그 곳에 소돔 성과 고모라 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래서 문화 수준이 높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헤브론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브엘쉐바에 겨우 판자집 하나 마련해서 이사를 가려던 찰라였습니다.  

요르단의 수도는 암만 입니다. 암만은 암몬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히브리어나 인근 언어들은 모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언어를 대할 때 어근을 따집니다. 어근을 이렇게 저렇게 발음해서 다른 단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요르단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것들이 모압, 암몬, 르우벤, 갓, 므낫세 등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 중에 암몬만 그 이름이 살아서 수도의 이름 암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숨겨진 사실을 생각 하게 합니다. 모압도 큰 도시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족속들도 나름대로 큰 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몬의 수도인 라파만 살아남아서 그 이름이 암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요르단을 이룬 사람들 중 암몬 사람들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는 반증이 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요르단 지역에서 암몬이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암몬은 이스라엘을 넘보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예레미야 서 40장과 41장에 미스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미스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암몬이 이 미스바 공동체를 깨버리고 그 땅을 점령하고 싶어 했습니다. 암몬 왕 바알리스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시켜서 그다랴 총독을 시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총독 시해에 성공한 이스마엘은 미스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데리고 암몬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몽땅 암몬에 바치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기브온 물가에서 이스마엘과 전투를 벌여 잡혀가던 자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미스바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망쳤지요. 이 일로 인해 예레미야는 물론 미스바의 유대인들은 암몬을 몹시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요하난은 이들과 함께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지요.

오늘은 예레미야의 신탁 중에서 네 번째 신탁을 다룹니다. 암몬에 대한 신탁이지요. 그런데 암몬에 대한 신탁은 매우 짧습니다. 모압에 대한 신탁은 매우 길었는데, 그에 비하면 암몬에 대한 신탁은 무시해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짧습니다. 단 여섯 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 블레셋도 일곱 절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룰 다메섹에 대한 신탁은 다섯 절이고, 게달과 하솔과 엘람에 대한 신탁은 여섯 절입니다. 하지만 암몬은 다메섹이나 게달과 하솔이나 엘람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몬에 대한 신탁이 그처럼 짧은 것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암몬이 누구입니까? 롯의 둘째 아들 벤암미 입니다. 첫째 아들은 모압이었지요. 하지만 이 둘의 어머니는 각각 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생각하면 참 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소돔 성에 있는 자기 소유가 다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피난하던 아내마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두 딸과 함께 소알의 뒷산에 올라가 바위 틈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딸 둘이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였습니다. 이때 두 딸의 심리는 우리의 연구 대상이 됩니다.

롯은 술을 마신 후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깨보니 야릇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열 달 후에 아들 둘이 생긴 겁니다. 딸이 마누라인지 손자가 아들인지… 이건 도대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개 족보였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나 나올듯한 이야기지요. 이후 롯과 그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압과 암몬이 나타나서 요르단 들판에 롯의 이름을 새기며 살아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모압과 암몬은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삼촌과 조카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모압과 암몬을 상종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더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모압과 암몬도 이스라엘을 증오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정복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압과 암몬은 조상인 롯이 섬기던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모스 또는 몰렉이라 하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 둘은 같은 우상입니다. 하지만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압과 암몬 사이에 알력이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지요. 모압과 암몬에게 있어서는 동생 암몬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형을 압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요르단의 수도가 암만이란 점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이스라엘과의 문제라면 연합해서 사사건건 이스라엘과 대립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49장의 본문에 따르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말감이 갓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말감은 말곰이라고도 하는데 몰록이라 하는 암몬의 우상을 말합니다. 이것을 모압은 그노스라고 했지요. 따라서 말감이 갓을 점령했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암몬이 하나님을 섬기는 갓 지파 사람들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갓 지파 사람들은 압복강을 경계로 하여 암몬의 북쪽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암몬이 그들을 침략했습니다. 그래서 갓 지파 사람들은 암몬의 우상을 섬기든가 자기 성읍을 떠나 이스라엘로 가든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신탁은 암몬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언젠가 이스라엘이 암몬을 점령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 신탁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점령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점령은 아닐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말감에 대한 신앙을 파괴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하나님은 갓 지파 사람들에게 요단 동편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암몬은 그 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모압은 르우벤을 녹여서 없앴는데 암몬은 갓을 두드려 패서 없앴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암몬이 망할 수 밖에 없는 첫번째 이유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함부로 다루는 자들은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랍바에 전쟁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암몬의 수도는 본디 랍바였습니다. 현재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랍바의 성채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암몬의 수도 랍바의 유적입니다. 이후 랍바가 암만이 된 것이지요. 다윗 왕 시절에 이스라엘은 랍바까지 쳐들어 가서 암몬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밧세바 사건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헷 사람 우리야를 랍바로 보내서 격렬한 전투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다윗의 명령을 받은 요압 장군은 우리야가 혼자 싸우게 했지요. 결국 우리야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과 요압의 이런 야비한 행동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아무튼 암몬에 대한 추억으로 좋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암몬의 수도 랍바는 폐허더미의 언덕이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실린 그림이 바로 랍바의 폐허더미 언덕입니다. 지금도 이 폐허더미 언덕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계속 됩니다. 랍바 인근의 마을들이 불타버릴 것입니다. 그 중에 아이라는 마을도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여호수아가 정복했던 아이 성이 아닙니다. 랍바 근처에 있는 어떤 마을의 이름입니다. 왜 하필 아이를 예레미야의 신탁이 언급하고 있는 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랍바도, 아이도, 다 폐허가 될 것입니다. 왕도 죽고 신하들도 죽고 백성들도 다 죽는다는 의미겠지요. 뿐만 아니라 말감도 죽고 그 제사장들도 죽을 겁니다. 이제 암몬의 우상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상은 결국 제거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지 않으면 적들에게 잡혀가서 노예가 될 것입니다. 노예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가축으로 취급을 받게 되지요.   

이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암몬은 패역한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패역한 딸을 히브리어로 ‘하 빠트 하 쇼베바’라고 합니다. 뒤로 넘어져서 미끄러지는, 또는 뒤로 돌아가는 딸이란 뜻입니다. 개역에는 타락한 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원뜻을 생각하면 패역으로 번역하는 게 맞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거꾸로 간다는 의미니까요. 패역한 딸이란 표현에서 우리는 유황 불에 타는 소돔 성을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딸이라고 하신 암몬은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딸은 언덕 위에 있는 반석에다 집을 짓고 살겠지요. 결코 골짜기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요르단의 골짜기는 대개 와디 입니다. 우기가 되면 물이 흐르지요. 우기가 아니면 마른 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기가 되어 비가 오면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모든 것을 쓸어 갑니다. 그런 곳에다 암몬은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말감 우상을 섬기며 살아온 암몬을 예레미야의 신탁은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제 암몬은 엄청나게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 갈 것입니다. 이것이 패역한 딸, 뒤로 돌아가는 딸, 즉 암몬의 운명이 될 것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암몬 사람들이 못 알아 들을까 싶으셨는지 패역한 딸의 삶에 대해 주석을 붙이셨습니다. 패역한 딸이란 재물을 의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롯의 아내도 재물 때문에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기둥으로 얼어붙었지요. 암몬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을 오래 전에 포기하고 오로지 재물만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재물로 적들을 구워 삶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재물은 사방에서 오는 적들을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재물 때문에 가장 먼저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 입니다.

성남시 대장동의 택지 개발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어떤 20대 청년은 이와 관계된 일로 50억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50억, 100억, 천 억… 참 말도 쉽게 합니다. 당시 성남 시장이었던 사람은 말하기를 돈을 주는 자는 마귀이므로 절대로 돈을 받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런 돈을 받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누군가 하나 걸린 것 같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받았다가 죽어가고 있지요. 돈이란 그런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암몬 사람들 같은 자들이지요.

암몬 사람들은 돈으로 사람들을 모아 적들과 싸우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들은 결코 구원의 사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항상 거스리던 암몬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 후에 내가 암몬 자손의 포로를 돌아가게 하리라.” 예레미야는 이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도장을 꽝 찍은 것이지요. 사사건건 하나님을 대적했던 암몬이지만 결국 회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돔 성의 의인이었던 롯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반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수종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 앞에 똭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종병이란 손과 발에 문제가 생겨 행동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손과 발이 마르는 병이지요. 예수님은 당연히 그를 고쳐주고 싶으셨지요. 그런데 하필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사들 조차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과도한 생각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성막을 만드는 행위와 관련이 있는 서른 아홉 가지 일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이라 해도 가족이나 가축이 웅덩이에 빠지면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에 똭 앉아있는 손발이 마른 사람의 수종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거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집이 바리새인의 집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을 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암몬에게도 회복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안식일에 율법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의 일부란 말입니다. 안식일은 아버지의 집으로 비유하고, 율법사들을 탕자에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가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했습니다. 그 사람은 공정하게 첫째와 둘째에게 각기 살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살림을 받고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둘째는 자기가 받은 살림을 몽땅 돈으로 바꾸어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런 심리도 연구대상입니다.

먼 나라로 간 둘째는 가지고 간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렸습니다. 돈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사는 짜릿한 맛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돈은 금새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땀을 흘려 번 돈은 바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받은 돈은 물에 빠진 소금과 같거든요. 나도 모르는 새에 녹아 없어집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둘째가 머물던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흉년이 오자 그 사람은 돼지를 치며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돼지를 치는 품꾼이 아니었습니다. 있을 곳이 없어 돼지 우리에라도 기거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 먹을까 했지만 그것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흉년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쥐엄 열매를 다 거두어 갔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둘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사실 쥐엄 열매는 돼지 먹이가 아닙니다. 사람이 먹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에게 쥐엄 열매를 주었다는 것… 그것은 둘째가 갔던 나라가 그만큼 부유했다는 뜻 입니다.  쥐엄 열매가 아니라도 먹을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흉년이 드니 쥐엄 열매도 얻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둘째는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하고 품꾼도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둘째는 품꾼이 부러웠습니다. 품꾼이라면 품삯을 받아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타국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귀향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품꾼으로나 써달라고 해보자. 그래야 밥이라도 먹고 연명을 하지… 어쨌든 둘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돌아간다는 것… 이것을 히브리어로 트슈바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번역합니다. 패역의 반대말이지요.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 겁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둘째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몰골이 참 남루 했을 겁니다. 다행히도 고향은 흉년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부유했습니다.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사람들이 둘째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속으로 요즘도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나… 했을 겁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뭣하는 인간이냐… 아버지의 집 근처에 도착하여 쭈빗쭈빗 하는 둘째… 그런데 아버지는 멀리서도 그게 보였습니다. 집으로 온 둘째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되면 적어도 자기 자녀에 대해서는 이런 초능력이 생깁니다. 물론 어머니는 이보다 더한 초능력이 생기지요. 이 모든 게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에게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냄새가 엄청나게 났겠지만 아버지에게 그 냄새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다는 것은 다시 주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지 꼴이었던 둘째는 과거 아들의 모습을 회복했습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후 말씀을 보면, 아버지와 첫째 아들 사이의 갈등이 생긴 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영원한 첫째와 둘째 사이의 갈등…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는 생기지 않지만, 형과 동생 사이에는 반드시 생기는 갈등… 이 갈등 때문에 형과 동생은 경우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패역한 암몬과 모압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부모들이 잘 해야 합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공정이고 그 다음은 설득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의 형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이후 형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은 더 이상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별도의 이야기이고 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째도 자녀를 얻은 후에 동생을 용서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을 겁니다. 첫째가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랬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그보다 더한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좀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초막절이 지났습니다. 호샤나 라바의 날, 즉 큰 구원의 날도 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지 않으셨네요. 유대인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일년 후에 오는 호샤나 라바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도 메시야가 오지 않으면 그 다음 해 호샤나 라바의 날을 또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것도 바람직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문제는 무작정 호샤나 라바의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암몬이 말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 그 결심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패역한 딸들처럼 뒤로만 가지 말고 앞으로 오란 말이지요. 왜냐하면 자녀에 대해 초능력을 가진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인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하나님의 아버지같은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 끝날까지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탕자가 염치 없고 부끄러워도 아버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듯이 우리도 하나님께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러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큰 구원의 날은 초막절 마지막 날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큰 구원의 날은 말 그대로 크기 때문입니다. 크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1) 암몬이 접수한 이스라엘의 한 지파는?

2) 암몬이 요르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말해 봅시다.

3) 하나님께서 암몬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이유는?

 

 

 

 

2021년 9월 26일

 

예레미야 48장 26-47절: [26]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27]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으냐 그가 도둑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도다 [28] 모압 주민들아 너희는 성읍을 떠나 바위 사이에 살지어다 깊은 골짜기 어귀에 깃들이는 비둘기 같이 할지어다 [29]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3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의 노여워함의 허탄함을 아노니 그가 자랑하여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도다 [31]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리로다 [32] 십마의 포도나무여 너의 가지가 바다를 넘어 야셀 바다까지 뻗었더니 너의 여름 과일과 포도 수확을 탈취하는 자가 나타났으니 내가 너를 위하여 울기를 야셀이 우는 것보다 더하리로다 [33] 기쁨과 환희가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그 외침은 즐거운 외침이 되지 못하리로다 [34]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와 소알에서 호르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야에 이르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 부르짖음은 니므림의 물도 황폐하였음이니라 [35] 여호와의 말씀이라 모압 산당에서 제사하며 그 신들에게 분향하는 자를 내가 끊어버리리라 [36]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 내나니 이는 그가 모든 재물이 없어졌음이라 [37] 모든 사람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수염을 밀었으며 손에 칼자국이 있고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38] 모압의 모든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 같이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9] 어찌하여 모압이 파괴되었으며 어찌하여 그들이 애곡하는가 모압이 부끄러워서 등을 돌렸도다 그런즉 모압이 그 사방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와 공포의 대상이 되리로다 [40]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가 독수리 같이 날아와서 모압 위에 그의 날개를 펴리라 [41]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42]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 [4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닥치나니 [44]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내가 모압이 벌 받을 해가 임하게 할 것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5] 도망하는 자들이 기진하여 헤스본 그늘 아래에 서니 이는 불이 헤스본에서 나며 불같이 시혼 가운데 나서 모압의 살쩍과 떠드는 자들의 정수리를 사름이로다 [46] 모압이여 네게 화가 있도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하였도다 네 아들들은 사로잡혀 갔고 네 딸들은 포로가 되었도다 [47] 그러나 내가 마지막 날에 모압의 포로를 돌려보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압의 심판이 여기까지니라.

마태복음 21장 1-9절: [0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02]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0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0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0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0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0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0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레미야의 계시 3  모압에 대해 2/ 비둘기같이 할지어다

 

모압인들은 까닭 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말만 나와도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잘난 체를 하고 오만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거스리게 되고 벌을 받지요. 그들은 성읍에서 살지 못하고 산 비둘기처럼 바위 사이에서 살게 됩니다. 창 19.30에 따르면 소돔 성을 떠난 롯과 두 딸들이 작은 소알에도 거주하지 못하고 그 뒷산에 올라가서 굴에 거주했지요. 거기서 모압과 벤암미가 태어났습니다. 놀랍게도 모압인들은 이와 흡사한 운명에 처합니다. 이렇게 살게 되므로 이후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합니다. (렘 48.42) 과연 그렇습니다. 그들은 지금 요르단에 살고 있지만 모압의 이름을 내세우지 못합니다. 그의 아우 암몬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었고 또한 이스라엘의 장남 지파인 르우벤 사람들을 품었을 수도 있으며 갓 지파 사람들도 품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신탁이 그토록 애절하고 길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모스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그모스에게 제물로 바치는, 그야말로 창조질서를 어기는 사람들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살아있는 그들의 아들들은 사로잡혀갔고 딸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정복자들의 노동력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들을 마지막 날에 돌려보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모압이란 이름으로 부활히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여기까지 말하고 모압에 대한 신탁을 끝냈습니다.

예레미야는 모압에 대한 신탁에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이 모든 신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신 말씀이지 예레미야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토로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압에 대한 신탁이 다른 민족에 대한 신탁과 달리 계속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아쉬워 하심 입니다. 그들이 웬만만 했더라도 그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모스 신을 섬겼고, 그 신을 위해 자녀들까지 제물로 바쳤으며, 옛날 소돔 사람들처럼 세속적으로 살면서 술을 즐겼습니다. 술 때문에 정신을 잃고 토한 것 위에서 추태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로 부터 나라를 빼앗았으나 아브라함과 롯을 생각하시고 마지막 날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모압인들에게는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그 자체를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 대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속의 복도 허락해 주십니다. 세속의 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전도본말 이랍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두 번째로 긴 모압에 대한 신탁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아쉬움과 진노로 채워져 있습니다. 술을 좋아했던 모압인들에게 계속 취해 있어 토한 것 위에 드러누워 뒹굴라고 하셨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노여움과 허탄함으로 인해 교만하고 오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압인들은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해 신음했다고 합니다. 길헤레스는 모압의 또 다른 수도였기 때문에 그 도시를 지키기 위해 다른 모압인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말이겠지요.

십마는 모압 북쪽에 있는 포도원 지역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포도원 지역은 사해에 이르고 암몬과의 경계인 야셀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모압인들은 그 포도를 먹지 못합니다. 침략자들이 그 포도를 차지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압인들은 포도주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던 그들이 참 곤란하게 되었겠군요. 그들에게 물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북단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 그리고 서쪽 소알에서 호르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아에까지 동서남북에 사는 모든 모압인들이 소리내어 부르짖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압의 중요한 수원지인 니므림의 물이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술로 살던 그들이 물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그모스의 신당을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압의 수도 길헤레스가 망하고 모든 재물이 탈취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모압인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피리 소리와 같은 울음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대머리가 되고 수염을 깎았으며 손에 칼자국이 생기고 허리에 굵은 베가 둘러졌습니다.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상해를 입었으며 초상을 당했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슬피 울었으나 하나님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 같이 깨버렸다고 하셨습니다. 도공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을 여지 없이 깨뜨리지요. 도공이니까요.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도공과 같으십니다. 이런 모압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니 그들 처럼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수리 처럼 날아와 모압 위에 날개를 펴시지만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복수였습니다. 이제 모압 주민들에게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닥칠 것 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도망하면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나오면 올무에 걸릴 겁니다. 이제 벌을 받을 해가 되었습니다. 헤스본과 시혼에서 불이 납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모압은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합니다.

 

---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출애굽기에 제시된 연중 3대 절기,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은 모두 그 자체로 감사절 입니다. 유월절은 해방과 자유에 대한 감사절 입니다. 오순절은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절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기 전에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인식 안에서 십계명은 십계명답게 되고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우리가 메시야를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무엇을 감사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지요. 초막절은 앞으로 이루어 질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롯의 후손들 입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섬기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소유 문제로 아브라함과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그때 롯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삼촌.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도 오로지 삼촌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삼촌이 먼저 정하십시오. 이후에 제가 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롯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삼촌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에 흥분해서 우선 선택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섣부른 결정을 했습니다. 그가 택한 곳은 도시였습니다. 도시로 가면 잘 살 것 같았습니다. 롯이 도시를 선택하지 아브라함은 벽지라 할 수 있는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롯은 결국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롯은 잘 살게 되었을까… 아니요, 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롯이었습니다. 롯은 소돔 성의 동성애자들을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롯의 말을 듣겠습니까? 오히려 니가 뭔데 우리를 판단하느냐…하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 불벼락이 내려서 모든 게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롯과 그의 두 딸은 살아났습니다. 이들은 소알을 거쳐 그 뒷산으로 올라가서 동굴에 머물렀습니다. 모든 게 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은 아버지 롯에게 술을 먹였습니다. 이후 모압과 벤암미라는 형제가 생겨났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인지 예레미야의 신탁에서는 술, 어린이, 그리고 바위틈이란 말이 계속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에 따르면 모압은 술에 취합니다. 그러다 토하지요. 하지만 그 위에서 뒹굽니다. 이들이 살 곳은 산 위에 있는 바위 틈입니다. 또는 깊은 골짜기 어귀입니다. 모든 것이 롯과 그의 두 딸을 생각나게 하는 언사입니다. 그들은 그모스 신을 섬겼습니다. 그모스 신은 암몬의 몰렉과 같은 신으로 어린 아이들을 잡아 먹는 신이지요. 사실 모압과 암몬은 어린 아이로 인해 생긴 비극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이것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으냐? 그가 도둑 가운데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사람들에 대해 잘못한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 심각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머리를 흔들면서 극도로 과장해서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에 대해 나무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욕을 하느냐고 하셨지요. 이것은 그들이 심히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불쌍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의 제목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롯에게 기름진 목초지인 요단 들녘을 양보하고 네게브 사막이 시작되는 척박한 헤브론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 롯이 동성애자들과 함께 살았다면, 아브라함도 역시 이방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헷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의 근거지인 하투사의 철광석 광산에서 난 철로 무기를 만들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브엘쉐바에 삶의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어땠습니까? 롯은 소돔 성 안에서 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딸들도, 사윗감들도, 심지어 아내조차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롯과 그의 딸들의 실패를 목격하고도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재물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공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사는 거냐고 험한 말로 힐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면 모압 사람들은 매우 즐거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신탁을 통해서 모압이 가진 십마의 포도나무가 탈취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마는 모압의 북쪽 지방에 있는 포도 생산 지대를 말합니다. 십마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유명했다고 합니다. 물질과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온 그들에게 아주 좋은 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침략자들이 들어와서 그 포도원들을 망가뜨려 놓을 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들던 사람들은 산 꼭대기로 또한 깊은 계곡으로 도망을 칠 겁니다. 그리고 바윗돌 사이에 숨어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벌이 아니어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마의 포도나무는 없지만 브엘쉐바에 삶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에서 남으로는 헤스본에서 엘르알레를 지나 야하스까지, 서에서 동으로는 소알에서 호르나임을 지나 에글랏 셀리시야까지, 그 광대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피난을 해야 합니다. 침략자들이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누메라 강의 물이 마를 것입니다. 누메라 강은 본문에 니므림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땅이 아무리 기름져도 강이 마르면 사막이 되는 것이고 사막이 되면 사람도 짐승도 살 수 없게 되지요.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물질과 권력에 도취되면 망하는 수순을 밟게 되는데 이와 함께 자연까지 엉망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회 현상과 자연 현상이 함께 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연을 다스리라고 명령 하셨으므로 사람이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연이 사람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흘러가지만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인 그모스와 그 부하 신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에게 제사하고 분향했습니다. 그들은 머리털과 수염을 밀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칼자국을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둘렀습니다. 그렇게 하면 신들이 도와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신들은 결코 모압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훼방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결국 모압 사람들은 사방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기들이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압이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의 백성이 된 모압이 마땅히 겪어야 할 바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모압의 포로들을 돌려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모압에 대한 심판이 끝나게 됩니다.

마지막 날, 모압의 포로들이 돌아오는 날, 그때가 언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를 호샤나 라바의 날이라 했습니다. 호샤나 라바…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호산나라고 음역을 했습니다. 호샤나 라바는 큰 구원의 날이란 뜻으로 초막절 마지막 날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 날 메시야가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유대인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마가복음 11장,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특이하게 이때를 유월절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그를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더도 덜도 아닌 초막절의 풍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되지요. 이 의문을 오늘 우리가 묵상한 예레미야의 모압에 대한 신탁과 연관 지어 보면… 메시야가 오셨는데 어찌하여 모압의 포로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지금도 호샤나 라바의 날을 열심히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메시야가 올해 오지 않으면, 내년에는 올거라고 생각하고 제 8일의 날과 심하 토라의 날을 만들어 놓고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제 8일의 날에 지난 일년 동안 밀렸던 십일조를 정산하고 다시 대열을 가다듬어 내년 호샤나 라바의 날에 대비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창세기 1장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내년 호샤나 라바의 날까지 신명기까지 다 읽고 메시야를 만나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것만 빼고, 우리는 호샤나 라바의 날에 관한 유대인들의 모든 주장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가 나귀 새끼를 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는 겸손하여 어린 나귀 새끼를 탔다고 말했지만 그걸 믿지 않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모압 사람들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이나 모압 사람이나 겸손한 메시야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귀 새끼를 타는 겸손한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걸릴지… 모압이 망한 지 어언 2,500년이나 되는데 앞으로 2,500년이 지나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오신 지 어언 2천 년인데, 2,000년이 지나면 알 수 있을까요? 100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2천 5백 년은 대단한 시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을 손에 쥐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시간의 문제로 보고 있지만, 시간이 문제가 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호샤나 라바라고 하는 마지막 날은 결국 시간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큰 구원의 날을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이게 시간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스스로 감사를 하는 사람이나 절기로 인해 감사를 하는 사람이나 감사한다는 그 자체가 마지막 날을 향한다는 점에서 초막절과 관련이 있는 우리의 추수감사주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1) 모압이 이스라엘을 무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모압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열거해 봅시다.

3) 하나님은 모압의 자존심을 어떻게 꺾으셨나요?

 

 

 

 

2021년 9월 19일

 

예레미야 48장 1-25절: [01] 모압에 관한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오호라 느보여 그가 유린 당하였도다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하여 파괴되었으니 [02] 모압의 찬송 소리가 없어졌도다 헤스본에서 무리가 그들 해하려고 악을 도모하고 이르기를 와서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 하는도다 맛멘이여 너도 조용하게 되리니 칼이 너를 뒤쫓아 가리라 [03]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04] 모압이 멸망을 당하여 그 어린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리는도다 [05] 그들이 루힛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울고 호로나임 내리막 길에서 파멸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듣는도다 [06]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노간주 나무 같이 될지어다 [07] 네가 네 업적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정복을 당할 것이요 그모스는 그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되어 갈 것이라 [08] 파멸하는 자가 각 성읍에 이를 것인즉 한 성읍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골짜기가 멸망하였으며 평지는 파멸되어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로다. [09] 모압에 날개를 주어 날아 피하게 하라 그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기에 사는 자가 없으리로다 [10]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 [11]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숭르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13] 이스라엘 집이 벧엘을 의뢰하므로 수치를 당한 것 같이 모압이 그모스로 말마암아 수치를 당하리로다 [14] 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 [15]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그 성읍들은 사라졌고 그 선택 받은 장정들은 내려가서 죽임을 당하니 [16] 모압의 재난이 가까웠고 그 고난이 속히 닥치리로다 [17] 그의 사면에 있는 모든 자여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자여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가 부러졌는고 할지니라 [18] 디본에 사는 딸아 네 영화에서 내려와 메마른 데 앉으라 모압을 파멸하는 자가 올라와서 너를 쳐서 네 요새를 깨뜨렸음이로다 [19] 아로엘에 사는 여인이여 길 곁에 서서 지키며 도망하는 자와 피하는 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물을지어다 [20] 모압이 패하여 수치를 받나니 너희는 울면서 부르짖으며 이아르논 가에서 이르기를 모압이 황폐하였다 할지어다. [21] 심판이 평지에 이르렀나니 곧 홀론과 야사와 메바앗과 [22] 디본과 느보와 벧디불라다임과 [23] 기랴다임과 벧가물과 벧므온과 [24] 그리욧과 보스라와 모압 땅 원근 모든 성읍에로다 [25] 모압의 뿔이 잘렸고 그 팔이 부러졌도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태복음 19장 20-26절: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3  모압에 대해 1

-광야의 노간주 나무가 되라-

  

예레미야의 신탁 중 가장 긴 것이 바벨론에 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서 50-51장이  바벨론에 관한 것으로 모두 110절이나 됩니다. 그 다음이 모압에 관한 것으로 예레미야 서 48장이며 모두 47절이나 됩니다. 그 다음은 이집트에 관한 것으로 26절이나 됩니다. 모압은 비교적 작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강대국 만큼 신탁이 길다는 것은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유감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신탁은 느보, 기랴다임, 미스갑이 유린 당한 것을 애통해 합니다. 이것으로 찬송이 그쳤다는 것 입니다. 우상의 근거지인 헤스본이 모압을 망하게 하고 맛멘도 칼로 인해 조용하게 될 것 입니다.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나니 그것으로 황폐와 파멸이 증명되었습니다. 모압이 멸망하면서 어린 아이들이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이 루힛 언덕으로 올라가며 울었으나 호로나임 내리막 길에서 파멸의 고통으로 불부짖습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구원한 후 광야의 노간주 나무처럼 되라고 합니다. 노간주 나무는 떨기 나무로 히브리어로는 ‘아로에르’라고 합니다. 주보 1면 그림.

 

 

모압이 이렇게 멸망하는 것은 업적과 보물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인 그모스도 그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가 될 것 입니다. 모압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이 모압의 모든 성읍에 들이닥쳐 파멸을 시킬 겁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처럼 될 것 입니다. 미리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압이 살아나는 방법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것 뿐 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키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않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모압 족속에 대하여

 

모압 족속의 조상은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 ‘롯’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직후에 롯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모를 ‘모압’이 태어났습니다. 모압의 후손이 바로 모압 족속입니다. 이후에 모압의 이종 사촌 동생이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은 ‘벤암미’였습니다. 벤암미의 후손은 암몬 족속입니다. 현재 요르단의 수도 암만이란 이름이 암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압은 에돔이나 아모리 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미디안 사람 발락을 데려다 저들의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과 싸우려 했습니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자 빌람까지 데려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허사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 말기에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입성을 준비했지요. 여기서 신명기의 내용이 기록되었고, 모세가 죽은 곳도 모압 땅에 솟아 있는 ’느보’ 산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도 모압은 틈만 보이면 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사사기 3장에 따르면 모압 왕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고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모압에게는 모압 신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신은 ‘그모스’였습니다. 참고로… 암몬의 신은 가증한 몰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모스가 곧 몰록이라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신들에게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모압 족속은 하나님의 사람인 롯의 후손이었지만 어느덧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경건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룻기에 따르면 모압 여인으로 현숙했던 룻은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다윗의 아비 이새의 아비가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압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반역을 일으킨 자들은 곧잘 모압이나 암몬으로 피신하곤 했습니다.

 

---

광야의 노간주 나무처럼 되라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의 신탁 중에서 모압에 관한 것을 다룹니다. 모압에 관한 신탁은 예레미야의 신탄 중 두 번째로 깁니다. 가장 긴 것은 바벨론에 관한 신탁이지요. 예레미야 50장부터 5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110구절이나 되지요. 그 다음이 바로 모압에 관한 신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48장인데 모두 47절이나 됩니다. 그 다음이 우리가 다룬 이집트에 관한 신탁입니다. 예레미야 46장인데 모두 26절입니다.

예레미야 신탁에서 바벨론과 이집트를 길게 다루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멸망에 있어 바벨론과 이집트는 구체적으로 관여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모압은 이스라엘의 멸망에 있어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모압은 조그만 나라입니다. 모압은 그 규모가 바벨론과 이집트에 비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신탁은 모압을 이집트 보다 더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저는 예루살렘에 갔을 때 유다 광야 높은 곳에 올라가서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동쪽 정면으로 보이는 아스라한 산맥 밑에 커다란 도시가 하나 있는데 그게 암만이라 하더군요. 거기서 동쪽으로 계속 나가면 쿠웨이트가 나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암만이 그렇게 가까운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암만이란 이름은 암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번째 아들 입니다. 장남이 모압이지요. 그러나 지금 모압은 없어지고 암몬만 암만이란 이름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모압은 4세기 후반 나바티아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압인들은 암몬인들과 합쳐져서 암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암만이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가운데 적어도 두 지파들, 즉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현재 요르단 지역을 차지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르우벤 지파가 모압 지역을, 갓 지파가 암몬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에게 흡수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모압에 관한 신탁이 두 번째로 간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 두 지파인 르우벤과 갓을 어떻게 잊으실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모압과 암몬에 섞여 버렸는데요. 오늘날의 인종학자들도 유대인들과 암몬인들은 서부 셈어족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그들의 출발이 같았으니까요.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롯은 아브라함이 양보한 땅에서 살았고 롯의 후손들도 그 땅을 떠나지 않고 그 곳에서 주욱 살았습니다. 모압의 영토는 사해 동쪽이었고 암몬의 영토는 모압 보다 다소 북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를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길르앗에 살던 므낫세 반 지파도 받아들였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모압 사회에서도 여호와의 신앙이 존재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모압으로 피난을 가곤 했지요. 그 가운데 신앙이 깊은 이스라엘 여자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훗날 모압 여인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 여인 룻은 베들레헴의 유지 보아스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최고의 왕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모압이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한 토막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과 모압은 많이 다투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압은 일찌감치 하나님을 떠나 저들 마음대로 세속의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암몬의 신 몰렉과 비슷한 그모스 신을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신을 이스라엘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에는 모압 신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모압과 이스라엘은 얼키고 설킨 감정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여러가지 문제로 대를 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해에서 동쪽으로 모압 땅을 바라 본 적이 있습니다. 사해 서쪽, 즉, 이스라엘 쪽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호텔도 있고 진흙으로 화장품을 만드는 공장들도 있어서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동쪽의 요르단 쪽, 즉 옛 모압 쪽은, 산악지대라 적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마친 후 모압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의 산악지대를 지나 여리고 맞은 편 모압평지에 도착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모압을 지날 때 그들이 사용했던 길은 모압 땅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왕의 대로라는 길이었습니다. 옛 부터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중해 해안으로 난 해변 길이지요. 이집트에서 가자를 거쳐 므깃도를 거치는 길입니다. 전쟁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 되었던 길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가나안 땅 산악지대에 난 족장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요. 헤브론에서 베들레헴, 벧엘, 세겜 등을 거치는 길입니다. 셋째는 바로 모압에 있는 왕의 대로였습니다. 이 길은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가거나 바벨론에서 이집트로 갈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 광야를 벗어나 왕의 대로로 들어서서 아르논 강을 건넜고  모압의 수도 디본과 아다롯을 지났으며, 그데못과 야하스와 랍바를 지나서 느보 산 기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모압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선지자 빌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이게 불발이 되자 빌람의 간계에 따라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우상을 숭배 하게 했습니다. 암몬 땅이 가까운 북 모압의 싯딤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일들이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 씨줄과 날줄로 얽혀 묘한 민족 감정을 만들어 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모압을 길게 다루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쉬움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모압에 대한 신탁은 가차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느보가 유린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해 점령되었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느보는 모압 평지에 있는 높은 산을 말합니다. 여기에 서면 요단강 계곡과 그 너머의 여리고가 자세히 보입니다. 모세는 이 곳에 올라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죽었습니다. 그런 느보 산이 바벨론에게 유린을 당했다고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리고 미스갑이 수치를 당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미스갑은 숲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압에 속한 어떤 주요한 산림이 파괴되었다는 말입니다. 모압처럼 메마른 땅에서 산림은 중요합니다. 이 산림이 사람들에게 물도 주고 약도 주고 피난처도 줍니다. 그런데 그런 산림이 수치를 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압의 영광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압의 최북단 도시는 헤스본입니다. 헤스본이 무너지면 모압의 입구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스본에서 사람들이 모압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압 사람들이 모압의 멸망을 도모하다니…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우상을 섬기는 모압 사람들이었습니다. 위험한 시국에 그들은 스스로 망할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맛멘에서도 모압의 멸망을 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맛멘은 메 디몬…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즉, 디몬에서…라는 뜻 입니다. 디몬은 모압의 수도 디본을 말한다고 합니다. 수도에서 조차 사람들이 스스로 망할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요.

호로나임에서도 멸망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호로나임은 두 개의 동굴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호로나임은 아마도 모압의 신인 그모스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장소가 아닌가 합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호로나임에서 어린 아이들의 부르짖음이 들린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울음… 즉, 제물로 바쳐진 어린 아이들이 고통에 죽어가며 울던 그 울음 소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게 모압이 멸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어린 아이들이 루힛 언덕으로 올라가서 죽음을 당하고 호로나임 내리막 길에다 그 시신이 버려진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멸망이 목전에 다가왔으므로 모압 사람들은 차라리 광야로 도망을 쳐라! 거기서 노간주 나무가 되는 게 낫겠다…

노간주 나무의 사진은 주보 1면에 실려 있습니다. 노간주 나무를 히브리어로는 ‘아로에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Juniper 또는 Cypress라고 하지요. 광야에서도 푸른 잎을 내서 생명의 모습을 드러내는 나무입니다. 우리 말로는 떨기나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압 사람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았니… 생명이 중하냐 아니면 재산이나 출세가 중하냐… 이런 질문이 노간주 나무로 살아라고 하신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모압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업적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정복을 당할 것이요 그모스는 그의 제사장들과 고관들과 함께 포로되어 갈 것이라.” 제사장들과 고관들… 한 마디로 말해서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업적을 쌓았고 보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모압 사회에서 내로라…하면서 살았겠지요.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지만 결코 하나님을 의뢰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상에 지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을 잡아 먹는 귀신, 그모스를 의뢰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모스와 함께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괴로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 괴로움을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의 괴로움에 비할 수야 있겠습니까…

모압의 그모스 신은 암몬의 몰렉 신과 같은 우상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받는 신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신을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곧 파멸하는 자가 각 성읍에 이를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벧엘에 있던 황금소 우상을 의지하다 망한 것처럼 모압도 그모스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모압은 본래 평화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술독을 깨뜨려 버릴 사람들을 보내실 겁니다. 이제 모압은 한 성읍도 파멸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수도 디본이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아로엘도 망할 겁니다. 홀론과 야사와 메바앗과 디본과 벧디불라다임과 기랴다임과 벧가물과 벧므온과 그리욧과 보스라에 파멸이 닥칠 겁니다. 예레미야 서 48장에 따르면 모압에 참 많은 동네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압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많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즉,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무슨 헬리콥터가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행글라이더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앉아서 파멸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다…” 스스로 생각하면 용사고 능란한 전사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강력한 파멸의 세력 앞에서 그 힘을 과시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압은 황폐해 졌고, 그 많던 성읍들은 사라졌고 선택 받은 장정들은 전쟁터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강한 막대기와 아름다운 지팡이는 부러졌으며, 그들의 뿔이 잘리고 그 팔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여호와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여호와의 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합니다. 이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니까 어리석은 제자들이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누구나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요. 그런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면,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무슨 낭패냐…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란 크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자꾸 물리적인 크기로만 해석하니까 혼란이 생기지요. 하지만 물리적인 크기로만 해석하면 오히려 해답은 더 간단해 질 수 있습니다. 바늘귀를 낙타보다 더 크게 만들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늘귀는 물리적인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물질의 문제로 보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방법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보호하는 장치로 봐야 합니다. 에덴 동산 주위를 두르는 그룹들의 불칼 같은 겁니다. 이걸 물리적으로 볼 수 없지요. 의미로 또한 방법으로 봐야 합니다. 저는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욥바 문과 루터가 숨어서 성경을 번역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가보고 바늘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평화 시에는 성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러나 전쟁 시에는 성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아군을 위해서 쪽문을 열어 놓지요. 그런데 이 쪽문에 바늘귀 장치를 해둡니다. 문 자체를 작게 하고, 심한 경우에는 90도 각도로 두 번 꺾어야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낙타를 타고서는 여기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말이나 낙타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와야 합니다. 말이나 낙타도 맨 몸으로 들어와야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90도로 몸을 꺾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 사람도 짐승도 결국 바늘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늘귀는 전투 중에 적군의 대량 침투를 방지하고, 아군에게는 오히려 원대복귀의 기회를 주는 장치란 말입니다.

소시쩍 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주장하는 청년에게 예수님이 재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재물 위에 올라 앉아있으면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려와야 비로소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천국의 문은 자기 발로 걸어서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그 문의 구조에 따라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큰 성문은 닫아두고 쪽문의 바늘귀 장치를 통과해서 들어오라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게 좁은 문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대로 하면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은 여호와의 일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못하게 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단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단호하게 칼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일을 못하게 하는 자를 내버려 두는 것은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모압 사람들은 업적이나 보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뢰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들까지 아낌없이 그모스 신에게 바칠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울음소리가 루힛 언덕에서, 그리고 호로나임 내리막 길에서 들려왔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자들이 어떻게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 사람들에게 차라리 광야로 가서 노간주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오늘 아침, 사진 두 장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예배당의 강단 중앙에 놓인 영정 사진이었습니다. 생화로 둘러싸여 호화롭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걸 두 개의 대형 스크린으로 또 비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병원 장례식장에 단만 덩그렇게 놓여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단 위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성경 구절을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단 아래 헌화대에는 고인의 유언이 적힌 알림판만 놓여 있었지요. 유언의 내용은, 부의금 사양, 조화 사양, 영정 설치 안함, 유족 위로로 상례 대신 등이었습니다.  

앞의 것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원로목사인 조용기 씨의 장례 사진이었습니다. 뒤엣 것은 고신대 신대원장을 지낸 허순길 목사의 장례 사진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지난 화요일 오전 7시에 별세 했습니다. 향년 86세라고 합니다. 그의 조문소 사진을 보니 ‘천국 가신 원로목사 조용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세계에서 교인 수가 가장 많은 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그의 공로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인 수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여든 헌금을 함부로 썼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담임 목사를 그만 둘 때 전별금을 받았는데 그 액수가 150억 원 또는 200억 원이라 합니다. 그 많은 돈을 세다가 정작 여호와의 일은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는 오중복음 삼중축복이란 것을 주장했습니다. 5중복음에 대해서는 시간 관계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3중 축복이라는 것… 즉,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고 또한 육체가 건강해 진다는…  오로지 복에 관심을 갖는 그의 생각을 뉴욕 타임즈는 한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역설했다…”

여러분, 누구나 복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수행하지요. 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만 찾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복의 백성이지요. 물질의 백성이고 결국 맘몬의 백성입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을 해서 재산을 모아놨는데 아들이 그 재산만 빼먹을 생각을 하고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이게 바로 조용기 목사의 3중 축복입니다.  

조용기 목사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스포일 시킨, 즉 오염 시킨 측면이 있습니다. 3중 축복이 진리라면 예수님은 결코 청년에게 재물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상식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맘몬 신을 들여 놓았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수 많은 교회들이 조용기 목사 핑계를 대고 복음전파보다 교회 대형화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익집단이 되어 심지어 정치에 관여하면서 독재 정부에는 굴종하고 반면 민주 정부는 겁박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가 전광훈의 사랑교회입니다. 본래 300명이었던 이 교회가 문재인 정부와 맞서면서 5천 명의 교회로 커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커지는 것도 부흥인가요?

허순길 목사의 빈소 사진은 2017년 1월 16일에 찍은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년 반 전 사진이지만 비교가 되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허순길 목사는 조용기 목사보다 3년 연상입니다. 그는 함양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다가 부산으로 와서 신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고신대 테두리 안에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이에 비해 조용기 목사는 울산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부산으로 와서 기술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와서 신학교를 다니며 서대문구 대저동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의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입니다. 허순길 목사의 이후 삶은 우리에게 별로 알려진 게 없습니다. 지방 신학교의 책임자를 지낸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허순길 목사님은 제대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유언을 보니 그걸 알겠더라고요.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망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이 말 듣고 저 말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면 미래가 없습니다.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나 당하는 고통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총에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돈에 의지하지 맙시다. 오로지 미래에 주실 은총을 기대하며 하나님 말씀을 의지합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모압에게 주신 신탁의 본질적 의미가 되겠습니다.  

 

1)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모압에 관한 것이 긴 이유에 대해 말해 봅시다.

2) 그모스 신은 어떤 신입니까?

3) 모압의 허세는 어떻게 파괴가 되었습니까?

 

 

 

 

2021년 9월 12일

 

예레미야 47장 1-7절: [01]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0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03]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의 자녀를 돌보지 못하리니 [04] 이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며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 자를 다 끊어 버리시는 날이 올 것임이니라 여호와께서 갑돌 섬에 남아 있는 블레셋 사람을 유린하시리라 [05] 가사는 대머리가 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잠잠하게 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06] 오호라 여호와의 칼이여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네 칼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쉴지어다 [07] 여호와께서 이를 명령하셨은즉 어떻게 잠잠하며 쉬겠느냐 아스글론과 해변을 치려 하여 그가 정하셨느니라 하니라.

누가복음 10장 29-37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블레셋의 ‘다곤’ 신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갔다가 죽으면서 허물어 버린 건물이 다곤 신당이었습니다. (삿 16.30) 또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보관한 곳이 다곤 신당이었습니다. (삼상 5.2) 따라서 다곤 신은 블레셋 사람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생선을 ‘다그’라 합니다. 복수로 ‘다김’이라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곤 신은 인어 신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도시마다 다곤 신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블레셋이 해양민족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곤은 곡식 또는 곡물이란 뜻을 가진 다간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 앗수르, 페니키아 등에서 다곤은 인기가 있었던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곤 신을 풍요의 농경 신으로 섬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농경 신 다곤을 가져다가 농경 신으로 섬기면서 또 어업을 했던 저들의 삶의 자리에 맞추어 인어 신 다곤으로 개량을 한 것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을 농경 신으로도 또 어업의 신으로도 생각했을 겁니다. 무엇을 하든 풍성하게 해달라는 현세구복적인 마음에서 다곤 신을 섬겼다는 말이지요.

다곤 신당이 블레셋 지역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았지만 고대 우가릿 지역에서는 발굴되었습니다. 우가릿의 다곤 신당은 제단이 있고 개방된 마당에서 제사 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마당에서 신당으로 가려면 계단을 올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소가 나오고 그 뒤에 지성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성소의 중앙에 단이 있고 그 단 위에 신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우가릿의 다곤 신상은 인어가 아니었습니다. 수염이 긴 장군의 모습이었지요.

사무엘상 5장,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시절… 사무엘 선지자는 어린 아이로 수련 중이었습니다. 에반에셀과 아펙 사이에 있는 샤론 평야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에반에셀은 이 전쟁이 끝난 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샤론 평야가 펼쳐지는 지역에 있는 마을로 보입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이기고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그들의 도시인 아스돗으로 가져 왔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다곤 신당에 있는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스돗 사람들이 다음 날 일찍 다곤 신당으로 가보니 다곤이 법궤 앞에 엎어져 있고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으켜 세워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가보니 다곤이 법궤 앞에 다시 엎드러져 있고 얼굴이 땅에 닿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은 몸뚱이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일으켜 세워 둘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이스라엘 측에 돌려 주기로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계시 2  블레셋 대해

페니키아와 히타이트(헷)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함은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을 낳았습니다.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습니다. 블레셋은 가슬루힘의 후손입니다. (창 10.14) 또 블레셋의 출생지는 갑돌 섬입니다. 이 섬은 지중해에 있는 크레타 섬을 말합니다. 그리이스의 신화가 생긴 섬이지요. 그런데 갑돌 섬은 갑도림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가슬루힘과 갑도림은 형제지간이니 가슬루힘의 후손인 블레셋이 갑돌 출생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갑돌이 갑도림 만의 섬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블레셋은 바다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아스글론과 가자란 도시들을 세웠습니다. 해양민족답게 지중해 해변에 도시를 세웠네요. 이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크레타 섬 사람들과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들 모두 해양민족이었지요. 크레타 섬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고향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의 특징을 보입니다. 그러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페니키아 사람들이었습니다. 페니키아는 레바논과 그 북부에 위치했는데 이들은 셈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히브리인들과 언어 소통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스블론 지파가 그들과 함께 무역을 도모하여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이 돈으로 형인 잇사갈 지파 사람들이 율법 공부를 하는 것을 도왔다고 하지요. 아무튼 페니키아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무역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해양민족인 블레셋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함의 아들이며 미스라임의 동생인 가나안은 시돈과 헷을 낳았다고 합니다. (창 10.15) 시돈은 페니키아이고, 헷은 히타이트 사람들을 말합니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오늘날 터어키의 중부 고원지대인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살다가 극히 일부가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블레셋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서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샀고, 브엘쉐바에서는 블레셋 족속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항상 긴장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의 요구에 따라 북방 세력과 싸워야 했고 북방 세력이 강해지면 이집트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에 살던 블레셋과 헷 사람들의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된 사람들은 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신탁은 이들의 운명에 대해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선한 이웃은 멸망을 막는다

   

지난 주일 우리는 로쉬 하 샤나를 기념했습니다. 로쉬 하 샤나는 한 해의 머리란 뜻으로 티슈리 월 1일을 말합니다. 티슈리 월은 현대 히브리력으로 첫 번째 달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니싼 월을 첫 번째 달로 지키라고 하셨는데, 왜 니싼 월을 첫 번째 달로 지키지 않고 일곱 번째 달인 티슈리 월을 첫 번째 달로 지키는가… 물론 유대인들은 종교력의 첫 번째 달은 니싼 월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종교력이 따로 있고, 무슨 세속력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들은 니싼 월을 첫 번째 달로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엘룰 월과 티슈리 월에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엘룰 월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말씀 드렸으니 티슈리 월의 이야기만 축소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로쉬 하 샤나, 즉 티슈리 월 1일을 창조의 6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날 사람이 창조 되었다고 하지요.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날,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로쉬 하 샤나를 의미있게 만들기 위한 유대인들의 노력입니다.

기왕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브라함에 대해 조금 말씀 드릴까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잘 아다시피 바벨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메르 문명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가 복잡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인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디론가 보내시고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요량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후손들도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 것이지요. 이후 아브라함을 만나는 사람들은 복을 받았습니다. 부자가 되었단 말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일차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차적인 복을 받고 곧 그 복을 주신 하나님 자신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좋은 예가 롯의 경우 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 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3형제 중 막내인 하란의 아들 입니다. 그런데 이 하란이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없던 아브라함은 롯을 받아 들여서 자기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하지만 롯도 어른이 되니 삼촌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가장 좋은 땅을 그에게 양보했습니다. 아무튼 롯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았지요.

롯이 받은 땅은 요단강이 흐르는 요단 계곡의 들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롯은 자기 믿음으로 자기만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되지 못했던 것 입니다. 롯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 모압에 대한 신탁을 다룰 때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멘트를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비유 한 가지를 드셨습니다.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유대인을 죽도록 두드려 패서 널부러 뜨리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후 제사장이 지나가다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를 피해 갈 길을 갔습니다. 아마 후다닥 뛰어서 갔을 겁니다. 이후 레위인이 지나가다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도 역시 잽싸게 그를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지나갔을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런 경우 율법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도와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이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방기 또는 유기 또는 포기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율법으로 먹고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롯도 이와 비슷합니다. 삼촌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현실 앞에서 롯은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짧은 시간의 결정이었겠지만 그 파장은 길었습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되지 못했고, 그의 후손들도 복의 근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후손인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을 보면 회한이 서립니다.     

 

요단 계곡의 좋은 땅을 롯에게 양보한 아브라함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까지 갔습니다. 헤브론은 네게브 사막이 시작되는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헷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별 수 없이 아브라함은 당시 기세가 등등했던 헷 족속과 함께 살았습니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면서 헷 족속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브라함은 수 많은 나그네들을 대접했고 또한 약한 자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헷 족속이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요단 계곡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318명의 사병을 이끌고 참전했습니다. 그래서 롯을 구했고 많은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사회에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삶을 보고도 헷 족속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 걸까요? 그들은 저들 손에 있는 칼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는 철로 만든 칼이 있었거든요. 다른 족속들은 기껏해야 청동으로 만든 칼을 사용했지만 헷 족속은 철로 만든 칼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패권국가인 이집트를 지근 거리에서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 헤브론에 거주했던 헷 족속은 아마도 이집트를 노리는 히타이트 제국의 첨병일 수도 있었습니다. 헷 족속은 다름 아닌 히타이트 족을 말합니다. 인류 최초로 철기 문명을 사용한 사람들 입니다.

‘크리스티앙 자크’라는 프랑스 사람이 썼다는 ‘람세스’란 소설에 히타이트 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히타이트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하투샤를 수도로 삼고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하투샤 근처에 철광석 광산이 있어서 그들은 철로 만든 칼을 썼습니다. 그래서 시리아를 제압할 수 있었고, 이집트 국경까지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히타이트가 이집트와 전투를 벌일 때, 그들은 철로 만든 칼을 썼는데, 이 칼로 상대 이집트의 청동 칼을 1:3의 비율로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철기 문명을 사용하는 히타이트의 전투력이 높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다윗 왕 이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신탁이 나오기 500년 전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신탁에는 헷 족속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히타이트가 망한 후, 많은 헷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편입 되었습니다. 다윗 왕의 충신이었던 우리야도 헷 사람, 즉 히타이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갑자기 헷 족속이 살고 있는 헤브론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간 곳은 헤브론 보다 더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 있는 그랄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네게브 사막에 있는 어떤 계곡이란 말이지요. 그래도 물이 많아서 사람들이 제법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에서는 기득권자들의 텃세가 심하니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여기서 이삭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시는 방법은 가히 신묘막측 하지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은 후에 이삭이 좀 더 안전하게 살도록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 곳은 네게브 사막에 있는 어떤 오아시스였습니다. 훗날 그곳이 브엘쉐바라고 불리워 지게 됩니다. 브엘쉐바는 안전하긴 했지만 생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점점 더 험악해 지고 힘들어 지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아브라함은 양보를 많이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롯에게 양보했지요, 헷 족속에게 양보했지요,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양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양보하는 버릇은 이삭에게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걸음걸음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후손들도 그렇게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도 그렇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게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들의 팔자인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호해 주신 것을 우리는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징적인 것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주신 것과 브엘쉐바를 남들이 인정하는 거주지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브엘쉐바에서  복의 근원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었습니다. 브엘쉐바에서 가끼이 살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칭송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다곤 신이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족속은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족속이 이주민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의 고향이 갑돌 섬이라고 합니다. 갑돌 섬은 지중해에 있는 크레타 섬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푸스의 주신 제우스가 태어난 곳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족속은 크레타 출신으로 바다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남부 해변과 인근 평야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가자, 아스글론, 딤나, 아벡 등의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사건건 이스라엘과 대립했습니다.

블레셋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까지 존속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신탁에서 블레셋을 거론하고 있겠지요. 예레미야의 신탁은 파라오 네코가 블레셋의 거점 도시인 가자를 치기 전의 상황을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이 신탁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블레셋도 결국 북방 세력에 의해 멸망 될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은 이후 100년도 되지 않아서 바벨론이 아닌 페르시아에게 멸망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블레셋은 예레미야의 신탁대로 페르시아에게 멸망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블레셋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후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시겠지요.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는 블레셋 족속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된 블레셋 족속이 오늘날의 팔레스틴 사람들, 즉 PLO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설명이 존재합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고 내린 결론은 지금은 블레셋 족속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많은 자료들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팔레스틴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은 주후 125년 이후에 팔레스틴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자면… 주후 70년 아브 월 9일, 로마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이와 함께 헤롯 왕가가 다스리던 유다 왕국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유다 왕국은 예레미야가 안타까워 하던 유다 왕국이 아닙니다. 이방인이 다스리던 예수님 시대의 유다 왕국이지요. 이 유다 왕국은 다윗이 세웠던 고대 이스라엘을 계승한 게 아닙니다. 이름만 유다였습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귀족들을 로마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있던 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성격이 우리 한국인들과 비슷하지요. 그래서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주후 132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반란이 최대의 반란이었고 또한 최후의 반란이었습니다. 주모자는 바 코크바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역을 하면 별의 아들이란 뜻이지요. 많은 유대인들은 바 코크바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짓 메시야였습니다. 결국 바 코크바 반란은 135년에 평정이 되었습니다.

이후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진공 상태로 만들어 버렸지요. 하지만 예루살렘 주민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예루살렘 밖에서 살다가 다시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와 살았지요. 아무튼… 바 코크바 반란을 평정한 로마 황제는 ‘유다’라고 불렀던 지역을 ‘팔레스티나’로 부르라는 칙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는 무슨 이유로 가나안 땅에서 발생했던 그 많은 이름들 가운데서 하필 500년 전에 소멸된 ‘팔레스티나’란 이름을 붙였을까… 당연히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언어와 같은 인도유럽어를 썼던 팔레스티나, 즉 블레셋… 이제 유대 땅은 없고 인도유럽어를 쓰는 로마제국만 가나안 땅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역사상 블레셋, 즉 팔레스틴은 유대인들과 가장 오래 싸운 족속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개명 칙령, 즉 유다를 팔레스티나로 부르라는 명령 이후 유다 땅에 살던 사람들은 갑자기 팔레스티나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팔레스틴 사람들로 불리워 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칙령 하나로 유다 사람들은 없어지고 팔레스틴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이름 장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팔레스틴 사람들은 이슬람교가 중동에 번지면서 결국 무슬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20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많은 혼혈이 생겼겠지요. 하지만 이들의 주류 인종은 유다 땅에 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외국에 살던 유대인들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팔레스틴 땅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시온주의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땅을 이스라엘 땅, 즉 에레쯔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이 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고 사람들도 유대교도와 무슬림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지요.

1948년 5월, 이스라엘 산헤드린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고 이어 벌어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연전연승을 하자 이스라엘의 입지도 매우 강해졌습니다. 결국 팔레스틴 사람들은 팔레스틴 밖으로 추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 레바논, 시리아 등에 설치된 난민촌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구가 자그마치 천 삼백 만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쫓겨난 팔레스틴 사람들이 사실은 원 유대인들이다…라는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도 이들에 대한 혈통학적 조사를 하겠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실천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팔레스틴 사람들의 혈통을 조사했더니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이 맞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무슬림의 인구가 유대교도의 인구의 두 배가 되는 겁니다.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나겠지요. 하지만 사실은 밝혀야 하고,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사람이 저 좋은 대로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항상 미결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 서 47장에 나오는 블레셋 관련 신탁을 현재의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서 47장에 나오는 블레셋은 예레미야 시대에 유대인들을 적대시 했던 그 블레셋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블레셋은 망했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에 관련 신탁을 주시면서 두로와 시돈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두로와 시돈은 블레셋이 아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블레셋과 함께 페니키아도 언급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페니키아가 블레셋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페니키아가 어떻게 블레셋을 도왔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되었을까… 페니키아가 블레셋에게 우상을 전해 주었기 떄문입니다. 바로 이 우상 때문에 블레셋은 선한 이웃인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을 무시했던 것 입니다. 물질적으로 도움이 될성 싶은 페니키아를 좋아했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페니키아는 ‘다간’이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페니키아는 여러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지요. 다간은 그들 중 하나입니다. 다간은 히브리어로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된다는 말이지요. 블레셋은 바로 그 다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간을 ‘다곤’으로 개조했습니다. 다간은 할아버지처럼 생긴 우상인데, 다곤은 상반신은 할아버지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의 신은 인어 우상이었습니다. 오늘 주보 1면에 다곤 우상이 실려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샤론 평야에서 전투를 벌였지요. 그때 이스라엘은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은 법궤를 다곤 신당에 안치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다곤 신당에 들어가 보니 다곤 우상이 저렇게 되어 있더랍니다. 이 그림은 블레셋의 운명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 떼 강도를 만나 죽도록 얻어 맞고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길 바닥에 버려져 죽어가고 있는 그를 제사장도 레위인도 못본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쓰러져 죽어가는 자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지요. 이게 정상적인 사람의 마음이지요. 죽어가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영장, 즉 사람의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맸습니다. 그리고 타고가던 짐승, 즉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까지도 그 사람은 여전히 아팠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율법사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사라면 뼈저리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사의 입에서 ‘자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지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이해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 아류인 율법사는 자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만 논하면 되니까요. 제사장과 레위인과 율법사는 율법을 논하면서도 행동은 율법을 듣는 상대방이 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논하고 있으니까요. 율법을 논하는 우리가 설마 율법을 범하겠냐… 이런 태도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 시키시고 그들은 자비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을 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멸망의 조건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엘레오스, 즉 자비를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넘치게 자비를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율법을 논할 자격이 없는 부정한 자라는 뜻을 갖기도 합니다. 그들은 태생부터 율법에 어긋나 있는 자들이기 때문 입니다. 다음 주일에 다룰 모압 사람들 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도 실천하지 않은 자비를 실천했다고 말씀하셨고 율법사에게 너도 그 자비를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이유였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엘레오스, 즉 자비를 행하는 것 말입니다. 그게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아 하니 그렇게 살면 틀림 없이 피곤해 질 겁니다. 양보를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를 둘러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를 통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것… 이게 결코 포기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곤 우상을 섬기는 블레셋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비를 행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법칙으로 우리 안에 존재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저야 뭐 알아서들 하시라는 말씀 밖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1) 블레셋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괴롭혔습니까?

2)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3) 블레셋의 신이 인어 모양의 다곤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4) 로마가 유대 땅에 구태여 팔레스티나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2021년 9월 5일

 

예레미야 46장 25-28절: [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26] 내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손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이전같이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7] 내 종 야곱아 두려워 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6장 31-34절: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리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레미야의 계시 1  이집트에 대해(3)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아도나이 츠바오트 엘로헤이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가 노의 아몬과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노의 아몬에서 노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를 말합니다. 테베의 지역 신이었던 아몬은 그 지역 사제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천도에 따라 멤피스의 신도 되었으며 결국 태양신의 반열에 올라갔습니다. 그의 모습은 숫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노의 아몬을 벌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아몬이 예레미야 당시 가장 큰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은 애굽과 애굽의 신들을 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이란 현상적인 모습의 애굽을 말합니다. 영원한 불이란 의미의 피라미드, 그리고 많은 도시들과 신전들, 거기서 피어난 애굽의 문명 등이지요. 그 다음은 애굽의 신들입니다. 애굽의 신들이 참 많아서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드는데, 짐승의 얼굴을 가진 신들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단 아피스라는 숫소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탄생의 신이라는 하토르는 암소의 모습입니다. 연꽃으로 피어오르는 아니 신은 천국의 만나를 받아 아침마다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 아니를 마주 보는 것이 불사조 ‘베누’입니다.  푸른 색 왜가리지요. 또 자칼의 머리를 가진 ‘아누비스’가 있습니다.

이 아비누스는 죽은 자 후네페르의 심판을 담당합니다. 아비누스는 그의 오른손으로 후네페르의 왼손을 잡고 괴물 이미트가 기다리는 곳에 와서 후네페르의 심장의 무게를 잽니다. 따오기 머리를 가진 지혜의 신 토트가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매의 머리를 가진 호루스에게 인도되고 이어 심판관 오시리스를 만납니다. 심판을 통과하면 오시리스 뒤에 서 있는 네프티스와 이시스의 환영을 받고 진리의 전당으로 입장하지요. 여기서 또 자칼 머리의 아누비스와 코브라 모양의 와제트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즉 파라오와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동원하겠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북방세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판의 목적이 애굽 땅으로 하여금 사람이 살 곳으로 회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하나님은 “내 종 야곱아, 두려워 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겠기 때문입니다. 포로살이에서 돌아와 평안히 걱정없이 살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 ‘아몬’ 신

 

이집트 문명은 매우 오래 되었지만, 사료 부족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마네토’의 역사 구분을 따릅니다. 마네토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주전 305-285년) 때 활동한 이집트 출신의 역사가입니다. 그는 델타의 다미에타 지류에 위치한 고대 도시의 사제였다고 합니다. 마네토의 역사 구분에 따르면 이집트의 제1 왕조는 메네스 왕에 의해 주전 3400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주전 525년 제26왕조가 페르시아에 멸망 당했습니다. 이후 주전 552-332년 사이에 짧은 기간 28-30왕조가 존재했지만 가치는 미미했고 주로 페르시아의 한 주로서 이집트가 존재했습니다. 주전 332년에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한 후 주전 30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존재하다가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한 주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제1 왕조는 테베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테베의 지역 신은 ‘아몬’이었습니다. 아몬이란 ‘숨겨진 자’란 뜻입니다. 본디 아몬 신은 이집트의 주류 신 체계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테베가 1-2왕조 420년 동안 이집트의 수도였기 때문에 테베의 지역 신인 아몬 신도 전국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아몬 신의 사제들도 영향력이 커졌지요. 그러다 제3왕조 때 조세르에 의해 수도가 북쪽에 있는 멤피스로 이전을 했습니다. 멤피스에는 프타 신이라는 지역 신이 따로 있었습니다. 프타 신은 멤피스의 상징인 아피스 황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테베의 아몬 신의 사제들이 저들의 영향력을 포기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왕을 따라 멤피스로 이전을 하고 거기다 엄청나게 큰 아몬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아몬 신은 태양신이란 별칭이 더해져 아몬-라 신으로 불리워졌습니다. 18왕조에 들어서서 아멘호테프 4세가 자기 이름을 아크나톤으로 고치면서까지 아몬-라 신을 무시하고 아톤 신을 유일 신으로 섬기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몬 신을 중심으로 뭉친 기득권 세력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아크나톤이 죽고 투탕카맨이 파라오가 되면서 아몬 신 숭배사상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몬 신 숭배사상은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에 의해 극도로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아몬 신은 파라오의 권위를 나타내는 이집트의 전통있는 신이었단 말이지요.    

훗날 아몬 신은 라 신의 얼굴과 프타 신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몬 신은 왼손에 남북의 결합 또는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앙크를 들고 있고 오른 손에는 킬을 들고 있습니다. 수호신의 역할을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몬의 영혼은 다산과 보호의 상징인 숫양의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 파라오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막의 제사를 위한 제물로 숫양을 바치라고 하셨지요.      

 

---

사람이 살 곳이 되리라

   

오늘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창조의 주간 중 네 번째 날이 됩니다. 별과 해와 달을 창조하신 날이지요. 오늘 일몰부터는 창조의 다섯 번째 날이 됩니다. 물고기들과 새들을 창조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몰부터는 창조의 여섯 번째 날이 되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은 티슈리 월 1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력으로 따지면 새해 첫 날이지요. 하나님께서 새해 첫 날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문학적 재치가 돋보입니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쳤던 때도 티슈리 월 1일, 즉 새해 첫 날이라고 하지요. 새해 첫 날,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쉬 하 샤나 이틀 전이긴 하지만, 점심 식사로 둥근 할라빵을 먹을 겁니다. 다시 돌아온 로쉬 하 샤나를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과를 꿀에 찍어 먹을 겁니다. 이번 한 해도 달콤한 시간이 되도록… 로쉬 하 샤나의 로쉬는 머리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선 머릿고기를 먹으며 아이들에게 모든 면에서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라고도 할 겁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사람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먼저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 뜻대로 자기 이익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 역사 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들을 응징하셨고 그들 대신 다른 사람들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 역사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역사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은 항상 공의롭고 옳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서에 사악한 왕으로 기록된 므낫세 조차도 앗시리아 피랍에서 돌아와서는 여호와를 하나님이라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지역신으로 알고 있었던 여호와 신이 창조주이시요 구원주이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대기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다시 예레미야의 신탁으로 들어갑니다. 오라클스 어게인스트 네이션스, OAN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신학용어로 많이 쓰이니까 알아 두면 좋겠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 손을 대신 이유를 직접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손을 대신 이유는 이집트 땅이 이전 처럼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없애기 위해 이집트에 손을 대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집트 땅이 사람들에게 유익한 땅이 되도록 손을 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도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평안히 그리고 걱정 없이 살게 하시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땅에서 평안하게 그리고 걱정 없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인데, 우리가 걱정을 안고 사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결코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불행하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에서 건져내시고 행복하게 살게 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위해서, 또한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항상 은혜스럽고 항상 기대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뜻은 어제와 오늘이 동일했으므로, 또한 내일도 동일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마귀와 마귀의 추종자들 밖에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이집트 사람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딸 이집트라고 부르셨겠지요. 하나님은 사하라 사막 동쪽 끝에 나일강이 흐르게 하시고 그 곳에 아름다운 이집트 땅이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곳에 모여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셈 족 중 하나가 이곳에 와서 나일강의 물고기를 잡고 무수한 과일을 따며 살았을 겁니다. 이들은 오늘날 이집트 사람들의 조상이 되겠지요. 그러다가 남쪽에서 누비아 사람들이 왔을 겁니다. 그들은 흑인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쪽 사막에서는 튀니지, 리바아, 심지어 모로코 사람들도 왔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이 이집트 사람들과 섞여서 새로운 의미의 이집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지중해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아나톨리아, 마케도니아, 이탈리아가 있는 지중해 북부 지역은 본래 거친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도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기름진 이집트로 이주를 했습니다. 이들은 나일강 하류의 델타 지역에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일강 중류에 있는 테베 사람들이 델타 지역 입구에 있는 멤피스로 이주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기자의 피라미드를 건설한 쿠푸 왕의 이집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원전 2900년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 있었던 제4왕조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노는 테베를 말합니다. 쿠푸 왕이 멤피스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테베는 자그마치 420년 동안 이집트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아몬은 바로 그 테베의 신이었습니다. 테베의 지역 신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테베의 지역 신이 쿠푸 왕을 따라 멤피스로 왔고 아몬은 멤피스의 신이 되었습니다. 물론 멤피스에도 그 곳의 지역 신이 있었습니다. 프타 신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수컷 물소를 상징으로 하는 무력의 수호 신 아피스도 멤피스의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테베의 지역 신 아몬이 멤피스로 이전하여 그 곳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왜냐하면 테베의 사제들이 멤피스의 사제들보다 힘이 셌기 때문입니다. 테베의 사제들은 왕과 함께 멤피스로 이사를 하면서 그들이 테베에서 누렸던 기득권을 멤피스에서도 그대로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몬 신이 멤피스의 최고의 신이 되었고 결국 이집트 최고의 신이 되었습니다. 아몬 신이 잘나서 최고의 신이 된 게 아닙니다. 파라오를 가운데에 놓고 테베의 아몬 신의 사제들과 멤피스의 다른 신의 사제들이 파워게임을 벌였는데 결국 아몬 신의 사제들이 이겼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미 역사가 오래된 아몬 신과 아몬 신을 빙자해 권력을 행사하는 바로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애굽을 벌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굽이란 파라오의 지지세력을 말합니다. 소위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셨습니다.

쿠푸 왕이 왜 아몬의 사제들을 테베에서 멤피스로 데려왔을까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몬의 사제들은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해 주면서 그들의 기득권을 챙겼지요. 서로 도와주는 겁니다. 아몬 신은 사실 핑계였던 겁니다. 이후 이집트는 아몬 신을 섬기는 자들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또는 4대 동안 살다가 출애굽을 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자마자 곧 바로 이집트로 갔습니다. 미스바 공동체만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이미 수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도 이집트로 갔구요.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내리시고 그들에게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라고 하신 겁니다. 물론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비하면 소수였습니다. 그래도 이집트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요즘 수요 성경 공부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이집트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이집트는 떠나야 하는 곳이라 생각해서 소홀하게 다루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딸 애굽이여… 하셨기에 이집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역사를 공부하다보니 출애굽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막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속죄일에 호렙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고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십계명 판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얼굴의 광채는 그렇다 쳐도, 손에 들려져 있는 두 개의 십계명 판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이집트에 살 때 신형문자로 적은 온갖 신탁과 파라오의 칙령을 봤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웅대하고 화려했을까요? 하지만 아몬 신은 한번도 그들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아몬이란 이름 자체가 ‘보이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몬에서 히브리어 아멘이 왔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아몬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호렙산 위에서 빽빽한 구름 속에 나타나셨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직접 나타나셔서 십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판에 새겨주셨습니다. 비록 이집트의 신형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돌판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신 하나님께서 그토록 얇고 작은 돌판에 십계명을 적어 주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지어야 하므로 재료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에게 바치는 예물이 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에게는 예물만 바치는 게 아니지요. 신이 원하시면 지하에 들어가서 평생 돌을 캐며 살 수도 있었지요. 이런 걸 보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료만 가져 오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일꾼들이 말하기를 재료가 너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가져 오지 말라고 했지요. 이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신에게 바치고 남은 것들은 파라오가 가져가고 사제들이 나누어 가져가지요. 그런데 더 이상 가져 오지 말라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물질적인 이익을 얻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석달 만에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성막은 가로가 3미터, 세로가 3미터, 길이가 10미터쯤 됩니다. 그런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쿠푸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146미터나 됩니다. 거기에 사용된 화강암 벽돌은 모두 60만 장 이상입니다. 그리고 그 벽돌은 하나의 무게가 2톤이나 됩니다. 만든 세월이 자그마치 20년 입니다. 그게 인간 파라오 쿠프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신 그런 존재가 임재하시는 성막이 가로 3미터 세로 3미터에 길이는 10미터라고? 이거 무슨 장난하냐?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아뭇소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경험했고 홍해를 건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고 오순절에는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을 대면하기도 했지요. 그러다 일부가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했고 그러다 그들 중 3천 명이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상 그들이 경험한 것들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몬 신과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성막이 우선 크기부터 이게 뭐냐? 게다가 성막은 모두 분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깨에 메어 나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성막… 이게 이래도 되는거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 많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거든요. 그들은 아마도 200만 명이 지고 가더라도 성막은 무지하게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뭐가 중한디?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고 걱정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러분, 친 이집트파 사람들에게는 성막이 장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성막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든 것이고, 그래서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성막이 작을 뿐만 아니라 분해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나르는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지요. 그리고 성막은 네 겹으로 덮혀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짠 휘장이 있습니다. 그 휘장에는 가는 베 실로 수 놓은 천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이런 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얀 린넨 천을 사용했지요. 그리고 그 다음 휘장은 염소 털로 되어 있습니다. 염소 털은 보온 효과도 있지만 소음 방지 효과도 있지요. 그 다음 휘장은 붉은 색 칠을 한 숫양의 가죽입니다. 가죽은 더울 때는 미세 구멍들이 열려져서 열기가 나가고 추울 때는 그 미세 구멍들이 닫혀져서 냉기가 들어오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맨 바깥 휘장은 해달의 가죽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방수에 그만이지요. 그러나 겉이 마르면 미세 구멍이 열려서 안에 있는 습기를 내보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막은 매우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성막의 과학성에 대해 논하려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오늘 성막이 지닌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안에서 따지면 세 번째 휘장, 그러니까 밖에서 따지면 두 번째 휘장이 되겠네요. 붉은 칠을 한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휘장입니다. 여러분, 놀랍게도 숫양은 이집트 최고의 신인 아몬의 형상입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실린 사진이 바로 아몬 신의 형상입니다. 아마도 테베에서 숫양은 힘의 상징이었나 봅니다. 이게 테베 사제들의 기득권에 업혀서 멤피스로 와서 멤피스의 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 이익과 권력에 의지해서 이집트의 신이 되었습니다. 결국 아몬은 이집트 원주민의 이익을 추구하는 신이 되었지요. 보십시오. 오늘 주보 1면의 사진을… 파라오가 숫양의 품 안에 안겨 보호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신이란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이 만들어 낸 것 입니다. 신을 주장하는 자들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 낸 신이 아닙니다.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숫양의 가죽에다 붉은 칠을 해서 성막의 세 번째 휘장으로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에 이르는 숫양의 가죽을 얻으려면 숫양을 몇 마리나 잡아야 할까요? 성막의 세 번째 휘장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마리의 숫양을 잡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저는 아마도 아몬 신 여럿을 잡으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눈에 숫양은 숫양일 뿐이었습니다. 그걸 아몬 신이라 하는 것은 파라오의 사기였고 테베와 멤피스 사제들의 사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숫양을 제 자리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이후에도 하나님은 숫양을 섬기는 자들이 있을까봐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제물 가운데서 숫양을 가장 많이 바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저의 해석입니다. 여러분도 나름대로 해석해 보십시오. 이집트 인에게 있어 숫양은 아몬의 형상이라는 것,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숫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었다는 것! 이런 반전은 성막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존경을 받는 제사장이 이스라엘 외에서는 천대를 받는 백정이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 이집트 관광을 많이 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카이로에 도쿄 공원도 만들었다고 하고… 그 이유가 많이 궁금했는데 역시 파라오가 천황과 닮아서 였다고 싶습니다. 천황을 신이라고 하는데 파라오도 결국 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군인들은 파라오를 위해 전투를 벌였고 파라오를 위해 기꺼이 죽었습니다. 일본 군인들도 마찬가지지요. 천황을 위해 전투를 벌였고 천황 반자이를 외치며 죽었습니다. 이집트 군인들에게도 일본 군인들에게도 파라오와 천황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했을 때 만주에는 수 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일본 정부는 만주에 사는 일본인들에게 노인과 어린이들은 내버려 두고 힘 있는 성인들만 일본으로 돌아가라 했다고 합니다. 노인과 어린이들은 천황에게 오히려 폐가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번 아프가니스탄 카불 탈출 작전에서도 일본 정부는 외교관들만 빼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에 많이 남아 있었지만 위험한 데 간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했답니다. 위험한 데 간 개인은 나라에 폐를 끼친 것이므로 정부가 무시해도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게 바로 파라오의 논리요, 이집트의 논리입니다. 천황을 모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 또는 극우파들의 논리와 똑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인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가겠다… 뿐만 아니라 가축들까지 다 데리고 가겠다… 하나님 앞에서는 힘 깨나 쓰는 어른들만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파라오나 천황에게는 힘 깨나 쓰는 어른들만 사람일 수 있지만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노인들도, 어린 아아들도 사람인 것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어린 아이들까지, 아니 가축들까지 다 데리고 출애굽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신전에 비하면 마치 장난감 같은 성막을 만드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에는 문턱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천황이나 파라오같은 사람들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걱정은 천황이나 파라오같은 자들을 의지하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진즉에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복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사람 사는 땅입니다. 이집트의 신들과 파라오와 파라오를 의지하는 자들이 벌을 받은 후에 나타나는 땅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땅이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번역이 참 재미있지요. 보통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야 한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내일이 염려한다고 했습니다. 주어가 우리가 아니고 내일 입니다. 걱정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내일이 한다는 말 입니다. 헬라어 원문도 그렇습니다. 헤 가르 아우리온 메리므네세이 헤아우테스. 이걸 직역하면, 그러니까 그 다음 날은 그 자체가 너희를 보살펴 줄 것이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날이 그 다음 날에 결코 나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쁜 날이 계속 되도록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말입니다. 이방인들과 똑 같이 살면 이런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과는 분명히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스스로 변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변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내일 일몰부터 히브리력으로 새해가 됩니다. 그리고 보름 후에 초막절과 추석이 함께 옵니다. 이어서 하누카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이어 2022년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도록…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삶은 매우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데에 코로나는 별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기에는 우리 자신 외의 어려움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파라오나 천황 같은 자들을 벌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아몬 신 처럼 만들어진 신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이 됩니까?

3) 이집트의 신전과 이스라엘의 성막은 어떻게 다릅니까?

 

 

 

 

2021년 8월 29일

 

예레미야 46장 11-24절: [11]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치료를 많이 받아도 효력이 없어 낫지 못하리라 [12] 네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네 부르짖음은 땅에 가득하였나니 용사가 용사에게 걸려 넘어져 둘이 함께 엎드러졌음이라 [13]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애굽 땅을 칠 일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말씀이라 [14] 너희는 애굽에 선포하며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굳건히 서서 준비하라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15]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16] 그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시매 사람이 사람 위에 엎드러지며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포악한 칼을 피하여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도다 [17] 그들이 그 곳에서 부르짖기를 애굽의 바로 왕이 망하였도다 그가 기회를 놓쳤도다 [18]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르시되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 같이, 해변의 갈멜 같이 오리라 [19] 애굽에 사는 딸이여 너는 너를 위하여 포로의 짐을 꾸리라 놉이 황무하며 불에 타서 주민이 없을 것임이라 [20]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일지라도 북으로부터 쇠파리 떼가 줄곧 오리라 [21] 또 그 중의 고용꾼은 살진 수송아지 같아서 돌이켜 함께 도망하고 서지 못하였나니 재난의 날이 이르렀고 벌 받는 때가 왔음이라 [22]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요한복음 8장 38-44절: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버지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레미야의 계시 1  이집트에 대해(2)

  

주전 609년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군대는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이 이끄는 유다 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때 요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4년 후 파라오 네코는 유프라테스 상류 남단 서쪽에 있는 갈그마스까지 진출했습니다. 옛 히타이트 제국의 도시였지요. 너무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이집트 군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갈그마스는 사도 바울의 고향인 다소 동쪽에 있고, 야곱이 11명의 아들을 얻은 하란 서북쪽에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가 패배했는데 이후 이집트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승리한 바벨론은 앗수르를 제압하고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 본문도 이때의 네코 군대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군대에게 길르앗에 가서 유향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길르앗이 안전선이었는데 너무 올라갔다는 뜻일까요? 길르앗은 값비싼 유향이 자연적으로 나는 곳이었습니다. 이 유향은 상처 치료에 도움을 주었지요. 하지만 그 유향이 이집트의 깊은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집트 군인들은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이후 느부갓네살은 이집트까지 먹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불러 들이려 하셨습니다. 특히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사는 유대인들을… 파라오 네코가 죽은 지 벌써 14년이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믹돌은 오늘날 수에즈 부근에 있는 마을로 국경을 알리는 탑이 이었습니다. 놉은 이집트의 유서 깊은 도시 멤피스를 말합니다. 다바네스는 미쓰바 공동체 유대인들이 찾아갔던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거기 사는 유대인들을 지켜 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장사들이 이미 14년 전에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에 나오는 장사들은 히브리어로 ‘아삐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삐르는 이집트의 신 아피스를 말합니다. 아피스는 수컷 물소의 형상을 한 이집트의 수호신을 말합니다. 이 아피스 신이 나일강을 지키고 파라오를 지키고 피라미드를 지키지요. 하지만 아피스는 갈그마스 전투에서 쓰러졌고 이집트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피스는 이집트가 망했고, 파라오가 망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볼 산이 나오고 갈멜 산이 나옵니다. 다볼이나 갈멜이나 모두 이스라엘 땅에 있는 산들로 구원의 산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집트에 사는 하나님의 딸들, 즉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집트 땅이 아무리 아름답고 기름져도 이제 더 이상 그 곳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처녀 딸 애굽이여…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OAN에서 이집트를 “쁘툴라트 빠트-미쯔라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처녀 딸 애굽이여…라고 부르신 겁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그리워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 14.17, 사 18.13, 암 5.2에서는 처녀 이스라엘이라 하셨고, 사 23.12에서는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빠트-치돈)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사 47.1에서는 처녀 딸 바벨론(쁘툴라트 빠트-빠벨)이라 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집트를 가리켜 쁘툴라트 빠트-미쯔라임이라고 하신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지요. 나라가 여성형이라 딸이라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각 나라에 대해 특히 불행을 당하는 나라에 대해 딸을 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말씀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느낌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담당하는 기관이 심장이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이 심장은 간직해야 한다면서 미이라를 만들 때 뇌와 내장은 모두 제거하지만 심장은 가슴에다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서 거기다 보관시켰다고 합니다. 부활할 때 심장만은 다시 뛰라고 말이지요. 이런 정감을 우리는 여성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파라오가 원정을 나갔다가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국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파라오는 시찰을 나가서 장교 하나를 만났습니다. “가족이 그립나?” “가족이라야 고향에 노모 한 분 계십니다.” “결혼을 못했구나.” “40년 동안 군인으로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이냐?” “군에서 받은 돈을 모아 두었으니 고향에 가서 예쁜 집 하나 짓고 노모를 모시고 살겠습니다.” “고향이 어디냐?  테베 근교입니다.” “좋은 곳이구나. 그래. 잘 살아라.” 하지만 그 날 저녁 파라오는 공격을 받았고 그 장교는 파라오를 지키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파라오는 전사한 장교를 내려다 보면서 애통해 했습니다. 파라오는 그 장교의 평화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하면서 파라오의 마차를 내주었습니다. 죽은 장교는 그 마차를 타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악당같은 사람들… 그러나 그들도 귀한 집 자식이고 어린 아이들의 부모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 끝날 부활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과 싸우고 심지어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앙골라에서 온 흑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예레미야 46장부터 51장까지를 Oracles Against Nations라고 합니다. 대개 영어 약자를 써서 OAN이라고 하지요. 열국에 대한 신탁이란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각국의 운명에 대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모든이교회를 세운 이후, 제가 OAN을 본문으로 설교한 것이 지금까지 다섯 번 입니다. 그런데 할 때마다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일단 분량이 많고, 내용을 제대로 다루자면 이집트의 역사, 바벨론의 역사, 페니키아와 모압과 암몬 등의 역사도 다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충 넘어가곤 했지요. 하지만 이제 제 인생에서 OAN을 다루는 게 거의 마지막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한번 제대로 다루고 싶었습니다. 요즘 이집트 역사에 대해 열공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역사는 예레미야 서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하지요. 그래서 이번 설교에도 이집트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지적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양 그 꼴로 살다가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바로 그런 모습을 수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이집트에 대한 예언을 다룹니다. 다음 주일까지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핵심적 인물은 파라오 네코가 되겠습니다. 네코는 요시야 왕과 관련이 있어서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요시야 왕은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과 비교가 됩니다.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시도한 좋은 왕이고, 므낫세 왕은 우상숭배를 했던 나쁜 왕이라는 프레임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왕 요시야가 파라오 네코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화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므낫세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하 21장과 역대하 33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21장만 읽으면 므낫세는 엄청나게 나쁜 왕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밥먹듯했던 아주 사악한 왕이었지요. 그런데 역대하 33장을 읽어보면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므낫세는 앗수르에 잡혀 갔다가 돌아와서 여호와가 하나님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모든 것을 바로 잡았습니다. 당연히 우상숭배를 철폐했고 국가의 근간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왕 요시야는 어떤가… 요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22장부터 23장까지, 그리고 역대하 34장부터 35장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단 기록의 양 자체가 므낫세 왕에 비해 두 배나 됩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이룬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힐기야로 하여금 새로운 두루마리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두루마리를 읽고 요시야 왕은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므낫세 치하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감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의 역대기 기록에는 열왕기서에는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전 609년, 파라오 네코가 앗수르를 치기 위해 북진할 때, 요시야 왕은 그를 대적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가 군대를 끌고 나온다는 말을 듣고 파라오 네코는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 사신이 요시야에게 전한 파라오 네코의 말은 이러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지만 요시야 왕은 파라오 네코의 말을 무시하고 그와 싸우려고 므깃도로 나갔습니다. 유다 군과 이집트 군이 대치하다가 이집트 궁수가 화살을 쏘았는데 그게 하필 요시야 왕에게 맞았습니다. 요시야는 중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후송되었는데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열왕기 서에서 본 므낫세 왕과 요시야 왕의 모습이 역대기 서에서는 좀 다르게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므낫세 왕은 좀 긍정적으로, 요시야 왕은 좀 부정적으로…

존 브라이트가 쓴 이스라엘 역사를 읽어보면, 므낫세 왕 때는 남 유다 왕국의 국력이 오히려 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앗수르같은 외세도 넘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이룬 요시야 왕 때는 남 유다 왕국의 국력이 쇠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라오 네코가 요시야 왕을 전사시키는 국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요시야 왕의 죽음으로 남 왕국 유다는 급격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범사에 복을 받는다는 상식에 비추어 소화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상식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는 파라오 네코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나… 물론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는 마귀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를 공격했고 요시야 왕을 죽였겠지요. 그런 파라오 네코까지 손바닥에 넣고 조정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핵심 인물이 되는 네코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이집트 제26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 입니다. 예레미야가 미쯔바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다바네스에 자리를 잡았지요. 그때는 제26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인 호프라의 시대입니다. 파라오 호프라는 파라오 네코의 손자이며 예레미야 서 44장 30절에 기록된 호브라 왕, 바로 그 사람입니다. 네코와 호프라가 속한 제26왕조를 사이스 왕조라고도 하는데요, 왜 사이스 왕조라 하는가… 그들의 수도가 사이스였기 때문입니다. 사이스는 다바네스를 말합니다. 사이스 또는 다바네스라 하는 도시는 오늘날 ‘사 알 하가르’라 합니다.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파라오 네코는 요시야 왕 때 므깃도까지 병력을 출동시켰을까… 네코 직전까지 이집트는 여러 조각이 나있었습니다. 나일강 하류 델타 지역은 열 두 개의 영지들로 나뉘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리비아 출신 테프나크테가 이 지역을 통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열 두 개의 영지들 가운데 몇 개를 앗수르 출신 영주들이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앗수르는 조만간 이집트를 침략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테프나크테는 줄기차게 노력해서 열 두 개의 영지들을 통합했습니다. 그래서 제26왕조, 즉 사이스 왕조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이스 왕조가 나타났지만 앗수르는 이집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네코는 앗수르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주전 609년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그런데 이걸 요시야 왕이 막으려고 했단 말이지요. 하지만 요시야 왕의 군대는 파라오 네코 군대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요시야 왕은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네코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변 라블리까지 진출하기는 했지만 앗수르 군대와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겁만 주고 이집트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앗수르는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앗수르가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알고 바벨론이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이 부상하게 되자 네코는 바벨론을 초기에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4년 후인 주전 605년, 드디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유인 작전에 빠져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갈그마스까지 갔습니다. 갈그마스는 오늘날 터키 땅에서 가깝습니다. 바울의 고향인 다소에서 지척이지요. 이 곳은 이집트 원정군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먼 거리였습니다. 결국 이집트 군대는 갈그마스 평원에서 바벨론 군대에게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치료를 받아도 효력이 없어 낫지 못하리라.” 이것은 이집트 군대가 너무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길르앗까지만 가지… 그러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뜻이 숨어 있습니다. 길르앗은 이스라엘 북동쪽의 고원 지대, 즉 골란 고원을 포함하는 고지대를 말합니다. 만약 이집트의 네코 군대가 골란 고원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와 맞붙었더라면 네코의 군대가 이겼을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골란 고원은 유향 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유향 나무는 치료제로 쓰이는 유향을 얻을 수 있는 나무입니다. 유향은 이집트에서 엄청나게 비쌌다고 합니다. 하지만 골란 고원, 즉 길르앗은 유향 나무 천지란 말이지요. 그러니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면 다친 병사들도 치료하기가 쉬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척박한 갈그마스 들판에서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쓰러진 병사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처녀 딸 애굽이여…”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파라오 네코는 한 번 더 바벨론을 치려고 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바벨론 군대가 두어 달 예루살렘을 떠난 적이 있지요. 그래서 예레미야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벤야민 문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지요. 그때 이집트 군대가 출동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별 다른 상황이 없으므로 바벨론 군대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포위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주전 586년 아브 월 9일 예루살렘 성 함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파라오를 믿은 사람들은 이집트로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따라서 이집트 다바네스로 갔구요. 이후 예레미야는 이집트 전역을 돌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집트 전역을 돈다고 해봤자 나일강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예레미야의 권면에 응하는 유대인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들은 오히려 이집트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들이 섬겼던 신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귀의 자손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정도의 인간들이었습니다.

끝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계속 기회를 주셨습니다. “너희는 애굽에 선포하며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 선포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굳건히 서서 준비하라.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느니라.” 믹돌은 탑이란 뜻이지요. 이집트인들이 국경에다 경계의 표식으로 세우는 탑이고, 또한 방위의 목적으로 세우는 망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집트의 국경에서부터 선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놉에도 또는 다바네스에도 선포되어야 합니다. 놉은 이집트의 옛 수도 멤피스를 말하고, 다바네스는 예레미야 당시의 이집트 수도를 말합니다. 그때 바벨론은 시나이 반도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집트는 바벨론 앞에서 풍전등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남 유다와 이집트에 너무 많은 국력을 사용했던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가 훗날 이집트를 접수하게 되었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 보면,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신화가 종횡무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이야기로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신화를 드신 겁니다. 16절에 이런 표현이 있지요. “너희 장사들이 쓰러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서지 못함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까닭이니라.” 여기서 ‘너희 장사들’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아삐레이카’로 나옵니다. 너희 황소들이란 뜻입니다. 황소를 장사로 번역한 건데 이렇게 번역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소는 일반 황소가 아닙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국방력으로 섬기는 힘, 즉 아피스 신을 말합니다. 들에 사는 다 자란 수컷 물소의 형상을 가진 이집트의 수호신이 바로 아피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피스가 쓰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가 자랑하는 아피스 신… 그것은 거짓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쓰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피스 신이 쓰러졌다는 것은 이집트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피스 신을 쓰러뜨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은 더 이상 기댈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집트 사람들을 믿던 유대인들도 기댈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댈 데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기대려 했고 파라오에게 힘을 주는 이집트 신들에게 기대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산들 중에 다볼 같이, 해변의 갈멜 같이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산은 숨을 수 있는 곳입니다. 파라오 네코의 군대가 갈그마스 들판이 아니라 길르앗 산지에서 싸웠다면 그들은 이길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다볼 산과 갈멜 산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은신처를 말합니다. 다볼 산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라고 당부했던 곳이었습니다. 갈멜산은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서 이긴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가야 합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집트에 사는 딸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포로의 짐을 꾸리라고! 왜냐하면 이집트가 자랑하는 멤피스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사하라의 동쪽 끝에 나일강이 흘러 만든 땅이긴 하지만 이집트는 예레미야가 살던 세상에서 가장 기름지고 온화한 땅이었습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한 자랐습니다. 물론 가축들도 나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려움이 닥쳐 옵니다.

이와 관련한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20절 말씀…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일지라도 북으로부터 쇠파리 떼가 줄곧 오리라.”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 똑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들 중에 ‘이오’라는 여신이 있었습니다. 유럽이란 이름을 낳은 오이로파 신의 어머니가 되는 신이지요. 그런데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가 질투심에 불타서 이오를 암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쇠파리 떼가 붙게 해서 이오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이오는 온 천지를 다니며 괴로워 하다가 결국 바다를 건너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가 건너간 바다를 이오니아라 하고 그가 건넌 해협을 ‘보스포러스’라고 합니다. 이오니아는 이오의 바다란 뜻이고, 보스포러스는 암소가 건너갔다는 뜻입니다.

이오는 이집트로 가서 ‘이시스’라는 여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이전에 많은 헬라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신화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사람들은 이걸 택도 없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은 암소의 여신입니다. 그래서 이시스의 머리에는 암소의 뿔이 두 개 나있습니다. 아피스라는 황소의 신이 있으니 어찌 암소의 신이 없겠습니까? 그게 바로 아시스지요. 하지만 이집트 신화에서 이시스는 사랑의 신입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신인 오시리스의 파트너가 됩니다. 그래서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사랑을 상징하는 심장을 미이라 속에 넣어 두나 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신화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계속 됩니다. 처녀 딸 이집트가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집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제 마음대로 산 게 도대체 몇 백 년입니까? 그러면서 아름다운 처녀 딸 이집트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뭉개지고 말았을까요? 그녀의 소리가 뱀의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적들은 도끼를 들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벌목 하듯이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말 것입니다. 그 적들은 황충보다 많을 것입니다. 황충은 누런 벌레, 즉 메뚜기를 말합니다. 그 메뚜기떼가 모래바람처럼 수풀을 지나가면 수풀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모든 것이 황무지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유혹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확 잡아당기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조리가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이집트의 신화를, 그리고 그리스의 신화를 더 재미있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사람으로 살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 1장은 세상을 다스린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세상을 다스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세상을 위해서,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위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유리한 쪽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불리한 쪽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의이고 또한 질서입니다. 이런 공의와 질서를 지키면 당연히 내게는 유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이것을 알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동족의 손에 살해 당하고 말았지요. 예레미야는 주전 570년경에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로마총독에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고 로마총독은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예레미아처럼 동족의 손에 죽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삶은 오늘 우리 가운데 빛나고 있습니다. 빛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묘한 진리를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코로나와 싸우면서 생활에 바쁜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하기가 참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문제를 앞에 놓고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OAN, 즉 Oracles Aginst Nations는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1)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신화를 찾아 봅시다.

2) 하나님께서 1)의 신화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3)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2021년 8월 22일

 

예레미야 46장 1-10절: [01] 이방 나라들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02] 애굽에 관한 것이라 곧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유브라데 강 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한 애굽의 왕 바로느고의 군대에 대한 말씀이라 [03] 너희는 작은 방패와 큰 방패를 예비하고 나가서 싸우라 [04] 너희 기병이여 말에 안장을 지워 타며 투구를 쓰고 나서며 창을 갈며 갑옷을 입으라 [0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본즉 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06] 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 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07] 강의 물이 출렁임 같고 나일 강이 불어남 같은 자가 누구냐 [08] 애굽은 나일 강이 불어남 같고 강물이 출렁임 같도다 그가 이르되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주민을 멸할 것이라 [09]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10]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

누가복음 22.25-30절: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레미야의 계시 1  이집트에 대해(1)

  

예레미야 서 46-51장의 내용은 예레미야 서 36장과 관련이 있는 계시로, 예레미야 당시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련합니다. 오늘의 지성으로 이 계시를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우리에게 올바른 신앙의 길을 비추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이 계시는 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과 하솔, 엘람, 그리고 바벨론을 다룹니다. 예레미야가 알고 있는 세계를 전부 다룬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46장은 애굽, 즉 이집트에 대해 다룹니다. 이 계시가 쓰여진 여호야킴 4년에 파라오 네코가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갈그미스에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패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집트에 관련한 계시를 예레미야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가 결국 패배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는 호기롭게 나일 강이 불어나 출렁이듯 움직입니다. 그들을 방패를 잡은 구스인과 붓인과 활을 잘 쏘는 루딤인이 지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희생제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처녀 딸 애굽’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치료를 받아도 낫지 못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집트의 수치가 나라들에 들렸고 부르짖음이 땅에 가득할 뿐입니다. 이집트 용사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엉켜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느브갓네살이 이집트 땅으로 쳐들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에서 느브갓네살의 침공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집트는 망할 겁니다. 파라오는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멸망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은 산들 중 다볼처럼, 해변의 갈멜처럼 밝혀지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 사는 딸은 포로의 짐을 꾸려야 합니다. 놉이 황폐해 질 것입니다. 이집트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북으로부터 쇠파리들이 몰려올 것이니… 사람들이 살진 수송아지처럼 도망칠 겁니다.  이집트는 도끼를 들고 벌목하듯 침공하는 바벨론 군대 때문에 뱀소리나 낼 것입니다. 결국 이집트 사람들은 북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잡힐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노의 아몬과 파라오와 이집트와 신들과 왕들, 파라오에게 의지하는 자들을 벌하실 겁니다. 이후에 이집트는 다시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도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사라져도 이스라엘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이집트는 검은 땅, 그래서 부요한 땅, 하지만 좁은 땅…

 

이집트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일강 때문입니다. 이집트 땅은 본래 사막이지만 나일강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날라 사막을 덮고 그 위에 생명수를 뿌려줍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았고,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나일강은 아프리카 중부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합니다. 지금은 우간다과 르완다가 반분하고 있는 호수지요. 여기서 현재 수단의 수도 하르툼까지 흐르는 강을 백 나일강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디오피아 고원에 있는 타나 호수도 또 다른 나일강의 발원지입니다. 타나 호수에서 하르툼까지 흐르는 나일강을 청 나일강이라 합니다. 이렇게 따지면, 나일강의 길이는 6,695킬로미터나 되어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 됩니다. ‘나일’이란 이름은 강이란 뜻을 가진 셈어 ‘나할’에서 왔습니다. 현대 히브리어로 강을 ‘나ㅋ할’이라 합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이테루’라 하는데 ‘큰 강’이란 뜻이지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합니다. 이디오피아 고원에 봄이 오면 계절성 폭우가 쏟아지는데 이 때문에 5월경부터 청 나일강 상류에 홍수가 납니다. 이 홍수는 6월경 하르툼에 이르고 9월에 아스완, 그리고 10월에 카이로에 이릅니다. 이때 엄청난 검은색 부엽토 등이 상류에서 하류로 전달이 되지요. 이 전달이 강변과 하류의 삼각주 지역, 즉 델타를 기름지게 만듭니다. 기름진 땅은 색깔이 검습니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 국호가 검다는 의미의 ‘케메트’였습니다. 그래서 콥트어 시대에는 ‘키마’로 불리워졌고 헬라어로는 ‘케미아’라고 합니다. 붉은 이집트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나일강 유역을 제외한 부분은 붉은 사막 지대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이집트를 ‘미쯔라임’이라 하는데, 이는 좁다는 의미로 나일강이 이루는 계곡을 말합니다. 나일강은 11월이 되어야 수위가 낮아지고 갈수기로 접어듭니다. 갈수기 수량은 홍수기의 60분의 1 밖에 안됩니다.

이런 현상은 이집트 인들의 삶과 세계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에게는 강의 상류가 남쪽에 있지요. 그래서 지도를 그릴 때 남쪽을 위로 그렸습니다. 따라서 남쪽 나일강이 상 나일이고, 북쪽 나일강이 하 나일입니다. 투투모세 때 이집트 군이 유프라테스까지 진출했다가 그 곳의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큰 강이 거꾸로 흐르다니 이럴 수 있는가… 하면서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집트는 기후가 좋고 따라서 농산물이 풍부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지중해 연안에 사는 사람들이 이집트를 탐냈고 이런저런 이유로 이집트에 가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니 갖가지 우상들이 범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절대 왕권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이런 상황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던 겁니다.      

 

---

섬기는 리더쉽

   

지난 월요일, 뉴욕타임즈에서 슬픈 사진을 하나 보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미국 대사관 옥상 위에 떠 있는 헬리콥터 네 대… 47년 전에 봤던 슬픈 사진과 똑 같았습니다. 47년 전 사진은 베트남 사이공에 있던 미국 대사관 옥상 위에 떠 있는 헬리콥터 사진이었습니다. 지금 이 건물은 호치민 전쟁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 미국은 베트남에서 떠났고,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떠났습니다. 참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두 주 전만 해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공항을 떠나는 비행기에는 몇 사람 밖에 타지 않아 텅텅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결정은 갑자기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카불은 이슬람 극우파 탈레반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정부를 세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기독교를 탄압할 것입니다. 선교사들을 체포하고 혹시 처형할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스무 명이 넘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현대 선교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교적 사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홀홀단신 어떤 지역으로 들어가서 그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또는 선교를 하고 싶은 교회가 그 지역에 있는 교회와 약정을 하고 사람을 보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대개 후자의 방법을 택합니다. 이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아프가니스탄처럼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정권이 들어서면 현지 교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약정을 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적 사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홀홀단신 어떤 지역으로 들어가서 사역하는 것… 다시 말해서 개별적 사명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 이게 참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사실 이게 전통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는 있으니까요. 다만 선교본부를 이루는 사람들이 기도와 후원으로 이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선교에 관심을 갖다보면 이게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험한 나라가 아니고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는 그 곳 교회와 협력하는 게 정상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독자 행동을 하지요. 예레미야가 뭐 현지 교회와 협력을 했나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헌신으로 일을 해나아갔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동키호테같은 독자 행동이지만,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사명에 의한 것이고 또한 소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집트로 갔고 그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벨론에게 망한 유대인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면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때문에 수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순히 바벨론에게 항복했고, 기꺼이 바벨론으로 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다음 일을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 계시를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유대인들로 하여금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이집트로 몰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게 바벨론에 저항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예레미야도 이집트에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미쓰바 공동체를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이집트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벨론이 이집트를 멸망시킬 거라는 예언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이집트를 멸망시키는 것은 그 당시 세계가 뒤집어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알게 하셨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집트를 떠날 이유를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신 사람들은 예레미야처럼 예언의 능력을 갖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께 예언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나 예언자로 인식했던 겁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이 언제 망하고 이스라엘은 언제 회복되느냐… 이게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딱 부러지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나 예언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이 언제 망하느냐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되느냐 하는 것은 메시야가 대답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메시야는 그걸 선지자나 예언자에게 알려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계시는 선지자나 예언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고,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은 과거의 예언을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요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수준에서 일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수준에서 자신을 충분히 증거했습니다. 이제 많은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를 믿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대로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과 그대로 전파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게 선지자와 예언자에게 얼마나 필요한 능력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능력을 더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열국의 미래를 알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이집트를 버리라! 그리고 바벨론을 택하라! 그러나 예레미야를 믿은 유대인들 만큼 예레미야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기어이 이집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들을 뒤따라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이라 할까요 아니면 선지자로서의 의무감이라 할까요?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집트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그 곳에 짱박혀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바벨론이 이집트를 멸망 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싫어서 이집트로 도주한 유대인들에게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가히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조금도 에누리 없이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너희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예지의 능력이었습니다.

사실 남 왕국 유다가 망하기 전에도 유대인들 가운데는 친 이집트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무슨 일만 나면 이집트로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토착왜구 같은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친 이집트파 유대인들이 난민이 된다면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반겨줄까요?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이런 의향서를 보냈습니다. 야마구치 현에다 인구 6만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땅을 빌려 줄 수 있는가… 우리가 망명 정부를 세우고 싶다… 하지만 일본이 이것을 허락할 리 있을까요? 일본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승만 망명 정부를 받아주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인지, 이후, 일본인들은 한반도 유사시 현해탄에 군함을 배치해서 한국인의 일본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50만 명이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란으로 가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타지키스탄 등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반겨줄까요?     

예레미야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 땅에서 유대인들을 찾아다니며 유대인을 만나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환영을 받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는, 또는 예언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섬깁니다. 섬기되 끝까지 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최고의 선지자로서, 그리고 예언자로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가까운 장래에 이집트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기후 변화가 왜 일어납니까? 한쪽 귀퉁이에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쪽 귀퉁이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정말로 큰 일을 당하게 됩니다. 큰 나라 바벨론이 큰 나라 이집트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작은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그 엄청난 변화를 예레미야가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알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서 46장부터 51장까지의 내용은 예레미야 서 36장과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의 정세 변동을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과 하솔, 엘람, 그리고 바벨론의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알고 있는 전 세계를 다루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겁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이집트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 포로들에게도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 나라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전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섬기는 리더쉽’을 세우셨습니다.  

예레미야 서 46장 3절부터 28절까지 하나님은 애굽, 즉 이집트에 대해서 말씀하셨니다. 이것을 3주간에 걸쳐 다룰 것입니다. 이집트에 대한 하나님의 언급은 여호야킴 4년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때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가 유프라테스 강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패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쪼그라 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집트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 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집트에 대한 예언에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나일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나일강을 지으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집트는 나일강 때문에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북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동쪽부터 서쪽까지 엄청나게 큰 사막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이지요. 사실 이집트 땅은 그 근본이 사하라 사막의 동쪽 끝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강이 흐른단 말이지요. 바로 나일강입니다. 만약 나일강이 없었다면 이집트는 사막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하는 백 나일강과 타나 호수에서 시작하는 청 나일강이 하르툼에서 만나 이집트 계곡을 흐릅니다. 이 나일강이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가져와서 강 연안과 델타 지역에 쌓아줍니다. 그래서 붉은 사막 속에 검은 이집트가 생겨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4대 문명들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 문명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나일강은 사실상 이집트 문명의 처음이요 나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일찌감치 나일 강변에 삶의 자리를 마련하고 살았습니다. 살아도 아주 잘 살았지요. 아마도 지중해 세계에서는 가장 유복하게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나일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신인 ‘눈’ 신이 나일강의 신이라고 합니다. 태양신인 라-신 조차도 나일 강의 신인 ‘눈’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지요. 이런 이유로, 이집트의 중요한 유적들은 모두 나일 강변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집트 왕의 명칭인 파라오는 라-신의 아들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신 라-신의 아버지는 나일강의 신인 ‘눈’ 신입니다. 그러니 파라오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일 강을 잘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이집트 군대가 나일 강이 불어나 출렁이듯 움직였다는 것은 파라오 군대의 장엄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군대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장엄한 표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나일 강이 불어나 출렁인다는 표현보다 더 장엄한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나 그렇다는 말이지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나일 강의 불어나 출렁이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군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과 저 하늘의 모든 군대의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군대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별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집트 군대는 이집트 사람들로만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는 살기가 좋은 곳이라 옛날부터 여러 민족들이 들어와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군대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집트 군대의 핵심은 파라오의 친위 사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친위 사단을 에워싸는 수 많은 사단들은 당연히 다민족 군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방패를 잡은 구스인과 붓인이 있었다고 하지요. 수비대로 활약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구스인이란 나일강 상류쪽에 사는 흑인들을 말합니다. 이집트 사람들로 대접받은 누비아인과는 또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날 이디오피아인의 조상들로 봅니다. 수비대로 활약한 민족들 가운데 또 다른 사람들로 붓인, 즉 붓 종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리비아 사람들의 조상들로 보입니다. 그리고 활을 잘 쏘는 루딤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루딤인, 즉 루딤 족 사람들은 튀니지 사람들의 조상들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집트 군대는 이미 국제군으로 편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 파라오 네코가 이끈 이집트 군대는 단순한 이집트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군대는 아프리카 연합군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승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이집트의 모든 것들은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집트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끝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집트의 끝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이셨을까…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물론 예레미야 시대에는 바벨론이 이집트를 멸망시킬 거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이중 고생을 하지 말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시대에도, 이삭 시대에도, 야곱 시대에도, 또한 모세 시대에도,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만 제외하고 모두 이집트로 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 오래 살면서 거기서 자손을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줄기차게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이셨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는 너무 많은 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신 조차도 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 유일신의 이름은 아톤이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 많은 신들을 섬긴다고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파라오가 말하는 마트의 율법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리더쉽을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살기 좋은 곳이긴 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부정적으로 대하신 이유입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임금들이 백성들을 주관하고 심지어 백성들이 임금들을 은인이라 칭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신이 되고 또한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 임금들은 결코 백성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자가 곧 젊은 자이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바로 메시야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파라오는 스스로 신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사하라 사막에 나일강이 옥토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잘 먹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 위에서도 인간들은 여전히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그 신들을 이용해서 백성을 무제한으로 무자비하게 다스렸습니다.  

십계명에도 이런 이집트의 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 모두 이집트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은 신 위에 신을 두었고, 신 아래 신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신들을 형상으로 나타냈습니다. 사자에서부터 따오기, 황소, 코브라, 심지어 풍뎅이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들의 형상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형상을 두기 위한 시설을 만든다고 지하에 들어가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신들의 이름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제사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열흘이 일주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에 따라 일주일을 7일로 정하시고 마지막 날을 인식일로 정하셔서 모든 사람이 쉬게 하셨습니다. 이 좋은 제도를 이집트에서는 실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인본주의적 요소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말은 인본주의지만 결국 사람을 잡는 인본주의였습니다. 여러분, 인본주의에서 핵심이 되는 인간은 신적 존재로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파라오같은 자들이지요. 그야말로 만들어진 신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부정적으로 대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살펴 보면서 이집트의 문제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유기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런 곳으로 가게 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런 곳에서 사는 자들은 그 곳에서 떠나게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담이지만 희한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집트를 참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이로에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동경 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떼를 지어 이집트 남쪽 누비아 지역에 있는 아부 심벨 신전까지 찾아간다고 합니다. 저는 이게 일본인들의 탐구적 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니, 이것은 그들의 천황제가 파라오 체제와 비슷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일본 자체가 불구덩이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일본 열도 지하에는 펄펄 끓는 마그마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처에 온천이 솟아나지요. 본래 사막이었는데 나일강이 흘러 옥토가 된 이집트와 비슷한 처지입니다. 그리고 천황은 인간이지만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파라오와 비슷합니다. 파라오도 살아있는 신이거든요. 죽는 순간 그는 완벽한 신이 됩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있는 수 많은 신들… 그리고 일본에 있는 인구보다 많은 일본 신들… 이것도 비슷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지요. 일본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지배했습니다. 이 모든 게 참 비슷합니다. 그러니 일본 사람들이 이집트를 좋아할 수 밖에 없지요.

또 안타까운 것은 일본군 출신의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한국적 민주주의입니다. 그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절대권력을 지닌 무제한 임기의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게 이집트의 파라오나 일본의 천황과 비교해서 다를 바 없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 가운데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를 통해 사람을 억압하는 인본주의는 그 모순 때문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리더쉽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그 존재 앞에서 두 손을 모우고 경건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좋아하시지 않는 이유는 많습니다. 그것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이신 이유에 대해 말해 봅시다.

2) 이집트의 신들에 대해 말해 봅시다.

3) 이집트의 신 아톤에 대해 알아 봅시다.

4) 람세스 2세 시기의 이집트는 복지국가였나요?

5) 이집트의 파라오 시스템과 일본의 천황 시스템이 서로 닮은 점은?

 

 

 

 

2014년 3월 30일

예레미야 46장 19-28절: [19] 애굽에 사는 딸이여 너는 너를 위하여 포로의 짐을 꾸리라 놉이 황무하며 불에 타서 주민이 없을 것임이라 [20]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일지라도 북으로부터 쇠파리 떼가 줄곧 오리라 [21] 또 그 중의 고용꾼은 살진 수송아지 같아서 돌이켜 함께 도망하고 서지 못하였나니 재난의 날이 이르렀고 벌 받는 때가 왔음이라 [22]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2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와 애굽과 애굽 신들과 왕들 곧 바로와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 [26] 내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리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이전 같이 사람 살 곳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7] 내 종 야곱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먼 곳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하며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나라들은 다 멸할지라도 너는 사라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법도대로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References  마가복음 13장 28-37절: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얼마 전에 선교사 모임에 가서 강의를 적이 있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선교사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데 동유럽에서 사역한다는 부부와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선교사 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오늘 강의가 좋았습니다.하더니 대뜸남편 볼까요?하더라구요. 선교지에서는 선교사보다 부인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선교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사역의 특성상 여행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오랜 만에 집으로 돌아 오면, 남편은 가장 먼저 신문을 집어든다고 합니다. 외국어 신문이라 당연히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까지 찾아 들고 열심히 신문을 읽는다고 합니다. 특히 국제정세 부분을자신은 아이들 씻기고 식사 준비하고 분주하기 한량 없는데 남편은 한가롭게 신문 읽기에 빠져든다는 겁니다.

말에 선교사는 겸연쩍게 웃으면서국제정세가 궁금해서 그렇지…”하더군요. 그러니까 부인이 그러더군요. 국제정세를 알면 뭐해요? 당장 씻고 먹는 급하지…” 맞는 말이긴 합니다. 국제정세가 어떻다 해서 선교사가 국제적으로 당장 해야 일은 없겠지요. 그러나 여행을 마친 터라 당장 해야 일이 있습니다. 씻고 밥먹고 그리고 이불 펴고 자야지요. 하지만 인간에게 그게 전부는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사모님, 저도 그렇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밀린 신문부터 챙깁니다. 동안 신문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같아서요…” 그러자 사모님은아니, 목사님도 그러세요? 아무튼 남자들이란…” 갑자기 남자는 일상과 떨어진 삶을 사는 종류로 분류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남자만 국제정세에 관심이 있는 아닐 겁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나라 대통령과 독일의 메르켈 수상이 회담을 하더군요. 아마도 대통령이 메르켈 수상보다 살이 많을 겁니다. 메르켈 수상은 공산주의 치하였던 동독에서 목사 딸로 자란 사람이고 대통령은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입니다. 메르켈 수상은 과거에 독일은 원자력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가진 러시아가 독일을 침공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메르켈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항복해야지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메르켈 수상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남한 사람들이 먼저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그러자 대통령은 말을 받아서 대답하기를  한국은 통일만 되면 대박입니다이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두 적은 메르켈 수상은 할머니 같았고 대통령은 할머니 앞에 있는 해맑은 손녀 같았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하나 보실까요? 겉도 젊어 보이고 속도 젊은, 그리고 패션을 아는 대통령을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자든 남자든 국제정세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고뇌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메르켈 수상처럼 넓은 시각을 가지고 멋진 삶을 살아갈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키운다고 목사나 신부가 되라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을 키워 주면 그들이 어디에 가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있습니다. 미국의 국제정치 전문가 가운데 쯔비그뉴 브레진스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헨리 키신저와 비교되곤 하지요. 공화당에 키신저가 있고 민주당에 브레진스키가 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요즘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브레진스키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87세인 쯔비그뉴 브레진스키는 1997년에 <더 그랜드 체스보드>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브레진스키는 러시아가 10년 안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거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지난 주에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를 합병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브레진스키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브레진스키의 책을 읽어 보면 시종일관 우크라이나를 미국이 포기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이 폴란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폴란드에서 태어났고 당연히 폴란드를 지극히 사랑하지요. 그런데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합병되면 폴란드가 위험해 집니다. 이런 이유로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 국제정치의 기획자가 되어 폴란드를 방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의 힘은 만의 군대보다 강하다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제정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국제정치를 기획할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강대국의 힘을 빌어 우리를 방어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반영시키려 노력하겠지요. 우리 한민족 가운데는 브레진스키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한국은 일본 방어에 필수적이란 말을 듣고 삽니다.

(레반트 지도) 예레미야 46장에서 51장을 읽어 보니, 예레미야는 국제정치의 전문가입니다. 그의 국제정치에 관련한 식견은 탁월했습니다. 브레진스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하나를 맞추었다고 굉장히 칭찬을 받고 있는데요, 예레미야는 당시 세계 모든 나라들의 운명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맞추고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입니다. 물론 이것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 들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게 파괴되기 18년 전에 장차 레반트 세계가 어떻게 될지 알려 주셨습니다. 레반트 세계란 오늘날에도 쓰이는 개념으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나라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을 말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레반트 세계는 이집트에게 망하고 이집트는 결국 바벨론에게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7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레반트 세계 너머에 있는 나라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동쪽 국경인 엘람이 무너지면서 바벨론도 망하게 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잡혀서 진흙 구덩이에 갇혀 있을 때, 또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또는 바벨론 군대에게 잡혀 포로로 끌려 때, 또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다 라마에서 석방되어 미스바 공동체로 가서 때, 그리고 요하난 일행에게 끌려 이집트로 때, 예레미야는 모든 나라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이집트로 피난을 해봤자 별볼일 없다고 말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이집트를 침공해서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게 이것을 숱하게 말했지만 유대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벨론도 동쪽에 있는 엘람이 뚤리면서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당장 먹고 사는 급해서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없었습니다. 

(샤갈의 그림)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샤갈이 그린 울고 있는 예레미야는 명작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그가 눈물을 흘렸다면 눈물은 결코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답답함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오히려 희망의 눈물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눈물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의 철없는 반항에 마음이 아팠겠지만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니까, 아는 없으니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온갖 수고를 다하며 사는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오히려 자기만 희생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고 해답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여유있고 행복하게 여생을 살아 가십시오. 이것이 해답입니다.

이스라엘 회복

마음에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해도 헤쳐 나갈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은 물론 공동체의 삶까지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심각한 문제에 부딛히다가 오리무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좌절하게 되지요. 예레미야는 마음 속에 희망을 품고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희망은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개인적으로도 또한 공동체적으로도 심지어 2500년 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긍정적인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리아 테레사 수녀를 알고 계실 겁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를 일컬어 하나님의 친구라고 추켜 세웠습니다. 그도 그럴 만한 1910년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는 1948년 인도 캘커타에 가서 1997년 현지에서 죽을 때까지 행려병자, 나환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할 없이 헌신적인 삶을 살았지요. 1950년에 그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는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공로로 템플턴 상과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생애가 2007년에 발간된 때문에 의문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브리앙 콜로디쥬크라는 사람이 데레사 수녀의 사적인 편지들을 모아 <Come, Be My Light>라는 책을 냈는데 이게 문제가 겁니다. 테레사 수녀는 50년 동안 캘커타에서 사역을 하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가졌다는 겁니다. 이걸 그는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 그와 함께 9년 동안 일했던  수전 쉴드 수녀가 수녀 직을 포기했습니다. 그 이유가 가관입니다. 교황청이 테레사 수녀에게 보내는 헌금을 은행의 비밀계좌에 모우고 유용하고 있었습니다. 수 달러를 모았는데 그걸 인건비로 써버렸다는 겁니다. 그 돈은 당연히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했지요. 수전 쉴드 수녀는 이걸 폭로하면서 수녀복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교황청의 재정은 요지경이었던 겁니다. 결국 재정 문제와 비자금 문제가 커져서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사퇴하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종신제를 추구하는 천주교회에서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2013년 3월 13일, 추기경들의 모임인 콘클라베는 청빈하다고 소문난 브라질의 베르골료 신부를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그가 교황 프란치스코로, 이태리 이민자의 아들이며, 이번 8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테레사 수녀는 교황청이 자신에게 보내는 헌금까지 유용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실망했으며 교황에게 이를 탄원하는 글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황이 저지른 일을 교황이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의 친구요 성인이라고 말하는 밖에 없지요.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적 성년이 살부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자그마치 18년 동안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18년 전에는 하나님께서 장차 레반트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10년 전에는 결국 바벨론도 망하고 이후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회복은 단순히 유다 왕국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잃어버린 지파들까지 포함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완전한 회복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예레미야가 말한 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세운 바벨론 제국을 일컫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바벨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느부갓네살이 세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메데를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메데를 멸망시킨 페르샤일까요? 아니면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아니면 로마제국? 다 아닌 같습니다. 신약 성경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도 바벨론이 멸망한 희생 당한 어린 양으로 예표되신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신학적으로 예레미야가 말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멸망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던 같습니다. 예레미야 51장 59절 이하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7년 전에 병참감 스라야가 시드기야 왕을 모시고 바벨론에 적이 있습니다. 그 직전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멸망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스라야로 하여금 책에 기록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두루마리에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예레미야는 책을 바벨론으로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책을 읽어 주라고 했습니다. 이후 책에 돌을 달아서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 했습니다.

병참감 스라야는 예레미야가 시킨대로 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유프라테스 강을 뒤지면 두루마리를 찾아낼 있을까요? 우리가 수는 없지요. 그러나 예레미야가 책에 돌을 달아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 했던 영원히 밀봉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벨론에 살고 있는 유대인 포로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지 바벨론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벨론 멸망이란 느브갓네살이 세운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아니라 있겠습니다.

바벨론 멸망은 유대 문학에서 메시야 강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메시야 강림이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보기에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벨론 멸망이 느브갓네살의 바벨론 제국의 멸망이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간단히 이해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처럼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성경에서 나오는 바벨론의 멸망과 동일시할 없다는 것이 우리가 내릴 있는 결론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이것이 무화과입니다. 참 아름답지요. 종말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란 꽃이 피지 않고 곧장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무화과입니다. 꽃이 없이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지요. 열매가 얼마나 급했으면 꽃도 피지 않을까요? 그래서 고래로 무화과는 나그네를 위한 구휼식량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그네의 구휼과 관련이 있는 아닐까요?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봄과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 열매는 누구나 따먹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는 엄청나게 커서 아무리 뙤약볕이 내려쬐도 그늘이 아주 시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그늘에서 쉬면서 무화과를 따먹고 허기를 면한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십시오. 미국의 테네시 주에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아래 머물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나그네들에게 아주 고마운 것이지만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소득을 주지 않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열매를 많이 맺어도 뭐 합니까? 남들이 가져 가는데 그늘이 아무리 시원하면 뭐합니까? 임대료를 받을 수도 없는데... 결국 무화과나무는 좋은 일만 해주는 나무지요.

그래서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고 거기다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를 심습니다.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는 배타적 권리가 인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포도와 올리브를 수확해 수입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나그네들은 얻을 하나도 없지요. 무화과나무 아래서만 있습니다.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밑에서 쉬면 도둑놈 혐의를 받게 됩니다.

팓캐스트를 통해 알자지라 방송의 A Journey into Invisible War라는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헤브론에서 유대인들과 팔레스틴인들이 때문에 벌이는 싸움을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돌을 던지는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유대인 군인들은 총을 쏘았습니다. 심지어 격한 말을 했다고 말에 의한 폭력 혐의로 체포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로 팔레스틴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사용하는 히브리어... 그 히브리어가 그토록 살벌한 증오의 말이 있다는 비디오를 보고 알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땅에 찾아 사람들이 안전하게 쉬면서 나그네의 권리를 누리게 주리는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이처럼 너그러워진다면 이스라엘이 회복이 되는 겁니다. 다윗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이방인들에 대해 아주 너그러웠습니다. 그들에게 곳을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꺼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레반트 세계뿐만 아니라 멀리 이디오피아, 바벨론을 넘어 인도까지 이름을 떨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들만 챙겨 먹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모른 것을 이웃들과 나누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나라가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 왕이 자기 몫을 챙기면서 결국 남북분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변 나라들과 끊임 없이 전쟁을 벌이며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자기 몫을 챙기려 하다 보면 결국 몫까지 잃어버리게 된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에 싹이 피고 잎이 나는 이스라엘 공화국의 건국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한 1948년,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통곡의 벽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 기도를 드렸지요. 그러나 그때부터 중동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건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180도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런 저런 말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화과나무는 나그네를 위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을 위한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매우 긴박합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이 일어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후 30년에 부활승천하셨으니, 한 세대를 40년으로 때, 주후 70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며 살았지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서 글도 쓰지 않았고 오로지 전도만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후 7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가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게 아닌갑다라고 생각하고 신약성경을 편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게 신약성경이 기록된 주된 이유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화과나무를 뽑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내게 실익이 없다 해도 그걸 뽑아내고 배타적 이익이 보장되는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를 심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누라 하신 것은 그게 내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것 가운데서 발견되는 다른 사람의 몫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쩨다카고 쩨다카의 최고가 바로 십일조인 것입니다.

여러분, 무화과나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이런 청지기적 사명을 말합니다. 이 청지기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지난 9주 동안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사정과 우리의 사정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말씀대로 살면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며 삶의 모습입니다. 마가복음 13장 37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을 우리 자녀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에게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는 모든 곳에서 선포해야 합니다. 

 


2011년 4월 3일

예레미야 515-10절: [5] 대저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을 입지 아니하였나니 [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7]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8]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9]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10]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 그걸 알고 살아가야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정체성 확립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아이덴티피케이션이라고 하지요. 이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서로 사이 좋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란 걸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면 다른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다른 종교인들과도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면, 그리고내가 그리스도인이란 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몇 일 전에 신문에 난 사진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서른 살 먹은 아가씨가 옷을 홀랑 벗고 돼지들 틈에 엎드려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진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거라사 지방의 광인과 돼지 떼가 생각이 나더군요. 이 아가씨는짐승이 있다, 고로 내가 존재한다라고 하더군요. 데카르트의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말의 앞부분을 살짝 바꾼 것입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은 김미루... 한국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란 것은 이 아가씨가 도올 김용옥 선생의 고명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워 지더군요.

도올 김용옥 선생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한신대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지요. 이후에 고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원광대학에서 한의학을 수학하고 한의사 면허증도 땄습니다. 정말 다양하게 정력적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그 분의 해박한 지식과 자유분방한 태도가 부러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고 자녀가 있는 사람은 너무 자유분방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김용옥 선생은 딸의 이름을 김미루라고 지었습니다. 미루의 미는 미륵의 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루는 누추하다 할 때의 누입니다. 미륵의 누추함그래서 이 말은 점점 더 겸손해 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점점 더 겸손해 지다가 인간이 돼지처럼 되었습니다. 김미루 양은 돼지 떼 사이에 누워서 돼지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있노라니 자신이 더욱 더 순수해 지는 것 같더랍니다. 하지만 김용옥 선생도 자신의 자유분방함이 딸로 하여금 돼지처럼 낮아져서 돼지 우리에서 돼지와 함께 누워 있게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하는 사람이 도올 김용옥 선생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들 가운데서 오로지 그리스도만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도올입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저렇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마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그대로 모방하며 철이 들고 나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함부로 자유 자유 하면서 살아가면 우리 자녀들도 김미루 양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여기또 다른 사진이 있습니다. 어떤 미국인 목사가 이슬람은 악마의 것이란 제목의 책을 한 권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9.11 9주년이 되는 날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을 태워 버리겠다는 문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도올 김용옥 선생과는 달리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집착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4 1, 만우절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쟈리 샤리프란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금요일 정오 기도회를 마치고 사원에서 나온 이슬람교도들이 그 곳에 있는 유엔사무소를 습격했습니다. 그래서 노르웨이, 루마니아, 스웨덴 국적의 직원들 열 두 명을 살해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두 명은 참수를 했다고 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타종교 사람들이나 이단자들에게 적대감을 표현할 때 참수란 방법으로 처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들이 무슨 이유로 이런 참극을 벌였는가... 지난 3 20, 미국 플로리다에서 테리 존스라는 사람이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을 불태웠다는 것입니다. 불태우는 장면이 각종 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보도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이 분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쟈리 샤리프의 이슬람교도들은 이에 대한 응징의 의미로 그곳에 있는 유엔 사무소를 습격해서 직원들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테리 존스라는 사람과 마쟈리 샤리프에 있는 유엔 사무소 직원들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길래...

테리 존스는 미국 플로리다 게인스빌에서 살고 있고, 무슨 선교센터교회의 목사라고 합니다. 그는 변변한 교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주택 몇 채와 가구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데, 얼마 안 되는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소유의 주택에 살게 하면서 가구공장에서 일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서 지금 기소 상태라고 합니다. 그가 돌연 9.11 사건 9주기 기념일에 꾸란을 불태우겠다고 했다가 유명해 졌습니다. 유명세를 타니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겠지요. 그는 방문자들에게도 자신의 가구공장에서 무보수로 일하도록 요청을 했답니다. , 교회 아이들에게 이슬람교는 악마의 것이란 글자를 새긴 티셔츠를 입히고 학교에 다니게 해서 이슬람교도들과 충돌을 하게 했습니다. 급기야 3 20, 자기 마음대로 교회 뜰에다 이슬람교를 재판하는 재판정을 만들고, 거기서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을 피고석에 올려 놓고, 화형을 선고한 후에 즉시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게 생중계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슬람교가 지금 발칵 뒤집혀 있다는 겁니다.

도올 김용옥 씨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수용했습니다. 그리스도만 수용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딸이 인간의 정체성까지 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테리 존스 목사는 이슬람교를 인정하지 않고 독설을 내뿜었는데 그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하던 죄 없는 백인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나 테리 존스 목사처럼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되면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올 선생처럼 살아서도 안 되고 테리 존스 목사처럼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우매하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도의 국부라 불려 지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 점에 대해 좋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해서 변호사 자격을 딴 사람입니다. 영국에 유학할 때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한 때 기독교인이 될까 심각하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먹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I like Christ, but I don’t like christians, because they aren’t like Christ.” “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간디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기로 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간디의 말은 우리에게 뼈아픈 지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두번째 학가다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학가다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절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그리고 최후 승리에 대해 결코 의심하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모든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배반자들에게까지 선을 행하셨습니다. 밉다고 악을 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바벨론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사는 방법이라고 하셨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벨론으로 갔습니다. 바벨론으로 간 사람들은 결국 유대인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훗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만이었습니다. 왜 하필 우리를 멸망시킨 바벨론으로 가라고 하시는가그래서야 무슨 희망이 있는가차라리 우리는 익숙한 이집트로 가겠다. 어차피 이집트는 바벨론과 한번 붙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집트와 협력하면 유다 왕국을 회복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그러므로 이집트로 가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바벨론으로 가지 않고 180도 다른 방향을 잡아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로 간 유대인들은 모두 도태되고 말았습니다. 이집트에서 자유롭게 우상을 숭배하다가 도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이 이집트를 멸망시킬 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의 뜻대로 했다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작 바벨론으로 갔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워 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가라 하신 것은 바벨론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이 훈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가던 때는 바벨론의 중흥기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에 대해 살짝 알려 주셨으니까요. 그것은 예레미야에게 주신 보너스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게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지 자세하게 가르쳐 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유대인들을 적극 사용할 계산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이 결국 모든 나라들을 미치게 하는 독배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졸지에 넘어져 파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바벨론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부터 도망해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51 9절에 따르면 바벨론이 문제가 많다고 해서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쳐서 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낫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지은 죄가 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화가 하늘에 미치고 궁창에 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북한 정권은 군대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김정은 청년대장 시절에 어차피 통일은 되게 되어 있다. 남한 군대는 나약하다. 군대에 있으면서도 연애만 한단다. 죽을까봐 있지도 않은 허깨비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기도를 한다지 않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권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지배자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멋지게 살아도 얼마 살지 못하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귀하고 아까운 인생을 독재자에게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폭동을 일으키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 있는 나라에서는 도망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게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있다가 자칫하면 화를 입기 때문입니다. 리비아가 그렇고, 북한이 그런 곳입니다. 앞으로 중국이나 일본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 바닥 안에 있는 열방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열방에 거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 파라샤트는 주전 6세기 경 주로 레반트(Levant) 세계에 있었던 정치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레반트(Levant)의 어원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의 ‘해가 뜬다’를 뜻하는 ‘lever’, ‘levare’에서 유래하며, 동쪽에 있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통상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4개국을 말합니다. 주전 6세기는 동양에서도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중국의 춘추시대가 이때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시대는 엄청난 변화의 시대였고 엄청난 문화의 발전을 이룬 시대였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예레미야 52장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만 망한 게 아닙니다.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유다를 둘러싸고 있는 열방이 모두 망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얼마 못가 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46장은 애굽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7장은 블레셋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8장은 모압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9장 1절부터 6절까지는 암몬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9장 7절부터 22절까지는 암몬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9장 23절부터 27절까지는 다메섹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9장 28절부터 33절까지는 아라비아에 있는 게달과 하솔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49장 34절부터 39절까지는 티그리스강 동쪽에 있던 엘람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50-51장은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 자신의 일이어서 길게 기록한 것 같습니다.

열방이 멸망한 이유

예레미야 당시 레반트 세계는 바벨론에 의해 통일이 되었습니다. 레반트 세계 입장에서 보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셈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레반트 세계의 그릇된 행동들을 하나하나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된 행동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망할 만 하니까 망했다는 논리입니다.

결국 바벨론도 망한다

하지만 레반트 세계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짧은 시간 존재하고 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메데인에 의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는 겁니다. 이후 페르시아가 레반트 세계를 점령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으므로 그들의 문명도 쇄하게 되고 그들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회복된다

세계를 경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레반트 세계의 서쪽 끝에 있는 조그만 유다는 별 볼 일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크게 보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었지요.

유다의 마지막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망하는 모습을 그의 예언서 마지막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대 지성이 바벨론으로 옮겨 간 것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을 보여 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

1) 레반트 세계의 인문적 성격에 대해 알아 봅시다.

2) 예레미야 시대는 중국의 공자 시대와 비슷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때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 봅시다.

3) 레반트 세계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된 이유를 말해 봅시다.

4) 바벨론은 무슨 이유로 망합니까?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5)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어떻게 변합니까?

 

 

 

모든이교회 MODENEE Presbyterian Church

in BEIT MODENEE

410-828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산두로 255-8호

#255-8 SanduRo, IlsandongKu, Koyang, Kyonggi, S.Korea

Tel: 031-905-8291(ex), eMail: modenee@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