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18

Mt.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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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Listening

 

2020년 7월 26일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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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 기쁜 마음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 말씀하시기를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기 13장과 14장에 기록된 짜라아트 율법을 지키신 겁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작년에 레위기를 다루면서 자세하게 묵상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새삼 기억하기 위해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짜라아트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제사장은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준비하게 합니다. 그리고 흐르는 물 위에서 새 한 마리를 질 그릇 안에 넣고 잡게 합니다. 새 한 마리를 질그릇에 넣고 잡게 하는 이유는 그 새의 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첫 번째 호렙산 등정에서 내려와서 소를 잡아 그 피를 양푼에 담았다가 그 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렸다고 했지요? 새도 그런 용도였습니다. 왜 이렇게 히야 하는지… 이에 대해서는 대속의 문제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후, 살아있는 새 한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에다 질그릇 안에 고여있는 새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뿌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다발로 묶어서 자신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이후 살아있는 새 한 마리를 놓아줍니다. 이렇게 해서 정결하게 된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전신의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고 7일 동안 자기 집 앞에 머물며 근신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또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과 전신의 털을 밀어버립니다. 이후에 또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습니다. 제사장은 이 모든 것을 확인합니다. 종국적으로 제사장이 정결하다고 선언하면 그는 드디어 정결하게 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정결하다고 선언을 받은 다음 날, 그러니까 여덟째 날, 짜라아트에 걸렸던 바로 그 사람은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힌을 예물로 제사장에게 가져 갑니다. 만약 그 사람이 가난하다면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고운 가루 십 분의 일 에바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 갑니다. 이것이 바로 예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이런 것들은 필요없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제사장에게 갈 때 취하는 예물만 필요했겠지요. 그 사람이 부유했다면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고훈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힌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가난했다면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고운 가루 십 분의 일 에바와 산비둘기나 집둘기 새끼 두 마리를 준비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 율법이 정확하게 지켜졌는지, 제사장에게 돈 몇 푼 주는 것으로 끝내버렸는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나병환자에게 레위기의 짜라아트 율법대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했지요. 제사장의 마음이나 행위는 어떻든지 율법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제사장에게 가서 제 몸을 보여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물을 드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몸이 회복된 이 사람에게 있어서  예물은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몸이 짜라아트에서 해방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까짓 예물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물론 어린 몇 마리, 기름 얼마, 곡식가루 얼마… 등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일상과 바꿀 수 있다면 그것들은 훨씬 저렴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와 똑 같은 논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400년 동안 그들은 파라오에게 그들 몸이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들이었던 것이지요.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 우리는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 생활도 지긋지긋해 합니다. 그런데 그 400년 동안의 노예생활이란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주신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밀린 임금을 받게 하셨습니다. 금덩이 은덩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소가죽 양가죽 해달의 가죽도 걷어가지고 나왔습니다. 보석들도 모두 챙겨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불과 5개월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는다고 물품을 기증하라고 하신 겁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물품이 자기 수중에 있었습니다. 금괴 열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해달의 가죽이 다섯 장이나 있는데 한 장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걸 이때 쓰기 위함이었구나…했을 겁니다. 초막절에 즈음해 이 대목을 다시 다루게 되겠지만, 기증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긴 줄을 섰기 때문에 필요한 재료들은 순식간에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제 제발 그만 가져오라고 당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매우 즐겁게 해 드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즐겁게 해드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은 제사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셨습니까?

3)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이 살아간 방법에 대해 알아 봅시다.

4) 나병환자가 제사장을 찾아갈 때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5) 나병환자는 제사장에게 어떤 예물을 주었을까요?

 


2015년 12월 6일

“패권 아닌 은총”  마태복음 13장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살아나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삼으셨습니다. 이 메시야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했던자들, 그리고 죽인자들을 포함해서… 만약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지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을 내려주셨을겁니다. 그들은 범죄행위를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신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데 당신의 방법을 찾으시디가 그 과정에서 인간의 범죄를 발견하시면 그 범죄를 은총으로 바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겁니다. 이것이 우리 눈에 인간의 범죄가 하나님의 뜻처럼 보일수도있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느끼는 착시현상이지요. 우리는 영적인 착시현상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런데 계시에서 가장 중요한건 경건한 해석입니다. 요셉은 경건한 해석에서 실패했기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 계시를 주시는데, 그 계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온전한게 바로 성경인데… 그래서 성경을 포함한 계시는 해석이 매우 중요합니다.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꿈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이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계시는 정확하게 이해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므로 계시를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확증으로 계시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선지자를 찾아가서 그분의 말을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선지자는 없지요. 이건 유대인들도 인정하는바입니다. 예수님 이후에는 사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란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지요. 물론 다른 의미도 있긴 하지만…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신약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존중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며 계시를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계시를 해석하는 방법에대한 설명이 나와있습니다. 오늘 제가 택한 신약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무리를 향하여 씨뿌리는 자와 씨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무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오로지 요셉에게만 계시를 주시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주지 않으셨다는게 여기서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비유를 무리는 결코 이해할수없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하여 눈이 보고 귀가 들으니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해설해주셨지요. 이게 바로 제자들이 누릴수있는 엄청난 특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해봐야하는건 농부가 제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만 의도치않게 생겨난 가라지가 무엇인가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가라지를 원수, 즉 마귀가 심은거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가라지가 있는곳은 알곡들 가운데입니다. 그러므로 알곡들 사이에 가라지가 있다는걸 우리는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추수를 세상끝, 추수꾼은 천사들이라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우리가 함부로 심판하지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다 알곡이 상할수있다는겁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제대로 분별할수있는 눈을 가진건 천사들입니다. 우리의 눈은 착시가 심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감춰진 보화와 값진 진주와 각종 물고기 비유를 통해 심판날에 하나님께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온고이지신…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자는 의미지요. 공자님 말씀입니다. 공자님 말씀에는 온고이지신 이후에 가이위사의란 말이 더 붙어있습니다. 그러면 스승이 될수있다는 의미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위해서 그리고 그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참과 거짓, 좋음과 사악함을 논하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려는걸까요? 이 말씀도 엄청난 계시라는걸 인정할수밖에 없겠네요.

질문

1) 비유에 해설이 필요한 이유가 비밀떄문입니다. 비밀이 무엇입니까?

2) 비밀은 종말론적 의미를 갖습니다. 의인들 가운데 악인을 골라낸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4) 이 서기관이 곳간에서 옛것과 새것을 내오는 집주인과 같다는게 어떤 의미입니까?

5) 우리의 종말론적 삶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2015년 11월 15일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마태복음 10장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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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반포하신 후 나훔 선지자의 추억이 있는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인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크게 보아 하나님나라 선포와 치유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산상수훈에서 예고하신대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파이스를 고쳐주셨지요. 이때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라는 백부장에게 최고의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앓아 누운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아울러 귀신들린자들과 병든자들을 다 고치셨습니다. 배를 타고 아마도 벳새다로 건너가시기 직전에는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자기는 머리둘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개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이 서기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이후 제자들 중 하나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자 죽은자들로 저희 죽은자를 장사하게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제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어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다 풍랑을 만났으나 풍랑도 잠재우셨고 아마도 거라사지방에서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들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은 인근의 돼지떼에게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서 서기관들과  죄사함에 대한 논쟁을 벌이셨지요. 그리고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고 금식관련 논쟁을 벌이셨으며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셨고 회당 직원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후에 소경 두 사람, 그리고 벙어리 한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추수할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적다고 하시면서 추수하는 주인에게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신 일과 연결이 됩니다. 열두 제자들이란 베드로(시몬), 안드레(시몬의 형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예수님을 판 가룟 사람 유다였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이들을 내어보내시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천국이 가까왔다하고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하게하고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것 받는게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깁니다. 그리고 지엄하고 단호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세상으로 향하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구체적으로 알수가 있습니다.

질문

1)  예수님 사역의 특징을 요약해 봅시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어떤 권세를 주셨습니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015년 11월 8일

“딸아, 안심하라”  마태복음 9장 18-25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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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을 보십시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여인이 급히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옷술이라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가련하고 애처롭게 보입니다. 미국의 하워드 리언이란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1998년에 열린 의학대회에 기증한 작품이라고 하네요. 그림의 백미는 여인의 얼굴입니다. 원래 그림을 보면 여인의 얼굴이 매우 하얗게 그려져 있습니다. 핏기가 없어서 병색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는 그런 얼굴입니다. 12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나 여인의 하얀 얼굴은 간절하고 애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삶을 적극적으로 희구하고 있지요. 그래서 희망적인 주제입니다.

작가는 그림의 제목을 ‘Treading Faith”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Treading 실을 뽑아낸다는 의미고, Faith 믿음이란 의미니까뭐라고 번역해야할까요? 손을 뻗쳐 회생을 간구하는 믿음을 표현한다고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가버나움에 내려오시자 많은 병자들이 고쳐주심을 바라고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회당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딸이 죽었으니 집에 오셔서 안수하시고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로마군 백부장은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회당 직원은 집까지 오셔서 안수해 달라고 했습니다. 차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예수님은 사람의 딸을 살리기 위해 집으로 바삐가셨습니다. 그때 여성이 예수님 뒤편으로 와서 예수님의 옷술을 살짝 만졌습니다. 일어서기도 힘든 여성이 많은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 뒤편까지 와서 옷술을 만지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모르기는 해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겁니다. 과정을 여인은 모두 통과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12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혈루증이란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생겨서 생리가 불순해진 증세라고 합니다. 불임과도 관계가 있어서 여성에게는 치욕적인 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마음에 생각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려고 시도했고 결국 그녀는 성공을 했습니다.

주보 1면에 있는 그림을 그린 하워드 리언은 이런 설명을 붙였습니다. “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순간 혈루증이 나았을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혈루증이 나았다는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걸음을 멈추시고 그녀를 향해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의 최대 관심은 혈루증이 낫는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그녀가 구원을 받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 속에는 당연히 혈루증이 낫는것도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하워드 리언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회당 직원의 딸도 살려주셨습니다. 직원의 소망은 딸이 살아나는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집에도 구원을 선포하셨을겁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 속에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것도 포함이 되어있었을겁니다. 결국 모든것은 구원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구원 속에는 우리의 소망이나 희망, 그리고 우리가 좋게 생각하는 모든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이 구원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제한적인 구원일겁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원은 우리가 좋아하지않는것, 심지어 싫어하는것도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피조물로서의 사명이 있고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도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겁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걸 쉽사리 인정할수있겠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른 말로는 포스트크리스텐돔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이후 시대라는 뜻이지요. 기독교 이후 시대란 결국 성경말씀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성경말씀이 필요없는 시대에 교회에 나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유대교까지 합치면 3500 역사는, 성경말씀을 따르는 사람들과 성경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갈등하며 이루어온 역사였습니다.

성경말씀이 이상 필요없다, 이제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야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시대만 있는게 아니라 항상 있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현혹이 되면 안됩니다. 특히 남자가 무신론적인 주장을 하면 멋있당-하면서 홀라당 넘어가는 여자들이 있는데요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015년 11월 1일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마태복음 8장

이 대목을 우리가 좀더잘 이해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한 백부장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가버나움 뒷산에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신 예수님을 한 백부장이 찾아왔습니다. 백부장이란 백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장교를 말합니다. 로마군의 꽃이라 할수있는 엘리트 장교라고 할수있습니다. 백부장은 경우에 따라서 장군이 될수있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 황제도 될수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백부장이 어째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아마도 경비를 서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겠지요. 그리고 행하시는 모습을 살펴봤겠지요. 그리고 어떤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 자신의 하인이 중풍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그걸 고쳐줄수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콧대높은 로마군 장교가 하인 하나 아프다고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볼수있을까요? 물론 그렇게 볼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좋은 사람은 그럴수있지요. 그런데 다르게 해석할수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말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파이스’입니다. 파이스는 어린 남자아이란 뜻이 있습니다. 아울러 나이가 들었어도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합니다. 영어에 보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어린 남자아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들이란 뜻도 있고 호텔보이라고 하면 허드렛일을 하는 남자란 뜻도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갸르송이란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년이란 뜻도 있고 급사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건 그의 아들이 간질에 걸려 고생하고있기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더욱더 절실해지는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을 읽어보면 그 백부장의 태도가 매우 뻣뻣했던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로 본문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참 아 다르고 어 다른 번역의 문제입니다. 백부장은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애절한 목소리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백부장의 출현은 예수님께 별로 좋을게 없었습니다. 일단 열두명의 제자들 가운데 과반수가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열심당원이란 로마군을 보면 즉시 전투도 마다하지 않는 열렬독립투사들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로마의 백부장의 아들을 고쳐주시다니… 이건 있을수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주위에 몰려와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을겁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백부장의 아들을 고쳐주는건 민족감정상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걸 모르실리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러자 백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의외의 말입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젊은 유대인 선지자에게 주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고 간결한 어조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이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진솔한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리고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랬더니 그 시로 그 아들이 나았다고 합니다.

백부장은 성공한겁니다. 협상도 없이 단판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협상의 달인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발견할수없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없었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백부장을 일대일로 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백부장을 어떻게 아브라함과 비교할수있겠습니까? 백부장은 학교도 다니지 않는 어린아이로 볼수있고, 아브라함은 대학원 학생이라고 볼수있는데, 이 두사람을 동급으로 놓고 비교할수는 없는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성공했는데 아브라함은 실패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도무지 부인할수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해석할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백부장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있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설프게 알고있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수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유프라테스강을 건넌 이브리트, 그 이브리트의 주인공 아브라함은 참으로 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에 들어와서 실수를 많이 범했고 과오도 많이 범했습니다. 그러나 실수와 과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일생은 백부장과는 비교할수없이 복된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신앙은 가끔 오리무중일때가 많았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백부장의 삶은 매우 이교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령체계 속에서 살다보니 권위와 권능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권위와 권능에 순종하면 명예와 출세를 보장받습니다. 심지어 또다른 권위와 권능을 손에 넣고 뭔가를 이루며 살수있습니다. 황제와 총독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그들이 내린 명령을 실천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명령이 나의 것이 될수있습니다. 백부장은 단순한 이 사실을 알았고 이것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을 어떻게 황제와 총독의 그것에 비교할수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은 최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되는겁니다. 그러면 원격치료도 가능한겁니다. 참으로 군인다운 단순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했기 때문에 백부장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 어설프게 알고 있느냐, 아니면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하는 점은 단순하게 나타납니다. 그건 논문거리도 아니고 연구대상도 아닙니다. 신앙고백이면 됩니다.

백부장이 지닌 단순한 신앙고백이란 측면에서 보니까 아브라함은 실수를 한게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의인이란 단어를 꺼내든겁니다. 이 세상에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열명이 있으면 어쩌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더라면 그는 무조건 그 권위와 권능 앞에 납짝 엎드렸을겁니다. 그게 사는 길이고 구원을 이루는 길이고 성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의인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한명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러니 주님, 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저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을 용서해주시지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망극하오니 통촉해 주시옵소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협상의 달인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협상을 잘하자…라고 합니다. 참 황당한 주장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이 협상의 달인입니까? 그래서 그많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까? 협상을 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협상을 해야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협상을 한다면 그건 백번해봤자 백번 다 실패입니다. 이에 비해 백부장은 아는게 없는 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확신을 하나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달리 백부장은 성공을 거둘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공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것에 달려있습니다.


 2011년 1월 30일

예수 앞에 나오면…  

본문: 마 11.25-30

 

설이 다가 옵니다. 설은 우리 가정에 아주 중요한 명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통해 민족을 이루셨지요. 민족은 나라보다 앞서는 개념입니다. 우리 말로 민족국가라고 번역하는 영어의 nation state도 나라보다 민족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나라는 가정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한 가정이 나라를 독점하고 다른 가정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 나라는 타도해야 하는 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공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 권력을 지닌 왕실의 존재나, 김일성 집안 같은 독재 권력의 세습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공부해 보면 그 배경이 개인이나 나라가 아니고 가정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어머니와 딸의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가 신앙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 안에서 형성된 가정, 그 가정의 부모와 자식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안다고 하셨지요.

성공하려면 고아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나 혼자 열심히 해서 성공을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고아 정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아 정신은 이교도 사상이지 우리의 기독교 정신은 아닙니다. 비록 부모에게 기대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니까 또 그렇게 불러야 하니까 신앙인은 고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안다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아들의 모습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부자관계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아들도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가진 민족이 생겨나고 역사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가정은 나라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을 반석 위에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배워야 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생성하는 새로운 생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우리 가정에도 들여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신약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33세에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30년 동안 준비하시고 3년 동안 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복음을 봤을 때의 경우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 번 유월절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유월절은 1년에 한 번 있으니까 3년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1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해 유월절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유대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해 오순절에 가버나움 뒷산에서 산상수훈을 반포하셨고, 이어서 열 두 제자를 세우시고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해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소하시고 종교지도자들과 담판을 벌이시며 6개월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직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1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이 되고 있는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란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들은 대개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그들이 나라를 위해서 또 민족을 위해서 가정을 희생시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토라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신 바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토라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당시의 시대 정신이나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토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이라고 왜 발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토라를 공부하고 강의했지만 추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지혜와 슬기였습니다. 그들은 토라를 인문학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했다 해도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남 왕국 유다 말기에 나타난 요시야 왕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보다 우선하는 것

황장엽 씨 망명 이후, 북한의 수 많은 지식인들이 남한으로 내려오거나 미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데려 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식인들이기 때문에 한국이나 미국의 정부 기관 또는 언론 기관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습니다. 또 자발적인 기구를 만들어서 탈북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노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정권 퇴진 운동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묻겠지요. 당신들은 북한에서 나름대로 대접을 받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는데 어째서 북한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느냐? 이때 이들이 하는 말이 딱 한 가지입니다. “북한 정권은 오직 김일성의 가족만 위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가족이 나라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유럽 대륙 중앙에 알프스 고원이 있습니다. 알프스에서 가장 높다는 몽블랑은 그 높이가 해발 5천 미터에 가깝습니다. 가장 아름답다는 융프라우도 해발 4천 미터가 넘습니다. 유럽 대륙이 전반적으로 들판과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프스는 아주 이례적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살았습니다.

알프스의 대부분은 만년설로 덮여 있습니다. 이 만년설이 녹아서 호수를 만들고 강을 이루어 유럽의 들판을 적셔 줍니다. 남쪽에 있는 레만 호수에서 쥬네브를 지나 프랑스 남부를 적시고 마르세이유로 흘러가는 강이 론 강입니다. 쥬네브 근처에는 파리를 경유하는 세느 강의 발원지도 있습니다. 쥬네브 옆에 있는 에비앙에는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마신다는 에비앙 생수 공장이 있습니다. 쮜리히 근처 호수에서 발원하는 강이 라인강과 다뉴브강입니다. 라인강은 북쪽으로 흘러 독일의 평야를 적시고 다뉴브 강은 동쪽으로 흘러 동유럽 들판을 적십니다. 이런 알프스 고원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스위스입니다. 스위스는 남한의 절반쯤 되는 국토에 760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나라가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았고 유로화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꿋꿋하게 자국 화폐인 스위스프랑을 쓰고 있습니다. 쥬네브에는 국제연맹 본부가 있었고, 지금은 국제연합의 유럽본부가 있지만, 스위스는 최근까지도 국제연합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스는 중세부터 망명객들의 나라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프랑스에서,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에서, 또한 이태리에서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스위스로 몰려 들어 생명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알프스 산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목장을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이랬던 사람들이 오늘날 스위스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스위스 사람들은 자신이 프랑스어를 쓰고 있어도 프랑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독일어를 쓰고 있지만 독일을 좋아하지 않고, 이태리어를 쓰고 있지만 이태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위스 사람들은 나라보다 칸톤이라고 하는 지방자치단체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지금도 칸톤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걸 자랑스러워 합니다. 스위스의 이런 특성이 중세 때 수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목숨을 살렸습니다. 장로교회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쟝 깔뱅도 프랑스에 있었다면 화형에 처해졌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쥬네브로 피신을 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살았기 때문에 불휴의 명저 기독교강요를 집필할 수 있었지요. 그래선지 스위스가 참으로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스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3 5천 달러로 세계 10위입니다. 산에서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의 후손치고는 엄청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요컨대, 요시야 왕이나 유럽의 왕들이나 김일성이 추구했던 국가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보다 민족을 소중하게 보시고, 민족을 만들어내는 가정을 소중하게 다루십니다. 이것은 창조 후 지금까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아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국가주의라는 가치에 함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사용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지지하셔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메시야라면 유대인들만의 메시야가 되어야 하고, 그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보내는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민족을 만들어 내는 가정 또는 가문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쉼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국가주의 가치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오면 쉬운 멍에로, 또한 가벼운 짐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결코 예수님께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해박한 토라 지식을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흐려 놓았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토라를 가지고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의 토라 지식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몹시 불쌍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한 사람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에 쉼을 얻었습니다. 마음에 쉼을 얻었다는 것은 마음만 쉼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인적인 쉼을 얻었다는 뜻이지요.

여러분, 가족이 모일 때, 또 친지가 모일 때,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도록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놀음이 없어지고 싸움도 없어집니다. 그 안에서는 사랑과 격려가 솟아납니다. 모든 가정이 이렇게 된다면 우리 민족이 또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족이 유연해 지고 나라를 강해 지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순리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설날 아침, 가장이 먼저 성경을 펼쳐 드십시오. 그리고 나라보다 귀한 가정을 향해 또한 가족을 향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영원히 여러분의 가정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2008년 1월 27일

지난 주에 저는 당진과 서산과 태안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금년 국토순례 장소를 이곳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도비도 휴양시설이 훌륭했습니다. 구두 계약을 해두었습니다. 만리포에서는 아직도 젊은이들이 기름 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산항에 들어와 있다던 허베이 스피리트란 사고 유조선은 본국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이 배를 들이받은 배가 소속되어 있는 삼성중공업은 눈꼽만한 벌금만 내면 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법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사고를 낸 회사들은 별로 잘못이 없다면서 떵떵거리고 있고 피해를 입은 어민들은 생계 유지 수단을 모두 잃은 채 손해 배상 한푼을 못받고 있는 걸까요? 적어도 유류 피해 지역에서 정부의 역할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신약파라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문둥이를 고침, 2) 백부장의 하인을 고침, 3)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 많은 사람들을 고침, 4) 아비 장사를 생각하는 서기관에게 따르라 함, 5)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함, 6)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침, 7) 중풍병자를 고침, 8) 마태를 제자로 부름, 9) 금식논쟁, 10) 관리의 딸과 옷을 만진 여자를 고침,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함, 11)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침, 12) 추수하는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 함. 13) 열 두 제자들을 세움, 14) 제자 파송, 15) 박해 예언, 16) 두려워 할 분을 두려워 하라, 17) 검을 주러 왔다, 18) 상 받을 사람에 대하여, 19)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함, 20) 회개하지 않는 마을들에 대한 저주, 21)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니... 22)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니... 23) 예수와 바알세불, 24)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25)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 26) 네 가지 씨들의 비유, 27) 겨자 씨와 누룩의 비유, 28) 가라지 비유, 29) 세 가지 비유, 30) 새 것과 옛것에 대하여, 30) 고향에서 배척을 받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고 들어간 마을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분봉왕 헤롯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필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제1차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의 전개에 따르면 이 1차 사역은 오순절 직후에 시작되어 초막절 훨씬 이전에 끝나고 벳새다에서의 2차 사역이 시작이 됩니다. 1차 사역이 끝난 싯점은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그때라 생각이 되는데  세례 요한은 유월절에 죽었으므로 이런 마태복음의 구성은 허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기자에게 있어 세례 요한의 죽음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1년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하기 위해 곁가지는 정돈이 됩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전개보다 그 역사가 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1차 사역에서 민중 속에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치유했습니다.  농민 속으로! 하는 브 나르도 운동과 비슷하지요. 브 나르도 운동이란 무산자 운동이요 프로레타리아 운동이지요. 그런데 요즘 기독교는 부르조아 같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장래는 어둡습니다. 복음은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독점할 수 없지요. 예수님의 사역 대상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민중이 주 대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 가운데서 열 두 명을 제자로 선택합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후 서기관이 계속 예수님을 따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자로 선택이 된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장사를 앞둔 자가 있었습니다. 장사에 참여하지 않은 아들에게는 유산이 없기 때문에 이 제자는 아버지 장사에 참여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제자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없다고 하면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을 원용했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죄인, 죄인과 의인의 경계, 그리고 의인에 대한 깊은 묵상과 통찰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에 대한 깊은 묵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세우고 이들을 민중에게로 파송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이해도 우리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면서 자신은 성전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말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쳤습니다. 이것이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씨와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천국과 관련시켰습니다. 아주 작은 씨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곳에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내용은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죽은 자들과 저 세상 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여기서 지금 (here and now)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

생각해 보기

 

1) 예수님의 공생애를 1년 동안의 이야기로 구성한 마태복음의 주제에 대하여 말해 봅시다. 참고) 유대교에서는 개종자들에게 1년 후에 입교를 허락합니다. 절기를 한번 다 지켜 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 예수님의 복음은 기독교의 독점물입니까? 기독교 이외 어떤 종교가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과 1920-30년대의 브 나르도 운동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이야기 해 봅시다.

4) 아버지의 장사 참여도 불허한 예수님의 제자도 또는 로드쉽에 대한 견해는 매우 완고합니다. 그러나 세리 마태와 그들의 친구들과는 한 자리에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의 가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5) 예수님은 스스로 성전보다 크다고 했고 안식일의 주인이라 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 개념을 참고하면서 예수님의 이런 견해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했을 지 이야기 해 봅시다.

6)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천국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7) 추수의 기쁨을 제자도와 관련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주에 신안을 잘 다녀 왔습니다. 신안의 여러 섬들을 다니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증도에서 자은도는 직선거리 4킬로미터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지신개로 나가서 지도를 거쳐 무안을 거쳐 목포에 와서 배를 타고 1시간 10분을 달려 안좌도에 내려 64킬로미터를 달려 겨우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나마 날씨가 좋지 않으면 모든게 정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통이 불편한 곳에 사람들이 왜 들어가 살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뭍에서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각 섬에 정착해서 산 사람들 가운데 양반들이 많은 것 같은데... 정약전도 흑산도에 유배 되어 살았다고 하고... 예전에는 목포에서 흑산도까지 일주일 동안 배를 타고 가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을 쾌속선이 다니는데 2시간이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에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전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기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습니다. 공중보건... 이런 게 아니고 의료 선교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야 그렇게 살기로 한 사람들이니까 그렇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의사 간호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구원호 이야기입니다. 팔금도 장촌리에는 의료선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미쉬파팀과 보조를 맞추며

오늘 파라샤트는 열 여덟 번째입니다. 유대인들이 생명이란 의미의 '카이'의 글자 값이라 해서 좋아하는 '18'입니다. 타낙 파라샤트의 18번은 미쉬파팀입니다. 여기부터 본격적인 율법 공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순절과 초막절 사이에 모세를 세 번 시내산 위로 부르셨지요. 그래서 세 가지 토라를 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 토라는 나름의 성격이 있는 토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순절에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그러니까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세 번 시내산에 올라갔던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은 세 번의 독특한 사역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가운데서의 사역, 두 번째는 이방지역에서 나타내 보이신 오병이어를 기본으로 하는 사역,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감당하신 사역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처음 받은 토라는 타낙 토라 18번 미쉬파팀으로 정리되었습니다. 필자는 여기에 마태복음 8-13장을 병행시켜 봅니다. 마태복음 8-13장은 예수님의 가버나움 사역입니다. 이 가버나움 사역은 산상수훈부터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께 관심을 표명하여 예수님께서 분봉왕 헤롯이 간섭할 수 없는 벳새다 지역으로 가버리신 일 직전까지를 말합니다.

가버나움 사역

가버나움은 국경 도시이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거처 또는 고향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는 가버나움이란 말 자체가 권위의 상징이었다.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사역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12번의 기적을 나타내셨고, 아울러 12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강한 자의식을 갖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 즉 엘리야의 증거를 받는 메시야라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선포하심으로써 공생애의 의미를 더 간절하게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당연히 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하셨으나 가족들은 곧 이해를 하게 됩니다.

비유를 통한 설교

예수님은 수 많은 그리고 복잡한 설교를 비유를 통해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시곤 하셨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5-7장의 산상수훈, 13장의 비유들처럼 사건들 사이에 비유를 사용하신 설교를 집중적으로 모아두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모아 둔 부분이 마태복음에 모두 다섯 군데나 있어서 이를 가지고 마태복음의 5경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런 편집 방법을 쓴 것을 이런저런 각도로 이해해 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사물에 대해 예민하게 관찰하셨다는 겁니다. 아마도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관찰하지 않으셨을까요? 이런 마음은 어릴 때부터 조성되어 온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토라를 형상화하시고 또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토라에 나온 것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기

 

1) 마태복음 8장부터 20장까지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의 계절적 특성을 말해 봅시다.

2) 1)에 나타난 각 부분의 개요를 정리해 봅시다.

3)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사역에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4)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은 여느 랍비들과 같은 점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색다른게 하나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시지 않겠습니까?

5)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을 생각하며 그 기적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6) 마태복음 기자는 1-2장을 제외하고 3-28장을 일년 동안의 사건으로 다룹니다. 3년이 1년으로 줄어 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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