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22

Ex. 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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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Listening

2020년 12월 6일

"카체르, 뜰"

 

출애굽기 38장 9-20절: [9] 그가 또 뜰을 만들었으니 남으로 뜰의 남쪽에는 세마포 포장이 백 규빗이라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1] 그 북쪽에도 백 규빗이라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이 스물이니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2] 서쪽에 포장은 쉰 규빗이라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며 [13] 동으로 동쪽에도 쉰 규빗이라 [14] 문 이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요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5] 문 저쪽도 그와 같으니 뜰 문 이쪽, 저쪽의 포장이 열다섯 규빗씩이요 그 기둥이 셋씩, 받침이 셋씩이라 [16] 뜰 주위의 포장은 세마포요 [17] 기둥 받침은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 머리 싸개는 은이며 뜰의 모든 기둥에 은 가름대를 꿰었으며 [18] 뜰의 휘장 문을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짰으니 길이는 스무 규빗이요 너비와 높이는 뜰의 포장과 같이 다섯 규빗이며 [19] 그 기둥은 넷인데 그 받침 넷은 놋이요 그 갈고리는 은이요 그 머리 싸개와 가름대도 은이며 [20] 성막 말뚝과 뜰 주위의 말뚝은 모두 놋이더라.

요한복음 5장 19-29절: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니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한느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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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살렐이 일곱 번째로 만든 것은 카체르, 즉 ‘뜰’이었습니다. 근거는 출 27.9-19입니다. 뜰은 성막(회막)의 주변 땅을 말합니다. 이 뜰 역시 성막처럼 직사각형이고 출입구는 동쪽으로 나있습니다. 그러므로 뜰의 동과 서의 길이는 각기 50규빗이었고, 남과 북의 길이는 각기 100규빗 입니다. 그러므로 넓이는 5,000평방규빗인데, 이 중에서  가로가 10규빗, 세로가 30규빗인 성막의 넓이를 제외해야 하니 뜰의 정확한 넓이는 4,700규빗이 되겠습니다.

뜰로 들어서는 페타 문의 넓이는 20규빗이고, 이것은 당연히 동쪽 벽에 붙어 있으므로 동쪽의 세마포 벽은 오른쪽과 왼쪽이 모두 15규빗이 있는 셈입니다. 페타 문은 10규빗에 지나지 않는 성막 출입문의 두 배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페타 문부터 성막의 문까지 70규빗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70규빗의 중간에 번제단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페타 문에서 번제단까지 35규빗, 번제단에서 성막 또는 회막의 출입문까지 35규빗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단이 차지하는 면적까지 생각하면 정확한 거리는 각각 30규빗쯤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막의 길이가 되겠습니다.

물두멍은 번제단과 성막의 출입구 사이에 놓여 있으니 번제단에서 15규빗, 성막 출입구에서 15규빗이 되는 거리 입니다. 또 성막의 가로는 10규빗이니 뜰의 가로가 50규빗임을 감안하면 성막 옆, 즉 왼쪽과 오른쪽 뜰의 넓이는 각각 가로 20규빗, 세로 30규빗으로 계산하여 600평방규빗 씩이 되겠습니다. 이게 둘이니 합계 1200평방규빗이 되겠네요. 성막 앞 뜰의 넓이는 가로 50규빗, 세로 70규빗으로 볼 수 있으니 그대로 계산하여 3500평방규빗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뜰의 넓이는 4700평방규빗이 됩니다. 그리고 성막 또는 회막의 넓이는 300규빗이 되겠습니다. 참고) 600*2(성막 또는 회막의 오른쪽과 왼쪽의 뜰 넓이)+3500(성막 또는 회막의 앞 뜰 넓이)+300(성막 또는 회막의 넓이)=5000(성막또는 회막의 넓이를 포함한 뜰의 넓이) 평방규빗.

뜰의 주변에는 모두 60개의 놋기둥이 놓이게 되고 그 기둥 사이마다 높이 5규빗의 세마포가 쳐지게 됩니다. 높이 10규빗인 성막의 기둥의 반이 되는 셈입니닫. 뜰의 기둥과 받침은 놋으로,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참고로, 성막은 슅팀나무 판자 48개로 동쪽을 제외한 3면을 두르게 됩니다. 판자의 길이는 10규빗, 너비는 1.5규빗으로 모두 48개가 쓰입니다. 이를 염소털로 쌉니다. 성막 또는 회막의 지붕은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을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을 또 덮습니다.   

1암마는 도대체 몇 센티미터일까…  

성막은 이집트 문명 속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 만든 교육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익숙한 것을 토대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파라오와 어떻게 다른지 그걸 알게 합니다. 예컨대 조각목으로 본을 만들고 거기에 금을 입혀서 기구를 만드는 방식은 파라오를 위한 기구를 만드는 방식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구는 고작해야 파라오의 미이라를 담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성막의 기구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파라오가 만든 가자의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또한 룩소르의 계곡에서 발견되는 왕들의 무덤들은 성막에 비하면 크고 웅장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의 것들은 죽음으로 향하고 성막은 생명으로 향했습니다. 성막은 작고 가벼워서 사람이 지고 나르기 쉬웠으니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막에서 사용하던 기름이나 향품도 이집트 문명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집트의 기름이나 향품은 파라오의 시신을 닦는 왁스나 방부제로 사용이 되었지만, 성막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성결함과 향기로움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어울리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성막을 만든 브살렐이 당시 열 네 살이었다고 합니다. 이집트 문명에 대해 알기는 하지만 거기에 빠져 있던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성막에서 사용한 단위가 ‘암마’라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암마란 팔꿈치에서 장지 끝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팔꿈치였을까… 열 네 살 난 브살렐의 그것이었을까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평균 암마는 도대체 얼마였을까? 궁금한 게 많지만 대답은 궁합니다. 우리나라 성인의 경우는 38-45센티미터쯤 됩니다. 그래서 1암마를 30-50센티미터쯤으로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1암마를 1규빗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성막을 재현하는 사람들은 1규빗을 대개 50센티미터로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재현된 성막은 실제보다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성막 또는 회막의 지붕은 해달의 가죽이 덮여있었고 동쪽을 제외한 삼면은 염소 털로 둘려 있었습니다. 동쪽은 출입구인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를 놓은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붉은 칠을 한 숫양의 가죽 천정 아래 분향단과 등대와 진설상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 커튼이 쳐진 서쪽 벽 외에는 모두 천사를 수 놓은  휘장으로 채워져 있겠지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오두막이고 기괴한 시설물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결국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생겨났고 그 후손으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2020년 11월 29일

"미즈빠야흐 하 올라, 번제단"과 "하 키요르 느코셑, 물두멍

 

출애굽기 38장 1-8절: [01] 그가 또 조각목으로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는 다섯 규빗이요 너비도 다섯 규빗이라 네모가 반듯하고 높이는 세 규빗이며 [02] 그 네 모퉁이 위에 그 뿔을 만들되 그 뿔을 제단과 연결하게 하고 제단을 놋으로 쌌으며 [03] 제단의 모든 기구 곧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고 [04] 제단을 위하여 놋 그물을 만들어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에 두되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하고 [05] 그 놋 그물 네 모퉁이에 채를 꿸 고리 넷을 부어 만들었으며 [06]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어 놋으로 싸고 [07] 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메게 하였으며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었더라 [08]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고린도전서 13장 9-12절: [0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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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살렐이 다섯 번째로 만든 것은 미즈빠야흐 하 올라, 즉, ’번제단’이었습니다. 영어로는 the altar of burnt offering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7장 1-8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번제단은 성막 안이 아니라 성막 뜰에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성막 뜰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브살렐은 여섯 번째로 하 카요르 느코셑, 즉, 물두멍을 만들었습니다. 물두멍이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장치였습니다. 영어로는 the laver of brass라고 합니다. 놋 세숫대야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출애굽기 31장 17-21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근거가 되는 구절들을 보면 번제단과 물두멍에 대한 명령은 본래 분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살렐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같이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재료가 놋이었고, 또한 서로 연결되는 기구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라 해도, 사람이 그 명령을 합리적으로 정리해서 추진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주셨단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정리하고 추진해야 합니다.  

브살렐이 다섯 번째로 만든 번제단은 엄청나게 센 불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 속에 둘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브살렐은 마지막으로 뜰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뜰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을 자세히 보면, 성소에 놓이는 분향단을 닮았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놋으로 쌌고,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싼 것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 밖의 모양이나 역할이 참 비슷합니다.

무엇보다 더 닮은 점은, 번제단과 분향단의 윗면이 정사각형이라는 것입니다. 번제단 윗면은 가로 세로가 5규빗인 정사각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넓이는 25평방 규빗이 되겠네요. 이에 비해 분향단은 작았습니다. 가로 세로가 1 규빗 밖에 안되는 정사각형이었으니까요. 그러므로 분향단의 윗면은 넓이는 1평방 규빗 밖에 안되겠네요. 이에 비해 번제단의 넓이는 스물 다섯 배나 되는 25규빗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크기로도 도무지 성막 속에 둘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 다음으로 닮은 점은, 번제단이나 분향단이나 정사각형 윗면 네 꼭지에 뿔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분향단은 윗면 네 귀퉁이에 네 뿔이 달려있다는 것은 두 주 전에 묵했지요? 이처럼 번제단 윗면 네 귀퉁이에도 뿔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향단의 뿔에는 매년 속죄일에만 희생제물의 피를 발랐습니다. 피를 바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분향단에는 일 년에 한 번만 희생제물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의 뿔에는 희생제물을 바칠 때마다 그 피를 발랐습니다. 그러니까 번제단의 뿔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희생제물의 피를 발랐던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뿔을 성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뿔을 성결케 한다는 것은 희생을 영예롭게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문을 갖습니다. 피를 분향단의 뿔이나 번제단의 뿔에 바르는 것이 그것을 성결하게 한다고? 심지어 희생을 영예롭게 한다고? 우리는 이걸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피가 그 뿔을 더럽혀서 냄새가 나게 하는 거 아닐까… 희생제물의 피가 어떻게 영예스러울 수가 있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피가 더럽고 냄새가 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은 영예는커녕 오히려 오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희생제물의 피는 분향단과 번제단의 뿔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피는 희생제물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참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수준이 다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을 존중하시고 수용하십니다. 이게 감사한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하겠습니다. 속죄일에는 분향단의 뿔에만 피를 바르는 게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그릇에 받아들고는 지성소로 들어가서 법궤에다 그 피를 뿌렸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 뿔에는 피를 바르는 정도였지만,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에는 그 피를 뿌리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일 년 중 속죄일에 한 번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지성소가 어디라고 감히… 하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속죄일에 희생되는 희생제물의 피를 귀하게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비록 짐승의 피였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속죄소에 그 피를 뿌리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번제단의 경우, 그 뿔에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피를 발랐습니다. 희생제물을 바칠 때마다 그 피를 발랐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희생제물의 피를 번제단 주위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법궤와 분향단에는 일 년에 한 번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발랐는데 번제단에는 희생제물이 바쳐질 때마다 그 피를 번제단 주위에 뿌리고 번제단의 뿔에 발랐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번제단의 역할이 법궤와 분향단의 역할을 일부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법궤-분향단-번제단이 어떤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태운다는 점에 있어서도, 분향단과 번제단은 닮았습니다. 분향단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만든 향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바쳐진 희생제물을 태웠습니다. 물론 분향단에서는 향로를 사용하여 향을 태웠고, 번제단에서는 철망 위에서 희생제물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연기가 하나님을 즐겁게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번제단에서 사용하는,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등을 모두 놋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놋 그물을 만들어서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에 두어서 제단 절반에 오르게 했다고 합니다. 복잡하게 설명하여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결국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불이 잘 붙게 하되, 안전을 도모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놋 그물 네 모퉁이에 채를 꿸, 고리 넷을, 놋을 부어 만들었습니다. 이 고리에,  놋으로 싼 조각목 채를 넣어, 사람이 들 수 있게 했지요. 번제단도 역시 포터블이었습니다. 번제단의 놋 그물 윗 부분은 비어있었습니다. 그 빈 공간에는 장작을 넣고 불을 붙였습니다.

이후에 브살렐은 물두멍과 그 받침을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두멍과 그 받침은 브살렐이 여섯 번째로 만든 기구였습니다. 그런데 물두멍과 그 받침을 만들기 위해서, 회막 문에서 수종들던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는 게 특이합니다. 이때의 거울은 유리로 만든 거울이 아니었습니다. 놋으로 만든 거울이었습니다. 놋으로 평판을 만들어서 잘 닦으면 거기에 사람의 얼굴이 비친다고 합니다. 이게 당시의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에다 수은을 바른 지금의 거울처럼 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거울이 그것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여인들은 놋 거울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브살렐은 무슨 이유로 여인들의 거울을 가져다 녹여서 물두멍과 그 받침을 만들었던 것일까요?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을 때 그게 본디 거울이었음을 기억하고 자기를 돌아보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번제단을 만들고 나니 놋이 떨어져서 긴급하게 회막 여인들의 거울을 수거한 건 아닐까요?    

이렇게 해서 브살렐은 성막에서 사용하는 기구를 만드는 일을 거의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뜰이었습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을 둘 뜰… 뜰이란 성막을 둘러 싼 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뜰의 가장자리에는 기둥으로 프레임을 세우고 세마포로 가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만 이 뜰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뜰에서 희생제물을 잡고 그것을 번제단에 태울 준비를 했지요. 하지만 번제단 안쪽으로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였습니다.

이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여러가지 수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수 백 년 동안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파라오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었지요. 파라오가 숨을 쉬라 하면 숨을 쉬고, 숨을 쉬지 말라고 하면 숨을 쉬지 않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고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브살렐이 성막을 지을 때 그들은 자유인이 된 지 6개월이 좀 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이 당대 최고였다고 해도 그것은 이집트 왕족이나 귀족이 향유하는 것이었고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강요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인이 되었단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보게 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것도 보게 하셨고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 직후 오순절에는 모세를 호렙산 꼭대기까지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 속죄일까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수준은 그 정도였습니다. 우리처럼 말씀을 하시면 곧 바로 알아듣는 수준이 아니었단 말이지요. 그리고 초막절부터 브살렐 등을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파라오의 궁전에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가르치셨단 말씀입니다.

성막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라… 이것은 말 자체가 모순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하나님은 임재 하실 수 있습니다. 성막에만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헷갈리지 않도록 성막에 임재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갈 수 있게 하셨던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준에 당신을 맞추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귀한 분은 궁전 깊은 곳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그 수준이었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파라오가 카이로의 궁전 깊은 곳에 있었거든요. 궁전 깊은 곳에 있어야 권위가 있지… 하나님이 어떻게 동네 강아지처럼 아무 데나 계실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이스라엘 백성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인지능력은 여러가지 경험을 하고 시간이 흘러야 개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게 하셨고, 심지어 그 성막 주변에다 담까지 치셨던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함부로 담을 넘어 들여다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성전, 더 나아가서 신전을 짓고 싶어 하지요. 갓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수준 높은 사람들로 만들고 싶으셨단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세마포로 둘러쳐진 성막을 보면서 하나님은 저 안에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예물을 챙겼습니다. 파라오에게 예물을 챙기던 것과 똑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지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이고, 첫 술에 배부를 수가 없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 존재인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육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교육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챙긴 예물은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첫 부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처럼 비싼 예물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나 곡식가루를 예물로 가져 와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파라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파라오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씩 조금씩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예물을 챙겨서 성막 동쪽에 나있는 ‘페타’라는 문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안내하는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페타 문에 서서 정면을 보면, 바로 앞에 번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내하는 제사장을 따라 번제단 인근까지 갔습니다. 물론 예물로 바칠 가축이나 비둘기 또는 곡식가루를 대동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은 번제단 인근에 도착한 후 희생제물을 고통 없이 죽였습니다. 아무리 가축이지만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제사장은 세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습을 통해 희생제물을 제대로 다루도록 훈련이 되는 것이지요. 제사장은 급소를 맞아 고통 없어 죽어 널부러진 희생제물을 그것을 바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고 해체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의 지시에 따라서 번제단에 올릴 것, 번제단 주변에 뿌릴 것, 쓰레기 통에 버릴 것 등을 구분합니다. 이후에 제사장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레위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정도의 인지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희생제물은 페타 문과 번제단 사이에서 잡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잡은 희생제물이 번제단 위에서 불에 타는 것을 봅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요? 희생제물이 모두 타버리면 그는 물러나야 합니다. 거기까지 성막의 뜰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파라오와 비교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좀 더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막의 성소까지 구경하게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노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노예 근성은 이후에도 오랜동안 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안동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안동은 유교적 신분제도가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종이란 사람도 보았습니다. 종은 머슴과도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신분 자체가 아랫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본 그 종은 쉰 살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 집에 감히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문에 서서 하염없이 하명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도 굽신굽신 했습니다. 그 아이는 종을 함부로 대했지만, 종은 그 아이에게 극존칭을 쓰며 극진하게 대우했습니다.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근성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희생제물을 가지고 페타 문까지 오면, 제사장이 그 사람을 맞는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과 함께 페타 문을 통과하여 번제단을 향해 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페타 문과 번제단이 일직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번제단 뒤에 물두멍이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물두멍 뒤로 성막의 입구가 보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페타 문에서 번제단까지의 거리는 번제단부터 성막의 입구 거리와 같았습니다. 번제단과 성막의 입구 중간에 물두멍이 놓여 있었지요. 물두멍에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손과 발을 씻었고 만약 그들이 거기서 손과 발을 씻지 않았다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례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 뜰에서 최대한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번제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수준 높은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을 지나 물두멍을 지나 성막까지 다가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의 출입구 커튼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지성소의 커튼도 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법궤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법궤 뒤로 가서 성막의 입구를 바라 보도록 합시다. 법궤 바로 앞에 지성소 커튼이 열려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커튼과 거의 붙어서 분향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분향단은 법궤 바로 앞에 있는데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우리는 놀라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법궤와 지성소 커튼의 중앙과 분향단과 성소의 커튼 중앙과 물두멍과 번제단과 페타 문의 중앙이 일직선 위에 도열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리고 마땅히 이게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직선을 본 후에, 분향단 오른쪽에 메노라 등대가 있고, 분향단 왼쪽에 슐한 상이 있다는 게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이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그림이었지요. 우리는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합니다. 어릴수록 단순한 그림을 사용합니다. 성막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시는 통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성막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성막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출애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성막으로 옵니다.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뵈러 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페타 문, 번제단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성소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성소가 개방되지 않았아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들 가운데 성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오직 제사장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3장 9-12절의 말씀은 바로 그 놀라운 주장의 일부 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말씀의 앞 뒤로는 사랑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성숙하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방향을 조금 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말합니다. 성막은 온전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어린아이를 교육시키기 위한 단순한 그림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성막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다루듯 신앙인들을 교육시켜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도래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을 ‘어드번트’라고 합니다. 어드번트는 대림절이란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대림절의 시작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오후에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을 하면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림절의 구호는 크리스마스 이전 4주간만 외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곧 신앙인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씀 중에서 오늘 출애굽기 본문과 관련이 있는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바로 이 표현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란 표현입니다. 요즘 우리는 아주 좋은 거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라는 표현이 무슨 뜻이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출애굽 시대에는 놋으로 만든 거울을 썼다고 했지요? 그래서 물두멍을 만들어야 했던 브살렐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자들이 사용하던 놋 거울로 물두멍과 그 받침을 만들었습니다. 바울 시대에 이르러서도 거울의 사정은 그닥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청동을 열심히 닦으면 얼굴이 비춰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희미했다고 하지요. 희미해도 어쩝니까? 거울이 그것 밖에는 없는데… 바울은 바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자들이 사용하던 놋 거울… 그것으로 물두멍과 그 받침을 만들어서 성막의 출입문과 번제단 사이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곳에서 손과 발을 씻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 것이지요. 이런 과정이 없으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도 희미한 것입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이란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것입니다. 누구의 얼굴과 누구의 얼굴을 맞대는 것입니까? 바로 확실하신 분과 얼굴을 맞대는 것이며, 확실하신 분과 얼굴을 맞댄 사람들끼리 또한 얼굴을 맞대는 것입니다. 확실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알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막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학생이 유치원생 교재로 공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작년 초막절부터 금년 유월절까지 우리는 레위기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왜 어린 아이들에게 레위기 부터 읽게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성막을 알아야 레위기를 읽는 게 의미가 있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금년 유월절부터 출애굽기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장면부터 묵상을 해야, 레위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을 묵상하다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어린 아이들들에게 레위기 부터 읽게 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유대인들의 처사가 옳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에게, 레위기 부터 읽게 하는, 거기까지만 옳습니다. 장성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제대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정하고는 도무지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확실하고 분명해 지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게 희미해서 알 수 없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성소의 문은 저절로 열릴 것이며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커튼도 맥없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즐거움… 그러나 우리는 오늘부터 또 페이스북 라이브 기능을 이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입니다. 방역본부에서 10명 이하의 모임 또는 비대면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우리 멤버들 어느 누구도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기도합니다.       

 

1) 물두멍과 번제단과 분향단과 법궤가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는 것을 조사해 봅시다.

2) 일직선 상에 놓여 있는 기구들의 연관성에 대해 말해 봅시다.

3) 성막이 훈련을 위한 도구라는 말에 동의 하십니까?

 

 

 

2020년 11월 22일

"미즈빠야흐 크토렡, 분향단"

 

출애굽기 37장 25-29절: [25] 그가 또 조각목으로 분향할 제단을 만들었으니 길이는 한 규빗이요 너비도 한 규빗이라 네모가 반듯하고 높이는 두 규빗이며 그 뿔들이 제단과 연결되었으며 [26] 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면과 그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둘렀고 [27] 그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었으되 곧 그 양쪽에 만들어 제단을 메는 채를 꿰게 하였으며 [28]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29]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

누가복음 1장 8-13절: [0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0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요한계시록 8장 3-5절: [0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0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0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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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살렐이 네 번째로 만든 것은 분향단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미즈빠야흐 하 크토렡’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he altar of incense라고 하지요. 브살렐이 분향단을 만든 근거는 출애굽기 30장 1-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고, 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두리를 두를지며, 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꼿이며…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 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근거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이 세상 일을 하는 데에 있어 근거는 법률입니다. 국민이 뽑은 대표가 입법부를 구성해서 만든 법률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은 불법이고, 입법부가 만든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것도 불법이지요. 최근 독일 정부는 코로나 방역을 위해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통행을 제한하거나 출입을 제한하는 법률이지요. 이 법률을 만들고 나니 독일 사람들이 협조를 잘 하더랍니다. 그러나 프랑스나 우리나라는 전염병 방역 시행령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민주정부라서 협조를 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독일처럼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방역 당국도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브살렐은 모세의 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분향단의 윗부 분은 가로 세로가 모두 1 규빗인 정사각형이었습니다. 그래서 넓이로 치면 브살렐이 만든 기구들 중에서 가장 작았습니다. 하지만 높이는 2규빗으로, 아론 법궤나 슐한 상보다 키가 반 규빗 컸습니다. 윗면 넓이는 작지만 키는 좀 더 컸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손 쉽게 분향할 수 있도록 높이를 고려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네모 반듯한 분향단 윗면을 보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정돈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반듯한 분향의 자세를 취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으며 디테일한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사각형인 윗면 네 귀퉁이에는 뿔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모두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둘렀습니다. 이것도 역시 사람이 쉽게 나를 수 있도록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다 채를 꿰게 했습니다. 분향단의 본체와 손잡이용 채도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0장 1-10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분향단을 법궤와 연결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 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향단을 사람의 영역인 성소에 두되, 지성소에 있는 법궤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궤와 분향단은 지성소를 가리는 커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법궤 위의 속죄소가 당신이 임재하시는 장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커튼으로 보이지는 않아도 법궤 바로 앞에 분향단을 두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은 법궤와 분향단이, 비록 지성소와 성소에 각각 놓이는 것이기는 해도, 서로 연관이 깊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분향단은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속죄일에는 희생제물의 피로 분향단의 뿔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일에는 희생제물의 피로 분향단의 뿔만 성결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소에 있는 법궤도 희생제물의 피로 성결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실 속죄일에 대제세장이 법궤 앞에 놓은 향로도 사실 분향단에서 불을 붙입니다. 따라서 분향단은 성소에 놓이지만 지성소와 직결이 되는 기구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에 있는 성막의 문을 통해, 뜰로 들어가서, 성소의 커튼을 젖치면, 왼쪽에 메노라 등대가 서있고, 오른쪽에 슐한 상이 놓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분향단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향단 윗면, 네 뿔로 둘러싸인 부분에, 금으로 만든 향로가 놓여져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향로에 불이 있으니 여기다 향을 넣어 분향을 했던 것이지요. 분향은 처음에는 아론이 아침 저녁으로 했더랬습니다. 이때 아론이 사용했던 향은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향 만드는 법은 이집트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체를 처리하는 몰약 왁스, 각종 약품 등…

출애굽기 30장 23-25절, 그리고 34-36절을 보면 거룩한 관유와 향품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상등 향품으로 액체 몰약 500세겔, 향기로운 육계 250세겔,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 여기에 올리브 기름 한 힌을 섞습니다. 이것은 성막과 성막에 관련한 모든 기구들에 왁스처럼 바르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아울러 관유는 사람에게도 바릅니다. 특히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사람에게 바르지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처음으로 관유를 바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지성소에서 분향할 때 사용하는 향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섞습니다. 이후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어서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합니다.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서 아론 법궤 앞에 둡니다. 법궤 앞에 두는 향을 분향단에도 사용했을까요? 저는 지성소에서 사용하는 향을 성소에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향단에서 사용하는 향을 만드는 법도 법궤 앞에 두는 향을 만드는 법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튼 분향단은 커튼 뒤 지성소에 놓인 법궤와 관계가 컸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분향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슐한 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메노라 등대는 우리의 착하고 선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살면서, 우리는 항상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다… 이렇게 지난 주일에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분향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분향단에서 분향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보았습니다. 제사장들의 기도, 성도들의 기도… 이것을 분향단에서 분향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80절에 기록된 제사장 사가랴의 일화와 요한계시록 8장 3-4절의 이야기는 분향이 기도라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 직무는 레위 지파 사람들의 가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수가 아주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레위 지파 사람들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소위 레위인 제사장들이 성전 예배를 맡았습니다. 모든 레위인 제사장들은 스물 네 개의 반열에 속해서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반열은 아마도 조상이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 졌을 겁니다. 아무튼, 스물 네 개의 반열이니까, 일년이면 50주가 되지요. 따라서 한 반열이 일 년에 두 번씩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봄에 한 주간, 가을에 한 주간… 유월절이나 오순절이나 초막절에는 대목이기 때문에 모든 제사장들이 달려들어서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스물 네 반열들 중에 ‘아비야’란 이름의 반열이 있었습니다. 아비야란 사람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반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스물 네 반열들 중에 여덟 번째 반열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들은 유월절 후 여덟 번째 주간과 초막절 후 여덟 번째 주간에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 중  ‘사가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족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고모쯤 되겠지요. 그러고보니 마리아도 엘리사벳처럼 아론의 후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엘리사벳이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가랴도 레위 사람, 엘리사벳도 아론의 자손이니까 레위 사람… 둘 다 레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지 못하고 늙어버렸습니다. 제사장은 세습으로 되는 것인데 사가랴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가랴의 직분은 당대로 끝나 버리게 됩니다. 요즘이야 여자도 랍비가 될 수 있지만 예수님 시절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외로운 말년을 보내고 있었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사가랴는 제사장 직무로 부름을 받고 거의 마지막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다룬 미즈빠야흐 하 크토렡 , 즉 분향단에 제사장으로서 분향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모든 백성은 밖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백성이 기도를 했다고 하니 이때가 바로 일몰 시간이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가 잘 아듯이, 일몰 시간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직무도 이때 시작하고, 아울러 분향도 이때 합니다. 이때를 민하의 시간이라고도 합니다. 저녁기도 시간이란 말이지요. 이 시간을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에서는 소제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여기서 사가랴가 분향을 할 때 백성이 기도를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가랴가 분향을 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오른쪽에 섰습니다. 그러고 보니 슐한 상이 있는 쪽이군요. 슐한 상은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사가랴에게 좋은 일이 생기겠군요.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를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외에도 천사는 사가랴에게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이후 사가랴는 집으로 돌아갔고 곧 엘리사벳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기도해서 나은 아들이지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때가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6개월 이후에 태어나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생일을 초막절로 보는 것입니다. 천사가 분향하는 사가랴에게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사가랴의 간구가 누구에게 들렸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들렸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분향을 기도로 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8장도 향로에서 나오는 향연, 즉 연기를 성도의 기도라고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도의 내용에 따라 천사를 통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는 사가랴의 이야기보다 더 길어서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힘을 내서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슐한 상과 메노라 등대만 아는 것입니다. 부족하단 말이지요. 우리는 성소 중앙에 있는 미즈빠야흐 하 크토렡, 즉 분향단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사는 것이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충분하게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분향단에서 사용하는 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법대로 만든 향이어여 합니다. 아무 향이나 다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법대로 만든 향이란 어떤 향을 말입니까? 지성소에서 분향할 때 사용하는 향은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섞는다고 했지요. 꼭 파운드 케잌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엄청난 양의 비싼 재료가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참으로 비싼 재료들을 구해서 정성을 들여서 향을 만들고 그것을 고체로 만들어 비축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 분향단에서 분향하여 연기로 사라지게 했을 겁니다. 분향단에서 나온 연기를 향연이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그 향연을 받으신다고 하시니 그게 값어치가 있어 보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연기만 낸다면 그것은 엄청난 재물의 낭비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기도가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지 않으신다면, 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기도라면, 그것은 오로지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그 기도를 어디다 써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까운 시간과 정열과 자기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법대로 만들지 않은 향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법대로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같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기도하는 방법은 물론이고 기도의 내용까지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고 매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게 뭐 어때서 예수님은 못마땅해 하셨을까…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언부언했습니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길거리에서 하는 기도는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내용만으로 기도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항상 다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도를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뭘 자꾸 달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니엘이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니엘의 적들은 다니엘을 없애기 위해 다니엘의 기도를 이용했습니다. 참 악랄한 사람들이지요. 금후 30일 동안 다리오 황제가 아닌 존재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에 처넣는다… 다리오 황제도 이에 동의하고 법령 문서에 어인을 찍었습니다. 다리오 황제의 최고 참모였던 다니엘이 이걸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기도생활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다니엘은 여전히 다락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으로 난 창문을 열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이런 처사가 무모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30일만 기도를 멈추면 될 거 아닌가… 30일 후에는 하나님이 어디로 가버리시나? 참 고지식한 다니엘 같으니라구… 그러나 그건 우리 생각이고 다니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루 세 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니엘의 존재 양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참 어렵지만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결국 다니엘은 다리오 황제의 군사들에게 끌려가서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안간적이고 현실적인 교훈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고 다니엘을 구해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기도를 했을까요? 글쎄,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매일 세 번씩 기도하던 다니엘을 기억하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대로 기도했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묵상하면서 가장 많이 만난 구절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대로 잡아서 번제단 위에 올려 태웠지요. 생고기가 타고 있으니 아무리 화력이 센 제단불이라 해도 연기가 몹시 올라왔겠지요. 그 주변이 참 매캐했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것이 우리에게는 향기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 자신에게는 향기롭지 않아도 하나님께 향기롭다면 그것을 향기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점에 있어 다니엘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아합 왕 치세 3년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한 댓가였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테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시기 전에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없앨 생각을 하셨습니다. 비와 함께 그들을 심판하리라… 사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인데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변절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은 그 숫자로 엘리야 선지자 하나를 눌러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850이란 인원 수로 시위를 하면서 엘리야에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게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결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기도를 들어주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면은 송아지 한 마리를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비를 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아우성이 어느 정도였느냐…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알은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정오가 지나고 저녁 소제 드릴 무렵까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은 그런 소동을 피웠다고 합니다. 소제 드릴 무렵… 아까 말씀드린 민하의 시간입니다. 분향단에서 분향할 시간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소동을 피우며 하는 기도가 이방인적인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를 과시하며 자기 뜻대로 해달라고 신에게 떼를 쓰는 것… 그것은 창조주가 되시고 또한 구원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찬찬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가 될 뿐입니다.

엘리야가 850인의 우상숭배자들과 대결한다는 소문을 듣고 숨어 있던 참된 신앙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850명이 하루종일 일으킨 소동을 다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지요. 바알과 아세라는 사실 귀신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능력을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아무 짓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엘라야는 자기 주변으로 몰려든 신앙인들에게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라고 했습니다. 소제의 시간과 함께 새 날이 시작되었고, 엘리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이지요.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어지럽힌 제단과 그 주변을 말끔히 청소했습니다. 이후 엘리야는 그 제단 밑에다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제단에다 네 통의 물을 부을 텐데 이 물이 빠져나갈 배수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인들은 엘리야가 하라고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뭔가 하실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제단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뜬 다음 제단의 장작더미 위에 벌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제단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왜 그랬을까요? 후에 보니 하나님의 불이 물을 말리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능력 있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엘리야는 신앙인들에게 통 넷에 물을 채워다 제단에 붓는 일을 세 번이나 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단 위에 는 열 두 통의 물이 부어진 것이었습니다. 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때문에 제단에 물이 차고 넘쳐서 미리 파둔 도랑으로 흘렀습니다.

이후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다음과 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바알과 아세라 선자자 850명이 저들의 신들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던 내용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비가 필요하니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당신의 백성에게 확인시켜 주시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경건하고 간절한 기도였으며 또한 권위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야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물에 젖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웠다고 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차고 넘치던 도랑의 물이 모두 말라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라하크 동사를 써서 표현합니다. 라하크 동사는 핥았다는 뜻입니다. 핥는 것은 가장 깨끗하게 청소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셔서 이 모든 일을 하시자, 모든 백성이 엎드려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후 엘리야는 신앙인들을 동원해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포획했습니다. 산돼지보다 더 포악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다 잡아죽였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그 백성의 우상숭배로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가뭄을 끝내셨습니다. 따라서 초막절에 맞추어 비가 올 것입니다. 3년 동안 이상했던 기후가 이제 제대로 우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존재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존재양식이란 말이 좀 어렵긴 한데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스스로 표현해야 하는 우리 삶의 모습이란 뜻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슐한 상의 모습은 우리의 존재 양식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는 메노라 등대처럼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 다음이 바로 미즈빠야흐 하 크토렡, 즉 분향단 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는 것이지요. 이것도 우리의 존재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아무렇게나 하면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떠들면서 하면 안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분향하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눈을 뜨고 하느냐 눈을 감고 하느냐… 이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길을 가면서, 운전을 하면서 기도할 수는 없지요. 우리는 무시로 기도해야 하므로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상관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원에 가서 나무 뿌리가 뽑히도록 애쓰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소제 시간에 맞추어 아침 저녁으로 하든가, 엘리야처럼 하루 세 번을 하든가, 기도는 일상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꿇어 엎드려 기도할 수도 있고 책상에 앉아 기도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비밀을 알려주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비밀을 알려주실 겁니다. 그러면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지요.

코로나가 내일부터 2단계로 상향 조정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지겹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의 기도 생활은 더욱 더 성숙될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우리의 존재양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 봅시다. 하나님의 능력은 엘리야만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1) 미즈빠야흐 크토렡, 즉 분향단을 기도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아론 즉 법궤와 분향단의 관계를 설명해 보십시오.

3) 향 만드는 법과 기도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2020년 11월 15일

"메노라, 등대"

 

출애굽기 37장 17-24절: [17] 그가 또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 [18] 가지 여섯이 그 곁에서 나왔으니 곧 등잔대의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왔고 등잔대의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왔으며 [19]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저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어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이 그러하며 [20]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21]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는 꽃받침이 있게 하였으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였고 또 다시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되게 하였으니 [22] 이 꽃받침과 가지들을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서 만들었으며 [23] 등잔 일곱과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을 순금으로 만들었으니 [24]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는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었더라.

마태복음 5장 14-16절: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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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들 속에 임재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말이야 그렇지만 그들은 6개 월 전만 해도 파라오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셨습니다. 거룩하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 높이에 당신을 맞추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축소지향성이라고 하는데, 이 자체가 우리를 위한 거룩하고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영역인 지성소와 사람의 영역인 성소로 구분되었습니다. 브살렐은 지성소에 놓일 법궤를 가장 먼저 만들었고, 이후에 성소에 놓일 슐한 상과 메노라 등대와 미쯔바야흐 하크토렡, 즉 분향단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메노라 등대입니다.

메노라 등대는 1 달란트의 금덩어리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법궤나 슐한 상과 달리 조각목 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 달란트는 지름이 1.6m쯤 되는 키카르라는 원반을 만들 때 사용한 금의 무게로 43kg쯤 된다는 설이 있습니다. 메노라 등대는 슈카딤 나무를 본뜬 것인데 중앙의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가지 셋씩 나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윗 부분에 나란히 붙이는 잔(까니아)이 일곱 개가 됩니다. 까니아는 불을 붙이는 부분인 등잔(니르)을 안고 있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중앙의 줄기를 보면 가장 위에 까니아 잔이 하나 붙어있고 그 아래 세 군데는 좌우로 뻗은 여섯 가지들을 중앙에서 붙잡아 주는 세 개의 까니아들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개의 까나아 잔들은 가지를 연결해 주는 소케트 역할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의 일곱 개 까니아 잔들처럼 줄기 아래 부분의 세 까니아들에도 꽃받침(카프토르)과 꽃(페라아흐)을 만들어 붙여주어야 합니다. 이 밖에도 당연히 맨 위 일곱 개의 까니아에 올리는 니르 등잔을 일곱 개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불똥그릇(멜르카아흐)와 마아흐타(불집게)도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니르와 멜르카야흐와 마아흐타는 불과 직접 닿는 것이었지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메노라 등대는 가지가 여덟 개 또는 여섯 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곱 개 가지가 있는 메노라 등대는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놓여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신념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벨론 시대 이후의 전통이지요. 가지가 아홉 개인 메노라 등대도 있는데 이것은 하누카에 때 사용하는 ‘하누키야’란 메노라 등대입니다. 메노라 등대는 당연히 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시면서 그 빛을 착하고 선한 행실이라고 설명하셨지요. 그러므로 착하고 선한 행실을 구원론에서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론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착하고 선한 행실에 대하여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은 다른 사람들이 능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감추어 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등불을 켜서 그릇 속에 넣어 두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행실이 우리의 빛이라고 지적하셨네요.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라고 하면서 행위를 무시하거나 더 나아가서 경멸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소에 메노라를 만들어 놓고 항상 불을 켜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말한 바울 자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라(고전 15.34)”고 했고, 선한 행실을 설명하여 이르기를 1) 자녀를 양육하는 것, 2)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3) 성도의 발을 씻기는 것, 4)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5.10.

뿐만 아니라 그는 세대 별로 맞춤형 선한 행실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1) 늙은 남자에게는 절제하고 경건하고 신중하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 온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2) 늙은 여자에게는 행실이 거룩하고 모함하지 말고 술의 종이 되지 말고 선한 것을 가르치고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며 순전하고 집안 일을 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3) 젊은 남자들을 위해서 디도 자신이 신중하고 범사에 선한 일의 본을 보이고 교훈에 부패하지 말고 단정하고 책망할 것이 없고 바른 말을 하라고 궈면했습니다. 또 4) 종들은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오히려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딛 2.2-10. 베드로도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하여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2.12.  

이 밖에도 우리는 성경에서 착하고 선한 행실에 대해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문제를 순종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구원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행위의 본질을 흐리는 것입니다. 물론 면죄부 따위와 같이 행위를 구원과 연결시켜 교권자들이 이익을 얻었던 사악한 예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행위의 문제 때문에 구원이 위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원의 결과로 행위를 강조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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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 기록자가 출애굽기 24장 10절에다 기록하기를,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 70인과 함께 호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 하나님이 계신 곳의 아래가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문이 아니고 번역문을 대하면 항상 갈급하지요. 성경은 더 그렇습니다. 이 대목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발 아래는 사파이어 타일을 깐 듯하고, 그게 하늘 그 자체였는데 그렇게 깨끗했다… 하나님의 발 아래는 깨끗한 하늘이었고 사파이어처럼 파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보는 자, 하나님의 발을 볼 수 있는 자 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오로지 하나님의 발을 볼 수 있을 따름이지요. 하나님을 대면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뜻입니다.

저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호수공원 가운데 있는 월파정에 올라가서 호수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사파이어 타일을 깐 듯하다… 하늘처럼 깨끗하다…하는 출애굽기의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참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파정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물의 색깔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은 것 같지만 또 각기 다릅니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하늘은 부드럽고 따뜻한 하늘색 입니다. 그리고 물은 부드럽고 시원한 물색 입니다. 하지만 따뜻한 것과 시원한 것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따뜻한 물을 마시고도 참 시원하다…하잖아요?

월파정에서 보는 하늘과 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무진 애를 써봤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눈과 같은 센서를 가진 영사기를 구해다 찍으면 될까요? 제 생각에는 그래도 안될 것 같습니다. 하늘과 물의 색깔은 3차원의 공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난반사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시간까지 들어가니 3차원이 아니라 4차원이라 해야 되겠군요. 이것을 몇 백 분의 일 초, 심지어 몇 천 분의 일 초로 잘라서 2차원의 평면인 사진에 나타내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습니다. 제아무리 동영상이라고 해도 그 역시 본질이 사진이라 마찬가지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토라 기록자도 사파이어로 타일을 깔고 하늘 그 자체로 깨끗했다는 표현 밖에 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들을 누가 다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단연코 불가능할 것입니다. 제 아무리 솜씨가 좋은 브살렐이라고 해도 또는 오홀리압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구상하고 창작하고 가공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브살렐와 오홀리압을 통해서 당신이 임재하실 장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거처를 만들게 하셨다는 말이지요. 피조물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거처를 만들라고 하신 것… 이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거처를 만들게 하셨고 이것으로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처를 우리는 성막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막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에 맞추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축소지향적인 하나님의 모습이지요.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봤듯이, 브살렐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은 법궤였습니다. 법궤를 히브리어로 아론이라고 하지요. 재미있게도 이 아론은 대제사장 아론의 이름과 그 스펠링이 똑 같습니다. 영어로는 ark라고 하지요. 앞으로 법궤를 말할 때는 아론 법궤라고 하겠습니다. 브살렐이 만든 아론 법궤는 지성소 안에 안치되었습니다. 이후 지성소의 커튼이 닫혔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조차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욤키푸르 속죄일에 말입니다. 아론 법궤는 그런 곳에 놓여졌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아론 법궤를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까지 말입니다.

 

브살렐이 두 번째로 만든 것은 슐한 상이었습니다. 이 슐한 상은 성소에 안치되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의 공간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특별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성소는 사람들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슐한 상을 사람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 주시는 양식에 대한 감사라고 해석했습니다.

브살렐이 세 번째로 만든 것은 메노라 등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메노라 등대를 다룰 것입니다. 메노라 등대도 슐한 상처럼 성소에 놓였습니다. 사람들의 공간에 놓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노라 등대도 사람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노라 등대는 슐한 상을 마주 보게 놓여졌습니다. 이것은 슐한 상과 메노라 등대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메노라 등대를 유대인들은 빛으로 해석합니다. 이 전통에 따라 예수님이 빛에 대해 한 말씀을 하셨지요. 마태복음 5장 16절 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은 장작 빛도 아니고 석유 빛도 아닙니다. 이 빛은 우리 마음의 빛이고 믿음의 빛입니다. 즉, 메노라 등대에 기름을 넣고 불을 붙였을 때 나오는 빛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밝히는 빛이라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슐한 상 앞에서 밝히는 빛이라서 의마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을 우리의 착한 행실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착한 행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처럼 메노라 등대는 우리의 착한 행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영원한 선교의 동력이 되겠습니다.  

아론 법궤나 슐한 상은 둘 다 조각목으로 상자를 만들고 거기다 금박을 입히고 또한 금테를 둘러서 완성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메노라 등대는 슈카딤 나무를 본으로 삼아 금덩어리를 치고 또한 쪼아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말 성경은 한 달란트의 금덩어리로 메노라 등대를 만들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달란트란 단위가 나오지 않습니다. 달란트란 단위 대신 키카르란 게 나오는데, 그 키카르는 원판이란 뜻을 갖습니다. 이 키카르 원판은 무게가 43킬로그램, 지름이 1.6미터였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메노라 등대는 지름 1.6미터인 원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 졌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그 만한 무게라면 반드시 받침대가 있어야 하므로, 받침대를 합한 실제 높이는 2미터쯤 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이 메노라 등대는 슈카딤 나무를 본 뜬 것이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살구나무로 번역되어 있는데 슈카딤 나무의 모습이 살구나무와 비슷하긴 하지만 살구나무는 아닙니다. 아무튼 메노라 등대 가운데는 전체의 무게를 감당하는 기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둥에서 왼쪽으로 세 가지가 뻗었고 또한 오른쪽으로 세 가지가 뻗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둥과 여섯 가지에 모두 일곱 개의 니르, 즉 등잔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니르 등잔 밑에는 까니아라고 하는 빋침을 깔았습니다. 이 까니아 받침을 우리 말 성경에는 그저 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까니아 받침은 기둥에 세 개를 더 붙였습니다. 모두 기둥과 가지가 교차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메노라 등대에는 니르 등잔이 모두 일곱 개, 까니아 받침은 모두 열 개가 사용되었습니다. 열 개의 까니아 받침에는 카프토르라 하는 꽃받침과 페라아흐라 하는 꽃을 붙였습니다. 좀 복잡하지요. 주보의 그림과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메노라 등대는 참으로 멋지고 호화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일단 하나의 금덩어리를 쳐서 만든 것이라 휘황찬란 했습니다. 제사장이 발판에 올라서서 손을 뻗어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니르, 즉 등잔은 모두 일곱 개 입니다. 이게 모두 까니아 받침과 카프토르 꽃받침과 페라아흐 꽃으로 장식이 되었습니다. 모두 금이었습니다. 그리고 니르 등잔은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큰 사발만 했지요. 여기다 처음 수확한 올리브의 기름을 넣고 심지를 넣고 불을 당겼던 것입니다. 니르 등잔은 금이었고, 올리브 기름도 금 색깔이었고, 불의 색깔도 그렇고… 그 모습이 따뜻하고 일정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메노라 등대는 모든 것이 슈카딤 나무를 본 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슈카딤을 영어로는 아몬드라고 하는데, 아몬드 중에서도 사막에 특화된 아몬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슈카딤의 의미였습니다. 슈카딤은 한 겨울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슈카딤이 꽃을 피우면 사람들은 봄이 멀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견디면 따뜻한 봄이 온다는 생각으로 겨울의 추위와 습기를 이겨냈습니다. 그러므로 슈카딤의 의미는 우리의 동백나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겨울에 동백꽃이 피면 우리는 이제 봄이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슈카딤은 그런 나무였습니다. 희망을 주는 나무였단 말이지요. 혹독한 겨울에 아름다움을 주는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쉬카딤을 메노라 등대의 본으로 삼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슈카딤 나무를 본 떠 메노라 등대를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엇보다 먼저 빛으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노라 등대의 그 자체만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카비의 하누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빛을 산상수훈을 통해 착한 행실이라고 딱 부러지게 규정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의 바로 그 말입니다. 열 되가 한 말이 되지요. 되는 됫박이라 하고 말은 말통이라 하나요? 아무튼 등불을 켜서 그 말통 속에 넣어 둘 수는 없지요. 말통 속에 등불을 넣으면 꺼져 버리겠지요. 등불은 켜서 당연히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춰서 유익을 줍니다. 앞을 보게 하고 모든 것을 분간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모름지기 빛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에 있어 첫 번째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선교지 뭐가 선교이겠습니까?

 

최근 문재인 정부의 탈 원전 정책에 반대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원장 직에 앉아 있는 최재형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은 41%의 표를 얻어 당선된 사람이기 때문에 탈 원전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사석에서 원전 조기 폐쇄가 문제가 있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가 동의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를 하다니… 하나님이 다음 대선에 후보로 출마하시나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 한국인의 7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보고 탈 원전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탈 원전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소수의견으로 존중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데 최재형 감사원장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문재인 정부의 고관으로서 대통령의 기본 정책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럴 의사가 없다면 사표를 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원장으로서 감사원의 탈 원전화 감사를 방해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감사원의 중요 인사 조치까지 했다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반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도 과반수가 지지하는 대통령인데 말입니다. 박정희는 힘으로 강요해도 과반수 지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사원장 최재형 씨는 우리 교단 소속인 신촌교회의 장로라고 합니다. 감사원장이 되면서 휴무 신청을 하여 지금은 휴무 장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젊은 부목사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사람은 교회서 작은 예수라고 불리워 진다고 합니다. 필리핀에 갔을 때 아이들이 몰려왔는데 선물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최재형 장로는 이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바람개비를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고장난 것까지 일일이 자기 손으로 수선을 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강 아무개 학생을 업어서 등교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대학에도 함께 갔고 사법연수원에도 함께 갔다고 합니다. 상당한 미담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밖에 다른 이야기도 있겠고 그 중에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작은 예수가 감사원장으로서 대통령에 대해 반역을 시도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출세한 사람들 가운데 다니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간증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다니엘 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황제 다리오는 고관 120명을 세워서 전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관들 위에 세 명의 총리들을 세워서 120명의 고관들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 세 명의 총리들 중 하나가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해서 모든 사람들 보다 뛰어났으므로 황제 다리오는 그를 사랑하여 최고의 총리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유대인 주제에 우리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총리가 되는 게 말이나 되나… 그래서 이들은 다니엘을 단칼에 처치할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다니엘은 매일 세 번씩 그의 집 다락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연 다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감사를 드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적들은 이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사악한 법령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금후 30일 동안, 다리오 황제 이외 다른 대상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굴에 처넣는다는 얼토당토 않은 법령이었습니다. 어리석고 미욱하기 그지없는 다리오 황제는 이 법령이  왜 나왔는지도 검토도 하지 않고 문서에 황제의 도장을 쾅 찍었습니다. 어인을 찍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 법령은 즉시 발효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당연히 이 모든 음모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황제가 법령에 어인을 찍었고 그래서 법령이 효력을 발생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다락방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으로 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며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의 적들은 이것을 적시하여 다리오 황제에게 직보했습니다. 어리석고 미욱하기 그지 없는 황제 다리오는 자기가 찍은 어인의 권위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리오는 다니엘을 법령에 따라 사자굴에 처넣으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리오와 그의 신하들은 굶주린 사자들이 다니엘을 즉각 처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다니엘을 보호해 주셨고,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살아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다리오 황제는 그제서야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다니엘에 대한 음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리오는 다니엘의 적들을 사자굴에 처넣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굴의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을 움켜쥐고 그 뼈까지 부숴뜨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속의 권력자가 되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다니엘의 적들은 어리석고 미욱한 다리오 황제를 이용해서 다니엘을 죽여 없애려 했습니다. 본래 세상 사람들은 사악하게 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그들은 교활하게도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죄명으로 다리오 황제의 손을 빌어 다니엘을 사자굴에 처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은총을 받으며 사는지 사악하고 교활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나오자 다리오 황제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리오 황제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곧 이어 고레스 황제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리오의 시대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다리오 황제에게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레스가 황제가 되어 다니엘을 중용하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고레스 황제에게도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께서 다니엘로 하여금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황제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황제를 사랑하시는 것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나 그 정도에 있어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황제에게 충성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황제를 직접  다스리시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으로 시대와 역사가 황제의 손 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 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디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요즘 시대에 종이니 상전이니 하는 말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의 뜻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기독교인인 네가 감사원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려서 그의 정책에 순응하고 거부하지 말아라. 너는 서울법대를 나왔고 대통령은 경희법대를 나왔다고 해서 대통령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여러분, 사도 바울에 따르면 자기 임명권자를 우습게 보지 말고 그의 정책에 순응하고 돕는 게 바로 착한 행실이고 선한 행실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현재를 불평하지 않고 기쁜 마음을 만들어 가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과 이 시간은 너무나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을 함부로 낭비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질서에 순종하라고 하셨고 이것을 착한 행실이라 하셨으며 이것으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며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뭔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가서 연설하는 것,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 북한과 제대로 협상을 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북한 선교 운운 하는 것…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재선을 위해 노력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요. 도널드 트럼프는 자기가 미국 대통령이라 하나님인 줄 압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두고 보시지 않지요. 그래서 트럼프는 약체 중 약체라는 조 바이든에게 졌습니다. 조 바이든이 얼마나 약체냐… 별명이 슬리피 입니다. 졸고있다는 뜻이지요.

바울은 디도서 2장에서 선한 행실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 줍니다. 2절에서, 늙은 남자는 절제하고 경건하고 신중하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있어 온전하라고 권면합니다. 3절에서, 늙은 여자는 행실이 거룩하고 모함하지 말고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고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4절에서 젊은 여자에게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고 순전하고 집안 일을 하고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7절에서는 젊은 남자들에게 신중하게 권면하고 범사에 디도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여서, 교훈에 부패하지 않고,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서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

교회 장로란 교회에서 늙은 남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대한민국 국민의 과반수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에 대해서 과연 절제된 행동을 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기독교인으로서 경건하고 신중한 것이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까? 또한 그것이 믿음과 사랑과 인내로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었는지 묻고 싶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란을 피워 민주적 헌정질서를 어지럽혔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런 어지러운 현장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거짓말을 끌어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어떻게 북한의 침략에 대비해 원전을 폐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손가락 하나로 황제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나라를 없애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며, 역사를 바꾸시기도 하시는데 말이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메노라 등대는 사람의 영역인 성소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착하고 선한 행실을 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메노라 등대는 함께 성소에 있는 슐한 상과 마주 보는 위치에 놓이는 것이 메노라 등대 입니다. 슐한 상과 마주 보는 위치에 놓이는 메노라 등대…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밥을 먹고 살면서, 착하고 선한 행실을 보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깨어 의를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를 양육하라, 나그네를 대접하라, 성도의 발을 씻기라,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의 발을 씻기고, 환난 당한 자를 구제하는 것… 참 번잡스럽고 귀찮은 일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게 착하고 선한 행실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야지요.

그런데 베드로전서 2장 12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하여 너희로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참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심지어 우리에게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것이지요. 아니, 제 정신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가 필요하지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만드신 성막은 결국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있는 법궤는 우리가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에 하나를 추가하거나 하나를 빼거나 할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러므로 십계명 전체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소에 들어있는 슐한 상이나 메노라 등대나, 다음 주일에 다룰 향단 등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귀로 직접 들을 수도 없지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물의 색깔조차 구현해 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맞추어 성막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막이 귀중한 것이며, 그 성막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통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 성막의 성소에 놓이는 메노라 등대가 무엇인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와 상관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메노라 등대를 착한 행실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여기서 지금 내가 실천해야 할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3) 공직 생활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지도자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2020년 11월 8일

"슐한, 상"

 

출애굽기 37장 10-16절: [10] 그가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너비가 한 규빗,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11] 순금으로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둘렀으며 [12]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었고 [13] 상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았으니 [14] 그 고리가 턱 곁에 있어서 상을 메는 채를 꿰게 하였으며 [15] 또 조각목으로 상 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16] 상 위의 기구 곧 대접과 숟가락과 잔과 따르는 병을 순금으로 만들었더라.

누가복음 9장 12-17절: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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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성막의 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은 '브살렐'이었습니다. 브살렐은, 유다 지파 사람 훌과, 모세의 누나 미리암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란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브살렐의 부계는 유다 지파였고 모계는 레위 지파였단 말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굉장한 영광이었습니다. 물론 브살렐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어느 지파 사람인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어서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레위 지파 사람이면 어머니도 레위 지파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레위 지파 여자는 며느리로 레위 지파 여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 남자들은 특히 레위 지파 여자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 남자의 아내는 대개 레위 지파의 여자였습니다. 브살렐이 유다 지파 사람인데 그 할머니가 레위 지파 사람인 것을 성경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점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인데, 그는 유다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유다 지파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낳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인이란 말이지요. 마리아란 이름이 그녀가 레위인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마리아는 로마식 발음에 지니지 않습니다. 히브리식으로는 미리암이라고 발음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미리암이란 이름은 당연히 모세의 누나 미리암에게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 여자들 가운데는 미리암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미리암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미리암이란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나는 레위 지파 여자다…” 하는 자긍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계인 유다 지파는 인구가 가장 많고 힘이 셌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유다 지파는 명실상부한 일등 지파였고 그래서 지도자 지파였지요. 그리고 브살렐의 모계가 되는 레위 지파는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직을 독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인이란 이름 하나로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앞에서 공손해 져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게 모세 덕분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브살렐의 모계였단 말이지요. 그런데 브살렐은 우리가 편한대로 발음을 하는 것이고 실제는 ‘베짤르엘’로 발음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베짤르엘에서 베는 영어로 in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베짤르엘에서 마지막에 있는 엘은 하나님이란 뜻이지요. 문제는 가운데 들어있는 짤르인데요, 짤르는 쩰에서 왔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읽어보면, “와요메르 엘로힘 나아쎄 아담 베짤르메누 키드무테누…”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양대로…”의 원어인 ‘베짤르메누’를 주목해 보시면, 마지막에 붙어있는 우리의…란 의미의 ‘메누’를 빼고, 그 대신 하나님이란 의미의 엘을 붙이면 베짤르엘이 되지요. 부살렐의 히브리 이름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베짤르엘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또는 하나님의 이미지대로…란 의미가 됩니다. 베짤르엘, 즉 브살렐은 하나님의 모양대로…란 뜻이 됩니다. 그래서 브살렐은 그 이름에 걸맞게 평생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의 이름을 하나 지을 때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그 이름이 그 아이로 하여금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성막에 놓였던 많은 기구들은 브살렐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브살렐이 만든 성막의 기구들 가운데서 첫 번째는 법궤였습니다. 법궤에 대해서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든 것이 ‘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상을 흔히 떡상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위에 떡을 진설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떡이 무엇입니까? 곡식가루를 뭉쳐서 수증기로 쪄낸 것이지요. 하지만 찌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리법이 아니었습니다. 물이 부족한 광야에서 뭘 어떻게 찌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곡식가루를 반죽해서 모양을 잡은 후에 화덕에서 구웠습니다. 말이 화덕이지 그것은 번철이나 숯불을 직접 쓰는 것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구운 것을 '레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레헴은 빵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떡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므로 브살렐이 두 번째로 만든 상은 떡상이 아니고 빵상입니다. 그리고 이 빵상을 히브리어로는 ‘슐한’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테이블이라고 하지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는 슐한은 상이란 의미에서 슐한 상…이라고 외웠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도 슐한 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슐한 상은 길이가 2규빗이고, 넓이가 1규빗이었으며 높이는 1.5규빗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이 처음 만들었던 법궤보다 길이가 0.5규빗 짧았고, 넓이도 0.5규빗 짧았습니다. 하지만 높이는 1.5규빗으로 같았습니다. 법궤가 사과궤짝처럼 작았다고 했는데 슐한 상은 그보다 더 작았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소지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담을 줄여 주시려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축소지향성이지요. 이것도 역시 우리 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섬세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슐한 상도 역시 사막의 아카시아 나무, 즉 쉳딤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위쪽 가장자리에 금 테를 둘렀고, 그 주위에는 손바닥 넓이 만한 턱을 만들어 붙였으며, 그 턱 주위에도 금 테를 둘렀습니다. 슐한 상 위에 높여있는 조그만 물건들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장치였습니다. 슐한 상에도 법궤처럼 금고리 넷을 만들어서 네 발 위 모퉁이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쉳딤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싼 두 개의 채를 그 금고리에 꿰어 넣었습니다. 슐한 상을 옮기기 위해 손잡이 겸 멜빵을 설치한 것이었지요. 슐한 상 위에는 대접과 숟가락과 잔과 병을 순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6장 23-30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브살렐, 즉 브짤르엘, 즉 하나님의 모습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법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지성소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자장 조차 1년에 한 번, 오직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슐한 상은 성소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지성소가 아니고 성소에 놓인다는 것은 지성소에 놓이는 법궤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의 영역이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들을 수행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바로 이 공간에 슐한 상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출 25.30에서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설병은 히브리어로 ‘레헴 파님’이라고 하는데 ‘앞에 두는 빵’이란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라 빵이라고 하는 것의 원형이 바로 이 레헴 파님 입니다. 할라 빵은 바벨론 시대 이후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만든 빵이라고 생각합니다. 레헴 파님, 즉 진설병은 순수한 곡물로 만들지만, 할라빵은 우유와 계란과 견과류 등을 넣어서 맛있게 만든 것입니다.  

레헴, 즉 빵은 이스라엘 백성의 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브살렐이 슐한 상을 만들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땅에 내리는 서리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액체가 아니고 고운 가루였다고 합니다. 고체였단 말이지요. 그래서 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마다 이 만나를 거두어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 빵이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주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사막에서 나는 탄수화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쉐바에 심었던 에셀 나무도 사막에서 탄수화물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사막의 생물들이 에셀나무가 내는 탄수화물을 먹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탄수화물이라고 하면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른바 탄수화물 증후군 때문입니다.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섭취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탄수화물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왜냐하면 탄수화물은 우리 몸에 에너지 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탄수화물이 만들어 내는 당분은 우리를 기분 좋게도 합니다. 그래서 유목민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곡류를 구해다 먹습니다. 고기나 유제품만으로는 사람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주식이 되고 에너지 원이 되는 곡물가루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보잘 것 없는 곡물가루가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히 소제의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곡물가루로 만든 탄수화물 덩어리인 빵을 성소 안에 있는 슐한 상 위에 두되 항상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빵이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란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안식일 직전에 빵을 구워서 그 중 잘 구워진 것 열 두 개를 골라서 슐한 상 위에 올렸다고 합니다. 여섯 개를 한 줄로 해서 두 줄을 세웠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 열 두 개의 빵을, 다음 안식일 직전에 새 빵을 올릴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일주일 후에 새 빵을 올릴 때, 일주일 된 빵을 거두어 들였다고 합니다. 새 빵을 올린 다음, 일주일이 된 빵은 제사장들이 거두어 들여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고 합니다. 비록 일주일이나 된 빵이지만, 하나님께 바쳤던 빵이므로 내다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성막 안은 건조한 데다가 항상 메노라와 분향단을 켜두기 때문에 빵은 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슐한 상에 올리는 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탄수화물, 즉 주식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침에 만나를 주셨지만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단백질을 섭취하게 하셨습니다. 메추라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축을 잡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메추라기 고기를 진설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메추라기 고기 뿐만 아니라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의 고기도 진설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고기는 제물로 바치라 하셨지만 빵처럼 진설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섬세한 뜻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고기가 매달려 있거나 진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서 육식을 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기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 고기는 사람의 먹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슐한 상에는 열 두 개의 빵과 함께 순금으로 만든 대접과 숟가락과 잔과 병을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이 빵 열 두 개를 다 먹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슐한 상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음식에 대한 감사로 봅니다. 저는 순금으로 만든 병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에레브 샤밭 때 포도주를 사용하니까 그 병 속에는 포도주가 들어있었을까요? 탄수화물을 섭취할 때는 그와 맞는 음료를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탄수화물과 함께 좋은 음료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서 열 두 척의 배를 이끌고 수 백 척의 왜적선과 싸워서 끝내 이겼지요. 이것을 명량대첩이라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인가… 이순신 장군이 기진맥진 하여 앉아 있는데, 수봉이란 소년이 다가와 이순신에게 토란을 건네 줍니다. 이때 이순신은 최민식이었고 수봉은 박보검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봉은 이순신의 친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왜군과 싸우다가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이순신은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수봉을 지근거리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었지요. 이순신은 수봉이 건네준 토란을 받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토란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서 먹을 수 있으니 좋구나…” 그리고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면서 수봉에게 와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픽션이란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음직한 이야기라 감동이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환경 속에서도 살아있기 때문에 토란을 받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시장기를 느낍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어도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시장기가 찾아옵니다. 뭘 좀 먹어야 네가 살지 않겠어? 살기 위한 신호지요. 그러므로 시장끼는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장기는 쑥스러운 것이 아니고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것입니다. 사람으로 살면서 시장기를 느끼고 먹을 것을 찾는 것…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고 사는 사람들, 즉 경건한 사람들은, 먹을 것을 항상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지나가면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벳새다 지역에 나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동북쪽에 있는 광야지대입니다. 돌 밖에 볼 수가 없는 곳이지요.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으므로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그 곳이 황무지고 광야라 해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누가복음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은 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절을 보면, 제자들보다 예수님이 먼저 사람들의 식사에 대해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 빌립에게 어떻게 하지?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빌립은 이 사람들을 조금씩만 먹이려 해도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할 거라고 했습니다. 식사의 문제를 돈 문제로 보았던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겠지요. 그런데 200데나리온은 성인 남자 200명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제자들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 9절을 보면, 안드레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니이까…”  여기서 보리떡은 보리로 만든 빵일 겁니다. 그리고 아이는 파이다리온이란 헬라어를 쓰고 있습니다. 어린 소년이란 뜻이지요. 그 소년이 가지고 온 것은 엄마가 싸준 자기 도시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드레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별게 아니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보리빵은 밀가루를 화덕에다 구은 것이지요. 물고기 두 마리도 역시 화덕에다 구운 것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한 소년의 한 끼 식사에 지니지 않는 빵과 구운 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은 실컷 먹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를 거두어 들였더니 열 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빵 부스러기에 대한 이야기만 있습니다. 구운 생선도 당연히 부스러기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빵만 아니고 구운 생선도 손에 쥐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또한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 부스러기에 대한 언급만 있고 구운 생선 부스러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게 참 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게 하셨고, 또한 매일 저녁 메추라기도 거두게 하셨지만, 슐한 상에 관련하여, 메추라기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신 것과 묘한 조화가 됩니다. 물론 생선 부스러기는 재활용이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 대목을 설명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를 그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 이후에 부스러기만 모았더니 그게 열 두 광주리를 채웠노라… 그런데 이 열 두 광주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제자들이 빵 부스러기가 많이 남을 줄 알고 미리 광주리 열 두 개를 준비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제자들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인간들이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빵 다섯 개로 많은 사람들을 풍성히 먹였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 두 광주리의 열 둘이란 숫자는 슐한 상 위에 놓인 열 두 개의 빵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먹거리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비하셨던 우리의 거룩한 먹거리는 과연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먹거리 문제로 고통받는 일을 많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 오랜만에 웨스트포럼을 가졌습니다. 그때 제가 발제를 하면서 코로나 이후의 식량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뜩이나 기후변화로 식량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교통마저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 식량수급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그 수가 3배로 증가할 것이란 보고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게다가 식량을 무기로 삼는 나라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식량을 무기로 삼다니… 인간의 잔인성을 단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리빵 다섯 개와 구운 물고기 둘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자명해 집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아르토스는 빵을 말하지요. 조금 비약적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식량으로 인식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오는 자들은 결코 주리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고프지 않을 거란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비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소에 있는 슐한 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여 살리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필요했던 것은 먹고 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은 가장 먼저 법궤를 만들었고 그 다음으로 슐한 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은 요단강 건너가 저 천국에 이른 다음에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또한 건강한 음식을 잘 섭취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이지요.

우리가 왜 트럼프를 지지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남북대화의 물꼬를 한번 터볼까 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이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가 혹시 고레스같은 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는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그런 기대를 접었습니다. 트럼프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워킹그룹을 통해 남북대화를 철저히 차단하는 걸 보고 그가 혹시 고레스? 했던 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는 미국 사람들 반반이 서로 반목질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이민자들을 박대했습니다. 차별받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트럼프의 트윗을 보면서 가슴을 졸이며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트럼프는 많은 사람들의 기초생활을 억눌렀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지탄을 받는 방법으로 지원세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짓을 과감하게 시도했던 걸까요? 아무튼 그는 완벽하게 대선에서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정부를 구상하겠다고 하고 대통령으로서 해외순방을 하겠다고 합니다. 미국 대통령의 취임일은 1월 20일입니다. 그 날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끌려나오는 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보수기독교인들과 이스라엘의 정통파 유대인들이 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수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실수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보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들의 기초생활입니다. 이것이 사실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1) 브살렐의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2) 브살렐이 가장 먼저 법궤를 만들고 그 다음에 슐한, 즉 상을 만든 이유를 설명해 봅시다.

3) 우리는 왜 먹는 문제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안됩니까?

4) 하나님의 사람들은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5) 고기 문제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2020년 11월 1일

금보다 귀한 믿음은...

 

출애굽기 37장 1-9절: [01] 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02] 순금으로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만들었으며 [03]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네 발에 달았으니 곧 이쪽에 두 고리요 저쪽에 두 고리이며 [04]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05]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 궤를 메게 하였으며 [06]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이며 [07]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양쪽에 쳐서 만들었으되 [08] 한 그룹은 이쪽 끝에 한 그룹은 저쪽 끝에 곧 속죄소와 한 덩이로 그 양쪽에 만들었으니 [09] 그룹들이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으며 그 얼굴은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더라.

누가복음 24장 28-39절: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이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 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 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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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세 번이나 호렙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길었던 말씀이 두 번째 올라가서 들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막에 관련한 말씀이었지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에 이 부분을 자세하게 살펴 봤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말씀이 출애굽기 35장부터 40장까지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출애굽기 35장에 이르렀을 때 이걸 건너 뛸까…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똑 같은 내용을 두 번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서 두 번 다루어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여름에 성막에 관련한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모세가 성막에 관련한 말씀을 받은 것이 여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말씀을 초막절부터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을 지내며 그 말씀대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겨울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막을 짓는 것을 묵상합니다. 들은 바를 실천하는 것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지요. 출애굽기 25장에서 31장까지, 그리고 출애굽기 35장부터 40장까지 모두 성막에 관련한 말씀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계절이 다르고 또한 주어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명령과 순종이라는 점에서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이라 해도 다른 의미가 있으니 우리가 두 번 묵상하는 것도 마땅합니다. 성막에 대해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온전하고 거룩한 삶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를 제대로 묵상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어느새 11월 1일이 되었습니다. 서리가 내리는 상강이 10월 23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1월 7일은 입동이라고 합니다. 우리 농부들은 아무리 늦어도 입동 전까지는 보리 파종을 끝내야 했다고 합니다. 입동은 겨울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한 주간 안에 겨우살이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2월 중순부터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정상적인 일상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왕좌왕 하다보니 다시 겨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가버렸습니다. 아쉬운 생각이 들고,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성막과 함께 이 겨울을 보내면 좀 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출애굽 원년 겨울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지었습니다. 코로나 원년 겨울에 우리는 그 성막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음미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는 성막을 만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본문에 따르면, 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브살렐이 만든 궤의 재료는 조각목이었다… 조각목이라고 번역한 것은 실수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올리브를 감람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이지요. 감람은 중국에만 있는 것으로 기름을 짜는 것은 올리브와 비슷한 것이지만, 감람을 올리브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다른 종류니까요. 이처럼 조각목도 중국에만 있는 것으로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아카시아 나무는 아니라고 합니다. 아카시아 나무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그런 아카시아 나무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생존하고 있는 사막의 아카시아 나무지요. 이것이 브살렐이 선택한 나무였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나오는 조각목의 원어는 쉳딤 입니다. 쉳딤, 또는 쉳딤 나무라고 하지요. 사막에서 자라는 잎이 적고 가시가 많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막이란 극한 상황에서 자라다 보니 나무결이 촘촘해 지고 단단해 져서 벌레가 파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편백나무와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자의 관을 만들 때 이 쉳딤 나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특히 파라오가 죽으면 그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고, 그 미이라를 금박으로 싼 쉳딤 나무 관에 넣었다고 합니다. 브살렐이 만든 궤도 그와 같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브살렐이 법궤를 만든 방식은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의 관을 만들 때 사용했던 방식이란 말이지요. 쉳딤 나무로 궤를 만들고, 그 궤의 안팎을 순금으로 둘러쌌다고 합니다. 금덩어리를 붙인 게 아니고 금박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궤의 안팎을  싼 것이지요. 그리고 그 궤의 위쪽 가장자리에 금 테를 둘렀다고 합니다. 이것이 궤의 뚜껑을 받치는 장치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뚜껑이 밑으로 빠지지 않게 했습니다.

파라오의 관에 비하면 브살렐이 만든 궤는 크기가 매우 작았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나무로 만든 사과궤짝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크기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은 궤를 크게 만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브살렐이 만든 그 궤는 법궤라고 불리워졌습니다. 또는 언약궤 증거궤라고 불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판을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법이었고, 언약이었고, 또한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법궤, 언약궤, 증거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같은 궤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법궤를 만든 사람의 이름은 브살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법궤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공로로 그의 이름이 길이 기억이 될 것입니다. 브살렐은 유다 지파 사람으로 성막을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유다 지파 사람이고 자신의 몸으로 새 성전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브살렐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크게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브살렐은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고, 히브리어로는 ‘베 짤르 엘’이라고 발음합니다. 하나님의 그림자란 뜻입니다. 출애굽기 31장 2절에 따르면, 브살렐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이 됩니다. 브살렐의 할아버지가 훌인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주었던 사람입니다. 훌은 모세의 누나 미리암의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훌을 자형 또는 매부라고 불렀겠지요. 그러므로 브살렐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외손주 뻘이 되는 사람입니다. 누나의 손자니까요. 그리고 브살렐은 가구를 잘 만드는 소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에서 사용하는 가구들을 브살렐이 다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브살렐이 처음 만든 것은 법궤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받아 온 십계명판이 모세의 회막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판의 케이스를 만드는 게 시급했습니다. 그 케이스가 바로 법궤였던 겁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십계명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십계명판이 없었다면, 법궤도, 성막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계명 판이 들어있지 않은 법궤가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런 성막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담이지만, 주전 586년과 주후 70년에 적에게 탈취된 법궤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십계명판이 없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없는 것을 믿는다고 비아냥 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성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브살렐의 법궤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법궤의 아랫 부분은 금으로 만든 고리 네 개를 붙입니다. 그리고 쉳딤으로 채를 두 개 만들어서 이것을 금으로 싼 후, 각각 법궤의 앞뒤 고리에 넣습니다. 그러면 그 채는 사람이 법궤를 들 수 있는 손잡이가 됩니다. 손잡이가 네 개 생기는 겁니다. 이 손잡이 때문에 법궤를 운반할 때 네 사람이 각각의 손잡이를 들어서 옮길 수 있습니다. 또는 어깨에 매고 옮겨 갈 수도 있습니다. 파라오의 관과 법궤는 같은 방법으로 만들지만, 파라오의 관은 무게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관은 죽음을 담아 무덤에다 고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법궤는 기본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두었지만, 성막 자체를 옮길 때는 사람들이 법궤도 들거나 메어서 날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게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이것이 법궤가 작아진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부담을 크게 생각하십니다.  

파라오의 관은 더 할 수 없이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만큼 비싼 것들이 많이 사용되었고 따라서 매우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관을 장식하는 자들은 무게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관은 죽음을 담고 있어서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은 썩어 문들어 질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관 속에는 파라오였던 사람의 미이라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양신이 와서 구해줄 때까지 온전한 몸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이라가 시체가 아닌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썩어서 없어지지 않는 게 아니었습니다. 파라오의 관은 그게 피라미드 속에 있든, 왕의 계곡에 있든, 엄청난 양의 금이 발려져 있든, 그것은 오로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브살렐이 만든 법궤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법궤 속에는 하나님께서 돌판에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은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십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라 해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담은 법궤는 움직여야 했단 말이지요. 그래서 똑 같은 공법으로 만들어졌어도 파라오의 관은 죽은 것이지만, 법궤는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주전 1361년부터 1352년까지 약 9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던 사람은 투탕카멘이라는 파라오였습니다. 하지만 투탕카멘의 연대를 이보다 30년 늦게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투탕카멘이란 이름은 이집트 발음으로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아문이란 태양신의 살아있는 이미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는 천사인데, 태양신의 이미지는 투탕카멘이었나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혹시…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연대를 잘 따지는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이 주전 1313년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모세는 80세… 투탕카멘의 치세는 출애굽 사건보다 4-50년 전이었고… 그렇다면 모세는 40세도 안된 젊은 장군이었으니 투탕카멘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만약 투탕카멘의 치세를 이보다 30년 늦게 잡는다면,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으므로 투탕카멘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오늘 투탕카멘에 대해서 좀 길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의 무덤이 참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막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어떤 통찰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 이집트의 ‘왕의 계곡’이란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kv62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발견 당시 그 무덤에는 엄청난 것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가 타던 화려한 전차도 있었고, 5,000여 점의 보석도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 출애굽 시대를 말해주는 유물이었다고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관이었습니다. 그의 관은 100킬로그램의 순금으로 제작이 되었는데, 얼굴을 덮는 마스크에만 11킬로그램의 순금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의 얼굴에다 마스크를 씌웠는데 일반 평민에게는 진흙으로 만든 마스크를 씌웠지만 파라오에게는 금으로 만든 마스크를 씌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관의 안팎은 모두 금박으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투탕카멘은 비록 10살에 등극했지만, 나이답지 않게 많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태양신을 위한 신전을 재건했고, 또한 태양신 신앙이 부활되도록 노력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처에 많은 건축물들을 만들어 세웠다고 하지요. 이복 누나와 결혼을 했는데, 딸 둘을 사산하고 말았고, 결국 18살에 죽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9년 동안 파라오로 살았지만 그를 좋아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짧고 굵은 생애를 기리기 위해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저 세상에 가서 사용하라고 많은 보물들도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 따르면,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속죄소는 그 두께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금덩어리였습니다.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키포레트라고 합니다. 키포레트는 단순히 뚜껑이란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은 이 키포레트를 속죄소라가 번역해 놓았습니다. 의역을 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속죄소는 말 차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냥 뚜껑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 뚜껑은 그 넓이가 법궤의 바닥 넓이와 똑 같았습니다. 그러나 법궤 윗부분의 금테가 뚜껑을 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뚜껑 윗부분에다 조그만 천사 둘을 금덩어리로 만들어 붙였습니다.  하지만 두 천사의 날개는 서로 붙어 있어야 했고, 두 천사의 눈은 아래를 봐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두 천사의 날개와 뚜껑 사이에 있는 조그만 공간에 임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는 20인치 모니터 정도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키포레트의 두 천사에게만 눈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투탕카멘의 얼굴에 붙어있던 황금 마스크에도 눈이 있었다고 합니다. 눈동자는 흑요석을 상감해서 넣었고, 흰자는 석영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보는 사람들은 그 빛이 너무 영롱해서 그 마음이 흥분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스크의 눈은 생명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염원했다고 해도, 그것은 실체가 없는 태양신에게 한 것이라, 그저 죽음에 대한 절규요 가련한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키포레트, 즉 법궤 뚜껑 위에 있는 천사들은, 비록 브살렐이 금으로 쳐서 만든 것들이긴 했지만, 날개를 올리고 있었고 눈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피조물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날개를 편다는 것은 찬양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향했다는 것은 경배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날개와 몸체와 또한 뚜껑이 만든 조그만 공간, 즉 찬양과 경배의 공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그 곳에 임재하신 것이었지요.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막에 많은 금이 사용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금은 파라오의 상징이었지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를 볼 때 그 얼굴보다 그를 감싸고 있는 금을 더 많이 봤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출애굽으로 인해서 파라오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들의 파라오, 즉 왕이 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출애굽 할 때 금을 많이 가지고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금은 영원한 재산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모세가 성막을 만든다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소유하고 있던 금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바쳤을 겁니다. 하나님은 나의 파라오가 되시므로 나는 금을 바쳐야 한다… 이게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막에다 금을 많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욱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왕이시만 파라오처럼 운명적인 왕은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운명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브살렐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복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출애굽 원년 한 겨울에 열심히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성막은 석달 동안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달 보름 동안 리허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새 봄에, 즉 니싼 월 1일에 하나님께 봉헌을 시작하게 됩니다.

 

인천공항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 10시간 만에 벤구리온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앞으로는 아랍 에미레이트를 통해 갈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면 시간은 더욱 단축이 되겠지요. 벤구리온 공항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있는 공항이지요. 여기서 차를 빌려서 고속도로로 들어가서 예루살렘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그러면 30분이 되지 않아 엠마오란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표지판을 따라 정션으로 들어가면 엠마오 유적이 나옵니다. 예수님 시절 엠마오에는 속병 치료에 좋은 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 따르면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져 있다고 하네요. 얼추 맞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바로 여기서 글로바란 제자와 또 다른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글로바란 제자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 작은 아버지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목수 요셉의 동생이었단 말이지요. 목수 요셉이 일찍 죽은 후에 그의 동생 글로바가 어린 예수님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또 다른 마리아라고 합니다. 훗날 이들은 골로새 교회를 섬기게 되지요.  

아무튼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났고 뿐만 아니라 저들을 찾아와서 함께 걷고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글로바는 함께 걷고 있던 예수님께 부활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여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시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가 살아나셨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요…? 글로바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그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러자 함께 걷고 있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로 알고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예수님을 강권해서 식당 딸린 여관에 들어갔고 세 사람은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빵에 축사하시고 그것을 떼서 그들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그때까지도 이 사람이 선지자로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축사를 하지…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예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울 생각은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글로바와 다른 제자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아까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같이 말한 사람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예수님이란 말인가… 그가 과연 살아나셨구나… 이건 가만 있을 일이 아니다… 그 두 사람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25리 정도야 두어 시간 걸으면 갈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글로바와 다른 제자의 뒤를 따라 오셨던 겁니다. 뒤를 따라 오고 계셨던 예수님… 하지만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그걸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샬롬!”하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제자도 놀라고 무서워했을까요? 저녁식사도 같이 했는데? 누가복음 본문은 우리에게,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렇게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예언을 설명하시고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바로 내가 부활하는 것이다.”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무엇입니까? 바로 토라, 느비임, 베 케투빔, 즉 타나크를 말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약성경의 핵심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5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당연히 토라, 느비임, 베 케투빔, 즉 타나크 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지요. 이때는 신약성경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구약성경만 있었지요. 구약성경도 제대로 갖추어진 것은 주후 90년에 있었던 얌니아 회의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집트 사람들이 파라오의 관을 만들었던 방법과  브살렐이 법궤를 만들었던 방법이 같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똑 같이 싣딤나무로 본체를 만들고 거기다 금박을 입혔지요. 그리고 뚜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황금으로 마스크를 만들어서 망자의 얼굴에 붙였습니다. 황금 마스크는 여러가지 보석으로 치장을 해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는 황금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공간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태양신에 의해 파라오가 부활이 되기 전에 도굴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밖에 없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파라오에게는 걱정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17대 대통령이 이명박입니다. 이 사람이 1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금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당하게 얻은 이익을 자기 회사에다 집어 넣고도 그 회사가 자기 회사가 아니라면서 13년 동안 버텼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국민은 이것만 알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망교회 장로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거짓말이 들통 났습니다. 여기서 뇌물 문제가 발생하여 17년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를 도왔던 검사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들은 이명박을 대통령이 되게 했고 그의 명령에 따라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살이까지 시켰습니다. 그들은 이제 징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명박의 17년 감옥살이는 오로지 뇌물죄에 의한 것으로, 4대강 사업으로 얻은 불법적 이익이나 자원외교로 얻은 불법적 이익은 별도로 따져야 하는 사안입니다.

그가 출석하고 있는 소망교회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소망교회는 압구정동의 거리 하나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는 그만큼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면 뭐 하겠습니까? 교회도 목사도 장로도 교인도 존경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욕을 먹고 있는데 말이지요. 이명박의 불법자금이 십일조 형태로 들어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십일조라는 그 거룩한 이름이 더러워졌습니다. 여러분, 사실 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금은 금속으로 존재하는 물질일 뿐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금은 좋은 것이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며, 금을 악용하거나 오용하는 사람에게 금은 나쁜 것입니다. 정직이 가훈이라는 이명박 장로에게 금은 나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보다 많은 금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금을 주십시오. 남의 금이라도 뺏어서 내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더 많은 금을 얻도록 축복해 주십시오…합니다. 하지만 그 금이 이명박 장로의 금처럼 되면 어떻게 합니까? 금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 어떡하냐… 이 말씀입니다.

하지만 브살렐에게 금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금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황금판 위에 황금 천사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황금을 쳐서 천사를 만들었다고 하니 아마도 거친 천사의 상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공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님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 것을 말합니다. 법궤의 크기가 예수님께서 뉘셨던 멩거, 즉 구유의 크기와 비슷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법궤 속에는 십계명이 있었고, 지하 마굿간의 멩거에는 아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그 위에서 죽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글로바와 다른 제자의 뒤를 좇아 예루살렘에 오셨고 제자들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저주와 죽음의 말 밖에 없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요.  

로웰 메이슨이란 사람은 1839년에 <현대시편가>란 책을 냈습니다. 여기에 내 평생 소원 이것뿐…이라는 찬송이 들어있습니다. 이 중 4절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 그렇습니다. 믿음은 금보다 귀한 보배입니다. 귀한 보배일 뿐만 아니라 참 보배입니다. 금은 거짓 보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참 보배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부활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배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누렇게 빛난다고 모두 보배로운 금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그런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참 보배라고 하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제대로 고백이 되지 않으면, 구약성경도 유대인의 고대 문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서지학적 가치는 느껴도 신앙적 가치는 느끼지 못하게 되지요.   

 

1) 쉳딤 나무로 가구를 만들고 거기다 금박을 입힌 것은 이집트의 기술이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왜 그런 식으로 가구를 만들었습니까?

2) 브살렐이 가장 먼저 법궤를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3) 파라오의 관과 법궤의 사이즈를 비교해 보고 느낀 바를 말해 봅시다.

 

 

2020년 10월 25일

"그가 내라고 하신 출입구"

 

출애굽기 36장 35-38절: [35] 그가 또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휘장을 짜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고 [36] 조각목으로 네 기둥을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그 갈고리는 금으로 기둥의 네 받침은 은으로 부어 만들었으며 [37]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 [38] 휘장 문의 기둥 다섯과 그 갈고리를 만들고 기둥 머리와 그 가름대를 금으로 쌌으며 그 다섯 받침은 놋이었더라.

요한복음 10장 1-10절: [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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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력으로 지난 주일 일몰부터 헤쉬반 월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헤쉬반 월 7일이 됩니다. 헤쉬반 월을 유대인들은 마 헤쉬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카드어인데, 마는 달이란 뜻이고 헤쉬반은 여덟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헤쉬반은 여덟 번째 달이란 말입니다. 유월절이 들어있는 니싼 월로 부터 따지면 여덟 번째 달이 된다는 뜻이지요. 헤쉬반 월이 되면 유대인들은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태조 여로보암의 배교 사건입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창세기 7장과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에 따르면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 둘째 달 열이렛 날 부터 비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출애굽 이전에는 첫째 달이 티슈리 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에는 첫째 달이 니싼 월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이 들어있는 달을 첫째 달로 삼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7장 11절에 나오는 둘째 달은 이야르 월이 아니고 헤쉬반 월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노아 홍수는 노아가 600세가 되던 해 헤쉬반 월 17일에 시작되어 그 다음 해 헤쉬반 월 27일에 끝났습니다. 창세기 8장 14절에 따르면 노아가 601세가 되던 해 둘째 달 27일에 물이 말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아 홍수는 1년 열흘 동안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동 지방에서는 우기가 헤쉬반 월에 시작된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기에 홍수를 일으키시고 이것을 그 시대를 심판하는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기인 헤쉬반 월에 비를 그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현상도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헤쉬반 월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이 또 생각하는 다른 한 가지… 여로보암 1세의 배교 사건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여로보암이란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요셉의 후손이었습니다. 소위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솔로몬 왕은 여로보암을 핍박했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핍박을 피해서 이집트로 망명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여로보암은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멍청이였습니다. 그래서 민심이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여로보암은 열 두 지파 가운데서 열 지파를 분리시켜 데리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세겜을 수도로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나라를 북 왕국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남북조 시대가 되었습니다.

북 왕국의 태조가 된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이 절기 때마다 남 왕국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국경을 튼튼히 하고 벧엘에다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전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여로보암은 남 왕국 유다와 차별을 시도하여 티슈리 15일에 오는 초막절을 한 달 늦추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헤쉬반 월 15일에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벧엘 신전에다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 그것에다 경배를 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공식적인 배교행위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수 많은 레위인들과 신실한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자연스럽게 북 왕국 이스라엘의 국력은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외세의 침략을 자초하고 말았지요.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공교롭게도 이 헤쉬반 월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저녁, 마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이유를, 95개 조항으로 정리해서,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성당 정문에 붙일 때, 할로윈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1월 1일이 만성절이니까 전야제 형식으로 할로윈 축제가 시작된 것이지요. 아마도 루터는 이 할로윈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성당 앞을 지나다가 자기가 성당 정문에 붙인 95개 조항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할로윈 축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헤쉬반 월의 배교 사건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언필칭 만성절을 지키기 위해 그 전야제로 할로윈 축제를 벌인다고 합니다. 만성절은 로마교회의 전통으로, 축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수 많은 성인들을 한꺼번에 추모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성절, 즉 All Saints Day라고 하는 겁니다. 할로윈 축제의 할로윈도 앵글로 색슨 언어로 ‘모든 성자들’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할로윈 축제가 켈트 족의 유령 축제와 결합이 되어 버린 게 문제입니다. 켈트족은 사람의 해골을 유독 좋아한다고 합니다. 적을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해골로 만드는 것을 통쾌하게 생각했단 말이지요. 그래서 적의 해골을 발로 차면서 게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축구가 나왔다고 합니다. 축구 공의 모습이 전반적으로 하얗지만 검은 부분이 군데군데 있는데, 이게 바로 해골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해골 깃발을 내건 해적선을 보면서 열광했던 적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금박쥐라는 만화를 보면서 즐거워 했지요. 빛나는 해골은 정의의 용사다…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해골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해골은 적에게 겁을 주는 것이고 절망을 말할 뿐이지요. 해골은 진정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의미한 것을 상징으로 내 건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었습니다. 특히 친위부대인 슈츠 슈타펠입니다. 에스에스라고도 하지요. 이들은 해골을 새긴 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산하에 악명 높은 게쉬타포가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독일의 정체성을 찾는다면서 나치 정권의 철학과 선무를 담당한 기관을 운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이전의 독일 종교를 찾아내서, 아리안 민족, 즉 게르만 민족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북 독일의 각종 컬트들을 조사하다가 해골 문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혐오스러운 현상들을 엮어서 아리아 민족의 종교적 원형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아주 어리석고 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여기서 레벤스라움이란 배타적인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레벤스라움이 뭐냐하면, 최고 우수 민족인 아리안 족, 즉 게르만 족이, 열등한 슬라브족이나 유대인들을 없애 버리고, 이 세상을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차별적인 엉터리 이론을 말합니다.

이 레벤스라움 이론에 따라서 나치 정권은 가장 먼저 폴란드를 침공했고 다음 해에는 러시아를 침공해서 슬라브 족의 씨를 말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슈츠 슈타펠, 즉 에스에스는 심각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에스에스 과학자들은 1940년 겨울은 따뜻할 거라고 예보했단 말이지요.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 군인들에게 여름 군복을 입혀서 전장으로 내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해 겨울은 예년보다 훨씬 더 추웠다고 합니다. 11월에 벌써 영하 40도에 가까운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 여름 옷을 입고 있던 독일군인들은 얼어 죽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 기차는 영하 15도 이하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보급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독일군은 러시아 군대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에스에스는 또 다시 어리석은 짓을 범하며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관리하고 있던 90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600만 명을 체포해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게 전 세계 사람들을 각성시켰습니다. 나치 정권을 저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지요. 유대인 학살 이후에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나라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결국 저들은 유대인 학살을 증오하는 연합군에 의해서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 1세의 만행과 비슷한 사건이 20세기에 터진 것이지요. 그것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나라에서 말이지요. 참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 토요일 저녁이 바로 만성절 전야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할로윈 축제가 시작되겠네요. 우리는 또 수 많은 해골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 해골을 보면서 저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해골은 결코 성자들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그 해골은 인류의 잔인성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끔찍해 해야 합니다. 그 해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비극에 빠뜨렸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토요일이 종교개혁 503주년이 되는 날이란 것을 생각해야 할 것 입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독일계라는 데에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내세우는 백인우월주의, 유색인종 및 여성 차별에 대해 심각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백인은 우수해서 코로나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코로나는 흑인이나 황색인종 같은 열등한 사람들이 걸린다고 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트럼프에 의해서 고무된 미국의 네오 나치 젊은이들이 독일의 바벨스부르크 성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바벨스부르크 성은 성지라고 합니다. 그들로서는 성지 순례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바벨스부르크 성은 나치 정권의 2인자였던 히믈러가 슈츠 슈타펠의 본부를 세웠던 곳입니다. 최고 우수 민족인 아리안 족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가증한 실험을 했던 곳이지요. 어딘가 해서 찾아보니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뮌스터에서 가깝더군요. 물론 독일 정부는 바벨스부르크 성을 유스 호스텔로 개조해서 관광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네오 나치들이 모여들겠지요. 하지만 나치 정권이 주장했던 아리안 족은 실체가 없는 거짓이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일부 광신자들을 제외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은 성막의 성소 입구에 기둥 다섯 개를 세워서 출입문 네 개를 만들고,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 입구에 기둥 네 개를 세워서 출입문 세 개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은 출애굽기 26장 31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을 간단하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막이 무엇입니까?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의 바깥 뜰에서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은 성막 안에, 그것도 지성소 안에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은 사실 출입구가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출입구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입구는 오로지 인간에게 필요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구원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고 또한 구원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뵈오면 죽을까봐 두려워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차원이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성소 입구에다 출입구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지성소의 입구에도 출입구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인간들의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그 출입구로 들락날락 하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즉,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가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따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을 원하셨습니다.

물론 성막의 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레위 지파에 속하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라 해도 대제사장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이라 해도, 일년에 단 하루, 즉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소건 지성소건, 인간인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접 만나시고 소통하셨는데 말이지요. 이런 시스템은 어떤 종교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독일의 고대 컬트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인신제사를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고대 유럽 사람들은 해골을 좋아했습니다. 적을 희생시키고 그 증거로 해골을 가져와서 좋아했단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가증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고, 인신제사에 얽힌 자들을 배교자라 하시면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계시면서 오로지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로 제물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서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기쁘게 받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제물도 시간이 지나면서 양으로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은 제물의 표상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문을 통해서 양의 우리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양을 노리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를 만들어 놓겠습니까? 도둑놈이나 강도 때문이지요. 그 중에는 늑대같은 짐승도 있겠지요. 그래서 목자는 우리를 튼튼하게 하고 오로지 문을 통해서만 드나듭니다. 그래야 양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스스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서 살면 안전하고 풍성해 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 일도이부삼빽이란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검찰 수사를 받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도망을 치고, 그러다 잡히면 무조건 부인하고, 이후에는 빽을 동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달라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서글픈 현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양의 문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많은 것들을 필요할 때마다 풍성하게 얻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도망할 필요도 없고 부인할 필요도 없으며 빽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3년 전에 독일 비텐베르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 모처럼 루터의 발자취를 밟아봤던 것이지요. 사실 루터의 발자취는 대부분 동독에 있었습니다. 동독은 우리에게 금단의 땅이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발자취도 밟아보지 못하고 루터를 강의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통일이 되었기 때문에 저는 동독 땅을 밟아볼 수 있었고 또한 루터의 발자취도 밟아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동독 땅에 있었던 비텐베르크… 여기서 루터는 교수 생활을 했고, 또 여기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반박문은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게시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저는 비텐베르크에 갔을 때 성당에 가서 반박문이 게시되었던 정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텐베르크에는 성당이 두 개가 있더군요. 하나는 시내 중심부에 있는 시티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변두리에 있는 성벽 성당이었습니다. 루터는 시티 성당이 아니고 성벽 성당의 정문에다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저는 성벽 성당으로 가서 정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뭐가 정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정문이 여덟 개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참 후에 루터가 반박문을 붙인 정문은 길가로 나있는 작은 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문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95개 조항의 반박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물론 중세 독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서 읽기가 아주 어려웠지요.

유럽 성당에는 문들이 참 많습니다. 성당 건물이 워낙 크다보니 접근성을 원활하게 하려고 정문을 많이 만들었나 봅니다. 비텐베르크의 성벽 성당에 나있는 여덟 개의 정문은 제단 쪽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길가에 있는 정문들 가운데에서 제단쪽으로 가장 가까운 정문을 찾아 들어가면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히톤의 관이 나옵니다. 맞은 편에 루터의 관이 있습니다. 루터의 관을 보기 위해서는 성당 마당에서 제단에 가까운 정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관을 예배실 안에 두다니…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가 가장 의미있게 생각했고 또한 사랑했던 예배실이 이 예배실일테니… 여기에 누워 있게 하는 것이 루터에게는 가장 행복한 게 아닐까…

아무튼, 비텐베르크의 성벽 성당에 출입문이 많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출입문이 많으니까 하나님 앞에 더 빨리 나가서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나라에서 히틀러, 히믈러 같이 그로테스크 한 자들이 나와서 레벤스라움이라는 엉터리 인류학을 만들고 그 주장에 따라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을까…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확실한 신앙인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우리도 일도이부삼빽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당당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참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갖은 혼란을 다 일으키며 우리를 미혹케 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헤쉬반 월은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배교자들과 배신자들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의 출입구를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기 전에 방주의 출입구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로보암 1세 시절에 수 많은 경건한 무리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떠나서 남 왕국 유다로 왔습니다. 그들은 결코 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남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에 멸망 당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벽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살행위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시고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무릅 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예수님이란 문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생깁니다. 우리 자신만 본다면, 그리고 주위 사람들만 본다면, 우리에게 그런 힘이 생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봐야 힘이 생기지요. 하나님을 보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그가 바로 양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십자가가 항상 우리의 묵상거리가 되는 겁니다.    

 

1) 출애굽 사건을 기점으로 과거 두 번째 달이던 것이 여덟 번째 달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바벨론 포수를 기점으로 과거 여덟 번째 달이던 것이 세속력으로는 두 번째 달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3) 마 헤쉬반의 반역 사건을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봅시다.

4) 하나님께서 성소와 지성소에 입구를 내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5)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로 다가갈 수 있습니까?

 

 

2020년 10월 18일

"그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출애굽기 36장 8-19절: [8]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휘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9]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0]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1] 연결할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를 만들되 [12] 그 연결할 한 폭에 고리 쉰 개를 달고 다른 연결할 한 폭의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아 그 고들이 서로 대하게 하고 [13]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갈고리로 두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을 이루었더라 [14]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었으니 [15]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6]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7] 휘장을 연결할 끝폭 가에 고리 쉰 개를 달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고 [18]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

요한복음 14장 1-6절: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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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초막절이 지나면 창세기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은 사실상 새해를 시작하는 절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정월 보름이 되면 축제를 벌이고 농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초막절이 바로 우리의 정월 보름과 같은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를 읽었고 우리는 그런 전통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초막절 직후에 오는 심하토라의 날에 맞추어서 창세기를 읽기 시작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잇는 작업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좀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세 번째로 호렙산에서 내려온 후에 성막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초막절 어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꼭 1년 후, 그러니까 다음 초막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작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역사는 초막절에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 직후에 창세기를 읽는 것은 이유가 있고, 그래서 심하토라의 날이 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구나…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 그 곳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정말 부럽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지요. 그런데 행복해 보이던 아담과 이브에게 아룸한 나하쉬가 찾아왔습니다. 나쁜 쪽으로 머리가 발달한 뱀같은 존재가 찾아왔단 말이지요. 결국 그들은 이 나하쉬 때문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동쪽에 있는 놋땅으로 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놋땅에 살면서, 아담은 노동의 고통을,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당연히 아담과 하와도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놋땅에서 살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의 고통과 해산의 고통을 안고 사는 아담과 하와, 그들은 시한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흙으로 지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들의 2세인 가인은 질투로 말미암아 친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놋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놋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괴로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덴동산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에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에덴동산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은 농업과 목축업을 발전시키고 또한 예술과 공학을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성까지 쌓았습니다. 그러나, 성을 쌓으면 뭐합니까?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회가 붕괴되는 비극이 생기는데 말입니다.

창세기 4장까지 읽고나면, 에덴의 동쪽 놋땅이 무서운 땅이란 걸 알게 됩니다. 에덴의 동쪽이라고 하면 에덴을 비추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지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곳으로 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땅에서는 태양만 먼저 떠오를 뿐, 모든 것이 에덴동산과 달랐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룸한 나하쉬만 조심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놋땅에서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위험한 것 뿐이었습니다. 동물들은 왜 그리 사나운지, 식물들은 왜 그리 독한지… 사람들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친애비가 친아들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친형이 친동생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놋땅에서는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것이었고 또한 위태로운 것이었습니다.

초막절이 지나고 심하토라의 날을 맞아 창세기를 읽은 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세상은 만만치 않다…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곳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됫바가지의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25절에 이르러 비로소 소망을 갖게 되었을 겁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유대인들은, 놋땅에서도 의인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 대신 셑이란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셑은 에노스를 낳았는데 에노스 때에 놋땅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만 계신 게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놋땅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그래서 놋땅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바벨론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격려를 받고 고무가 되었을 겁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한 유대인은 손톱으로 벽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여기도 계신다!”

놋땅에도 계셨던 하나님께서 모세가 올라갔던 호렙산에 계시지 않을 리가 없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 꼭대기에 나타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또한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두 번째로 호렙산에 올라갈 때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완성된 성막의 모습을 푸른 하늘에 나타내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도 성막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초막절 어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초막에 들어가서 초막절 내내 하늘을 보며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왜 초막절에 초막을 지을까… 물론 초막은 광야시절에 사용했던 보잘 것 없는 거처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억하기 위해 초막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초막절에 성막을 지었기 때문에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전통도 생기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여유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말씀은 성막을 어떻게 짓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6장 8절부터 38절까지 다 읽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앞부분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출애굽기 26장에 이미 나왔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6장의 기록은 출애굽기 26장 기록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말씀은 출애굽기 안에서도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바벨론에 살던 토라 편집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매우 깐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반복이 가능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 기록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실함을 보고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것이지요. 이사야 34장 16-17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를 모으셨음이라.”

 

여기서 성소의 껍데기, 즉 성막을 간단하게나마 조망해 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성막의 문은 동쪽으로 나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에 서서 성막을 바라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입니다. 그 최소한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모두 3미터입니다. 이것이 성막의 단면이 되겠습니다. 정사각형으로 보이는 출입구에는 기둥이 다섯 개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왼쪽과 가장 오른쪽에 있는 기둥 두 개는 남벽과 북벽에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출입구만 네 개라고 보여질 것입니다. 이 출입구 위에 프레임이 있어 기둥 다섯 개를 잡아줍니다.

성막을 위에서 보면 가로가 9미터, 세로가 3미터의 길죽한 직사각형으로 보일 겁니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3:1이 되는 겁니다. 이 가운데서 서쪽의 3분의 1이 되는 공간이 지성소 공간이 되겠습니다. 나머지 3분의 2 공간은 성소의 공간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의 공간이 지성소 공간의 2배가 되겠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네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역시 가장 왼쪽 기둥과 가장 오른쪽 기둥은 벽으로 들어가 있어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출입구는 세 개로 보여질 것입니다. 물론 세 개의 출입구는 천사를 수놓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이 휘장은 속죄일 하루만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오로지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속죄의 행위만 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출입구 위에도 역시 프레임이 있어 네 개의 기둥을 잡아줍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내부 벽면은 모두 천사를 새긴 예리아, 즉 휘장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수 많은 천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를 새긴 휘장 뒤에는 휘장 하나당 조각목 널판 두 개씩 버티고 있습니다. 이 조각목은 고리와 띠와 받침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에는 중앙 기둥이나 석가래가 없습니다. 조각목 널판 밖에는 염소털로 만든 두꺼운 천막이 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성막의 벽면을 바라보면, 출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모두 두꺼운 염소털 천막으로 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염소털은 습기를 막고 바람을 통과시켜 조각목 널판이 항상 뽀송뽀송하게 해줍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겠지요.

성막의 지붕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지 않고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해달의 가죽을 덮었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물개나 물범 따위의 가죽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가죽들의 특징은 안에서 피어나는 연기나 물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밖에 있는 신선한 공기를 들어오게 한다고 합니다. 밖에 있는 습기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요. 오늘날 고어텍스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 안은 항상 뽀송뽀송하고 공기가 잘 순환되어 쾌적했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러분 스스로 본문을 찾아서 읽어 보시고 확인하시고 은혜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막의 놀라운 점에 대해서는 저의 건축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이 정도 밖에 말씀을 드릴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막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그 황금 비율이라든가 각 부분의 역학적 관계라든가 재료적 특성이 놀라울 정도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건축을 했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성막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구원주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권위와 그 능력이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세운 후에도 여전히 광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년 동안… 그리고 그 40년 동안 성막은 낡고 닳고 결국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이르면 법궤만 달랑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의 아들 솔로몬 왕 때 현실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통해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좋은 것도 있었고 슬픈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결말은 슬픈 것이었습니다. 남의 손에 허물어지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막을 짓는 마음을 가져보면 어떻겠나…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설령 보잘 것 없이 느껴지고 심지어 오래 갈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이 되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라면 해보는 겁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브살렐이나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이 모세 시대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막절에 초막을 만들다 보면, 특히 아이와 함께 만들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면서 성막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내 마음 속의 성막을 물려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이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란 말이지요. 또한 이것이 놋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에노스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벨론 포로들의 마음이었지요. 이 마음이 오늘 구약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브살렐이나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이 모세 시대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막절에 초막을 만들다 보면, 특히 아이와 함께 만들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면서 성막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내 마음 속의 성막을 물려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이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란 말이지요. 또한 이것이 놋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에노스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벨론 포로들의 마음이었지요. 이 마음이 오늘 구약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도마가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메시야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런 말씀을 한 두 번 들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무슨 일을 하는 존재입니까?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가 메시야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야라 하면서도 오히려 악한 자들의 흉계에 빠져 십자가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도마는 이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미련없이 제자들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지 않아서 도마는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도마도, 이전에, 내가 죽었다가 살아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황하던 도마는 긴가민가 하다가 생각한 바가 있어 제자들의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내가 어디론가 갈 거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따라다닌 죄로 얼마나 많은 곤란을 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또 우리를 떠난다고 말씀하시는가… 사실 예수님은 이전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나 봅니다. 또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후 도마는 예수님이 길이란 걸 알기 위해 무척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도 인도에 존재하고 있는 성 토마스 교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당장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내 일생이 끝날 때까지 얼마 동안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구요? 그렇다면, 내일, 내 앞에서 벌어지게 될, 바로 그 일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 일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그렇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실천해야 하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놋땅에서 에노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이유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호렙산 기슭에다 성막을 만든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토라학자들이 성막의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토라에다 언급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안국역에서 내려서 원남동까지 걸었습니다. 창경궁쪽으로 들어가는 고가도로가 없어지고 터널이 생겼습니다.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시키는 터널이지요. 본래 창경궁과 종묘는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걸 분리시켰지요. 창덕궁과 창경궁은 밤이 늦도록 사람들이 들락날락 했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뿌듯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창경궁 정문 바로 앞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 있습니다.  문승미 자매의 부친께서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조문을 갔었지요. 폐암으로 고생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지난 금요일 입원하셨는데 그 날 저녁에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문승미 자매가 많이 울더군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격려해 주시고 옳은 길을 가르쳐 주셨다고 하더군요. 딸에게 무한 존경을 받는 아버지는 행복합니다. 알고보니 고인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시더군요. 오늘 아침에 발인한다 하여 어제 저녁에 부랴부랴 갔었지요.

문상 후에 육개장을 먹고 있는데 함상욱 형제가 와서 편한 시간이 언제냐고 묻더군요. 자기 집에 와서 축복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축복기도… 우리 교회서는 잘 쓰는 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언젠가 그 집에 가서 축복기도를 해주려고 합니다. 복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해 줄 작정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싶더군요. 내일 독일로 가는 택호, 논산으로 가는 용준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길만 잘 알면 진리와 생명으로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 그 자체라고도 하지요.

우리는 지금 자못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권위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살다보니 코로나가 생기고 영적 카오스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길이시고 그래서 진리시며 생명이 되십니다. 사실 놋땅에서 에노스가 불렀던 여호와란 이름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호렙산 기슭에 세워졌던 성막도 사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인도로 건너가서 복음을 증거했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실 겁니다. 이걸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1) 성막의 평면도를 그려 봅시다.

2) 염소털과 염소의 가죽, 그리고 해달의 가죽은 어떤 용도인지 알아봅시다.

3) 성막에서 기둥과 대들보 대신 쓰인 게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2020년 10월 11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

 

출애굽기 36장 1-7절: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마태복음 21장 6-17절: [0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0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0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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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일몰로 금년의 초막절은 끝났습니다. 초막절은 7일 동안 지키는데, 그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인 일곱 째 날을 안식일처럼 지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인 일곱 째 날을 ‘호샤나 라바의 날’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 의미는 ‘큰 구원의 날’ 입니다. 큰 구원의 날이란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날이란 뜻이지요. 그래서 이 날 메시야가 오십니다. 그런데 이 날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다음 날,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다시 1년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 날을 제8일의 회중의 날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쉐미니 아트쩨레트’라고 하지요. 이것은 토라에 기록된 절기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게 바로 어제였습니다.

아무튼, 금년에도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십일조를 정산하고 창세기부터 성경읽기를 다시 해야 합니다. 하기야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메시야가 오시겠지요. 혹시 우리가 우리 생애에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후손들은 반드시 메시야를 만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은 대를 잇는 게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결국 메시야를 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야를 헬라어로 직역하면 그리스도가 되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초막절 마지막 날, 즉 호샤나 라브의 날,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이룬 것으로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 따르면, 사람들이 나뭇가지들을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막절 마지막 날의 풍경이 되겠습니다. 큰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어서 예수님은 메시야의 자격으로 성전에 들어가셔서 정화작업을 하셨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따르면,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정화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별도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미 오셨고 이 세상에 사시면서 메시야의 사역을 수행하셨으나,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뜻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이후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 때문에 신약성경이 쓰여졌고 구약성경 뒤에 붙여진 것이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메시야가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메시야가 오셨다면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겠는가…라고 되묻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소위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그들을 핍박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이제 겨우 나라다운 나라를 이루어 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그들의 땅이 불안한 것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진짜 메시야, 저들의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박해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초막절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룬 것이지요. 스가랴 서 9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소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셔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자 이게 뭔 짓이냐고 나무랐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성전에서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감당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예수님을 찬양했으나, 정작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고 한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핍박 때문에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만 위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주가 되시고 구원주가 되시겠습니까? 유대인이 뭔데요. 같은 논리로, 유대인들만 위하는 메시야라면 그 메시야가 진정한 메시야이겠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들의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뉴욕에서 죽은 한 랍비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를 메시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렙산을 세 번 등정한 모세는 초막절 어간부터 성막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호렙산에 두 번째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만 해주신 게 아니고 완성된 성막의 모습이 푸른 하늘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미 성막의 최종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습니다. 성막을 만들려 한다. 그러므로 관련 재료를 가져 오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각종 재료를 가져 왔습니다. 아하- 이걸 이때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셨던 거구나…

아울러 모세는 성막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재능기부를 권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원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 사람인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합니다. 브살렐은 아마도 보석 세공 기술이 아주 뛰어났나 봅니다. 이어 하나님은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시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셨다고 합니다. 오홀리압은  수를 놓는 기술이 뛰어났나 봅니다. 또한 그는 수 놓는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가르칠 수 있었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성막에  관련된 일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주도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성경은 성막에 관련한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마음이 지혜로운 (하캄 레브)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막을 성소라 칭한 것이 특이합니다. 미쉬칸이라 하지 않고 하 코데쉬라 했단 말이지요. 이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 등이 성소에 들어가는 물건들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으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지혜를 하크마라 하고 총명을 트부나(알아듣기)라고 합니다. 하크마는 눈으로 딱 보면 알아차리고 그 감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트부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크마와 트부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두 번 세 번 설명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코데쉬: 미쉬칸 즉 성막이 아님)에 필요한 물건들을 예물(테루마)의 형식으로 모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하크마와 트부나를 가진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 예물을 받아서 지시받은 대로 일을 했습니다. 물건을 만들고 수를 놓고… 그랬다는 말이지요.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성막에 관련된 모든 일은 한꺼번에 시작된 것 같습니다. 한쪽에서 법궤를 만들고 다른 쪽에서 메노라를 만들고 또 다른 쪽에서 휘장에 수를 놓고 또 다른 쪽에서 은으로 못을 만들고 등등…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마음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40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자유인이 되었고 또한 출애굽하여 호렙산까지 왔는데… 굶어죽기는커녕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성막을 만들고 있다… 이 성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의 광야생활도 이제 몇 달 남지 않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우리 앞에 있으며, 우리는 곧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이다… 마치 소풍 전야처럼 들떠있는 그들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감동이 지나쳐서 아침마다 예물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물을 모세에게 가져왔는지, 아니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가져왔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모세에게 가져왔고 모세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해야 되겠지요. 어쨌든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중지하고 모세에게 와서 예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하고도 남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게 불평거리가 될 수 있는 건지 의문을 갖습니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은 거지요.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부족한 것보다는 남는 게 낫지요. 많이 남으면 집으로 가져가면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한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겁니다.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 만큼만 하면 됩니다. 그 이하로 해서도 안되고 그 이상을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모세에게, 정해진 물량을 넘었다고 보고했던 것이지요. 모세는 이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예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 된 성경의 이야기지만 지금 당장 우리의 삶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감사절을 통해서 시간을 재편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사용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선택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지요. 하나님은 이것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새로운 시간과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먼저, 첫째, 하나님은 감사절을 통해서 시간을 재편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사용하게 하셨다는 점에 대하여… 모세 시대에 감사절이 세 번 있었습니다. 겨울을 지내며 자란 곡식을 이른 봄에 거두어 신에게 감사드리는 이른 봄의 감사절입니다. 겨울을 지냈지만 성숙 속도가 느린 곡식을 늦은 봄에 거두어 신에게 감사드리는 늦은 봄의 감사절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세가 살던 곳은 우리와 기후가 다른 중동 지방이란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름을 지낸 곡식이나 열매들을 거두어 신에게 감사드리는 가을의 감사절입니다.

사람들은 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이제 먹을 게 생겼으니 다음 감사절까지는 우리가 살아 갈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한부이긴 하지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른 봄과 늦봄과 가을에 있는 세 번의 감사절을 주의깊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감사절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절이 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름 그대로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장남들은 살려주신 날입니다. 문설주에 발라진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유월하게, 즉 뛰어넘게 하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른 봄의 감사절을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종속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유월절에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늦봄의 감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훗날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을의 감사절… 가을의 감사절은 가을걷이를 텐트에 넣어 보관하고 이것으로 겨울을 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텐트입니다. 모양은 가을걷이를 모아서 넣어두는 텐트와 비슷하지요. 그러나 성막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것은 가을걷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무교절로, 오순절 또는 칠칠절을 맥추절로, 초막절을 수장절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갖게 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축약해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월절에 출애굽하게 하셨고, 7주 동안 열심히 호렙산 기슭에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주만에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오순절과 초막절 사이에, 모세를 40일씩 세 번이나 호렙산 꼭대기로 부르셔서 올라오게 하시고 세세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속죄일이 되었고 또한 초막절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초막절부터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막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보관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아무튼… 이 성막은 이후 5개월 반에 걸쳐 지어졌고, 출애굽 제 2년 1월 1일부터 7일 동안 봉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런 진행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하나님은 그해 초막절에는 이 성막을 가나안 땅에 들여 놓으실 작정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나르기 쉽게 포터블로 지어졌던 것이지요. 이 세상에 포터블로 지어진 신전은 성막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아끼고 우리의 노력을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제도로 자리매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절을 통해서 시간을 재편하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무엇보다 구원에 대한 소망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선택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점에 대함 묵상입니다. 모세는 나이 80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80이란 나이가 별게 아니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때도 나이 80은 생을 마감하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는 대장정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생각을 초월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세를 한 2-3년 정도 사용하실 요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라는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따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지만 모세의 부관이었고 아울러 모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 십보라와는 출애굽 제 2년에 사별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십보라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게르솜과 엘리에셀이었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모세의 두 아들의 활약이 미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고작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자손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과, 게르솜의 자손 스브엘이 곳간을 맡았다는 정도…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적인 지도자였던 모세의 후손들이 이 정도였다는 사실은 우리마저 섭섭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모세의 형인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었고 그의 네 아들들은 모두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세습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집에 비하면 아론의 집은 특별 대우를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을…

초막절에 즈음하여 모세가 만들기 시작한 성막은 사실 유다 지파의 브살렐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막을 만드는 일에 브살렐과 오홀리압만 참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열 두 지파가 모두 사람을 보내서 성막 만드는 일을 거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일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으라고 명령하신 성막,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공들여 만든 성막은 아론의 가족을 중심으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 관리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하나님의 인사제도가 많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 했겠지요.

 

어쨌든 오늘 심하토라의 날이 끝나면 초막절도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로 달려가게 됩니다. 금년 겨울은 매우 추울 거라고 하던데… 하지만 함께 부둥켜 안고 살면 추운 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렇게 살면서 겨울을 이겨냈으니까요. 그러면서 우리는 또 유월절을 바라보며 살게 되지요. 물론 그 사이에 대강절이 있고 크리스마스가 있고 하누카가 있고 투 브 쉐밭이 있고 부림절이 있습니다. 현현절도 있고 사순절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절기들은 토라의 절기들은 아니지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절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초막절에서 유월절을 건너다 보면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레위기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 작년 유월절부터 레위기를 묵상했었지요. 그러다가 레위기는 출애굽기 속편으로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올해 유월절부터 출애굽기를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기 묵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막 만들기만 끝나면 출애굽기도 끝나고 레위기 교재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번 겨울에는 이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초막절을 끝내고 겨울을 바라보는 시점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 각자의 임무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유월절의 해방과 자유, 오순절의 하나님 말씀, 그리고 초막절의 메시야 강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 후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이 되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즐겨 봅시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주시지 않은 것을 바치라고 하셨습니까?

2)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합니까?

3)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의 일과 구분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의 일과 구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감당하는 방법이 다릅니까?

5) 우리에게 메시야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020년 10월 4일

 

"이것이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애굽기 35장 20-35절: [20]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23]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24]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 [25]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27]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28]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2]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33]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34]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35]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3장 3-18절: [0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0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0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0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으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07]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0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0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느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 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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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다른 날이 아닌 티슈리 월 10일, 즉 속죄일에, 돌판에 새긴 십계명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게 하신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심으로써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호렙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십계명 판을 잘 간직했다가 성막이 지어지고 그 안에 법궤가 안치되자 십계명 판을 법궤 속에 넣었습니다.

이후 법궤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파괴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당연히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를 탈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가 법궤 속에 넣었던 십계명 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십계명 판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인데 먹으로 쓰신 것도 아니요 돌 판에 쓰신 것도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육신의 마음 판에 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 판처럼 사라지는 일이 결코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 따라서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광채를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보다 그리스도인이 더 위대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을 포함한 복음의 일꾼들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인지 유대인들도 동의를 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광채를 봤을 뿐이지만,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봤으나,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보았으니,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본 것이다… 이것이 오늘 고린도후서 3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결국 40년 후에 광야에서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셨고 또한 승천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찌 모세의 영광에 비하겠는가…

그들은 수건을 쓴 채로 하나님을 보고 우리는 수건을 벗고 하나님을 보니, 우리는 주님의 영을 알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있는 자유를 느낀다… 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큰 책임이 있으며 유대인들보다 더 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바울의 언사는 참으로 은혜스럽고 우리를 무척 격려하지만 한 편으로 큰 부담을 갖게 합니다.  

호렙산에서 내려 온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 껍데기는 빛이 나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출애굽기 35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안식일 준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거룩한 날이니 누구든지 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는데 모두 39가지라고 합니다. 이 39가지 는 성막을 만들 때 필요한 일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미리 불을 피워두란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날 전기등을 미리 켜둡니다. 하지만 안식일 중에는 이것을 끌 수 없습니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막 만들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 염소 털,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와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라고 했습니다. 즉, 성막과 천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과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휘장과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불 켜는 등잔대와 그 기구와 그 등잔과 등유와 분향단과 그 채와 곤유와 분향할 향품과 성막 문의 휘장과 번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과 그 기둥과 그 받침과 뜰 문의 휘장과 장막 말뚝과 뜰의 말뜩과 그 줄과 성소에서 섬기기 위해 정교하게 만든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 등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가 두 번째로 호렙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지시하신 것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은 재료로 쓰일 물건들을 바침으로써, 또한 물건을 만드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재능 기부로 이 거룩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성막과 관련해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즉 레위 사람들이 주로 거명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밀접한 관련자들이기 때문인 것이고 성막 그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것이었고 또한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것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책임을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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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오늘은 초막절 두 번째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일 일몰부터 월요일 일몰까지는 속죄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속죄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몇 분은 금식을 하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속죄일을 기억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광야시대가 아니라 코로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제목이 무엇인지 챙겨 보았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들이 보내오는 소식들을 읽어보니 그들은 확실히 속죄일을 챙기고 있더군요. 그 중에서 랍비들의 속죄일 강론이 유익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주의깊게 들었습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용서를 한다는 게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용서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는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용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강론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와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티슈리 월 10일, 바로 속죄일에, 돌 판에 새긴 십계명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당연히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 때문에 깨져버린 십계명을 다시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십계명 판은 얼마 후에 성막이 지어지고 법궤가 만들어지자 법궤 안에 안치되어 지성소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성막 안의 지성소, 지성소 안의 법궤, 그 법궤 안에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겨 주신 십계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십계명이 들어있는 법궤는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관리하는 천막에 보관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지은 후에는 그 성전의 지성소에 법궤가 보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법궤 안에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전 586년,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성전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를 탈취했고 당연히 그 뚜껑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법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먼지만 발견했다고 합니다.

법궤 속에 넣어 두었던 십계명 돌판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당연히 누군가가 치웠겠지요. 이방인들이 십계명을 탈취해 욕보이도록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누군가가 치웠다면 어디에선가 발견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아직도 십계명 돌판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십계명 판을 영원히 치워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십계명 판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남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 한 것은 참 문학적입니다. 게다가 그 편지는 먹으로 쓴 것도 아니요 돌 판에 쓴 것도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육신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계명 판처럼 사라지는 일이 결코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을 통해서 십계명 판보다 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신앙인들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새 언약의 일꾼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 따라서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광채를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보다 그리스도인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을 포함한 복음의 일꾼들에게는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인지, 유대인들도 동의를 할 수 있는 건지, 저는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율법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광채를 봤을 뿐이지만,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봤을 뿐이지만,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보았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본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주장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3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주장입니다. 모세는 결국 40년 후에 광야에서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셨고 또한 승천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찌 모세의 영광에 비하겠는가… 이것은 덤이 되겠습니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수건을 쓴 채로 하나님을 보았으나, 우리는 수건을 벗고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영을 알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서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 위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큰 책임이 있으며 유대인들보다 더 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바울의 언사는 참으로 은혜스럽고 우리를 무척 격려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부담을 아울러 갖게 합니다.

제 손자 하율이가 어느새 41개월이 되었습니다.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더 사랑을 받은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 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3층이 비좁다고 2층에 내려와서 놉니다. 그리고 1층에 내려와서 놀다가 밖으로 나가서 놉니다. 집 주위를 뱅뱅 돌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집 주변의 풀까지 뽑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침없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좀 아픈 게 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지금 서재로 쓰고 있는 공간에, 젊은 부부와 그들의 초등생 자녀 둘이 산 적이 있습니다. 2년 동안 이곳에서 전세로 살았지요. 부부는 맞벌이로 낮 동안은 집을 비웠습니다. 그러니 낮에는 자녀 둘만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녀석들이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얼마나 떠들어대며 노는지… 그때 저는 아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들이 살았던 2층 공간이 매우 좁았을 겁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많이 답답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지금같으면 제가 좀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일층을 내주어서 마음껏 놀아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놀던 자리를 뒷정리 해야하겠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는 그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을 향해서 시끄럽다고 냅다 소리만 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저를 무서워했겠지요.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 일러 바치기도 했을 겁니다. 3층 아저씨가 우리를 못놀게 해… 하지만 젊은 부부가 집 주인에게 대들겠습니까 또는 뭐라 꾸중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을인데… 지난 속죄일 내내 이게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인천으로 이사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년 속죄일에는 맛있는 거라도 좀 사들고 그들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게 작은 행동일지라도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다시 뉘우치고 다시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  

 

속죄일은 지난 월요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지난 금요일 일몰부터 초막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을 연말의 감사절로 지키되 수장절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수장절은 가을걷이를 추수해서 창고에 들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막절에 오는 주일을 우리교회의 추수감사절로 정해놓고 일년 동안의 모든 것을 망라해 감사하는 절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공동체로서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못해 유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각자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각자가 감사제목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감사는 결국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행동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십계명 판을 들고 호렙산에서 내려온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때가 안식일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내려온 날이 속죄일인데 속죄일을 일컬어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을 거라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속죄일로부터 5일 후에 초막절이 시작됩니다. 초막절은 7일 동안 계속 되는 절기지요. 그런데 그 7일 중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을 또 안식일처럼 지켜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초막절의 일곱 날들 가운데서 첫째 날과 일곱 째날을 제외한, 가운데 다섯 날들은 평일처럼 보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기간에 모세가 성막을 짓겠노라고 선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초막절을 장막절로 지키기 위해 예물을 가져왔는데 그게 바로 이집트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6개월 전에 출애굽한 사람들의 수중에 가을걷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님께 바쳤더니 그것이 성막 재료로 사용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었지요.

성막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건축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두신 예배 방법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짓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 이상의 많은 재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많은 재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게 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재물을 넘겨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있었던 어두움의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사람들이 숨겨 둔 많은 보물을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왕 파라오의 이름으로 키우던 가축들을 그들의 소유처럼 다 끌고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파라오는 아뭇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기력이 쇄잔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아뭇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끌고 나온 가축들 가운데 극히 소량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모세가 초막절 평일에 성막을 짓겠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습니다.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에 관련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재능기부를 하라고 요청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 가운데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가운데서 유다 지파의 브살렐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이 뽑혔습니다. 그때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이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막은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의 결과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은 감사였고, 또한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토대로 성막이 지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막이 오래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우리가 원해서 드리는 감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서 얼마를 구분하여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감사란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결코 주지 않으신 것을 구태여 주셨다고 우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감사는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주지 않으신 것을 거두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남에게 돈을 꾸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 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안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감사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과 공기와 물과 햇볕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게 없으면 생명 현상이 제대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하늘과 땅과 공기와 물과 햇볕을 모두 언급하기는 어려우니 땅 하나만 생각해 봅시다. 만약 어떤 땅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일부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겠습니까? 아마도 엄청난 불평등이 양산될 것입니다. 이 땅은 한 평에 1억 원이 넘게 되고 다른 땅은 한 평에 1만 원도 안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이용해서 벼락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땅을 팔아도 살아 갈 수가 없게 되어 급기야 몸을 팔게 되겠지요. 이런 사회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엄청난 불평들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들도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기 2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지만 한국교회는 스스로 땅을 사서 부동산 부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땅을 사서 부동산 부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롭게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십일조를 헌금으로 받아주시겠습니까?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쯤 제가 다른 교회서 선교 담당을 하고 있을 때 그 교회의 헌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가를 조사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헌금으로 제대로 쓰이고 있는 액수는 전체의 10% 정도였습니다. 나머지 90%는 소위 종교사업자들이 착복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나 조사해 보니 부동산 부자들이 또 복을 받기 위해 내는 헌금 아닌 헌금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전체 헌금의 90%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자가 되었지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요즘 광화문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헌금은 그 자체로 교회의 암덩어리가 됩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서 일부를 돌려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헌금은, 예배를 위해서, 또한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헌금이란 무엇인가… 이걸 가지고 선지자들과 백성이 갈등을 일으킨 적이 많았단 말이지요.

진정한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마가복음 12장 41-44절과 누가복음 21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과부의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비유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커다란 헌금통이 놓여있었나 봅니다. 부자들은 거기다 큰 액수의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구제 대상인 과부들도 헌금을 하더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관심을 갖고 그들의 헌금 행위를 지켜 보셨습니다. 그런데 과부들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의 동전을 넣었다고 합니다. 두 렙돈은 헬라 시대의 동전 두 개를 말하는데 로마의 동전인 고드란트 한 개와 가치가 같다고 합니다. 고드란트는 로마의 최소 가치 동전인데, 목욕탕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돈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4천 원쯤 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예수님은 부자들이 낸 큰 액수의 헌금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구제대상인 과부들이 낸 두 렙돈, 한 고드란트의 헌금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적은 액수의 헌금을 생활비 전부라고 하시면서 과부들을 추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들도 헌금하라는 뜻으로 추켜 세우신 건 아닙니다. 과부는 토라가 정한 구제대상으로 헌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활비 전부를 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과부들은 굶어죽을 수 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그들이 굶어죽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과부들은 굶어죽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헌금에 대한 견해는 그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신 겁니다. 그것은 성전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종교사업자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돈을 많이 들여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통에 넣은 돈이 어떤 돈인지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시 부자들이 지니고 있는 돈이야 당연히 불로소득이었습니다. 당신이 자고 있을 때도 당신의 돈은 일하고 있다…

과부들이 왜 어렵게 살아가겠습니까? 남편이 없기 때문이지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남편이 없습니까? 부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부자로 살게 하기 위해 몸바쳐 일하다가 결국 알량한 임금마저 받지 못하고 죽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부들은 헌금을 하려면 생활비 전체를 털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헌금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헌금으로 빈 호주머니를 또 채워줄 것입니다.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마르는 날이 없을 겁니다. 그들의 헌금은 희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감사도 없었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운영되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 위의 돌이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하셨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지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운영되는 성전이라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저주를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저주하셨고, 그 저주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성전은 결국 예수님의 저주대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볼 수 있습니다. 돌 위에 돌이 쌓여 있습니다. 서쪽 벽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서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폐허가 되었지요. 이것은 이 성전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 의해 가차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제대로 하면 이방인은 파라오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방인은 느브갓네살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실 만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감사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생각해 내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감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상한 심령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표현도 감사의 제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으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이걸 구태여 입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께 마음으로 말해도 됩니다.

오늘은 초막절 기간 중에 오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각기 감사제목을 나누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일상을 감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1)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온 사건을 속죄일로 설명해 봅시다.

2) 바울은 모세의 얼굴 광채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3) 바울의 견해 중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 재료로 가져온 물건들의 출처는?

5) 재능기부란 무엇을 말합니까?

 


2017년 3월 26일

"안식으로 시작하다"

출애굽기 35장 1-9절: [35.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7]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8]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9]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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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출애굽기 35장은 갑자기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으로 시작합니다. 토라 두루마리는 본래 장 절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35장은 34장에 이어 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따라서 35장은 모세가 마지막으로 시내산 꼭대기에 내려 온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4장에 따르면 그의 손에는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십계명 판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을 해서인지 모세의 얼굴은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자 모세 는 스스로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이어서 35장에 들어가자마자 제4계명이 나왔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물론 안식일 명령을 독립적으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토라 두루마리가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 게 아닐까요?

필자는 안식일 계명이 유독스럽게 여기에 기록된 것은 이것이 모세의 하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내산 꼭대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 온 것이 안식일과 상관이 있을 거라는 추정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유대인들도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가 티슈리 월 10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져 보면 오순절부터 티슈리 월 10일까지 대략 120일이 됩니다. 모세가 40일씩 세 번 시내산 꼭대기에 잠도 자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거했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모세의 마지막으로 시내산 거함을 끝내는 시점이었지요. 80세 된 노인 모세가 세 번이나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다니… 물론 평범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당시 모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티슈리 월 10일에 들고 내려온 십계명판은 사실 두 번째 십계명 판이었습니다. 첫 번째 십계명판은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에머랄드 판을 다듬으셔서 거기에 손수 십계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 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산 중에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목격하고 던져서 깨뜨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너희같은 작자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돼지 발에 진주와 같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똑 같은 크기로 돌판 두 개를 다듬어서 다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티슈리 월 10일에 모세가 들고 내려온 십계명 판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새겨 주신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티슈리 월 10일이 무슨 날입니까? 초막절 닷새 전이기도 한 이 날은 욤 키푸르, 즉 속죄일입니다. 그리고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입니다. 매우 강한 안식일이지요. 안식일에는 그래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지만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 하루 종일 금식합니다. 속죄일은 안식일 율법이 가장 엄하게 적용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 35 1-3절의 안식일 계명은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의 계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태여 제4 계명을 강조하실 이유가 속죄일이란 이유 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속죄일이 지난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과 성구를 만들 재료를 가져오게 했고 재료가 모이자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성막과 성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막과 성구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초막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의 성경을 읽어 보면 성막과 성구는 석달 동안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넉 달째 부터 이에 대한 실험운용이 있었고 결국 초막절로부터 6개월 후인 출애굽 제2년 첫날에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35장 처음에 갑자기 등장한 안식일 명령은 속죄일과 초막절을 생각하면서 그 의미를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막과 성구는 안식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이고 그 안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요. 안식은 속죄와 더불어 진행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들고 내려온 십계명판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금송아지 우상숭배 때 모조리 죽었어야 했을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판을 다시 새겨주신 게 그 용서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십계명판은 케투바였거든요. 모세를 중매장이로 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혼인증명서… 그 혼인증명서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로, 다시 말해서 간음 행위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혼인증명서를 재발급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겁니다. 그리고 그 날을 안식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 할 수 있는 속죄일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욤 키푸르라고 하지요. 이 날은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날에 일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엄하게 안식일 율법을 만드셨을까요? 속죄의 의미가 그만큼 지엄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숨을 고르고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겠지요. 안식을 취하면서 말입니다. 안식 후에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본 성막을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시내산 꼭대기 위의 푸른 하늘에 마치 레이저 쇼처럼 나타났던 그 성막… 그리고 그 안에 진열되어 있던 성구들의 모습… 그걸 그려 보면서 필요한 물건을 생각하고 또 설계도를 그리고… 그렇게 몇 일을 보냈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와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 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주인 노릇을 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던가… 금송아지 우상숭배만 했던가? 덥다고, 또는 춥다고, 배고프다고, 또는 다른 게 먹고 싶다고… 얼마나 많은 불평을 했던가… 노예로 살았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즐거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뻣뻣하고 교만했던가… 그래서 모세가 성막과 성구를 만들테니 재료를 가져 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적극적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넘치도록 충분히 가져 왔습니다. 모든 일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그들은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표현일 수도 있었습니다. 자유인으로, 그리고 속함을 받은 신앙인으로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설교문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에 안식일 관련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일 관련 말씀이 나올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 나오기 때문에 생뚱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내용도 제4계명과 비교해 보면 좀 다릅니다. 출애굽기 35 2절과 3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 그리고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 이런 말은 사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는 들어가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앞뒤의 구절을 읽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맥에서 이 말씀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성경은 장 절 구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 하나로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장 절이 들어간 것은 16세기에 인쇄술이 발명되어 성경을 인쇄하게 되었을 때 출판업자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책을 만들 때는 이게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일을 때는 장 절을 무시하고 읽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끊기지 않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5장 초반부에 안식일 말씀이 나오는 것은 34장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안식일 말씀은 35 4절 이하의 말씀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별 문제 없이 35 1-3절에 기록된 안식일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것은 34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34장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면, 모세는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눈이 부셔서 모세를 바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을 가져다가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모세가 가지고 내려왔던 십계명판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새겨주신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판은 모세가 깨뜨려 버렸지요. 첫번째 판을 들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향해 십계명 판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십계명 판은 깨져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도 깨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두 개의 돌판을 잘 다듬어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새겨주셨습니다. 모세는 두번째 십계명 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은 다시 효력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두번째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티슈리 월 10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 하셨던 겁니다. 특별한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신 거지요. 그래서 이 날 일하는 자는 죽이고, 집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던 겁니다.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에는 나오지도 않는 벌칙을 추가하신 겁니다. 바로 이 특별한 안식일을 우리는 속죄일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욤 키푸르라고 하지요.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짓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이 체계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안식일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안식하면서 그 우상숭배의 죄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다짐하라는 의미지요. 그러므로 그 날 일하는 자는 죽여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업신 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만은 집안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일에는 하루 종일 금식을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속죄일은 일년 중 가장 특별한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일본을 와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와식, 와규… 이런 말을 씁니다. 와식은 일본 음식이란 뜻이고 와규는 일본 ‘소’란 뜻입니다. 와는 평화란 단어에서 화를 말하는 것인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와를 왜라고 하지요. 왜소할 왜… 그래서 왜식, 왜놈, 왜구라고 합니다. 부정적 의미의 말이지요.

그런데 와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대개 평화의 화를 모든 사람이 함께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와는 우리의 화와 아주 다릅니다. 와를 설명 할 때, 꼭 필요한 속담이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바로 이 속담입니다. 그룹 안에서 튀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룹 안에서 튀는 행동을 하면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이걸 이지메라고 하지요. 와를 어기면 이지메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와는 기본적으로 종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평화를 말합니다. 오야붕의 명령에 꼬붕이 순종하는 것이 일본식 와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오야붕 중의 오야붕은 바로 천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천황에게 순종하는 것이 궁극적인 와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배층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신또이즘 입니다.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지요. 신또이즘은 일본 전국에 8만 개의 신사, 즉 진자를 거느리고 일본인들의 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민중봉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 역사상 민중봉기가 딱 한번 있었습니다. 1637 12 17일 부터 그 다음 해 4 15일 까지 대략 넉달 동안 시마바라 성을 중심으로 한 민중봉기였습니다. 이것을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합니다. 영화 침묵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지요. 지난 주에 저는 일본 규슈에 있는 시마바라에 다녀왔습니다. 규슈의 내해인 아리아케 만에 있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에서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민중봉기로 수 많은 농민들이 희생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와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지요. 그 숫자가 2 6천 명이라고도 하고 3 7천 명이라고도 합니다. 일정하지 않은 것을 보니 결국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제 생각에는 10만 명 이상이 죽어나간 것 같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기독교와 조선인을 생각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바라-아마쿠사의 영주였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요. 그는 임진왜란 때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자기 영지로 데리고 와서 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본에서 기독교 전파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포로들은 기독교를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던 이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걸 위험하게 생각했습니다. 일본에 기독교를 믿는 조선인들이 생긴 것은 모난 돌이 생긴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모난 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정으로 쪼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에도 막부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축출하고 시마바라의 기독교인 영주를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막부에 충성하는 자들을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영주로 삼았습니다. 새로 온 영주들은 안보를 위해 성을 쌓는다고 하면서 민중들에게 엄청난 세금과 노역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배교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마바라의 난은 4개월 만에 진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천황이 계신데 어찌 하나님이란 신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란 신을 섬긴다면 그는 일본인이 아니다… 시마바라의 난이 실패로 끝나면서 일본의 기독교는 위축이 되고 말았습니다지금까지 그런 위축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죄일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안식일에 만약 일을 한다면 사형에 처라하고 하셨고 아울러 집안에 불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일을 한다고 처형시키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일을 안한다고 처형하는 수는 있어도 일을 한다고 처형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속죄일같은 새로운 안식일에는 더욱 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집안에 불을 피우지 말고, 그러니까 밥도 먹지 말고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일이라는 새로운 안식일을 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을 일본의 와로는 결코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또이즘에 취한 일본인들의 비극이 되겠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아래로는 민중을 업신 여기는 것이 신또이즘이고 또한 천황제도입니다. 이것이 또한 일본 교회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7장은 아주 중요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보통 안식일과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 봅시다.

2) 왜 안식일 명령이 성막과 성구 제작 직전에 떨어졌습니까?

3) 모세가 하나님이 두 번째로 새겨주신 십계명판을 들고 내려온 때를 속죄일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지혜에 대해 평가해 봅시다.

4) 속죄일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과 성구를 만들 재료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엄청난 양을 자발적으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일까요?

 


2016년 3월 6일

"우리와 함께 행하옵소서"

출애굽기 36장 2-7절: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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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서 볼 것을 다 본 후에 산 기슭에서 대기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하나하나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것은 성막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성막은 텐트라 할수있으나 그 규모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텐트처럼 분리해서 인력으로 이동시킬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이에 걸맞는 설계를 하고 적절한 재료를 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 속에는 이런저런 기물들이 필요했습니다. 성막뿐 아니라 기물에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양이 있었으며 또한 규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기억력은 대단했던것 같습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마치 레이저 쇼처럼 보여주신 모든 것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재현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재현에는 특별히 두 사람의 공이 컸는데, 그 두 사람은 유다지파에 속한 건축가 브살렐과 단지파에 속한 공예가 오홀리압을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몇 달 안에 성막과 그 안에 둘 기물들을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성막은 모세가 티슈리 월 10일에 시내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시작하여 석달 동안 지어졌고 이후 석달 동안 시험 운용한 후 출애굽 원년 아달 월 29일에 완공하고 그 다음 날인 출애굽 2년 니싼 월 1일에 봉헌한것으로 봅니다.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마음이 지혜로운 자원자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성막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더 많은 예물을 들고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 성막을 만드는 일에 지장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남음이 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재료가 남으면 좋은거지요. 그러나 그게 백성이 바친 헌물이라는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남기면 함부로 쓸수 있지요. 그건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에서 일하는 일꾼들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할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명령이었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예물을 가져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 이미 백성이 가져온 예물의 양이 모든 일의 재료가 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이동해야 하는것이라 튼튼하고 강하게 그리고 가볍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료도 좋아야 하지만 적절한 설계가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참 많은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성막이 팀웍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은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그대로 기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성막을 만드는 재료로 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긴밀한 교제를 위한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헬라어 ‘퀴리우’에서 나온 말입니다. 퀴리우란 퀴리오스의 소유격으로 ‘주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독일어 Kirche를 보면 헬라어 퀴리우의 흔적이 남아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이걸 중세영어에서 Church라고 했습니다. Ch발음은 ㅋ 발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퀴리우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분리될때 그러니까 약 5세기경에 유대인의 회당 앞에 기독교인의 예배장소를 만들고 이걸 일컬었던 말입니다. 시나고그에 대항한 말이 퀴리우였던 겁니다. 그러므로 퀴리우 또는 키르헤 또는 처치 또는 교회란 말에 건물적 요소가 들어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건물은 편의적 장소일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셨던 성막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을뿐입니다. 성막에서 많은 의미를 찾을수 있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상징일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좀더잘 이해하고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완벽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키르헤나 처치나 교회는 헬라어 성경의 ‘엑클레시아’와 그것의 원어인 히브리 성경의 ‘카할’을 번역한것으로 봐야합니다. 카할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즉 이집트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엑클레시아는 그걸 그대로 직역한 말이지요. 카할은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카할에게 화를 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를 매우 어렵게 했던 사람이 마르시온입니다. 영지주의자지요. 이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이 중요하지 예수님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예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남도 없고 따라서 삶과 죽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럴수는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말씀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 즉 ‘로고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지요.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비록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이 땅에서 구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마르시온에 따르면 이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세상을 버리고 오로지 선하신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공동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은 마르시온의 영지주의와 매우 비슷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개인주의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상가로 소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메시지도 여러 사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옵션처럼 소개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필연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선포에 근거하지 않고 초대교회의 산물로 치부됩니다.

교회는 구원을 이루는데에 필요하지 않은것을 넘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의 권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근대 계몽주의를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 성경 자체가 개인주의를 배제합니다. 성경 어디에 공동체를 떠난 개인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그 나라의 빛을 발할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 들이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것입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님을 머리로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분리될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도 분리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론은 신학의 여러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신학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짓는 지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교회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에게 직접 도래하기보다 교회를 통해 개인에게 다가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구원의 기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없는 교회 사상도 문제지만 교회가 없는 또는 무시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도 문제가 됩니다. 물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일치하는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세속에서 결코 해소될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제 아무리 밀접하다 해도 그 차이는 분명히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모세는 성막을 만들기 위해 어떤 팀웍을 구축했습니까?

2) 성막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용도였습니까?

3) 교회 공동체의 필연성 또는 필수성에 대해 논해 봅시다.

 


2012년 3월 18일

출애굽기 35장 30절 - 36장 7절: [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2]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33]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34]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35]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References 마태복음 28장 11-20절: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일꾼들

광고 카피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광고 카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엿새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주일은 쉬라고 하셨습니다. 쉰다는 것은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던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쉬게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평생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받았던 것입니다. 자유인이 누릴 있는 것이지요.

차를 사면, 두툼한 설명서 권이 따라 옵니다. 영어로 매뉴얼이라고 하지요. 엔진 오일이나 기어 오일은 언제쯤 갈아 넣어라, 안전 장치는 어떤 있다, 자동 키는 이렇게 써라, 순정부품은 어디서 판다등등차에 관한 모든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설명서를 읽지 않고도 차를 사용할 있습니다. 내가 차니까 마음대로 굴릴 있지요. 그러나, 아무리 차라고 해도 자동차 제작자들이 만든 설명서대로 사용해야 고장 없이 오랫동안 차를 사용할 있습니다.

우리 몸과 정신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 정신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사용하면 탈이 수가 있습니다. 몸과 정신을 관리하면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용할 있지요. 자동차를 만든 사람들이 차동차 설명서를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사용 설명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일이 되겠지요.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육체와 정신이 쉬는 날입니다.

성경은 쉬는 것도 일하는 것만큼 엄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하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쉬지 않으면 일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어떻게 일을 계속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우리 몸을 위해서 쉬어야겠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서 지난 엿새 동안 했던 일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엿새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피드백을 계속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한 삶을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창조적인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다듬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애를 마칠 , 위대한 신앙인으로 칭송을 받게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명 판을 받아서 내려 , 그는 성막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짓기 위해 기꺼이 예물을 바쳤습니다. 모세는 브살렐, 오홀리압 같은 젊고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서 성막을 짓게 했습니다. 성막의 디자인은 모세가 호렙산 꼭대기에서 목격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모세가 말한 대로 설계도를 그렸고 이에 맞추어 이런저런 부속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성막 안에 놓을 여러 가지 기명들도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휘장에 온갖 수를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힘만으로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남녀노소가 성막 일에 달려 밖에 없었습니다. 

성막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땀한땀 의미를 담아야 했기 때문에,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달려 들어 감당을 해야 해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가끔 선교 현장에서 사람은 필요 없다 돈만 보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리고 돈은 다다익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은 틀린 말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만들 , 많은 물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건을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예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예물이란 자원해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억지로나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것은 예물이 아닙니다. 그건 뇌물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다익선이란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것만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적절한 선에서 예물 바치기를 중지시켰습니다.

교회의 헌금에서도 이게 중요합니다. 헌금은 우러나오는 마음의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거두면 안됩니다. 우러나오는 마음의 예물이 아니거나 필요 이상으로 예물을 많이 거두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일하는 아니라 돈이 일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패하게 되는 겁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금융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판교 신도시만 해도 27 교회들 가운데 24 교회가 금융 부채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운데 걸어간다고 표현합니다. 치읓 받침의 빛이 아니라 지읒 받침의 빚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부동산으로 돈이 헌금이란 이름으로 교회에 엄청나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부동산으로 돈이 헌금으로 바쳐지면 그건 부동산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동산에 엄청난 투자를 하게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성장학이라는 사이비 학문이 많은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써야 한다면서 무조건 건물이 교회를 만들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은행 빚을 지고 가운데 걸어가게 것입니다.

저는 헌금을 위해서 기도할 , 한가지를 기도합니다. 6 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이 우리 교회의 십일조가 되기를 바랍니다하는 기도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의 십일조는 아주 요긴하게 쓰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의 십일조가 드려지는 교회에서는 금융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의 재정은 빠듯한 같지만 항상 모자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항상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빠듯한 같지만 모자라지 않게 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에 대한 생각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구약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모세 같이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합니다. 이른바 선지자들입니다. 둘째,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젊고 창조적이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셋째, 여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긴가민가 하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버리시지 않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주십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손을 함께 하며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안식에서 출발합니다. 안식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신비한 점이기도 합니다.

모세 같은 늙은 자켄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40 가까이 내려오지 않자 몹시 불안해 졌습니다. 그래서 에이레브 라브라는 불평분자들은 이런 불안을 이용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를 하게 했고 결국 이집트로 되돌아 가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세를 생각할 , 조심해야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말씀하신 위대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우리와 다른 신비한 사람일 수는 없었습니다. 역시 모자란 인생을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역시 우리처럼 희로애락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가 달랐던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40 동안의 양치기 삶입니다. 하지만 시대에40 동안 양치기로 살았던 사람이 모세뿐이겠습니까? 많았겠지요. 그러나 모세는 40 동안 양만 치고 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모세는 40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히 묵상하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고통과 해방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40 삶을 통해서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80세가 되던 , 호렙산 기슭에서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로 임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모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80 이후 40 동안 노인이었지만 민족의 지도자로서 활기찬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노인을 자켄이라고 합니다. 자켄은 우리 말로 번역하면 장로가 됩니다. 장로는 노인이지만, 지혜로워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있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의 이치와 사리를 분별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자켄은 신앙적으로 또한 세상적으로 지도자란 말이지요. 우리는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단순한 노인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있는 노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켄,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자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켄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성막을 만들기에는 이미 늙었습니다. 노안이 와서 사물을 제대로 분별할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구를 이끌고 살다 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노인은, 자켄은, 장로는, 육체로 일하는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지혜와 지식으로 일한다는 것을자신의 경험과 지혜와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전승시켜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젊은이들이 일을 하지만, 일을 지도하는 사람은 노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켄은 젊은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일을 시킬 있지요. 그래야 젊은이들의 미래를 상상하고 올바르게 준비하게 있습니다. 모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세가 우리와 비교해 성정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자켄으로서, 장로로서, 늙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브살렐 같은 젊은 일꾼들

모세는 브살렐 같은 젊은 일꾼들을 뽑아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브살렐은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의 손자였습니다. 모세에게는 외손주가 되는 사람이었지요. 브살렐을 영어로는 베짤렐, 히브리어로는 베트짤렐이라고 발음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National Betzalel School of Art and Design이란 학교가 있습니다. 국립 베트짤렐 예술학교란 뜻이지요. 1903년에 설립이 되었으니 벌써 110년이 학교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그림은 베트짤렐 예술학교의 표지입니다. 표지 중앙에 법궤와 속죄소가 그려져 있는 재미있지요. 학교에서는 공예 기술과 여러 가지 디자인 기술을 배운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 가운데서 누가 베트짤렐 예술학교에 가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이유로 베트짤렐이란 이름을 예술학교의 이름으로 삼았을까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유대인 사회에서 베트짤렐, 브살렐의 위치를 있습니다.

브살렐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남보다 탁월한 눈과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브살렐이 무엇을 복제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교히 연구를 해서 각종 기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창조적인 장인이었던 것입니다. 브살렐은 모세가 미처 말해 주지 않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해서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딱딱 들어맞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을 분해해서 나를 때도 파손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품을 모아 합체를 때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어느새 온전한 성막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성막을 만들 , 모세의 외손자인 브살렐만 대우를 받았던 아닙니다. 밖에도 오홀리압이라든가 이름이 밝혀 지지 않는 다른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성막을 만드는 일에 참여를 했고 브살렐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모세나 아론같은 자켄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격려했고 되어 가는 일에 감동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 성막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모든 세대가 어울리며 합력하여 감당해 가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나라에서나 우파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우로나 좌로 치우치면 공의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치우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 위에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대는 신세대를 받아주고 신세대는 구세대를 믿고 존경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세대가 먼저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진리가 빛을 발하게 해야 합니다.

여자들

모세의 이야기 가운데서 인구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남자 장정의 수만 세이 되는 보게 됩니다. 여자들은 인구에 포함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집트의 영향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여자들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미리암, 십보라, 슬로브핫의 딸들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시대적인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중요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여자도 자켄으로 대접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속담에 여자가 말했다…” 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는 것은 그래서 믿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정에서 진술되는 여자의 증언은 법률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예수님께서는 단칼에 자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8장에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집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겠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증거를 여자의 말이라면서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소위 남자인 제자들은, 훗날 사도가 되었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의 말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갈릴리의 어떤 산으로 그들은 과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자의 말이라고 무시했을 그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여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있었습니다. 이후 여자들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여자들 스스로 사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 때의 여자들의 활약상은 일을 다루어도 다루지 못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여자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다만 기록을 하는 남자들이 간과해 버렸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아무튼하나님께서는 사회적 통념에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한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여자를 무시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안식일 또는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가 예배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걸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의 증언을 들었지만 여자들의 말인지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가 있어상식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여자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있어사내의 자존심이 그들의 의혹을 증폭시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에 따라서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으로 갔습니다. 어떤 산인지 구체적으로 우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산상수훈을 반포하셨던 가버나움 뒷산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산에 모인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자들이 긴가 민가 했다고 합니다. 하급 제자들만 긴가 민가 했다는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도 긴가 민가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수제자 중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수탉은 베드로의 수치의 상징입니다. 그런 부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상최대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 그리고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은 완벽하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상최대의 명령을 내리신 아니었습니다. 허세가 가득하고 마음에 의심이 가득한 남자들에게 지상최대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헛점투성이였던 제자들을 보면서 용기를 있습니다. 저런 사람들도 사도로 선택이 되었으니 나도 희망이 있는 아닐까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있어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것부터 우리의 신앙 생활을 시작합시다. 일주일 내내 일하라는 것보다 쉽지 않습니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바칠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브살렐을 거쳐 자켄으로 변해 것입니다. 긴가 민가 했던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을 대면하게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확고한 신앙인이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후손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지금 알게 되었으니 미래는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양 손에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 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박멸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상숭배를 한 자들만 멸하시라고... 이후 모세는 사파이어로 돌 판 두 개를 만들어서 다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또 4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파이어 판에 다시 십계명을 새겨 주셨습니다. 모세는 티슈리 10일에 시내 산에서 내려 왔습니다. 욤 키푸르, 즉 속죄일입니다.

복음, 미쉬칸을 지어라

티슈리 11일, 그러니까 욤 키푸르 즉 속죄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모세가 우상숭배자들을 박멸한 후 사건은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용서를 해주시기는 했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서운 죄를 용서 해 주셨다는 것과 하나님꼐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쉐키나가 임재할 장소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장소를 '미쉬칸'이라 합니다. 미쉬칸을 어떻게 지을 지, 거기에 무엇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 지...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미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 처음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말을 듣고 감격했습니다. 가슴 속에 끓어 오르는 흥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니... 그들은 모세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시행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모세는 미쉬칸을 짓는 일은 아주 거룩한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안식일에 그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일렀습니다.

미쉬칸과 안식일, 그 커넥션

그렇다면 안식일에 우리는 미쉬칸에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나요? 미쉬칸을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39가지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아보트 멜라코트'라고 합니다. '일의 주요 분야들'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안식일에는 이 39가지의 일들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39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씨뿌리기 2) 밭갈기 3) 거두기 4) 다발 묶기 5) 타작하기 6) 까부르기 7) 고르기 8) 갈기 9) 체질하기 10) 반죽하기 11) 빵굽기 12) 양털깎기 13) 양털빨기 14) 양털두드리기 15) 양털염색하기 16) 잣기 17) 양털짜기 18) 두개 이상 고리 만들기 19) 두 올 이상의 실로 짜기 20) 두 올 이상 나누기 21) 묶기 22) 풀기 23) 두 바늘 이상 꿰매기 24) 찢기 25) 짐승잡기 26) 짐승죽이기 27) 가죽벗기기 28) 고기 절이기 29) 무두질하기 30) 가죽 마르기 31) 가죽 자르기 32) 두 글자 이상 쓰기 33) 두 글자 이상 지우기 34) 집짓기 35) 허물기 36) 불끄기 37) 불붙이기 38) 망치로 때려 열내기 39) 사적 공간에서 대중적 공간으로 물건 나르기 또는 대중적 공간에서 물건 나르기.

만약 어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이 멜라코트 가운데 하나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이 사실을 고발합니다. 그러면 베이트 딘은 돌로 쳐 죽이라는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우발적으로 이런 일을 했으면 코르반 ㅋ하타트 즉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필요한 물건 수집

모세는 미쉬칸을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금, 은, 구리, 파란 빛이거나 보라 빛이거나 붉은 빛 물을 들인 털실, 좋은 린넨, 염소의 털, 붉은 양의 가죽, 타ㅋ하쉬의 가죽, 슅팀 나무, 올리브 기름, 향품, 보석들... 그러나 개인 할당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적에 맞게 내고 싶은 사람이 내되 원하는 만큼 가져오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물품이 모이자 미쉬칸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창고로 쓸 텐트를 쳤습니다. 그 방향은 사람들이 만나를 거두어 먹는 쪽이었습니다.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품들을 들고 미쉬칸으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에게 인사를 할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모세는 물품을 접수하는 팀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매일 얼마나 물품이 들어왔는지 조사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모세는 12 지파에게 각각 사람들을 보내서 미쉬칸을 만들기 위해 물품을 바치도록 뿔 나팔을 불어 알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쁨과 환호 속에 물품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직 12 명만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2 지파의 족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물품을 내고 모자라면 그 나머지를 모두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충분히 기증되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일 12개의 보석들과 여분의 향품과 올리브 기름이 기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족장들은 이런 물품들만 기증하면 되었습니다.

앞에 선 소년

미쉬칸 건축 책임은 베트짤렐이 맡았습니다. 베트짤렐은 오홀리아브를 조수로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솜씨 좋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39가지 일들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베트짤렐은 미쉬칸 안에 놓일 벱궤나 메노라 같은 성스런 도구들을 디자인했습니다. 법궤는 제1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는 요쉬야후 왕 때 50년 동안 감추어 졌던 것을 제외하면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제3 성전이 세워지면 어디선가 베트짤렐이 만들었던 법궤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는 제대로 일이 되어 가고 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각각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모든 것들을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본 그대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3개월 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질문과 대답

 

1) 오늘 파라샤는 출 25-31장의 명령을 실천한 것입니다. 실천의 내용이 명령의 내용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막 짓는 작업은 언제 시작했으며 언제 끝났습니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성막과 그 안의 기물들을 직접 제작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들입니까?

4) 예물을 바치는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5) 교회에서 다다익선이 덕목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성막의 모습을 그려 보고 그 의미를 서로 말해 봅시다.

7)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웃 덮개를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경건과 함께 필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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