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22

Ex. 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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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Listening

 

2020년 10월 18일

"그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출애굽기 36장 8-19절: [8]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휘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9]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0]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1] 연결할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를 만들되 [12] 그 연결할 한 폭에 고리 쉰 개를 달고 다른 연결할 한 폭의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아 그 고들이 서로 대하게 하고 [13]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갈고리로 두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을 이루었더라 [14]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었으니 [15]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16]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17] 휘장을 연결할 끝폭 가에 고리 쉰 개를 달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고 [18]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

요한복음 14장 1-6절: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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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초막절이 지나면 창세기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은 사실상 새해를 시작하는 절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정월 보름이 되면 축제를 벌이고 농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초막절이 바로 우리의 정월 보름과 같은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를 읽었고 우리는 그런 전통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초막절 직후에 오는 심하토라의 날에 맞추어서 창세기를 읽기 시작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잇는 작업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좀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모세는 세 번째로 호렙산에서 내려온 후에 성막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바로 초막절 어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꼭 1년 후, 그러니까 다음 초막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작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역사는 초막절에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 직후에 창세기를 읽는 것은 이유가 있고, 그래서 심하토라의 날이 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구나…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 그 곳에서 살던 아담과 하와가 정말 부럽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지요. 그런데 행복해 보이던 아담과 이브에게 아룸한 나하쉬가 찾아왔습니다. 나쁜 쪽으로 머리가 발달한 뱀같은 존재가 찾아왔단 말이지요. 결국 그들은 이 나하쉬 때문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동쪽에 있는 놋땅으로 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놋땅에 살면서, 아담은 노동의 고통을,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당연히 아담과 하와도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놋땅에서 살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의 고통과 해산의 고통을 안고 사는 아담과 하와, 그들은 시한부의 삶을 살았습니다. 흙으로 지어졌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들의 2세인 가인은 질투로 말미암아 친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놋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놋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괴로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덴동산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에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에덴동산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들은 농업과 목축업을 발전시키고 또한 예술과 공학을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성까지 쌓았습니다. 그러나, 성을 쌓으면 뭐합니까?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회가 붕괴되는 비극이 생기는데 말입니다.

창세기 4장까지 읽고나면, 에덴의 동쪽 놋땅이 무서운 땅이란 걸 알게 됩니다. 에덴의 동쪽이라고 하면 에덴을 비추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지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곳으로 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땅에서는 태양만 먼저 떠오를 뿐, 모든 것이 에덴동산과 달랐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룸한 나하쉬만 조심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놋땅에서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위험한 것 뿐이었습니다. 동물들은 왜 그리 사나운지, 식물들은 왜 그리 독한지… 사람들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친애비가 친아들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친형이 친동생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놋땅에서는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가 저주스러운 것이었고 또한 위태로운 것이었습니다.

초막절이 지나고 심하토라의 날을 맞아 창세기를 읽은 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세상은 만만치 않다…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곳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됫바가지의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 25절에 이르러 비로소 소망을 갖게 되었을 겁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유대인들은, 놋땅에서도 의인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 대신 셑이란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셑은 에노스를 낳았는데 에노스 때에 놋땅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만 계신 게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놋땅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그래서 놋땅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바벨론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격려를 받고 고무가 되었을 겁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한 유대인은 손톱으로 벽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여기도 계신다!”

놋땅에도 계셨던 하나님께서 모세가 올라갔던 호렙산에 계시지 않을 리가 없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 꼭대기에 나타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또한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두 번째로 호렙산에 올라갈 때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완성된 성막의 모습을 푸른 하늘에 나타내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도 성막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초막절 어간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초막에 들어가서 초막절 내내 하늘을 보며 살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왜 초막절에 초막을 지을까… 물론 초막은 광야시절에 사용했던 보잘 것 없는 거처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억하기 위해 초막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초막절에 성막을 지었기 때문에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전통도 생기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여유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말씀은 성막을 어떻게 짓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6장 8절부터 38절까지 다 읽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앞부분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출애굽기 26장에 이미 나왔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6장의 기록은 출애굽기 26장 기록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말씀은 출애굽기 안에서도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 세 번 확인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바벨론에 살던 토라 편집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매우 깐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반복이 가능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 기록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의 성실함을 보고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것이지요. 이사야 34장 16-17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를 모으셨음이라.”

 

여기서 성소의 껍데기, 즉 성막을 간단하게나마 조망해 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성막의 문은 동쪽으로 나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에 서서 성막을 바라보면 정사각형으로 보입니다. 그 최소한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모두 3미터입니다. 이것이 성막의 단면이 되겠습니다. 정사각형으로 보이는 출입구에는 기둥이 다섯 개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왼쪽과 가장 오른쪽에 있는 기둥 두 개는 남벽과 북벽에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출입구만 네 개라고 보여질 것입니다. 이 출입구 위에 프레임이 있어 기둥 다섯 개를 잡아줍니다.

성막을 위에서 보면 가로가 9미터, 세로가 3미터의 길죽한 직사각형으로 보일 겁니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3:1이 되는 겁니다. 이 가운데서 서쪽의 3분의 1이 되는 공간이 지성소 공간이 되겠습니다. 나머지 3분의 2 공간은 성소의 공간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의 공간이 지성소 공간의 2배가 되겠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네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역시 가장 왼쪽 기둥과 가장 오른쪽 기둥은 벽으로 들어가 있어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출입구는 세 개로 보여질 것입니다. 물론 세 개의 출입구는 천사를 수놓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이 휘장은 속죄일 하루만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오로지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속죄의 행위만 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출입구 위에도 역시 프레임이 있어 네 개의 기둥을 잡아줍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내부 벽면은 모두 천사를 새긴 예리아, 즉 휘장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수 많은 천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를 새긴 휘장 뒤에는 휘장 하나당 조각목 널판 두 개씩 버티고 있습니다. 이 조각목은 고리와 띠와 받침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에는 중앙 기둥이나 석가래가 없습니다. 조각목 널판 밖에는 염소털로 만든 두꺼운 천막이 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성막의 벽면을 바라보면, 출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모두 두꺼운 염소털 천막으로 쳐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염소털은 습기를 막고 바람을 통과시켜 조각목 널판이 항상 뽀송뽀송하게 해줍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겠지요.

성막의 지붕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지 않고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해달의 가죽을 덮었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물개나 물범 따위의 가죽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가죽들의 특징은 안에서 피어나는 연기나 물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밖에 있는 신선한 공기를 들어오게 한다고 합니다. 밖에 있는 습기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요. 오늘날 고어텍스와 같은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막 안은 항상 뽀송뽀송하고 공기가 잘 순환되어 쾌적했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러분 스스로 본문을 찾아서 읽어 보시고 확인하시고 은혜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막의 놀라운 점에 대해서는 저의 건축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이 정도 밖에 말씀을 드릴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막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그 황금 비율이라든가 각 부분의 역학적 관계라든가 재료적 특성이 놀라울 정도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건축을 했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성막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또한 구원주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권위와 그 능력이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성막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세운 후에도 여전히 광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년 동안… 그리고 그 40년 동안 성막은 낡고 닳고 결국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이르면 법궤만 달랑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지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의 아들 솔로몬 왕 때 현실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통해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좋은 것도 있었고 슬픈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결말은 슬픈 것이었습니다. 남의 손에 허물어지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막을 짓는 마음을 가져보면 어떻겠나…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설령 보잘 것 없이 느껴지고 심지어 오래 갈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이 되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라면 해보는 겁니다. 나에게 재능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브살렐이나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이 모세 시대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막절에 초막을 만들다 보면, 특히 아이와 함께 만들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면서 성막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내 마음 속의 성막을 물려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이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란 말이지요. 또한 이것이 놋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에노스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벨론 포로들의 마음이었지요. 이 마음이 오늘 구약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브살렐이나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이 모세 시대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막절에 초막을 만들다 보면, 특히 아이와 함께 만들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면서 성막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내 마음 속의 성막을 물려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이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란 말이지요. 또한 이것이 놋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에노스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벨론 포로들의 마음이었지요. 이 마음이 오늘 구약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도마가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메시야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런 말씀을 한 두 번 들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무슨 일을 하는 존재입니까?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가 메시야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야라 하면서도 오히려 악한 자들의 흉계에 빠져 십자가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도마는 이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미련없이 제자들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지 않아서 도마는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도마도, 이전에, 내가 죽었다가 살아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방황하던 도마는 긴가민가 하다가 생각한 바가 있어 제자들의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내가 어디론가 갈 거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따라다닌 죄로 얼마나 많은 곤란을 당하고 있는데, 당신은 또 우리를 떠난다고 말씀하시는가… 사실 예수님은 이전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나 봅니다. 또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후 도마는 예수님이 길이란 걸 알기 위해 무척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도 인도에 존재하고 있는 성 토마스 교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당장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게 아닙니다. 내 일생이 끝날 때까지 얼마 동안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구요? 그렇다면, 내일, 내 앞에서 벌어지게 될, 바로 그 일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 일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그렇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해답도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실천해야 하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놋땅에서 에노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이유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호렙산 기슭에다 성막을 만든 이유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토라학자들이 성막의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토라에다 언급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안국역에서 내려서 원남동까지 걸었습니다. 창경궁쪽으로 들어가는 고가도로가 없어지고 터널이 생겼습니다.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시키는 터널이지요. 본래 창경궁과 종묘는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걸 분리시켰지요. 창덕궁과 창경궁은 밤이 늦도록 사람들이 들락날락 했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뿌듯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창경궁 정문 바로 앞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 있습니다.  문승미 자매의 부친께서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조문을 갔었지요. 폐암으로 고생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지난 금요일 입원하셨는데 그 날 저녁에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문승미 자매가 많이 울더군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격려해 주시고 옳은 길을 가르쳐 주셨다고 하더군요. 딸에게 무한 존경을 받는 아버지는 행복합니다. 알고보니 고인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시더군요. 오늘 아침에 발인한다 하여 어제 저녁에 부랴부랴 갔었지요.

문상 후에 육개장을 먹고 있는데 함상욱 형제가 와서 편한 시간이 언제냐고 묻더군요. 자기 집에 와서 축복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축복기도… 우리 교회서는 잘 쓰는 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언젠가 그 집에 가서 축복기도를 해주려고 합니다. 복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해 줄 작정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싶더군요. 내일 독일로 가는 택호, 논산으로 가는 용준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길만 잘 알면 진리와 생명으로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 그 자체라고도 하지요.

우리는 지금 자못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권위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살다보니 코로나가 생기고 영적 카오스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길이시고 그래서 진리시며 생명이 되십니다. 사실 놋땅에서 에노스가 불렀던 여호와란 이름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호렙산 기슭에 세워졌던 성막도 사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인도로 건너가서 복음을 증거했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실 겁니다. 이걸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1) 성막의 평면도를 그려 봅시다.

2) 염소털과 염소의 가죽, 그리고 해달의 가죽은 어떤 용도인지 알아봅시다.

3) 성막에서 기둥과 대들보 대신 쓰인 게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2020년 10월 11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

 

출애굽기 36장 1-7절: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마태복음 21장 6-17절: [0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0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0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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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일몰로 금년의 초막절은 끝났습니다. 초막절은 7일 동안 지키는데, 그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인 일곱 째 날을 안식일처럼 지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인 일곱 째 날을 ‘호샤나 라바의 날’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 의미는 ‘큰 구원의 날’ 입니다. 큰 구원의 날이란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날이란 뜻이지요. 그래서 이 날 메시야가 오십니다. 그런데 이 날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다음 날,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다시 1년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 날을 제8일의 회중의 날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쉐미니 아트쩨레트’라고 하지요. 이것은 토라에 기록된 절기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게 바로 어제였습니다.

아무튼, 금년에도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십일조를 정산하고 창세기부터 성경읽기를 다시 해야 합니다. 하기야 이렇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메시야가 오시겠지요. 혹시 우리가 우리 생애에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후손들은 반드시 메시야를 만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은 대를 잇는 게 필요합니다. 이 믿음은 결국 메시야를 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야를 헬라어로 직역하면 그리스도가 되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초막절 마지막 날, 즉 호샤나 라브의 날,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이룬 것으로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 따르면, 사람들이 나뭇가지들을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막절 마지막 날의 풍경이 되겠습니다. 큰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어서 예수님은 메시야의 자격으로 성전에 들어가셔서 정화작업을 하셨습니다. 물론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따르면,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정화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별도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미 오셨고 이 세상에 사시면서 메시야의 사역을 수행하셨으나,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뜻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이후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 때문에 신약성경이 쓰여졌고 구약성경 뒤에 붙여진 것이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메시야가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메시야가 오셨다면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겠는가…라고 되묻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소위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그들을 핍박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이제 겨우 나라다운 나라를 이루어 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그들의 땅이 불안한 것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진짜 메시야, 저들의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박해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초막절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룬 것이지요. 스가랴 서 9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소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셔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자 이게 뭔 짓이냐고 나무랐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성전에서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감당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예수님을 찬양했으나, 정작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고 한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핍박 때문에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만 위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주가 되시고 구원주가 되시겠습니까? 유대인이 뭔데요. 같은 논리로, 유대인들만 위하는 메시야라면 그 메시야가 진정한 메시야이겠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들의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뉴욕에서 죽은 한 랍비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를 메시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렙산을 세 번 등정한 모세는 초막절 어간부터 성막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호렙산에 두 번째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만 해주신 게 아니고 완성된 성막의 모습이 푸른 하늘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미 성막의 최종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습니다. 성막을 만들려 한다. 그러므로 관련 재료를 가져 오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각종 재료를 가져 왔습니다. 아하- 이걸 이때 쓰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셨던 거구나…

아울러 모세는 성막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재능기부를 권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원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 사람인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셨다고 합니다. 브살렐은 아마도 보석 세공 기술이 아주 뛰어났나 봅니다. 이어 하나님은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시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셨다고 합니다. 오홀리압은  수를 놓는 기술이 뛰어났나 봅니다. 또한 그는 수 놓는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가르칠 수 있었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성막에  관련된 일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주도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성경은 성막에 관련한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마음이 지혜로운 (하캄 레브)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막을 성소라 칭한 것이 특이합니다. 미쉬칸이라 하지 않고 하 코데쉬라 했단 말이지요. 이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 등이 성소에 들어가는 물건들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으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지혜를 하크마라 하고 총명을 트부나(알아듣기)라고 합니다. 하크마는 눈으로 딱 보면 알아차리고 그 감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트부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크마와 트부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두 번 세 번 설명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코데쉬: 미쉬칸 즉 성막이 아님)에 필요한 물건들을 예물(테루마)의 형식으로 모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하크마와 트부나를 가진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 예물을 받아서 지시받은 대로 일을 했습니다. 물건을 만들고 수를 놓고… 그랬다는 말이지요.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성막에 관련된 모든 일은 한꺼번에 시작된 것 같습니다. 한쪽에서 법궤를 만들고 다른 쪽에서 메노라를 만들고 또 다른 쪽에서 휘장에 수를 놓고 또 다른 쪽에서 은으로 못을 만들고 등등…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마음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40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자유인이 되었고 또한 출애굽하여 호렙산까지 왔는데… 굶어죽기는커녕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성막을 만들고 있다… 이 성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의 광야생활도 이제 몇 달 남지 않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우리 앞에 있으며, 우리는 곧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이다… 마치 소풍 전야처럼 들떠있는 그들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감동이 지나쳐서 아침마다 예물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물을 모세에게 가져왔는지, 아니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가져왔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모세에게 가져왔고 모세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해야 되겠지요. 어쨌든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중지하고 모세에게 와서 예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을 하고도 남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게 불평거리가 될 수 있는 건지 의문을 갖습니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은 거지요.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부족한 것보다는 남는 게 낫지요. 많이 남으면 집으로 가져가면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한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겁니다.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 만큼만 하면 됩니다. 그 이하로 해서도 안되고 그 이상을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모세에게, 정해진 물량을 넘었다고 보고했던 것이지요. 모세는 이 보고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이상 예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 된 성경의 이야기지만 지금 당장 우리의 삶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감사절을 통해서 시간을 재편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사용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선택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지요. 하나님은 이것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새로운 시간과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먼저, 첫째, 하나님은 감사절을 통해서 시간을 재편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사용하게 하셨다는 점에 대하여… 모세 시대에 감사절이 세 번 있었습니다. 겨울을 지내며 자란 곡식을 이른 봄에 거두어 신에게 감사드리는 이른 봄의 감사절입니다. 겨울을 지냈지만 성숙 속도가 느린 곡식을 늦은 봄에 거두어 신에게 감사드리는 늦은 봄의 감사절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세가 살던 곳은 우리와 기후가 다른 중동 지방이란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름을 지낸 곡식이나 열매들을 거두어 신에게 감사드리는 가을의 감사절입니다.

사람들은 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이제 먹을 게 생겼으니 다음 감사절까지는 우리가 살아 갈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한부이긴 하지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른 봄과 늦봄과 가을에 있는 세 번의 감사절을 주의깊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감사절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절이 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름 그대로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장남들은 살려주신 날입니다. 문설주에 발라진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유월하게, 즉 뛰어넘게 하셨단 말이지요.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은 이른 봄의 감사절을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종속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유월절에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늦봄의 감사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훗날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을의 감사절… 가을의 감사절은 가을걷이를 텐트에 넣어 보관하고 이것으로 겨울을 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비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텐트입니다. 모양은 가을걷이를 모아서 넣어두는 텐트와 비슷하지요. 그러나 성막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것은 가을걷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무교절로, 오순절 또는 칠칠절을 맥추절로, 초막절을 수장절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갖게 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축약해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월절에 출애굽하게 하셨고, 7주 동안 열심히 호렙산 기슭에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주만에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오순절과 초막절 사이에, 모세를 40일씩 세 번이나 호렙산 꼭대기로 부르셔서 올라오게 하시고 세세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속죄일이 되었고 또한 초막절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초막절부터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막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보관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아무튼… 이 성막은 이후 5개월 반에 걸쳐 지어졌고, 출애굽 제 2년 1월 1일부터 7일 동안 봉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런 진행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하나님은 그해 초막절에는 이 성막을 가나안 땅에 들여 놓으실 작정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나르기 쉽게 포터블로 지어졌던 것이지요. 이 세상에 포터블로 지어진 신전은 성막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아끼고 우리의 노력을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제도로 자리매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절을 통해서 시간을 재편하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무엇보다 구원에 대한 소망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선택하여 세우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점에 대함 묵상입니다. 모세는 나이 80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80이란 나이가 별게 아니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때도 나이 80은 생을 마감하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는 대장정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생각을 초월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세를 한 2-3년 정도 사용하실 요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라는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따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지만 모세의 부관이었고 아울러 모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내 십보라와는 출애굽 제 2년에 사별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십보라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게르솜과 엘리에셀이었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모세의 두 아들의 활약이 미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고작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자손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과, 게르솜의 자손 스브엘이 곳간을 맡았다는 정도…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적인 지도자였던 모세의 후손들이 이 정도였다는 사실은 우리마저 섭섭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모세의 형인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었고 그의 네 아들들은 모두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세습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집에 비하면 아론의 집은 특별 대우를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을…

초막절에 즈음하여 모세가 만들기 시작한 성막은 사실 유다 지파의 브살렐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막을 만드는 일에 브살렐과 오홀리압만 참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열 두 지파가 모두 사람을 보내서 성막 만드는 일을 거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일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으라고 명령하신 성막,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공들여 만든 성막은 아론의 가족을 중심으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 관리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하나님의 인사제도가 많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 했겠지요.

 

어쨌든 오늘 심하토라의 날이 끝나면 초막절도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로 달려가게 됩니다. 금년 겨울은 매우 추울 거라고 하던데… 하지만 함께 부둥켜 안고 살면 추운 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렇게 살면서 겨울을 이겨냈으니까요. 그러면서 우리는 또 유월절을 바라보며 살게 되지요. 물론 그 사이에 대강절이 있고 크리스마스가 있고 하누카가 있고 투 브 쉐밭이 있고 부림절이 있습니다. 현현절도 있고 사순절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절기들은 토라의 절기들은 아니지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절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초막절에서 유월절을 건너다 보면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레위기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 작년 유월절부터 레위기를 묵상했었지요. 그러다가 레위기는 출애굽기 속편으로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올해 유월절부터 출애굽기를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기 묵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막 만들기만 끝나면 출애굽기도 끝나고 레위기 교재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번 겨울에는 이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초막절을 끝내고 겨울을 바라보는 시점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 각자의 임무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유월절의 해방과 자유, 오순절의 하나님 말씀, 그리고 초막절의 메시야 강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 후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이 되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즐겨 봅시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주시지 않은 것을 바치라고 하셨습니까?

2)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합니까?

3)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의 일과 구분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의 일과 구분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감당하는 방법이 다릅니까?

5) 우리에게 메시야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2020년 10월 4일

 

"이것이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애굽기 35장 20-35절: [20]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23]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24]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 [25]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27]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28]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2]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33]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34]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35]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3장 3-18절: [0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0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0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0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으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07]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0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0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느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 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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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다른 날이 아닌 티슈리 월 10일, 즉 속죄일에, 돌판에 새긴 십계명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게 하신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심으로써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호렙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십계명 판을 잘 간직했다가 성막이 지어지고 그 안에 법궤가 안치되자 십계명 판을 법궤 속에 넣었습니다.

이후 법궤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파괴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당연히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를 탈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가 법궤 속에 넣었던 십계명 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십계명 판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인데 먹으로 쓰신 것도 아니요 돌 판에 쓰신 것도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육신의 마음 판에 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 판처럼 사라지는 일이 결코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 따라서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광채를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보다 그리스도인이 더 위대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을 포함한 복음의 일꾼들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인지 유대인들도 동의를 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광채를 봤을 뿐이지만,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봤으나,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보았으니,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본 것이다… 이것이 오늘 고린도후서 3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결국 40년 후에 광야에서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셨고 또한 승천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찌 모세의 영광에 비하겠는가…

그들은 수건을 쓴 채로 하나님을 보고 우리는 수건을 벗고 하나님을 보니, 우리는 주님의 영을 알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있는 자유를 느낀다… 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큰 책임이 있으며 유대인들보다 더 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바울의 언사는 참으로 은혜스럽고 우리를 무척 격려하지만 한 편으로 큰 부담을 갖게 합니다.  

호렙산에서 내려 온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 껍데기는 빛이 나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출애굽기 35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안식일 준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거룩한 날이니 누구든지 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었는데 모두 39가지라고 합니다. 이 39가지 는 성막을 만들 때 필요한 일들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미리 불을 피워두란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날 전기등을 미리 켜둡니다. 하지만 안식일 중에는 이것을 끌 수 없습니다.

이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성막 만들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금, 은, 놋,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 염소 털,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와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라고 했습니다. 즉, 성막과 천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과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휘장과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불 켜는 등잔대와 그 기구와 그 등잔과 등유와 분향단과 그 채와 곤유와 분향할 향품과 성막 문의 휘장과 번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과 그 기둥과 그 받침과 뜰 문의 휘장과 장막 말뚝과 뜰의 말뜩과 그 줄과 성소에서 섬기기 위해 정교하게 만든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 등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가 두 번째로 호렙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지시하신 것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은 재료로 쓰일 물건들을 바침으로써, 또한 물건을 만드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재능 기부로 이 거룩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성막과 관련해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즉 레위 사람들이 주로 거명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밀접한 관련자들이기 때문인 것이고 성막 그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것이었고 또한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것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책임을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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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오늘은 초막절 두 번째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일 일몰부터 월요일 일몰까지는 속죄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속죄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몇 분은 금식을 하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속죄일을 기억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광야시대가 아니라 코로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제목이 무엇인지 챙겨 보았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들이 보내오는 소식들을 읽어보니 그들은 확실히 속죄일을 챙기고 있더군요. 그 중에서 랍비들의 속죄일 강론이 유익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주의깊게 들었습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용서를 한다는 게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용서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는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용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강론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와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티슈리 월 10일, 바로 속죄일에, 돌 판에 새긴 십계명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당연히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 때문에 깨져버린 십계명을 다시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십계명 판은 얼마 후에 성막이 지어지고 법궤가 만들어지자 법궤 안에 안치되어 지성소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성막 안의 지성소, 지성소 안의 법궤, 그 법궤 안에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겨 주신 십계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십계명이 들어있는 법궤는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관리하는 천막에 보관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다 성전을 지은 후에는 그 성전의 지성소에 법궤가 보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법궤 안에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전 586년,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성전을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지성소에 들어가서 법궤를 탈취했고 당연히 그 뚜껑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법궤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먼지만 발견했다고 합니다.

법궤 속에 넣어 두었던 십계명 돌판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당연히 누군가가 치웠겠지요. 이방인들이 십계명을 탈취해 욕보이도록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누군가가 치웠다면 어디에선가 발견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아직도 십계명 돌판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십계명 판을 영원히 치워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십계명 판은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남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 한 것은 참 문학적입니다. 게다가 그 편지는 먹으로 쓴 것도 아니요 돌 판에 쓴 것도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육신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계명 판처럼 사라지는 일이 결코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을 통해서 십계명 판보다 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신앙인들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새 언약의 일꾼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 따라서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광채를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보다 그리스도인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을 포함한 복음의 일꾼들에게는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인지, 유대인들도 동의를 할 수 있는 건지, 저는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율법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 껍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광채를 봤을 뿐이지만,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봤을 뿐이지만, 바울을 포함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보았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본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주장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 3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주장입니다. 모세는 결국 40년 후에 광야에서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부활하셨고 또한 승천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어찌 모세의 영광에 비하겠는가… 이것은 덤이 되겠습니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수건을 쓴 채로 하나님을 보았으나, 우리는 수건을 벗고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영을 알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서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 위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큰 책임이 있으며 유대인들보다 더 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바울의 언사는 참으로 은혜스럽고 우리를 무척 격려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부담을 아울러 갖게 합니다.

제 손자 하율이가 어느새 41개월이 되었습니다.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더 사랑을 받은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 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3층이 비좁다고 2층에 내려와서 놉니다. 그리고 1층에 내려와서 놀다가 밖으로 나가서 놉니다. 집 주위를 뱅뱅 돌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집 주변의 풀까지 뽑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침없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좀 아픈 게 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지금 서재로 쓰고 있는 공간에, 젊은 부부와 그들의 초등생 자녀 둘이 산 적이 있습니다. 2년 동안 이곳에서 전세로 살았지요. 부부는 맞벌이로 낮 동안은 집을 비웠습니다. 그러니 낮에는 자녀 둘만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녀석들이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서 얼마나 떠들어대며 노는지… 그때 저는 아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들이 살았던 2층 공간이 매우 좁았을 겁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많이 답답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지금같으면 제가 좀 다르게 행동했을 겁니다. 일층을 내주어서 마음껏 놀아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놀던 자리를 뒷정리 해야하겠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는 그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을 향해서 시끄럽다고 냅다 소리만 질렀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저를 무서워했겠지요.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 일러 바치기도 했을 겁니다. 3층 아저씨가 우리를 못놀게 해… 하지만 젊은 부부가 집 주인에게 대들겠습니까 또는 뭐라 꾸중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을인데… 지난 속죄일 내내 이게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인천으로 이사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년 속죄일에는 맛있는 거라도 좀 사들고 그들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게 작은 행동일지라도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다시 뉘우치고 다시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  

 

속죄일은 지난 월요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지난 금요일 일몰부터 초막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막절을 연말의 감사절로 지키되 수장절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수장절은 가을걷이를 추수해서 창고에 들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막절에 오는 주일을 우리교회의 추수감사절로 정해놓고 일년 동안의 모든 것을 망라해 감사하는 절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공동체로서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못해 유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각자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각자가 감사제목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감사는 결국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행동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십계명 판을 들고 호렙산에서 내려온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이때가 안식일이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내려온 날이 속죄일인데 속죄일을 일컬어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을 거라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속죄일로부터 5일 후에 초막절이 시작됩니다. 초막절은 7일 동안 계속 되는 절기지요. 그런데 그 7일 중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을 또 안식일처럼 지켜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초막절의 일곱 날들 가운데서 첫째 날과 일곱 째날을 제외한, 가운데 다섯 날들은 평일처럼 보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기간에 모세가 성막을 짓겠노라고 선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초막절을 장막절로 지키기 위해 예물을 가져왔는데 그게 바로 이집트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6개월 전에 출애굽한 사람들의 수중에 가을걷이가 있을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가지고 있던 물건을 하나님께 바쳤더니 그것이 성막 재료로 사용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었지요.

성막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건축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두신 예배 방법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짓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 이상의 많은 재물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많은 재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게 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재물을 넘겨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있었던 어두움의 재앙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사람들이 숨겨 둔 많은 보물을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왕 파라오의 이름으로 키우던 가축들을 그들의 소유처럼 다 끌고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파라오는 아뭇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기력이 쇄잔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아뭇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끌고 나온 가축들 가운데 극히 소량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모세가 초막절 평일에 성막을 짓겠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왔습니다.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에 관련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재능기부를 하라고 요청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 가운데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가운데서 유다 지파의 브살렐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이 뽑혔습니다. 그때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이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막은 의무감이 아니라 감사의 결과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은 감사였고, 또한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토대로 성막이 지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막이 오래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우리가 원해서 드리는 감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서 얼마를 구분하여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감사란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결코 주지 않으신 것을 구태여 주셨다고 우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감사는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주지 않으신 것을 거두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남에게 돈을 꾸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 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안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감사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과 공기와 물과 햇볕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게 없으면 생명 현상이 제대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하늘과 땅과 공기와 물과 햇볕을 모두 언급하기는 어려우니 땅 하나만 생각해 봅시다. 만약 어떤 땅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일부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겠습니까? 아마도 엄청난 불평등이 양산될 것입니다. 이 땅은 한 평에 1억 원이 넘게 되고 다른 땅은 한 평에 1만 원도 안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이용해서 벼락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땅을 팔아도 살아 갈 수가 없게 되어 급기야 몸을 팔게 되겠지요. 이런 사회가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엄청난 불평들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들도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레위기 2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지만 한국교회는 스스로 땅을 사서 부동산 부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땅을 사서 부동산 부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롭게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십일조를 헌금으로 받아주시겠습니까?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쯤 제가 다른 교회서 선교 담당을 하고 있을 때 그 교회의 헌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가를 조사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헌금으로 제대로 쓰이고 있는 액수는 전체의 10% 정도였습니다. 나머지 90%는 소위 종교사업자들이 착복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나 조사해 보니 부동산 부자들이 또 복을 받기 위해 내는 헌금 아닌 헌금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전체 헌금의 90%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자가 되었지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요즘 광화문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헌금은 그 자체로 교회의 암덩어리가 됩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서 일부를 돌려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헌금은, 예배를 위해서, 또한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헌금이란 무엇인가… 이걸 가지고 선지자들과 백성이 갈등을 일으킨 적이 많았단 말이지요.

진정한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마가복음 12장 41-44절과 누가복음 21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과부의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비유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커다란 헌금통이 놓여있었나 봅니다. 부자들은 거기다 큰 액수의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구제 대상인 과부들도 헌금을 하더란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관심을 갖고 그들의 헌금 행위를 지켜 보셨습니다. 그런데 과부들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의 동전을 넣었다고 합니다. 두 렙돈은 헬라 시대의 동전 두 개를 말하는데 로마의 동전인 고드란트 한 개와 가치가 같다고 합니다. 고드란트는 로마의 최소 가치 동전인데, 목욕탕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돈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4천 원쯤 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예수님은 부자들이 낸 큰 액수의 헌금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구제대상인 과부들이 낸 두 렙돈, 한 고드란트의 헌금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적은 액수의 헌금을 생활비 전부라고 하시면서 과부들을 추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들도 헌금하라는 뜻으로 추켜 세우신 건 아닙니다. 과부는 토라가 정한 구제대상으로 헌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활비 전부를 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과부들은 굶어죽을 수 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그들이 굶어죽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과부들은 굶어죽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헌금에 대한 견해는 그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신 겁니다. 그것은 성전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종교사업자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돈을 많이 들여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통에 넣은 돈이 어떤 돈인지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시 부자들이 지니고 있는 돈이야 당연히 불로소득이었습니다. 당신이 자고 있을 때도 당신의 돈은 일하고 있다…

과부들이 왜 어렵게 살아가겠습니까? 남편이 없기 때문이지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남편이 없습니까? 부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부자로 살게 하기 위해 몸바쳐 일하다가 결국 알량한 임금마저 받지 못하고 죽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부들은 헌금을 하려면 생활비 전체를 털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헌금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헌금으로 빈 호주머니를 또 채워줄 것입니다.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마르는 날이 없을 겁니다. 그들의 헌금은 희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감사도 없었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운영되고 있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 위의 돌이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하셨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지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운영되는 성전이라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저주를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저주하셨고, 그 저주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성전은 결국 예수님의 저주대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쌓여있는 돌무더기를 볼 수 있습니다. 돌 위에 돌이 쌓여 있습니다. 서쪽 벽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서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폐허가 되었지요. 이것은 이 성전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 의해 가차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제대로 하면 이방인은 파라오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방인은 느브갓네살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실 만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감사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생각해 내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감사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상한 심령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도저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하는 표현도 감사의 제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목으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이걸 구태여 입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께 마음으로 말해도 됩니다.

오늘은 초막절 기간 중에 오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각기 감사제목을 나누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일상을 감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1)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온 사건을 속죄일로 설명해 봅시다.

2) 바울은 모세의 얼굴 광채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3) 바울의 견해 중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 재료로 가져온 물건들의 출처는?

5) 재능기부란 무엇을 말합니까?

 


2017년 3월 26일

"안식으로 시작하다"

출애굽기 35장 1-9절: [35.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7]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8]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9]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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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출애굽기 35장은 갑자기 제 4계명인 안식일 계명으로 시작합니다. 토라 두루마리는 본래 장 절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35장은 34장에 이어 진 것으로 봐야 합니다. 따라서 35장은 모세가 마지막으로 시내산 꼭대기에 내려 온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4장에 따르면 그의 손에는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십계명 판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을 해서인지 모세의 얼굴은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자 모세 는 스스로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이어서 35장에 들어가자마자 제4계명이 나왔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물론 안식일 명령을 독립적으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토라 두루마리가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 게 아닐까요?

필자는 안식일 계명이 유독스럽게 여기에 기록된 것은 이것이 모세의 하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내산 꼭대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 온 것이 안식일과 상관이 있을 거라는 추정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유대인들도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왔을 때가 티슈리 월 10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져 보면 오순절부터 티슈리 월 10일까지 대략 120일이 됩니다. 모세가 40일씩 세 번 시내산 꼭대기에 잠도 자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거했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모세의 마지막으로 시내산 거함을 끝내는 시점이었지요. 80세 된 노인 모세가 세 번이나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다니… 물론 평범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나 당시 모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티슈리 월 10일에 들고 내려온 십계명판은 사실 두 번째 십계명 판이었습니다. 첫 번째 십계명판은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에머랄드 판을 다듬으셔서 거기에 손수 십계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 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산 중에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목격하고 던져서 깨뜨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너희같은 작자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돼지 발에 진주와 같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똑 같은 크기로 돌판 두 개를 다듬어서 다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티슈리 월 10일에 모세가 들고 내려온 십계명 판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새겨 주신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티슈리 월 10일이 무슨 날입니까? 초막절 닷새 전이기도 한 이 날은 욤 키푸르, 즉 속죄일입니다. 그리고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입니다. 매우 강한 안식일이지요. 안식일에는 그래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지만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 하루 종일 금식합니다. 속죄일은 안식일 율법이 가장 엄하게 적용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 35 1-3절의 안식일 계명은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의 계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태여 제4 계명을 강조하실 이유가 속죄일이란 이유 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속죄일이 지난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과 성구를 만들 재료를 가져오게 했고 재료가 모이자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성막과 성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막과 성구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초막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의 성경을 읽어 보면 성막과 성구는 석달 동안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넉 달째 부터 이에 대한 실험운용이 있었고 결국 초막절로부터 6개월 후인 출애굽 제2년 첫날에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35장 처음에 갑자기 등장한 안식일 명령은 속죄일과 초막절을 생각하면서 그 의미를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막과 성구는 안식에서 시작이 되었던 것이고 그 안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요. 안식은 속죄와 더불어 진행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들고 내려온 십계명판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금송아지 우상숭배 때 모조리 죽었어야 했을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판을 다시 새겨주신 게 그 용서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십계명판은 케투바였거든요. 모세를 중매장이로 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혼인증명서… 그 혼인증명서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로, 다시 말해서 간음 행위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혼인증명서를 재발급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겁니다. 그리고 그 날을 안식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 할 수 있는 속죄일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욤 키푸르라고 하지요. 이 날은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날에 일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엄하게 안식일 율법을 만드셨을까요? 속죄의 의미가 그만큼 지엄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도 숨을 고르고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겠지요. 안식을 취하면서 말입니다. 안식 후에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본 성막을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시내산 꼭대기 위의 푸른 하늘에 마치 레이저 쇼처럼 나타났던 그 성막… 그리고 그 안에 진열되어 있던 성구들의 모습… 그걸 그려 보면서 필요한 물건을 생각하고 또 설계도를 그리고… 그렇게 몇 일을 보냈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와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 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주인 노릇을 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았던가… 금송아지 우상숭배만 했던가? 덥다고, 또는 춥다고, 배고프다고, 또는 다른 게 먹고 싶다고… 얼마나 많은 불평을 했던가… 노예로 살았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즐거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뻣뻣하고 교만했던가… 그래서 모세가 성막과 성구를 만들테니 재료를 가져 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적극적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넘치도록 충분히 가져 왔습니다. 모든 일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그들은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표현일 수도 있었습니다. 자유인으로, 그리고 속함을 받은 신앙인으로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열었습니다.

설교문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에 안식일 관련 말씀이 나옵니다. 안식일 관련 말씀이 나올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 나오기 때문에 생뚱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내용도 제4계명과 비교해 보면 좀 다릅니다. 출애굽기 35 2절과 3절을 보면,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라, 그리고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라… 이런 말은 사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는 들어가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앞뒤의 구절을 읽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맥에서 이 말씀이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성경은 장 절 구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 하나로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장 절이 들어간 것은 16세기에 인쇄술이 발명되어 성경을 인쇄하게 되었을 때 출판업자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책을 만들 때는 이게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일을 때는 장 절을 무시하고 읽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의미가 끊기지 않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5장 초반부에 안식일 말씀이 나오는 것은 34장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안식일 말씀은 35 4절 이하의 말씀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별 문제 없이 35 1-3절에 기록된 안식일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것은 34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34장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면, 모세는 십계명 판을 들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눈이 부셔서 모세를 바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을 가져다가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모세가 가지고 내려왔던 십계명판은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새겨주신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판은 모세가 깨뜨려 버렸지요. 첫번째 판을 들고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을 향해 십계명 판을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십계명 판은 깨져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도 깨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두 개의 돌판을 잘 다듬어서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판에 십계명을 다시 새겨주셨습니다. 모세는 두번째 십계명 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은 다시 효력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두번째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티슈리 월 10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 하셨던 겁니다. 특별한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신 거지요. 그래서 이 날 일하는 자는 죽이고, 집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던 겁니다.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에는 나오지도 않는 벌칙을 추가하신 겁니다. 바로 이 특별한 안식일을 우리는 속죄일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욤 키푸르라고 하지요.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짓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이 체계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안식일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안식하면서 그 우상숭배의 죄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다짐하라는 의미지요. 그러므로 그 날 일하는 자는 죽여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업신 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만은 집안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일에는 하루 종일 금식을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속죄일은 일년 중 가장 특별한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일본을 와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와식, 와규… 이런 말을 씁니다. 와식은 일본 음식이란 뜻이고 와규는 일본 ‘소’란 뜻입니다. 와는 평화란 단어에서 화를 말하는 것인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와를 왜라고 하지요. 왜소할 왜… 그래서 왜식, 왜놈, 왜구라고 합니다. 부정적 의미의 말이지요.

그런데 와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대개 평화의 화를 모든 사람이 함께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와는 우리의 화와 아주 다릅니다. 와를 설명 할 때, 꼭 필요한 속담이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바로 이 속담입니다. 그룹 안에서 튀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룹 안에서 튀는 행동을 하면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이걸 이지메라고 하지요. 와를 어기면 이지메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와는 기본적으로 종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평화를 말합니다. 오야붕의 명령에 꼬붕이 순종하는 것이 일본식 와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오야붕 중의 오야붕은 바로 천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천황에게 순종하는 것이 궁극적인 와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배층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신또이즘 입니다.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지요. 신또이즘은 일본 전국에 8만 개의 신사, 즉 진자를 거느리고 일본인들의 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민중봉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 역사상 민중봉기가 딱 한번 있었습니다. 1637 12 17일 부터 그 다음 해 4 15일 까지 대략 넉달 동안 시마바라 성을 중심으로 한 민중봉기였습니다. 이것을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합니다. 영화 침묵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지요. 지난 주에 저는 일본 규슈에 있는 시마바라에 다녀왔습니다. 규슈의 내해인 아리아케 만에 있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에서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민중봉기로 수 많은 농민들이 희생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와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이지요. 그 숫자가 2 6천 명이라고도 하고 3 7천 명이라고도 합니다. 일정하지 않은 것을 보니 결국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제 생각에는 10만 명 이상이 죽어나간 것 같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기독교와 조선인을 생각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바라-아마쿠사의 영주였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요. 그는 임진왜란 때 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자기 영지로 데리고 와서 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본에서 기독교 전파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포로들은 기독교를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던 이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걸 위험하게 생각했습니다. 일본에 기독교를 믿는 조선인들이 생긴 것은 모난 돌이 생긴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모난 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정으로 쪼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에도 막부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축출하고 시마바라의 기독교인 영주를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막부에 충성하는 자들을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영주로 삼았습니다. 새로 온 영주들은 안보를 위해 성을 쌓는다고 하면서 민중들에게 엄청난 세금과 노역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고문을 하고 배교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마바라의 난은 4개월 만에 진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천황이 계신데 어찌 하나님이란 신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란 신을 섬긴다면 그는 일본인이 아니다… 시마바라의 난이 실패로 끝나면서 일본의 기독교는 위축이 되고 말았습니다지금까지 그런 위축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죄일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안식일에 만약 일을 한다면 사형에 처라하고 하셨고 아울러 집안에 불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일을 한다고 처형시키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일을 안한다고 처형하는 수는 있어도 일을 한다고 처형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속죄일같은 새로운 안식일에는 더욱 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집안에 불을 피우지 말고, 그러니까 밥도 먹지 말고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속죄일이라는 새로운 안식일을 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을 일본의 와로는 결코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또이즘에 취한 일본인들의 비극이 되겠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아래로는 민중을 업신 여기는 것이 신또이즘이고 또한 천황제도입니다. 이것이 또한 일본 교회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7장은 아주 중요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보통 안식일과 욤 키푸르, 즉 속죄일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 봅시다.

2) 왜 안식일 명령이 성막과 성구 제작 직전에 떨어졌습니까?

3) 모세가 하나님이 두 번째로 새겨주신 십계명판을 들고 내려온 때를 속죄일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지혜에 대해 평가해 봅시다.

4) 속죄일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과 성구를 만들 재료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엄청난 양을 자발적으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일까요?

 


2016년 3월 6일

"우리와 함께 행하옵소서"

출애굽기 36장 2-7절: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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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서 볼 것을 다 본 후에 산 기슭에서 대기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하나하나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것은 성막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성막은 텐트라 할수있으나 그 규모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텐트처럼 분리해서 인력으로 이동시킬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이에 걸맞는 설계를 하고 적절한 재료를 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 속에는 이런저런 기물들이 필요했습니다. 성막뿐 아니라 기물에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양이 있었으며 또한 규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기억력은 대단했던것 같습니다. 그는 시내산 꼭대기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마치 레이저 쇼처럼 보여주신 모든 것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재현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재현에는 특별히 두 사람의 공이 컸는데, 그 두 사람은 유다지파에 속한 건축가 브살렐과 단지파에 속한 공예가 오홀리압을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몇 달 안에 성막과 그 안에 둘 기물들을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성막은 모세가 티슈리 월 10일에 시내산에서 내려온 직후에 시작하여 석달 동안 지어졌고 이후 석달 동안 시험 운용한 후 출애굽 원년 아달 월 29일에 완공하고 그 다음 날인 출애굽 2년 니싼 월 1일에 봉헌한것으로 봅니다.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 그리고 마음이 지혜로운 자원자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성막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더 많은 예물을 들고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는지 성막을 만드는 일에 지장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남음이 있다... 무슨 일을 하는데 재료가 남으면 좋은거지요. 그러나 그게 백성이 바친 헌물이라는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남기면 함부로 쓸수 있지요. 그건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에서 일하는 일꾼들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할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명령이었습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예물을 가져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 이미 백성이 가져온 예물의 양이 모든 일의 재료가 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이동해야 하는것이라 튼튼하고 강하게 그리고 가볍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료도 좋아야 하지만 적절한 설계가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성막에서 참 많은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성막이 팀웍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은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그대로 기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성막을 만드는 재료로 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긴밀한 교제를 위한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헬라어 ‘퀴리우’에서 나온 말입니다. 퀴리우란 퀴리오스의 소유격으로 ‘주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독일어 Kirche를 보면 헬라어 퀴리우의 흔적이 남아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이걸 중세영어에서 Church라고 했습니다. Ch발음은 ㅋ 발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퀴리우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분리될때 그러니까 약 5세기경에 유대인의 회당 앞에 기독교인의 예배장소를 만들고 이걸 일컬었던 말입니다. 시나고그에 대항한 말이 퀴리우였던 겁니다. 그러므로 퀴리우 또는 키르헤 또는 처치 또는 교회란 말에 건물적 요소가 들어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건물은 편의적 장소일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셨던 성막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을뿐입니다. 성막에서 많은 의미를 찾을수 있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상징일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좀더잘 이해하고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완벽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키르헤나 처치나 교회는 헬라어 성경의 ‘엑클레시아’와 그것의 원어인 히브리 성경의 ‘카할’을 번역한것으로 봐야합니다. 카할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즉 이집트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엑클레시아는 그걸 그대로 직역한 말이지요. 카할은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카할에게 화를 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를 매우 어렵게 했던 사람이 마르시온입니다. 영지주의자지요. 이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이 중요하지 예수님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예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남도 없고 따라서 삶과 죽음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럴수는 없다는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말씀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 즉 ‘로고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지요.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비록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이 땅에서 구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마르시온에 따르면 이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세상을 버리고 오로지 선하신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공동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은 마르시온의 영지주의와 매우 비슷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개인주의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상가로 소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메시지도 여러 사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옵션처럼 소개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필연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선포에 근거하지 않고 초대교회의 산물로 치부됩니다.

교회는 구원을 이루는데에 필요하지 않은것을 넘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의 권위는 받아들이지 않는 근대 계몽주의를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단 성경 자체가 개인주의를 배제합니다. 성경 어디에 공동체를 떠난 개인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그 나라의 빛을 발할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 들이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것입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님을 머리로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분리될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도 분리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론은 신학의 여러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신학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짓는 지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교회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에게 직접 도래하기보다 교회를 통해 개인에게 다가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구원의 기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없는 교회 사상도 문제지만 교회가 없는 또는 무시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도 문제가 됩니다. 물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일치하는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세속에서 결코 해소될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제 아무리 밀접하다 해도 그 차이는 분명히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모세는 성막을 만들기 위해 어떤 팀웍을 구축했습니까?

2) 성막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용도였습니까?

3) 교회 공동체의 필연성 또는 필수성에 대해 논해 봅시다.

 


2012년 3월 18일

출애굽기 35장 30절 - 36장 7절: [30]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31]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2] 금과 은과 놋으로 제작하는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며 [33]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34]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35]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2]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3]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으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5]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이르되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7]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References 마태복음 28장 11-20절: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일꾼들

광고 카피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광고 카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엿새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주일은 쉬라고 하셨습니다. 쉰다는 것은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던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쉬게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평생  파라오의 노예로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받았던 것입니다. 자유인이 누릴 있는 것이지요.

차를 사면, 두툼한 설명서 권이 따라 옵니다. 영어로 매뉴얼이라고 하지요. 엔진 오일이나 기어 오일은 언제쯤 갈아 넣어라, 안전 장치는 어떤 있다, 자동 키는 이렇게 써라, 순정부품은 어디서 판다등등차에 관한 모든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설명서를 읽지 않고도 차를 사용할 있습니다. 내가 차니까 마음대로 굴릴 있지요. 그러나, 아무리 차라고 해도 자동차 제작자들이 만든 설명서대로 사용해야 고장 없이 오랫동안 차를 사용할 있습니다.

우리 몸과 정신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 정신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사용하면 탈이 수가 있습니다. 몸과 정신을 관리하면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용할 있지요. 자동차를 만든 사람들이 차동차 설명서를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사용 설명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일이 되겠지요.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육체와 정신이 쉬는 날입니다.

성경은 쉬는 것도 일하는 것만큼 엄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하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쉬지 않으면 일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어떻게 일을 계속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우리 몸을 위해서 쉬어야겠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서 지난 엿새 동안 했던 일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엿새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피드백을 계속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한 삶을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창조적인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다듬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애를 마칠 , 위대한 신앙인으로 칭송을 받게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명 판을 받아서 내려 , 그는 성막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짓기 위해 기꺼이 예물을 바쳤습니다. 모세는 브살렐, 오홀리압 같은 젊고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서 성막을 짓게 했습니다. 성막의 디자인은 모세가 호렙산 꼭대기에서 목격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모세가 말한 대로 설계도를 그렸고 이에 맞추어 이런저런 부속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성막 안에 놓을 여러 가지 기명들도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휘장에 온갖 수를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힘만으로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남녀노소가 성막 일에 달려 밖에 없었습니다. 

성막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땀한땀 의미를 담아야 했기 때문에,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달려 들어 감당을 해야 해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가끔 선교 현장에서 사람은 필요 없다 돈만 보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리고 돈은 다다익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은 틀린 말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만들 , 많은 물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건을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예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예물이란 자원해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억지로나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것은 예물이 아닙니다. 그건 뇌물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다익선이란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것만 받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적절한 선에서 예물 바치기를 중지시켰습니다.

교회의 헌금에서도 이게 중요합니다. 헌금은 우러나오는 마음의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거두면 안됩니다. 우러나오는 마음의 예물이 아니거나 필요 이상으로 예물을 많이 거두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일하는 아니라 돈이 일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패하게 되는 겁니다.

요즘 많은 교회들이 금융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판교 신도시만 해도 27 교회들 가운데 24 교회가 금융 부채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운데 걸어간다고 표현합니다. 치읓 받침의 빛이 아니라 지읒 받침의 빚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부동산으로 돈이 헌금이란 이름으로 교회에 엄청나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부동산으로 돈이 헌금으로 바쳐지면 그건 부동산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동산에 엄청난 투자를 하게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성장학이라는 사이비 학문이 많은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써야 한다면서 무조건 건물이 교회를 만들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은행 빚을 지고 가운데 걸어가게 것입니다.

저는 헌금을 위해서 기도할 , 한가지를 기도합니다. 6 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이 우리 교회의 십일조가 되기를 바랍니다하는 기도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의 십일조는 아주 요긴하게 쓰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의 십일조가 드려지는 교회에서는 금융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의 재정은 빠듯한 같지만 항상 모자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항상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빠듯한 같지만 모자라지 않게 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꾼에 대한 생각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구약의 본문 말씀에 따르면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모세 같이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합니다. 이른바 선지자들입니다. 둘째,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젊고 창조적이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셋째, 여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긴가민가 하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버리시지 않고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주십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손을 함께 하며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안식에서 출발합니다. 안식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신비한 점이기도 합니다.

모세 같은 늙은 자켄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가서 40 가까이 내려오지 않자 몹시 불안해 졌습니다. 그래서 에이레브 라브라는 불평분자들은 이런 불안을 이용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를 하게 했고 결국 이집트로 되돌아 가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세를 생각할 , 조심해야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말씀하신 위대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우리와 다른 신비한 사람일 수는 없었습니다. 역시 모자란 인생을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역시 우리처럼 희로애락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우리가 달랐던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40 동안의 양치기 삶입니다. 하지만 시대에40 동안 양치기로 살았던 사람이 모세뿐이겠습니까? 많았겠지요. 그러나 모세는 40 동안 양만 치고 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모세는 40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히 묵상하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고통과 해방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40 삶을 통해서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80세가 되던 , 호렙산 기슭에서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로 임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모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80 이후 40 동안 노인이었지만 민족의 지도자로서 활기찬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노인을 자켄이라고 합니다. 자켄은 우리 말로 번역하면 장로가 됩니다. 장로는 노인이지만, 지혜로워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있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의 이치와 사리를 분별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자켄은 신앙적으로 또한 세상적으로 지도자란 말이지요. 우리는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단순한 노인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있는 노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켄,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자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켄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성막을 만들기에는 이미 늙었습니다. 노안이 와서 사물을 제대로 분별할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구를 이끌고 살다 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깨달았습니다.  노인은, 자켄은, 장로는, 육체로 일하는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지혜와 지식으로 일한다는 것을자신의 경험과 지혜와 지식을 젊은이들에게 전승시켜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젊은이들이 일을 하지만, 일을 지도하는 사람은 노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켄은 젊은이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일을 시킬 있지요. 그래야 젊은이들의 미래를 상상하고 올바르게 준비하게 있습니다. 모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세가 우리와 비교해 성정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자켄으로서, 장로로서, 늙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브살렐 같은 젊은 일꾼들

모세는 브살렐 같은 젊은 일꾼들을 뽑아서 성막을 만들게 했습니다. 브살렐은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의 손자였습니다. 모세에게는 외손주가 되는 사람이었지요. 브살렐을 영어로는 베짤렐, 히브리어로는 베트짤렐이라고 발음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National Betzalel School of Art and Design이란 학교가 있습니다. 국립 베트짤렐 예술학교란 뜻이지요. 1903년에 설립이 되었으니 벌써 110년이 학교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그림은 베트짤렐 예술학교의 표지입니다. 표지 중앙에 법궤와 속죄소가 그려져 있는 재미있지요. 학교에서는 공예 기술과 여러 가지 디자인 기술을 배운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 가운데서 누가 베트짤렐 예술학교에 가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이유로 베트짤렐이란 이름을 예술학교의 이름으로 삼았을까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유대인 사회에서 베트짤렐, 브살렐의 위치를 있습니다.

브살렐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남보다 탁월한 눈과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브살렐이 무엇을 복제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교히 연구를 해서 각종 기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창조적인 장인이었던 것입니다. 브살렐은 모세가 미처 말해 주지 않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해서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모든 딱딱 들어맞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을 분해해서 나를 때도 파손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품을 모아 합체를 때도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어느새 온전한 성막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성막을 만들 , 모세의 외손자인 브살렐만 대우를 받았던 아닙니다. 밖에도 오홀리압이라든가 이름이 밝혀 지지 않는 다른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성막을 만드는 일에 참여를 했고 브살렐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모세나 아론같은 자켄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격려했고 되어 가는 일에 감동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 성막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모든 세대가 어울리며 합력하여 감당해 가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나라에서나 우파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우로나 좌로 치우치면 공의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치우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 위에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대는 신세대를 받아주고 신세대는 구세대를 믿고 존경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구세대가 먼저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진리가 빛을 발하게 해야 합니다.

여자들

모세의 이야기 가운데서 인구조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남자 장정의 수만 세이 되는 보게 됩니다. 여자들은 인구에 포함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집트의 영향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여자들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미리암, 십보라, 슬로브핫의 딸들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시대적인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중요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여자도 자켄으로 대접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속담에 여자가 말했다…” 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는 것은 그래서 믿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법정에서 진술되는 여자의 증언은 법률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예수님께서는 단칼에 자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8장에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집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겠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증거를 여자의 말이라면서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소위 남자인 제자들은, 훗날 사도가 되었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자들의 말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갈릴리의 어떤 산으로 그들은 과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자의 말이라고 무시했을 그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여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있었습니다. 이후 여자들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여자들 스스로 사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 때의 여자들의 활약상은 일을 다루어도 다루지 못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여자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다만 기록을 하는 남자들이 간과해 버렸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아무튼하나님께서는 사회적 통념에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한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여자를 무시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안식일 또는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가 예배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걸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의 증언을 들었지만 여자들의 말인지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가 있어상식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여자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있어사내의 자존심이 그들의 의혹을 증폭시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에 따라서  갈릴리에 있는 어떤 산으로 갔습니다. 어떤 산인지 구체적으로 우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산상수훈을 반포하셨던 가버나움 뒷산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산에 모인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자들이 긴가 민가 했다고 합니다. 하급 제자들만 긴가 민가 했다는 아닙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도 긴가 민가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수제자 중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수탉은 베드로의 수치의 상징입니다. 그런 부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상최대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 그리고 명령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은 완벽하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지상최대의 명령을 내리신 아니었습니다. 허세가 가득하고 마음에 의심이 가득한 남자들에게 지상최대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헛점투성이였던 제자들을 보면서 용기를 있습니다. 저런 사람들도 사도로 선택이 되었으니 나도 희망이 있는 아닐까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있어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것부터 우리의 신앙 생활을 시작합시다. 일주일 내내 일하라는 것보다 쉽지 않습니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바칠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브살렐을 거쳐 자켄으로 변해 것입니다. 긴가 민가 했던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을 대면하게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확고한 신앙인이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후손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지금 알게 되었으니 미래는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양 손에 십계명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 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박멸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상숭배를 한 자들만 멸하시라고... 이후 모세는 사파이어로 돌 판 두 개를 만들어서 다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또 4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파이어 판에 다시 십계명을 새겨 주셨습니다. 모세는 티슈리 10일에 시내 산에서 내려 왔습니다. 욤 키푸르, 즉 속죄일입니다.

복음, 미쉬칸을 지어라

티슈리 11일, 그러니까 욤 키푸르 즉 속죄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모세가 우상숭배자들을 박멸한 후 사건은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용서를 해주시기는 했지만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서운 죄를 용서 해 주셨다는 것과 하나님꼐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쉐키나가 임재할 장소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장소를 '미쉬칸'이라 합니다. 미쉬칸을 어떻게 지을 지, 거기에 무엇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 지...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미 하나님께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때 처음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말을 듣고 감격했습니다. 가슴 속에 끓어 오르는 흥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니... 그들은 모세가 말하는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시행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모세는 미쉬칸을 짓는 일은 아주 거룩한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안식일에 그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일렀습니다.

미쉬칸과 안식일, 그 커넥션

그렇다면 안식일에 우리는 미쉬칸에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나요? 미쉬칸을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39가지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아보트 멜라코트'라고 합니다. '일의 주요 분야들'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안식일에는 이 39가지의 일들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39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씨뿌리기 2) 밭갈기 3) 거두기 4) 다발 묶기 5) 타작하기 6) 까부르기 7) 고르기 8) 갈기 9) 체질하기 10) 반죽하기 11) 빵굽기 12) 양털깎기 13) 양털빨기 14) 양털두드리기 15) 양털염색하기 16) 잣기 17) 양털짜기 18) 두개 이상 고리 만들기 19) 두 올 이상의 실로 짜기 20) 두 올 이상 나누기 21) 묶기 22) 풀기 23) 두 바늘 이상 꿰매기 24) 찢기 25) 짐승잡기 26) 짐승죽이기 27) 가죽벗기기 28) 고기 절이기 29) 무두질하기 30) 가죽 마르기 31) 가죽 자르기 32) 두 글자 이상 쓰기 33) 두 글자 이상 지우기 34) 집짓기 35) 허물기 36) 불끄기 37) 불붙이기 38) 망치로 때려 열내기 39) 사적 공간에서 대중적 공간으로 물건 나르기 또는 대중적 공간에서 물건 나르기.

만약 어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이 멜라코트 가운데 하나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이 사실을 고발합니다. 그러면 베이트 딘은 돌로 쳐 죽이라는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우발적으로 이런 일을 했으면 코르반 ㅋ하타트 즉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필요한 물건 수집

모세는 미쉬칸을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금, 은, 구리, 파란 빛이거나 보라 빛이거나 붉은 빛 물을 들인 털실, 좋은 린넨, 염소의 털, 붉은 양의 가죽, 타ㅋ하쉬의 가죽, 슅팀 나무, 올리브 기름, 향품, 보석들... 그러나 개인 할당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적에 맞게 내고 싶은 사람이 내되 원하는 만큼 가져오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물품이 모이자 미쉬칸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모세는 창고로 쓸 텐트를 쳤습니다. 그 방향은 사람들이 만나를 거두어 먹는 쪽이었습니다.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품들을 들고 미쉬칸으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에게 인사를 할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즐거웠을까요? 모세는 물품을 접수하는 팀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매일 얼마나 물품이 들어왔는지 조사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모세는 12 지파에게 각각 사람들을 보내서 미쉬칸을 만들기 위해 물품을 바치도록 뿔 나팔을 불어 알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쁨과 환호 속에 물품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직 12 명만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2 지파의 족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물품을 내고 모자라면 그 나머지를 모두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충분히 기증되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의 가슴에 붙일 12개의 보석들과 여분의 향품과 올리브 기름이 기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족장들은 이런 물품들만 기증하면 되었습니다.

앞에 선 소년

미쉬칸 건축 책임은 베트짤렐이 맡았습니다. 베트짤렐은 오홀리아브를 조수로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솜씨 좋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불렀습니다. 이들은 39가지 일들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베트짤렐은 미쉬칸 안에 놓일 벱궤나 메노라 같은 성스런 도구들을 디자인했습니다. 법궤는 제1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는 요쉬야후 왕 때 50년 동안 감추어 졌던 것을 제외하면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제3 성전이 세워지면 어디선가 베트짤렐이 만들었던 법궤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는 제대로 일이 되어 가고 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각각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모든 것들을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본 그대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3개월 동안 지속이 되었습니다.

 

질문과 대답

 

1) 오늘 파라샤는 출 25-31장의 명령을 실천한 것입니다. 실천의 내용이 명령의 내용과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성막 짓는 작업은 언제 시작했으며 언제 끝났습니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성막과 그 안의 기물들을 직접 제작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들입니까?

4) 예물을 바치는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5) 교회에서 다다익선이 덕목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성막의 모습을 그려 보고 그 의미를 서로 말해 봅시다.

7)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웃 덮개를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경건과 함께 필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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